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아침기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저녁기도
12월 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끝기도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
1542년경 스페인 아빌라주의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가르멜회의 회원으로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권고를 받아 1568년경 자기 회에서 최초로 개혁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노역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1591년 우베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여러 가지 영성 저술들이 입증하는 바와 같이 성덕과 지혜에서 탁월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의 [영적 찬가]에서
(Red. B, str. 36-37, Edit. E. Pacho, S. Juan de la Cruz, Obras completas, Burgos, 1982, pp.1124-1135)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신비의 지식
거룩한 학자들이 발견하고 이 생활 상태에 다다른 영혼들이 알게 된 신비와 경이가 많지만 아직도 그들이 말할 것과 이해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들어가야 할 깊은 데가 많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무리 깊이 파 들어가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풍부한 광산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보화를 매장하고 있는 광맥들이 허다하여 매번 여기저기에서 새 보화와 새 광맥을 찾아냅니다.
이 때문에 성 바울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 속에는 지혜와 지식의 온갖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먼저 내외적 고통이라는 작은 문을 통해서 영적 지혜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대로 이 보화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기에 이르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해 알게 될 수 있는 것마저 먼저 아는 고통을 당하거나 하느님께로부터 수많은 영적이고 감각적인 은혜를 받거나 또는 많은 영적 수련을 미리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이 모든 은혜들은 그리스도의 지혜에 다다르기 위한 선결 조건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지혜보다 더 낮은 은혜들입니다.
영혼이 고통에다 위로와 열망을 두지 않거나 또는 여러 겹으로 된 고통의 숲 속을 거치지 않고서는, 여러 겹으로 된 하느님 보화의 울창함과 지혜에 결코 이르지 못함을 우리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깨달았으면 합니다. 또한 신적 지혜를 참으로 갈망하는 영혼은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 십자가의 숲 속에서 고통받는 것을 원해야 함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이 때문에 성 바울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환난에서 실망하지 말고 힘을 돋구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하느님 보화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문은 십자가라는 문입니다. 그 문은 좁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들어가고 싶어하는 이들은 적지만 그것을 통해서 다다를 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이들은 많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48. 수도회 창설자편 (7) 십자가의 성 요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참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에서 도망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삶과 저서를 통해 말해준다.
자기 십자가 지고 하느님 따라
맨발의 가르멜회 기초 이뤄
반대파 비난을 수련 기회로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말라.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말라 …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는 데를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것에도 발을 멈추지 말라』(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한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은 1568년 11월 28일 두명의 동료와 함께 아빌라의 데레사 도움으로 두루엘로에서 개혁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십자가의 요한」으로 이름을 바꾸고, 가르멜회 최초 규칙으로 돌아가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함으로써 맨발의 가르멜회의 기원을 이뤘다.
이후 십자가의 성 요한은 23년간의 개혁 가르멜회 생활을 통해 가르멜회 회원들에게 영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예언자 엘리야 보다 훨씬 더 많은 영성적 영향을 드러냈다.
「만약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마태 16, 24)는 말씀은 곧 그의 생애의 표현」이라고 할 만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자신의 생활에서 「십자가」의 실현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보였다. 그의 영성은 한마디로 사랑 자체인 하느님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었다.
1542년 스페인의 아빌라 인근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난 요한의 삶은 21년간의 세속생활, 5년간의 완화 가르멜에서의 생활, 그리고 개혁 가르멜회에서 살았던 시기로 구분된다.
