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확전(廓戰)
벌써 일곱 시 반이야. 늦는군.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남기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한 뼘 정도 커튼이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밝은 아침 햇살이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이에요, 부장님. 온다고 했으니 올 거예요. 그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난번 그의 상처는 너무 심했다.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것은 아직 위험해.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지켜보기는 하지만 말이야.
남기호는 어딘지 쓸쓸한 기색이 엿보이는 강재은을 보며 말했다.
그가 뿜어내는 담배 연기를 보던 강재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끊으신 지 오래 되셨잖아요?
다시 피우기로 했다. 속이 타는데 식힐 방법이 없어서 말이야.
남기호는 멋쩍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제 기억으로는 예전 부장님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의지박약아라고 욕하셨던 것 같은데.
강재은의 입가에 드리워졌던 미소가 진해졌다. 약간 초췌한 안색의 그녀가 웃자 거실이 환해졌다.
남기호는 그런 그녀를 보며 마주 웃었다.
요즘 자네는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아. 이제 시집갈 때가 된 건가?
그의 눈길은 막내 여동생을 바라보는 장남과도 같았다. 그의 눈길에서 염려와 깊은 정을 느낀 강재은은 살짝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자네가 그 태권브이 같은 친구를 좋아하는 걸 알아. 그 친구는 여전히 목석인가?
강재은은 남기호의 말에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남기호와 인간적인 신뢰가 두텁긴 해도 사적인 대화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일밖에 모르는 남자라는 걸 부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강재은의 음성이 가라앉았다.
그 친구 같은 남자를 얻으려면 기다릴 줄 아는 현명함이 필요해. 여유를 가져. 그 친구는 어떤 여자든 한 번 마음을 주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친구야. 그 마음을 얻기가 어렵긴 하지만 말이야. 기다려! 그것이 그런 친구에겐 최고의 방법이야.
강재은은 말없이 웃었다.
한의 외벽을 들러싸고 있는 무심함은 너무나 두터워서 그녀는 그 벽을 허물 마땅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기호의 말이 정확한 답일지도 몰랐다.
기다려서 될 일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기다린다고 그가 제 마음을 알아줄지.
이어지던 남기호와 강재은의 대화가 끊겼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현관문을 향했다. 작은 노크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며 한이 들어서고 있었다.
들어서는 한의 얼굴을 본 두 사람의 얼굴에 놀람의 기색이 떠올랐다. 강재은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한의 왼쪽 뺨에 새겨진 이십 센티가 넘는 굵은 칼자국이 먼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본래 한의 무표정한 얼굴에 새로 생긴 굵은 검상(劍傷)은 그에게 냉정하면서도 음울한 이미지를 더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한의 상처를 응시하며 남기호는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의혹과 분노가 가득한 음성이다. 한은 그의 동료인 것이다.
일이 있었습니다.
한은 얼굴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무심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라는 태도여서 그것을 보는 두 사람의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
무슨 일이에요?
강재은의 음성에 날이 섰다. 한의 상처를 보는 그녀의 두 눈에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상처를 입힌 자가 눈앞에 있다면 머리에 총알이라도 박아 넣을 듯 박력 있는 기세였다. 그가 죽음 직전의 상처를 입었던 일이 불과 십여 일밖에 되지 않았다. 한의 상처를 보는 그녀의 마음이 어떨지는 불문가지였다.
남 부장님 , 이것을 보시죠.
한은 강재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으며 품에서 절반도 채 남지 않은 부서진 책을 꺼내 남기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
남기호는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으며 물었다. 그는 한이 더 이상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이 건네준 책은 금방이라도 부서질까 염려스러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제게 이 상처를 남긴 자가 보던 책입니다.
남기호는 고개를 들어 한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회의 인물인가?
그렇습니다. 수뇌부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수뇌부?
남기호의 반문에 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책을 가리켰다. 우선 책의 내용부터 보라는 의미였다.
남기호는 책의 겉면에 쓰여 있는 비전(秘典)이라는 글귀에 눈을 번뜩이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한문이로군.
책은 한문으로 쓰여 있었지만 남기호는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나갔다. 국정원의요원들은 기본적으로 외국어를 한 개 이상 교육받는다. 그리고 남기호는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 페이지씩 책장을 넘겨가던 남기호의 안색이 점차 희게 변해갔다. 경악과 분노, 살기와 갑작스레 닥친 심적 충격이 그의 얼굴에 완연해졌다.
한의 무뚝뚝한 태도에 치미는 화를 삭이고 있던 강재은의 안색도 긴장으로 굳었다.
남기호는 국정원 최고를 다투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다. 표정 관리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의 얼굴색이 칠면조처럼 변하고 있는데 그녀가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책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책자는 십여 장밖에 남아 있지 않아서 남기호가 모든 내용을 읽는 데는 삼십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책을 덮고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빛이 떠 있었다.
