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시작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교회와 사회적 경제, 아니 한 사람의 기독교인과 사회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건 언제였던가? 늘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의 병을 고친다는 말에 아버지는 장남으로서 제사를 팽개치고 교회를 다녔고, 그렇게 초등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나의 신앙생활은 시작되었다. 그저 친구들과 즐겁게 다니던 신앙생활에 변화가 생긴 건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복학생이던 1980년대 후반이었다.
신앙을 진지하게 만나보리라 시작한 새벽기도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동안 나름 잘난 맛에 살아가던 내가 “나야말로 정말 죄인이구나, 악독한 사람이 바로 나였구나, 사랑하는 연인도, 평생을 키워 준 부모조차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 조금만 나에게 불리하면 밀어내는 존재,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유한한 존재구나” 고백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런 나를 사랑하시고, 심지어 자기 몸을 희생하는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존재가 불쑥 다가왔다. 그 이후 늘 일기장에 쓰여 있던 외로움, 월요병 등이 사라졌다. 교회에서 성가대, 청년부 회장, 교사 등 다양한 봉사를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이 내게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신앙이냐? 맨날 교회 안에서만 기도하고, 교사 하고, 성가대 하고, 무엇무엇 하고, 그게 무슨 신앙이냐? 지금 사회는 이러저러한 일로 어려운데 개인 구원에만 매달리는 그게 무슨 신앙이냐?”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래서 의문이 생겼다. 교회 속에서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생활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그러다가 만난 말씀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마 9:12)이다. 그때부터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소시민적인 출세를 생각하던 내가 사회의 병든 곳은 어디인지, 약하고 힘든 곳은 어디인지,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의 삶이 변화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사회의 힘든 곳,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기업에서 노동조합으로
여기까지가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 ‘교회와 사회적 경제’ 또는 ‘교회는 왜 사회적 경제에 기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한 사람의 고민과 경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경제면 그냥 경제이지 왜 ‘사회적 경제’라고 하는 것일까? 사회적 경제의 뜻을 찾아보면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등 공동 이익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사회적 경제 조직이 상호 협력과 사회 연대를 바탕으로 사업체를 통해 수행하는 모든 경제적 활동”이라고 되어 있다. 이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일자리, 주거, 육아, 교육 등 인간 생애와 관련된 영역에서 경쟁과 이윤을 넘어 상생과 나눔의 삶의 방식을 실현하려고 한다”라는 설명도 덧붙어 나온다.
결국 교회가 사회적 경제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마가복음의 말씀처럼 사회의 약하고 병든 곳을 찾아가 그 병을 낫게 하기 위한 일과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무한경쟁 속에서 그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어려움과 문제들에 개입하여 경쟁과 이윤을 넘어 상생과 나눔의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직장은 그 당시로는 매출이 1,000억 원 정도 되는 신생 기독교 기업이었다. 신앙적인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터, 노동자들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어 보자!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기독교 기업도 자본주의 구조 속의 기업이니 무한 성장과 이윤 극대화를 추구했다. 선한 뜻으로 모인 기독 청년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기업은 초고속으로 매년 100%씩 성장했으나, 그 이면에는 하청 공장, 대리점, 판매직 노동자들의 문제,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비정규직의 희생과 어려움이 쌓여 갔다.