본래 조상은 명문 귀족이었으나 가세가 몰락, 요한이 태어날 당시에는 매우 가난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가 사망, 유복자로 세상을 본 요한은 모친이 정착한 메디나에서 목수의 조수 등으로 일하다 메디나 병원에 채용돼 간호사 일을 하기도 했다. 이때 병원 전속 사제가 되려는 생각으로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로 통학했던 그는 1563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게 됐고 살라망카 대학에서 철학 신학 공부 후 156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의 가르멜회 환경과 생활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던 요한은 고향집을 찾았다가 아빌라의 데레사를 만나게 되는데 이 일은 그에게 일련의 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가르멜 수도회 생활보다 더욱 고적하고 깊은 기도 생활이 요구되는 카르투지오회로 옮길 것을 털어놓았던 그는 성요셉 수도원을 설립 개혁 작업을 시작하고 있던 데레사로부터 개혁 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게 된 것이다.
두루엘로에서의 새 생활은 엄격한 금욕, 극기와 고행의 생활 등 가르멜 수도회 본래의 은수적 관상적 수도 생활 실천으로 요한을 이끌었고, 한편 맨발로 마을내 부락을 돌아다니며 사도직을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1577년 요한은 개혁을 반대하던 완화 가르멜회 수도자들에게 납치돼 톨레도 수도원 다락방에 감금되는 사태를 맞는다. 이곳에서 9개월간 지내면서 요한은 갖은 모욕과 학대를 묵묵히 참아냈고 오히려 자신의 덕을 쌓는 계기로 삼았다.
동료들에게 배척당하고 「순명하지 않는 자」로 비난받는 고통스런 경험속에서 그는 여러 편의 시를 탄생시켰고 이후에는 그 시를 설명하고 해설하기 위한 저서들을 남길 수 있었다. 「로망스」 「내 그 샘을 잘 아노니」와 「영혼의 노래」 일부가 이때 쓰여진 것이다.
감옥에서 탈출한 요한은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 하엔의 엘 갈바리오, 그라나다의 로스 마르티레스 수도원의 원장직과 안달루시아 관구장직을 역임하고 가르멜회 제1평의원, 세고비아 수도원 원장직도 맡는 등 활동을 벌였다.
맨발의 가르멜회는 1579년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았으나 이후에도 개혁을 둘러싼 가르멜회의 분쟁이 재현되면서 요한은 반대자들에 의해 계속적인 비난 공격의 대상이 됐다.
1591년 6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향하던 그는 열병에 걸려 스페인에 남게 됐고, 9월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겨진 후 정신적 고통과 병세 악화로 4개월만에 눈을 감았다.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또 이 소명에 충실히 응답하는데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펴고자 했다.
저서들을 통해서는 사랑이 인간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소명이라는 사실과 사랑이 인간 실존에 총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 또 사랑이 인간의 실존을 하느님을 향한 점진적인 여정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을 드러냈다. 특히 「어둔 밤」 등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찾고 사랑하는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학자들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삶과 저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너희가 참으로 살고자 한다면 십자가에서 도망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1675년 교황 글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또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교회 학자로 선포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스페인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가톨릭신문, 2005년 2월 27일, 이주연 기자]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08. 수도회 창설자편 (3) 가르멜산 은수자들
가르멜산에 있는 엘리야의 우물(왼쪽아래는 예수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성 요한)
고행, 가난 통해 하느님과 일치 꿈꿔
13c 은수자들이 ‘엘리야 우물’ 근처 살며 시작
맨발의 가르멜회 등 봉쇄, 활동 수도회로 구분
관상수도회를 일컬을 때 항상 그 맨 앞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가르멜회이다. 여타의 수도회들이 일정한 창설자에 의해 시작되고 그 창설자의 정신과 영성을 본받아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 되지만 가르멜회는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창설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로부터 시작된 가르멜회는 봉쇄 수도회와 활동 수도회로 구분되는데 봉쇄 수도회 중에서도 ‘맨발의 가르멜회’(Ordo Camelitarum Discalceatorum)는 O.C.D.라는 약칭을 사용하고 그 외에는 OCarm이라는 약칭을 사용한다.
이미 13세기부터 여성들이 이 수도회 규칙에 따라 서원을 한 사례가 보이지만 가르멜 수녀회는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의 인준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됐다.
