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향 학다리 / 수필
정성헌
전남 함평군 학교면 사거리 783번지, 내가 태어난 곳의 주소다.
내가 고향에 머문 것은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인 여섯 살, 그리고 입학했던 초등학교에서 고향의 초등학교로 옮겨와 졸업하고 중학교 3학년까지가 전부다. 어느 해 봄 우리 가족은 모두 할아버지의 고향으로 이사를 떠났다. 어머니는 열차로 목포로 행상을 떠나시고 조그마한 구멍가게는 할머니와 내가 지켰지만 사람 좋고 경제 관념이 없으신 아버지로 인해 경제적으로 쪼들리다 보니 당시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모면해 보고자 하는 한 가장(家長)으로서 아버지의 궁여지책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그런데도 고향은 내가 잉태해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낸 추억의 젖줄로서 내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향수임이 분명하다.
학다리라는 지명은 어릴 때 긴 다리가 있어 ‘학다리’라 불렸다고 들었는데 커서 어른들께 말을 들으니 마을의 형국이 학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에 마을 앞까지 호수처럼 물이 찼을 때 학이 많이 날아와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장수하는 학을 으뜸으로 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니 정확한 유래는 잘 알 수가 없다,
함평을 ‘함평 천지’라 부르는데 들이 넓은 옥토를 가졌기에 곡창리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로 옛날부터 쌀이 많이 나는 곳이었고 주변의 풍광이 아주 수려한 곳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유배 생활을 했던 나주 백룡산에서 흘러온 큰 냇물이 고막천을 이루어 사시사철 흘러내려 어렸을 적 어른들은 나에게 고막원 돌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놀리곤 하셨다. 함평의 북쪽 해보면에 꽃무릇이 유명한 용천사가 있는 불갑산이 병풍처럼 청산이 드리워져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다. 초가을이 되면 노란 상사화를 시작으로 붉은 상사화가 산아를 수 놓으며 들녘은 온통 황금빛을 띤다. 내가 여섯 살 무렵에는 큰집을 포함 동네 전체에 몇 채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기와집에 살면 엄청난 부자로 보이던 시기가 바로 그쯤이기도 했다.
지금은 폐교가 된 지 오래인 학다리 중앙초등학교는 내가 44회 졸업생이고 윗마을 아랫마을에 사는 1.00여 명의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였다.
처음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떨리는 마음으로 입학하던 그때의 설레고 떨리던 마음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국어와 산수책은 내용이 바뀌었는지 학교에서 새로 수령을 하였고 나머지 책들은 동네 형들과 누나들이 쓰던 헌 책을 물려받아 시멘트 포대로 쓰던 두꺼운 종이로 정성껏 표지를 입혔다. 전후 베이비 붐 세대인 우리 무술 생과 기해 생인 또래의 입학생이 선배 형과 누나들보다 숫자가 많아 헌책을 구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어머니의 친화력으로 나는 어렵지 않게 구했다. 가슴에는 쉴 새 없이 흐르는 콧물을 닦기 위한 하얀 손수건이 매달리고 자갈밭 비포장 신작로를 오리 넘게 걸어서야 학교에 당도할 수 있었다. 눈을 반짝이며 앵무새처럼 기역니은을 되풀이해서 읊어댔고 교실이 부족하여 오전반 오후반으로 2부제 수업이 있어 오후반에는 학교에 가면서 해찰을 많이 부렸었고 4학년으로 올라가니 5~6교시 수업이 이루어지면서 점심때면 줄을 서서 배급해 주는 강냉이 빵을 받아먹었다.
아이들은 말 그대로 자연과 일부였다.
학교를 마치면 망태 하나씩을 메고는 소나 염소를 끌고 언덕으로 올랐다. 망태에는 낫으로 벤 풀을 담았고 소나 염소는 저 홀로 돌아다니며 싱싱한 풀을 입맛대로 뜯어먹었다. 어쩌다 가축이 남의 밭으로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기라도 하면 기겁을 하고 달려가 저보다 덩치 큰 소를 끌어내느라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염소는 고집이 센 동물이고 코뚜레가 없이 목줄로 이끌어야 하므로 다루기가 소보다 더 힘들었었다.