노동조합을 만들어보자. 그래서 만난 게 영등포산업선교회였다. 이윤만이 아니라 사람을 생각하는, 노동자들과 회사가 함께 행복한 회사를 만들어보자! 가급적 성경적으로 진실하게 실천해보자! 다짐하고 노동조합을 창립했다. 그렇지만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잘사는 일터, 오순도순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기업은 쉽지 않았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우선순위는 달랐고, 그 다름은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노사는 지속적으로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일부는 개선되었으나 끝내 노사 협력과 상생, 참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노동조합 활동을 10여 년 이상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이것이다. 부당한 것들에 대해 개선하라고 회사의 경영자들에게 요구하고, 정부에 요구하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우리 스스로 실천하고 변해야 하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요구하고, 고치라고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회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사회적 경제 영역인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불편한’ 협동조합으로
협동조합운동은 스스로 자신의 삶과 생산 방식, 경제, 소비생활을 설계하고 협동하는 방식으로 성립된다. 협동조합운동의 ‘교과서’라 불리는 레이들로(A. F. Laidlaw) 보고서는 협동조합의 본질에 대해 “상부상조, 약자의 연대, 수익과 손실의 공정한 분배, 자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의 결합, 자본에 대한 인간의 우선, 착취 없는 사회, 유토피아의 추구 등의 다양한 생각과 개념을 집대성한 것에 기초한 활동을 한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바람직함과 동시에 모든 참여자에게 이익을 주는 서비스나 경제제도를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자조의 토대 위에서 공동으로 협동하고자 하는 크고 작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1인1표’주의로 대표되는, 이윤만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는 의사 결정과 실천 방식, 자본주의 사회의 무제한적인 이윤 추구와 사회주의의 비효율과 획일성을 넘어서려는 협동조합의 ‘제3의 길’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서로살림농도생활협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그 배경에는 평생 농사를 지어온 아버지의 수고와 땀에 대한 미안함도 한몫했다.
우리나라 농촌은 아기 울음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령화되고 있다. 수입 농산물의 범람으로 인한 가격 폭락, 기상 이변과 병충해 등으로 농촌은 농산물의 생산과 판매 모두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촌은 적정한 생산비용을 책임지는 도시 소비자가 필요하고, 도시는 안전하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을 찾고 있다. 이러한 도시와 농촌이 서로를 살리는 일, 그것을 연결하고 확대하여 지속가능한 사업과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서로살림생활협동조합의 사업 목적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대형마트와 온라인에는 값싼 제품이 즐비하고 편리한 쇼핑이 보장되는데, 협동조합은 불편하다. 그래서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자발성, 결의가 필요한 사업체이다. 시장에서 좋은 상품을 찾아다니는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좋은 것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겠다는 결의와 결심이 필요한 것이다. 소규모 농가와 어려운 농촌의 현실을 해결하겠다는 신념과 가치, 사람을 중심에 놓는 지향점이 있어야 협동사업은 가능해진다.
‘서로살림농도생활협동조합’의 사업으로
이해를 돕고자 서로살림농도생활협동조합의 협동사업 몇 가지를 소개한다. 봄이면 사과나무 분양 사업을 통해 사과 판매를 완료한다. 4월에 사과꽃이 피고, 사과 한 알을 수확하려면 7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가뭄과 폭염, 장마와 태풍을 거치고 견뎌내야 한다. 서리가 내리는 10월에 사과가 익으면 수확하여 분양자인 조합원들에게 사과가 배달되기 시작한다. 소비자는 사과의 판매를 분양사업을 통해 책임지고, 생산자는 판매에 대한 부담과 걱정 없이 안전하고 건강한 사과를 생산하는 데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쌀 소비 촉진 운동도 한다. 우리나라의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은 30년 전에는 122kg 정도였는데, 2017년에는 61.8kg으로 반 토막이 났다. 그래서 유기농쌀라면의 생산과 판매, 정기적인 친환경쌀 공동구매 등으로 쌀 소비 운동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 주요 곡물 자급률은 2016년 기준으로 쌀이 그나마 100% 내외이고 밀 1.8%, 콩 24.6%, 옥수수 3.7% 등으로 식량자급률이 OECD 꼴찌 수준이다.
우리나라에는 콩에 대한 속담이 많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콩밭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주위에서 콩밭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이라고 물으면 “프랑스에는 밀밭이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러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콩을 살리자는 운동을 ‘우리콩 살리기 두부꾸러미’ 사업으로 작게나마 실천하고 있다. 싼 가격이 아니라 조금 비싸더라도 우리콩으로 만든 두부를 먹으면 콩밭이 살아날 수 있다.