현재 전세계의 가르멜회 회원들은 남자가 3700여명, 여자가 10만 5000여명이고 이 중 한국에는 맨발의 가르멜 여자 수도회, 맨발의 가르멜 남자 수도회, 그리고 가르멜 전교 수녀회 등이 있으며 재속회로 가르멜 제3회가 있다.
엘리야가 기도했던 가르멜산
12세기 말경 제1차 십자군 원정 후 일단의 유럽인들이 팔레스티나 북부 갈릴레아에 있는 가르멜산에 정착한다. 이들은 13세기 초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있는 작은 암자들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교회를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했고, 그 지역 주민들은 이들을 인근 성녀 마르가리타 수도원의 희랍 수도승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들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자리를 잡은 가르멜산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께로 부르시는 산, 곧 이스라엘의 하이파 동남쪽에 있는 거룩한 산이다.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는 언제나 가르멜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가르멜산의 은수자들도 이렇게 믿고 있었고, 1281년 회헌 서두에서도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자가 가르멜산에서 경건히 생활하던 때부터 구약과 신약의 성조들은 엘리야의 우물 곁에서 거룩한 계승을 부단히 지속하며 칭송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멜산에 은수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약 570여 년경이었고 후대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였던 알베르토(1205~1210)는 1206년에서 1214년 사이에 은수자들의 요청에 따라 은수자들 자신이 제시한 제안에 적합한 하나의 생활 규범을 그들에게 부여했다.
이 규칙서에 따르면 13세기 초 수도자들이 엘리야의 우물 근처에 살면서 한 수도원장의 통솔 아래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바로 이것이 수도회 설립에 대한 최초의 확실한 증거이다.
13세기에 팔레스티나 최북단 항구인 아코(Akko)의 주교였던 드비트뤼도 팔레스티나에 라틴 왕국이 설립된 12세기에 순례자들과 수도자들이 가르멜산에 정착한 사실을 기록했다.
이 규칙은 원장의 선출과 함께 시작돼 순종 아래 각 수도자에게 개인 숙소가 배당되며 거기서 밤낮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머물러야 한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중단 없는 개인기도이고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전례기도가 개인기도에 부가된다. 규칙서는 은수생활과 공동체 생활의 통합을 제시한다.
1226년 교황 호노리노 3세는 이 규칙을 승인한다. 이로써 초기의 규범은 참된 규칙이 되었는데, 1229년 그레고리오 9세는 가르멜 은수자들을 탁발 수도회들의 생활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하면서 가르멜 회원들에게 탁발 혹은 공동체적 가난을 부과했다.
탁발수도회로 인정 받아
은수자들은 1235년 서방으로 이동해야 했다. 회교도들의 탄압에 의해 서방으로 옮아간 수도회는 13세기말까지 150여개의 수도원이 12개 관구로 나뉘어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15세기까지에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동유럽과 포르투갈 등지까지 수도회가 확산됐다.
서방으로의 이전과 탁발의 부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수도회는 이제 은수적이고 관상적인 수도회에서 탁발수도회로 옮아가게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상에 특별한 강조점을 두고 있었다.
가르멜회의 영성은 이제 관상과 활동간에 균형을 잡아나가게 되며 이 오묘한 두 축은 가르멜회 영성의 발전 안에서 중심축을 이뤄 왔다.
1274년 리용 공의회에서 탁발 수도회로서의 성격을 잠정적으로 인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1298년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와 동일하게 탁발 수도회로서의 특전과 면제를 부여했다.
1317년 요한 22세 때 탁발 수도회를 향한 가르멜회의 발전 과정을 종결됐다고 할 수 있다. 즉 가르멜 회원들은 항상 다양한 형태의 사도직을 수도회의 주된 목표, 즉 공동체 전례 기도에 밀접히 연결된 관상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에 종속시키면서 모든 형태의 사도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가르멜회가 유럽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마리아 신심은 이 수도회의 상징이 됐다.