친구들과 꼴을 베러 나갔다 풀이 자라지 않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꾀를 내어 멀리 선을 그어놓고 낫을 던져 선 가까이 낫을 던진 사람이 꼴 가져가는 도박성 따먹기 놀이를 즐겼다. 그래서 재수 좋은 날은 고생하지 않고도 꼴 한 망태를 그저 만들기도 했다. 망태에 꼴이 찼다고 나만 집에 돌아올 수 없어 게임에서 진 친구의 꼴망이 다 찰 때까지 꼴을 베어 채워주었기에 집으로 돌아올 때는 항상 함께 왔었으니 꼴 따먹기는 그냥 재미 삼아 하는 놀이뿐이다.
지금은 책을 버리고 폐지로 파는 사람도 있지만, 그때는 종이마저 무척 귀하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두툼한 책 한 권이 생기면 횡재로 생각하고 딱지 접기에 여념이 없었다. 빳빳하고 두꺼운 종이는 누구나 탐낼만한 일등품 딱지를 만들어내는 귀한 소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지가 많아야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부자로 느껴졌다. 딱지를 많이 보유해야 딱지치기를 하자는 친구들의 도전이 있기에 딱지치기는 놀이 일부였고 여기저기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또래들은 서로 흩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가끔은 밤을 이용해 공터에서 영화도 상영되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는 시간이면 천막 안에서 잘 잘 때는 소리와 함께 흑백의 영상이 하얀 스크린에 옮겨붙으면 대사는 변사의 몫이었다. 영사기와 필름이 낡은 탓에 화면에는 빗줄기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지루한 반공 강연을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영화가 방영되는 날이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온 동네가 일찍부터 부산스러웠다.
또 이따금 유랑극단이 찾아오기도 했다.
연극이 있는 날이면 우선 동네 총각들과 처자들 마음부터 바빠진다. 어두운 밤에 하는 것도 문제려니와 공짜가 아니니 얼마간의 돈도 필요하다. 엄격한 부모를 둔 저자가 공연장에 보내 달라 하면 밤에 위험하다느니, 돈이 없다느니 이런저런 이유로 안 보내준다, 그러면 낮에 여느 총각에게 저녁에 공연을 같이 보자는 제안을 받은 처자는 부모와의 실랑이가 시작되고 여차하면 공연장으로 달려갈 심산이다. 내용 대부분이 청순가련한 순애보였으니 처자들은 연극을 통해 장차 자신에게도 다가올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며 자신이 주인공인 양 찔끔찔끔 울면서 관람했고 이런 처자들의 감성을 어루만지며 접근한 총각은 머지않아 그 처자와 사랑을 이루었다.
가설극장의 영화나 유랑극단의 연극이 이웃 큰 마을에 들어오면 동네 청년들은 마을 처자들을 큰 마을까지 에스코트하거나 마중 나가 인원 파약을 하여 돌아오곤 했는데 혹시 그 중 이탈한 처자가 생기면 다음 날 아침 ‘그 처자가 어느 총각에게 끌려갔네,‘ ‘그 총각을 따라갔네,’ 라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50년 전만 해도 유난히 귀신이 흔했던 시절이다. 또래 녀석이 실제 보기나 한 것처럼 실감 나게 귀신 이야기를 꺼내면 등골이 오싹해지고 금방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처녀 귀신. 총각 귀신, 아기 귀신 도깨비 등, 다양한 귀신 이야기를 듣고 나면 며칠은 어둠 속에 흔들거리는 모든 것이 모조리 귀신으로 보여 오금이 저렸고 지금 생각하면 유성이었는데 혼불이 날아가니 곧 누군가 죽게 된다든지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큰 인물이 날 거라는 이야기는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나의 어린 시절의 고향 학다리와 소년 시절을 잠깐 보냈던 서호리에는 명절이나 특별한 때에 찾아 아버지 산소와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곤 하지만 이제는 낯익은 얼굴을 만나기가 쉽지를 않다. 이미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방증이다.
오늘처럼 혼자 상념에 잠겨 마음에 고향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다. 이런 날은 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를 만나 마음속에 저미는 애잔한 고향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술 한잔으로 달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운 고향을 떠올리며. ‘240608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