이 내용이 정말 사실인가?
저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한의 대답에 남기호는 신음을 토했다. 한은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밝힌 상태가 아니다. 그가 모르는 비밀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한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했지 없는 말을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너무나 엄중했다.
부장님,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기에?
강재은은 긴장한 어조로 물었다. 강재은에게 시선을 향한 남기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한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녀였고 앞으로도 그 위치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그녀도 알아야 할 내용이다.
이 책에는 대명회가 어떻게 이루어진 조직이며, 그들의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포섭된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네. 아마도 그들에게 최고의 기밀이 되는 내용일거야.
긴장으로 메마른 입 안을 침으로 적시며 남기호는 말을 이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국정원이 단독으로 다룰 수 있는 사안을 넘어선다.
강재은에게 향했던 남기호의 시선이 한을 향했다.
이것을 어디에서 얻은 건가?
일성재단이라고 아십니까?
일성재단?
한의 질문에 남기호는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들어본 이름인 듯한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은 탓이다.
권오상 요원에게 들었던 기억이 있네. 약간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지만 좋은 일을 하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자네가 그곳을 조사하겠다고 말했다는 보고도 있었던 듯 하군. 이것을 그곳에서 얻었나?
그렇습니다.
으음.
남기호의 안색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권오상에게서 재단에 대한 보고 내용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일성재단에 연결되어 있다는 거물들의 이름도 함께.대명회의 뿌리가 진정 중국 본토에 있단 말인가? 그들이 이 나라에서 아직도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친일민족반역자들의 후예를 하나로 엮어 수십 년 뒤 있을 중국의 대한(對韓) 공작에 이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단 말인가?
남기호의 말을 들은 강재은의 얼굴도 하얗게 변했다. 심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다.
부장님, 그게 도대체 무슨?
이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그들의 조직 구조와 활동 반경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어. 한국지회와 각 지부의 위치, 그 책임자들까지 전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들에게 포섭된 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던 부분이 뜯겨나갔다는 점이다.
남기호는 책의 뒷면에 으스러진 형상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한 명의 이름은 남아 있어.
누구죠?
나중에 임 형사에게 듣도록 하게. 이 사람이 그들에게 포섭된 자들의 우두머리로 기록되어 있다니. 이 내용이 모두사실이라면 초특급태풍이 불겠군.
태풍이 불 수 있을까요?
한은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말인가?
그의 물음에 남기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 책에 대해 보고하실 겁니까?
당연히 보고해야지.
국정원 내부에서도 그 책의 진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말게. 그동안 그들을 어떻게 추적해 왔는지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네. 이 책의 내용이 진실인지에 대해 자네 말대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설득할 수 있네.
다행이군요.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그 안에 적혀있는 자들을처리하기 위해서는 국정원 단독으로는 불가능하죠.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그러려면 결국 대통령이 결단해야 합니다.
한은 말을 멈추고 묵묵히 남기호를 응시했다.
계속 말해 보게.
그 책의 마지막에 적혀 있던 한형규라는 자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보았습니다. 간략한 내용이긴 하지만 그자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기엔 부족함이 없더군요."
"."
"그곳에 적혀 있는 서울의 사대 조폭 세력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있다 해도 검경과 국정원이 합동 작전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모두 손을 뗄 테니까요. 아깝긴 하겠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겠죠. 하지만 한형규는 다릅니다. 그를 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고 그것은 현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겁니다. 한형규는 이 나라의 힘 있는 자들 중 친일민족반역자의 맥을 잇고 있는 자들을 대표하는 자이고, 미국에도 영향력 있는 인맥들이 꽤 되는 듯 하니까요.
남기호는 국내 정보를 다루는 사람이다. 한형규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한의 말이 옳다는 것도 알았다.
한을 보는 그의 눈 깊숙한 곳에 고민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자네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네. 알면서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죠. 절대로!
한의 음성은 단호했다.
남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그렇지. 나라를 좀 먹는 자들을 그냥 둔다면 국정원이 존재할 이유가 없네. 그런데 이 책을 지니던 자는? 그자를 데리고 왔다면 더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
데리고 온다고 해도 말을 할 수 없는 잡니다.
한의 대답을 들은 남기호는 입을 다물었다. 한의 말 속에 담긴 뜻을 눈치 챈 것이다. 드물긴 해도 간혹 있는 일이다. 그 수뇌부라는 자는 시체가 된 것이다.
굳은 안색으로 침묵하는 남기호를 보며 한은 말을 이었다.
가능한 빨리 검경과 국정원이 연합한 힘이 그들을 쳐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제가 일성재단에 잠입해 벌였던 일로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지워나가고 있을 겁니다. 시간이 하루 이틀 늦어질수록 그들에 대한 추적은 어려워집니다.