14세기에 들어와서 서방 교회의 분열과 함께 가르멜회도 지역에 따라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개혁 시대를 거치며 발전해온 가르멜회는 쇠퇴와 부흥을 반복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6년 12월 17일, 박영호 기자]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4) 십자가의 성 요한
(1) 눈비 들이치는 방에 살며 완전한 가난 실천
정영식 신부 · 수원 영통성령본당 주임,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16세기에는 소위 종교 분열의 시기로, 이단과 이교가 난립했다. 그래서 신앙이 약한 많은 이들이 참 진리를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이 시기는 영광의 시기이기도 했다. 진정한 종교 개혁자인 교회 성인들이 많이 탄생한 것이다. 이들은 교회 내부를 쇄신하는 한편, 가톨릭 영성을 더욱 심화하고, 전교에 대한 새로운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St. Joannes de Cruce, 축일 12.14)이다.
요한은 1542년 6월 24일 스페인의 가스티아 주 폰티베로스 마을에서 태어났다. 본래 명문 귀족 집안이었지만, 요한이 태어날 당시는 가세가 기울어 매우 가난한 상태였다.
이름이 요한이 된 것은, 태어난 날이 성 요한 세례자의 탄생일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요한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생활고에 쪼들리던 어머니는 요한을 처음엔 목수의 조수, 다음은 양복점과 조각가의 제자로 보냈으나 요한은 도무지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요한은 이후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채용되었으며, 쉬는 시간을 이용해 인근에 예수회가 경영하는 신학교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하느님의 섭리로 신학교 수료 후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한다.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이름은 가르멜 수도회에서 착의식 때 수도명으로 정한 것으로, 이는 그의 고난의 삶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가르멜 수도회는 퇴폐한 시대 사조의 영향을 받아 완덕에 대한 열망이 거의 없었다. 수도원내 분위기도 매우 어수선했다. 이 시점에 테레사 성녀는 자신이 속한 가르멜 수녀회의 개혁에 착수했으며, 남자 수도회의 개혁은 십자가의 요한에게 청했다.
이에 요한은 뜻을 같이하는 안토니오라는 수사와 함께 개혁에 본격 나서게 된다. 완전한 가난을 실천하며 엄격한 금욕 및 극기 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들의 방은 너무 좁아서 다리를 펼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천장은 서 있기도 힘들 만큼 낮았다. 눈이나 비가 오면 그대로 방안으로 들이쳤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않고 오직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고하고 죄악을 경고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찾아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고, 그 지원자 수는 날로 늘어갔다. 요한은 그들 모두를 반갑게 맞으며,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기존의 냉랭하고 타성에 젖은 수도생활을 이어가던 수사들은 이러한 요한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모함하고 수도생활을 방해했다. 가르멜 총회가 열렸고, 총장은 요한을 수도원의 동굴 지하실에 감금토록 했다. 요한은 그곳에서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지만 모든 시련을 묵묵히 이겨냈다. 항변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오히려 덕을 쌓게 하는 감사한 은인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탁월한 성덕은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게 된다. 곧 요한의 결백함이 드러나게 됐고, 교황 비오 5세 및 그레고리오 13세는 요한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임을 특수한 가르멜회로 공인, 비준했다.
이제 요한에 대한 모든 오해는 완전히 해소됐다. 요한은 명상에 잠겼고, 하느님을 체험했으며, 그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는 삶 안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하느님 사랑의 부르심을 받은 인간의 소명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았다. 또 모든 영혼들을 인도하기 위해 영적인 가르침들을 펴고자 했다.
그러던 1591년 6월이었다.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멕시코로 향하던 그는 열병에 걸려 스페인에 남게 됐고, 9월 우베다 수도원으로 옮겨진 후 4개월만에 눈을 감았다.
