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사(感恩寺)는 신라 제31대 신문왕 2년(682년)에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한 사찰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부근인 동해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습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습니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 2기가 있습니다. 사천왕사는 경주 낭산 아래에 폐사지로 남아 있고, 도로 건너에는 당시 당나라 사신을 속이기 위해 선덕여왕 지시로 만들어진 급하게 만들어진 망덕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천왕사 뒤편 낭산에는 초라한 토분으로 만들어진 선덕여왕릉이 있습니다.
이곳 경주 낭산에 선덕여왕릉이 만들이지게 된 전설이 있는데, 이 전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보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慶州 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은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13.4m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입니다. 감은사터 넓은 앞뜰에 나란히 서 있는 쌍탑입니다.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으며, 옛신라의 고선사의 1탑 1금당 중심에서 삼국통일 직후 석탑으로 조성된 쌍탑 1금당 가람으로는 최초의 배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 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세운 절로, 동해 바닷가인 이 곳에 터를 잡았습니다. 문무왕은 생전에 절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인 682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이러한 호국사상은 탑에도 이어져 장중하고 엄숙하면서도 기백이 넘치는 탑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통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개의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1960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서쪽탑 3층 몸돌에서 금동 사리기(보물)와 금동 사리외함(보물)이 발견되었다. 경주에 있는 삼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실로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합니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신문왕이 감은사를 짓고 만파식적을 얻게된 전설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져 옵니다.
『신라 제 31 대 신문왕이 어느 날 동해에 나가 일관 (日官)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떠다니고 더욱 기이한 일은 그 산 위에 대나무 한 그루 가 있는 데, 낮에는 둘로 나누어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나이다.
왕이 이상히 여겨 몸소 그 곳까지 찾아가 용에게 연유를 알아본즉,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좋은 징조이니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그 대나무로 악기를 만들어 불었다. 그러자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쾌유되며 가뭄에도 비가 내리고 장마 때에는 맑게 개며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그래서 이 악기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주 감은사지 동, 서 삼층석탑(국보)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경주 낭산 자락 사천왕사지(선덕왕릉 아래 있음)
경주 망덕사지와 당간지주
신라 제31대 신문왕릉
(신라 왕릉 답사 공부를 하면서 신라 왕릉 중 개인적으로 제일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첫댓글 신용성 시인님
감사합니다.
회원님들의 집필소재 확충에 큰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내내 욱필하소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