경제 실천은 곧 신앙 고백
다시 돌아가서 교회가 왜 사회적 경제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할 듯하다. 교회의 선교는 크게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급변하는 산업사회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이윤 확대를 위해 무한경쟁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고통과 어려움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고통받는 민중(노동자, 농민, 서민과 약자들)들의 삶에 교회가 응답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소득양극화, 고령화, 높은 실업률과 고용불안의 문제에 대해 이윤 확대와 효율만을 앞세우는 자본주의적인 사업체로는 해결책이 나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회적 경제에 교회의 참여가 필요한 것이다. 돈과 이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경제, 사람을 살리고 존중하는 경제적 실천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업체는 자본의 논리로 학습된 사람들이 운영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결의와 신념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한 달에 한 번, 재래시장에서 쇼핑하는 날을 정했다고 한다. 어느 교회에서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순수하게 재래시장의 작은 가게들도 살아갈 수 있는 소비를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꾸준하게 실천하자 재래시장에서는 그 교회가 쇼핑하러 오는 날을 기다리고 참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숲은 큰 나무들만이 아니라 작은 나무들이 함께 모여 이루어진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과 대형마트만 이익을 많이 내고 작은 가게와 재래시장은 다 죽어버린다면 그 사회가 온전할 수 있을까?
서로살림농도생활협동조합의 도시 교회들은 철을 따라 농촌 교회의 소농가 생산지를 방문하고 함께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서울의 ○○교회는 봄에 강원도 농가로 가서 감자를 심고, 여름에는 감자를 생산자 농부와 함께 캔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심고, 캔 감자”라고 홍보하면서 교회의 교우들에게 판매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담긴 감자는 모양이 좀 못나더라도 순식간에 다 팔려 나간다.
이런 활동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좋고 값싼 물건을 구매하는 자본주의적인 소비 행위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우리나라의 농업 현실과 농촌, 농민들의 삶을 살리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고 하는 신앙 고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바로 당면한 사회의 어려움들에 응답하는 교회의 사회적 경제 활동의 단초들이다.
신앙생활에서 ‘생활신앙’으로
그동안 한국교회는 열성적인 영성과 신앙생활은 있었으나 사회의 문제적 현안에 뛰어드는 사회적 참여는 부족했다. 비약적으로 양적 성장을 이룬 교회는 질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이름이 ‘개독교’라고 조롱받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여론은 차갑다.
이러한 상황에서 향후 교회의 사회 참여, 이 글의 주제인 사회적 경제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참여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의 소수가 아니라 이미 다수가 된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상식적인 여론에서도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경에서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신앙생활만이 아니라 ‘생활신앙’에 힘써야 한다. 즉 우리의 신앙만이 아니라 소비생활과 경제생활도 신앙적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야 한다.
청년 실업과 취업 대란으로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대에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30여 년 전 기도와 영성, 신앙생활에만 머물러 있던 나에게 전도사님이 던졌던 그 말을 다시 오늘의 기독 청년들에게 건네고 싶다. 지금 우리가 믿는 것이 진정 올바른 신앙인가? 주일날 교회에서 만나는 은혜가 사회생활과 일터에서도 구현되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영성생활과 사회적 실천의 조화를 권면하고 싶다. 이 둘은 어느 하나가 빠져도 문제이다. 영성생활이 사회적 실천을 대체할 수 없고, 사회적 실천이 영성생활을 대체할 수 없다. 이 둘 중에서 어느 하나만 남을 때 그 나머지도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과 직장 내에서 온갖 ‘갑질 문화’가 판치는 세상이다. 세상은 권력과 돈을 믿는 자들이 그 힘으로 우리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평화를 믿는다. 가장 힘세고 능력 있는 신께서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얻어지는 ‘평화’라는 신비를 우리는 믿는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깊은 영성생활을 통해 만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예수께서 그리하셨듯이 세상과도 만나야 한다. 온갖 부조리와 난제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분의 제자답게 그 희생과 섬김을 통해 사회적 문제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사회적인 필요는 있으나 많은 이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좁은 길,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인이니 말이다.
배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