그의 삶은 이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았으며, 결국 1675년에 시복되었고, 1726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신비 신학의 명저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지식으로 1926년에는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언됐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3년 스페인 언어권의 모든 시인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23년간의 개혁 가르멜회 생활을 통해 가르멜회 회원들에게 영성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예언자 엘리야보다 훨씬 더 많은 영성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삶 안에서의 십자가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그 가르침은 「어둔밤」과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 보석같은 저술들을 통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16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5) 십자가의 성 요한
(2) 아빌라의 테레사 만나 새로운 인생 시작
신비신학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친분 돈독하던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보다는 27살 아래다. 그는 테레사 성녀와 함께 교회에 새로운 영적 바람을 일으켰으며,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여줬다. 그가 어떻게 형성적인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어린 시절은 비참했다.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난 그는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그러다 우연히 한 은인의 도움으로 병원 간호사로 일할 수 있었으며, 신학교도 다닐 수 있었다.
요한이 병원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은총이었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면서 고통 받으시는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고통에 직면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기 마련이다. 병자들도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지 안다. 그래서 애원하고, 매달리게 된다. 자연스레 하느님과 가까이 하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요한은 이렇게 고통받는 환자들의 모습 속에서 살아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후 요한은 수도회에 입회하게 되는데, 가르멜회였다. 그리고 25세가 되던 해, 사제품을 받게 되고, 또 그 해에 아빌라의 테레사도 만난다. 이 점에서 요한에게는 25세의 나이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당시 테레사는 52세로 완전한 하느님의 딸이자 배필로 살고 있을 때였다. 요한은 테레사로부터 인간이 무엇인지, 또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눈뜨게 된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하느님을 따라야 할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야 할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확신에 가득찬 요한은 진정한 수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26세때 남자 개혁 가르멜 수도회를 연다.
그런데 선각적인 행동은 늘 걸림돌을 만나기 마련이다. 문제는 기존 가르멜회 수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수도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을 끌어 내리려는 경향이 있다. 하향 평준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이유도 그래서다.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 진다. 가르멜회 회원들도 그래서 요한의 개혁 가르멜회를 험담하고 모함했다.
요한은 결국 감옥에 갇혔다. 비참했다. 요한이 생활하는 방은 가로 1.8m, 세로 3m 였다. 그 좁은 방에 대소변을 처리할 양동이 하나가 있었다. 사람들은 요한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이 양동이를 며칠씩 치우지 않았다. 게다가 요한의 방 바로 옆에는 공용 화장실이 있어서 악취가 심했다. 햇빛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곰팡이와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이런 방에 오랜 기간 갇혀서 살다보면 건강한 사람도 병이 나기 마련이다. 요한의 체중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번민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참담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요한은 암흑의 구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홀로 철저하게 내버려졌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선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번민에 덧붙여 욕망과 욕정이 함께 일어났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스스로 억눌러 없애 버렸다고 생각한 것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한은 수많은 욕망과 욕정들이 자신을 질질 끌어다 암흑 속에 내동댕이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요한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요한의 육체와 정신을 향한 가혹한 채찍질은 끝없이 계속됐다.
그러던 1758년 5월의 어느 날 요한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온다. 간수가 바뀌었다. 이 간수는 그동안 심장이 찢어지고, 오장육부가 흩어지는 그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평온한 모습으로 기도에 열심인 요한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간수는 이제 남모르게 새 옷도 넣어주고, 음식도 보충해 주는 등 성심껏 편의를 봐주게 된다. 하지만 요한이 정작 원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요한은 간수에게 노트와 필기도구를 구해 달라고 말한다. 간수는 종이와 필기도구를 구해 주었다.
그런데 감옥에는 빛이 없었다. 2인치(5~6㎝)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전부였다. 그 구멍도 요한의 키보다 높은 곳에 나 있었다. 요한은 바닥에 물건을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그 가느다란 빛에 의지해 글을 썼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23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6) 십자가의 성 요한
(3) ‘능동적 정화의 삶’ 노력해야
육신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내면의 모든 차원들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한 그러한 고통 속에서 요한은 굳게 일어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삶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기도 안에서 그 모든 고통을 이겨냈다. 이후 하느님으로부터의 격려와 은총을 통해 감옥 탈출에 성공한 요한은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에 피신할 수 있었다. 그때 요한의 나이 36세였다. 이후 요한은 놀라운 열정으로 책 집필에 나서게 되는데, 「가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도 이렇게 탄생했다.
여기선 차가운 감옥의 2인치(5∼6㎝) 구멍으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 줄기에 의지해 집필한 신비 신학의 대작, 「어둔 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내용이 좀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찬찬히 따라 읽다보면 영성의 참 깊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둔 밤」을 보면, 인간 삶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하나는 ‘능동적 정화의 삶’이고 또 다른 하나는 ‘수동적 정화의 삶’이다. 이 중 능동적 정화의 삶과 수동적 정화의 삶은 또다시 ‘감각적 정화’와 ‘영혼의 정화’로 나뉜다.
감각적 정화란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가진 이 몸뚱어리의 감각에 관한 것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것을 말한다. 그 감각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감각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이 감각을 통해서 반형성적인 것들이 즉 잘못된 요소들이 내 안에 많이 들어올 수 있다. 우선 욕심을 들 수 있다. 몸이 편해지기 위해 많이 먹으려고 하고, 돈을 벌려고 하고, 좋은 집에서 살려고 한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편해지기 위해 많은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에 매여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욕심에 의해 나의 의지는 나쁜 방향으로 움직여 질 수 있다. 감각적으로 나쁜 것이 들어와서 그것이 판단을 잘못 내리게 하고, 잘못된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 또한 망가지게 된다. 감각의 문제가 영혼의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감각을 정화함으로써 영혼, 즉 이성 기억 의지 들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고로 이성의 정화는 신앙 즉 믿음으로 가능하고, 기억의 정화는 희망으로, 의지에 정화는 사랑으로 가능해진다.
앞서서 설명한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영혼의 성’ 원리와 연결시켜 보자면, 감각적 차원에서의 능동적 정화는 1궁방과 2궁방과 관련된 것이고, 영혼 차원에서의 정화는 3궁방 내지 4궁방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벌레와 독충이 들끓는 1궁방에서 벗어나 우리는 2, 3, 4궁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감각적인 요소들을 빼내야 한다. 그래서 좋은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를 위해 불편하더라도 성경을 많이 읽고, 영적 지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기 싫어도(감각이 거부하더라도 그 정화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감각이 싫어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으로 편한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영적 초심자는 이렇게 부단한 노력을 통해 감각의 정화를 성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의 눈과 귀와 입과 손의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 이 변화와 동시에 이성적 차원의 변화가 오고, 동시에 나쁜 것들은 사라진다.
육신이 변화가 되면 그 다음에 육신의 작용의 하나인 이성이 변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기억도 변하고, 의지도 바뀌고, 결과적으로는 행동과 삶 자체도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1~4궁방까지는 나 자신의 능동적인 힘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정화의 삶이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정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5궁방으로 접어들게 되면 지금까지의 능동적 정화의 삶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동적 정화의 삶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수동적이라는 말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 곳에서는 참으로 거룩한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수동적이라는 말은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게 된다는 의미다. 하느님의 손에 내맡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나의 변화를 주도했다면 더 높은 단계에선 하느님께서 직접 나 자신을 변형시켜 주신다. 그 놀라우신 섭리 앞에서 우리는 그저 묵묵히 경외의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수동적 정화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1월 30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67) 십자가의 성 요한
(4) 캄캄한 ‘어둔 밤’ 신앙의 작은 빛 찾기
신앙을 모르고 교회를 모를 때, 교회 밖에서 생활할 때는 하느님을 볼 수 없고 느끼기도 힘들다. 캄캄한 밤이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며 참 신앙의 소중함을 알고 그 참 신앙을 위해 조금씩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서서히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때 만나는 빛은 온전한 빛이 아니라 아직은 희미한 빛이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를 깨닫기에는 아직도 어둡다. 과거의 습관에 아직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을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을 정화시키는 삶을 성취했다고 해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영성의 최고 단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됐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수동적인 정화의 삶’이다.
수동적 정화의 삶은 하느님께서 직접 조종을 해 주시는 것이다. 직접 변형을 시켜주시는 것이다. 하느님에 의해 감각이 변형되면 보는 눈이 바뀌고, 말하는 입이 달라지고, 만지는 모든 물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눈을 맘대로 딴 곳으로 돌리지 못하고, 입을 마음대로 벌리지 못하고, 손을 함부로 쓰지 않게 된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완전하시고 빛나시는 분인지 알게 되면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함부로 눈 돌리지 못한다. 내가 하는 눈짓이 아니라 하느님의 눈짓이고,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는 말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영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눈으로 보셨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세상 만물에 담겨 있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의 섭리를 보았다. 자연과 이야기했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하느님에 의해 수동적인 정화를 거치게 되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달도 내 누이가 되고, 꽃 한 송이도 형제가 된다. 이는 인간이 가진 능력에 의해서, 능동적인 노력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해석할 수밖에 없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신비적 차원의 경지다.
이렇게 감각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면, 자연히 이성도 하느님께서 판단하시는 그러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기억도 바뀌고, 의지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러한 의지대로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완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카르멜의 산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테레사 성녀가 말한 ‘영혼의 성’과 연관지어 설명하자면 1~4궁방은 능동적 정화의 삶이었고, 5~7궁방은 수동적 정화의 삶이다. 물론 5~7궁방에서도 감각이 중요하다. 인간은 감각적 동물이기에 감각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 본 것이 있어야, 느낀 것이 있어야, 들은 것이 있어야 판단과 기억, 의지도 변화된다. 그런데 5~7궁방에서의 감각의 변화는 나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과의 합치를 이루는 관상의 단계는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다. 누구나 그 단계에 들어설 수 있고, 또 들어가야 한다. 물론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시기 때문에, 그 합치의 단계에 들어서는 상황과 여건은 다를 수 있지만, 합치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주어진 처지에서 처음에는 스스로의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이고, 그 다음 단계에서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7궁방의 완전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다. 변형일치의 기도의 단계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동적 정화의 단계를 설명하며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치의 삶을 요청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어둔 밤」은 워낙 심오하기에, 영성가들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둔 밤」을 이상과 같이 설명한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다. 단지 조금씩 깨달아 나갈 수 있을 따름이다. 1궁방에서 7궁방까지, 기도의 1단계에서 7단계까지, 능동적 정화에서 수동적 정화의 단계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길은 누구나 걸어갈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과의 완전한 합치의 경지까지, 황홀한 관상의 경지까지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가톨릭신문, 2011년 2월 13일]
[영성의 향기] 수도회 창설자를 찾아서 - 아빌라의 성 데레사 · 십자가의 성 요한
맨발 가르멜회 개혁 · 창설자
가르멜 수도회의 첫 시작은 가르멜 산에서 까마귀들이 날라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으며 살았던 엘리야 예언자(열왕기 상 17-19장 참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중세기에 와서 새롭게 거듭난 ‘맨발 가르멜회’ 남녀 회원들은 수도회 개혁의 주도자였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 예수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을 창설자로 모시고 있다.
심오한 기도 체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교회에서 ‘영성의 어머니’, ‘신비신학의 박사’로 불리우는 성녀 데레사는 1515년 스페인에서 출생했다. 매력과 재치가 넘치는 소녀로 성장한 데레사는 13세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기도 했다.
다른 평범한 여성들처럼 아름다워지기를 바랬던 데레사는 자라면서 외적인 몸치장에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데레사의 아버지는 이런 그녀를 세속적인 유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수녀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들여보냈고, 데레사는 20세 때 완화된 가르멜 규칙을 따르는 강생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강생 가르멜 수녀원은 매우 세속화돼 있었다. 수녀들은 개인 재산을 소유했으며 가문 좋은 수녀는 특혜를 누렸다. 수녀원에서는 침묵이 지켜지지 않았고 외출이나 외부인의 방문도 자유로웠다.
데레사는 그곳에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고 오랫동안 기도 생활에도 어려움을 겪는 등 많은 시련을 당했다. 그러나 1554년 상처투성이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통해 완전한 회심에 이른 데레사는 엄격한 초창기 정신을 찾아야겠다고 결심, 1562년 개혁된 첫 수녀원인 성 요셉 수녀원을 창설하고 1582년 선종할 때까지 모두 17곳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교회는 그녀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맨발 가르멜회를 개혁 이전의 완화 가르멜회로부터 분리, 독립시켰다.
데레사는 자신의 영적인 신비 체험을 ‘완덕의 길’, ‘영혼의 성’, ‘천주 자비의 글’ 등에 기록했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인간의 영혼을 ‘7 궁방(宮房)’으로 나눠 가장 내밀한 7궁방에 하느님이 내재하며 그 하느님과 합일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데레사는 또한 교회를 더없이 사랑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수녀들로부터 중상모략과 추방까지 당하면서도 교회를 위해 끝내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뒀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데레사의 성덕과 탁월한 지식을 인정, 1970년 그녀를 최초의 여성 ‘교회 박사’로 선포했다.
남자 수도원 개혁을 꿈꾸던 1567년 그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자요 고해 신부가 된 십자가의 성 요한을 만났다. 그녀는 52세였고 요한은 25세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비적인 기도 체험을 서로 이해하고 영혼의 친교를 나눌 수 있었기에 영적으로 깊이 일치했다. ‘거룩한 가난’이 성 프란치스코와 글라라를 일치시킨 것처럼.
십자가의 성 요한은 1542년 혼띠베로스에서 출생,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청년시절 예수회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 살라망까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567년 그는 고향에서 첫 미사를 드렸는데 이때 개혁 가르멜의 두 번째 수녀원을 세우려고 준비 중이던 데레사를 만나게 된다. 데레사의 수도회 개혁 의지에 동감한 요한은 두루엘로에 있는 작은 농가를 개조, 개혁 남자 수도원을 세우고 가르멜 수녀들의 영적 지도자가 됐다. 물론 요한도 49세로 선종할 때까지 감옥에 감금당하는 등 완화 가르멜회의 반대자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박해를 받았다.
저서 ‘갈멜의 산길’, ‘어둔 밤’ 등에 나타난 대로 요한의 영성 또한 그 깊이를 잴 수 없이 심오하다.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 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요한은 불완전한 인간의 감각과 영을 정화함으로써 자신을 비워내고, 그곳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전(全, toda)과 무(無, nada)’의 영성을 제시했다.
산의 정상에 쉽게 도달하려면 지고 있는 배낭을 가볍게 비워야 하고 하느님을 얻기 위해 자신은 빈 그릇이 돼야 한다. 십자가의 요한은 이를 “자기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 이는 마치 날개털 하나도 빠지지 않은 새처럼 가볍게 영을 따라 날아간다”고 표현했다.
데레사와 요한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흘러가는 세월에 물들지 않았다. 자신을 비운 그들의 영혼은 새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세속화된 수도회에 초창기 정신을 불러일으키려는 책임감은 누구보다도 무거웠고, 수도적 관상과 사도적 활동을 조화시키려는 쇄신에의 열정은 그들을 온전히 불태웠다.
[평화신문, 1996년 6월 30일, 남기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