한의 우려가 현실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들이 꼬리를 자르고 숨는다면 추적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남기호도 이미 한이 저격된 직후에 경험한 바가 있었다.
알겠네. 그건 그렇고 경찰엔 언제 복귀할 건가?
부장님이 신경 써주신 덕분에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들이 저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 그들에 대한 추적을 할 수 있는 기횝니다.
추적이라고 말은 했지만 한은 대명회에 최대한의 타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외부의 지원을 받은 회의 힘은 더욱 강해질 터였다.
그의 머릿속엔 남기호에게 넘겨준 비전의 내용이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었다. 지회와 지부의 명칭과 위치, 그 책임자들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자네 뜻대로 하게. 자네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최대한 손을 쓰겠네.
남기호는 책자를 의자 옆에 놓인 서류 가방에 집어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한 마음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난 차장님을 뵈러 가겠네. 휴대폰을 열어놓도록 하게. 연락이 안 되더군. 차장님이 자네를 찾을 수도 있어 강 요원은 임 형사와 함께 움직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남기호는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떠났다. 그가 떠난 안가엔 한과 강재은이 남았다.
양화군의 두 손은 꽉 쥐어진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뻘겋게 변한 그의 두 눈에서 광포한 살기가 쉴 새 없이 번뜩였다. 평소의 느긋하고 털털하기까지 하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평정을 잃고 있었다.
그의 발 앞엔 강우림의 시신이 뉘어진 백색 대리석 관이 놓여 있었다. 강우림의 시신은 안색이 푸른빛을 띠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에 의해 잘려 나간 그의 머리와 두 다리는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그는 차마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시신이 된 지금도 그에게서 강렬한 원한이 느껴졌다.
그는 강우림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강 장로님을 살해한 자가 임한이 확실합니까?
그렇습니다. 상임고문실에 남아 있던 흔적은 천단무상검도의 그것이었고, 진영충 장로님이 본 침입자는 천외천부의 암향부동신법을 사용했습니다. 강 장로님의 몸에 남은 상흔은 곽 장로님의 팔을 벤 수법과 동일한 것입니다. 침입자가 임한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소회주님.
윤찬경은 침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음성에도 깊은 슬픔과 분노가 배어나왔다.
호국무단의 인물 증 백두대전을 거치며 능력을 보존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자가 윤찬경과 일본지회를 맡고 있는 오카모토 미노루였다. 회의 장로들은 몇 남지 않은 무단의 인물들을 아꼈는데 그중에서도 강우림은 회 내에서 그를 유난히 아꼈던 사람이다.
임! 한!
양화군의 악다문 이빨 사이로 바람이 새듯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일성재단 건물의 지하에 있는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경운과 진영충, 주광 등의 원로원 장로들과 윤찬경, 남국현, 양화군의 최측근인 사도평과 사도평 또래의 사내 다섯 명이 원형으로 양화군과 대리석 관 주변에 늘어서 있었다.
강우림은 양화군에게 무예를 가르친 세 명의 스승 중 두 번째 스승이었다. 첫 번째
스승인 양천종이 양화군의 친조부였으니 실제로는 강우림이 첫 번째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양화군과 그의 동생은 백두대전에서 천외천부에 의해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그들의 친조부인 양천종은 대한호국회를 이끄는 일로 너무 바빠서 그들을 돌보지 못했다. 외롭던 그와 그의 동생을 친할아버지처럼 돌본 사람이 강우림이었다.
강우림은 엄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지만 그가 자신과 동생을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했는지 양화군은 알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 탓에 강우림의 간섭이 심했고, 그 때문에 그는 강우림을 어려워하며 만나기를 꺼려했지만 그가 강우림을 만나기 꺼려 한 것은 자신이 강우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 죄송했기 때문이지 강우림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런 강우림이 살해된 것이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로 자신이 미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흥분해 있었다.
양화군의 눈초리가 찢어지며 핏물이 비치자 진영충이 다가와 양화군의 팔을 잡았다.
소회주, 진정하시게.
나직한 음성이었지만 양화군의 귀에는 마치 천둥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진영충의 음성에 내력을 실었던 것이다.
흐트러지던 양화군의 두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진영충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지나친 슬픔은 몸을 해치게 되네. 지금은 복수를 해야 할 때야. 강 형님의 죽음을 위로해야 하지 않겠나!
윤 지회장님. 그자의 행방은 아직입니까?
질문을 던지며 윤찬경을 바라보는 양화군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법기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윤찬경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죄송합니다. 소회주님.
아무리 이곳이 우리 땅이 아니라 해도 이곳은 조그만 나랍니다. 그자를 찾으세요. 삼일 내로! 그때도 그자의 행적이 불투명하다면 윤 지회장님은 그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양화군의 강렬한 기세는 윤찬경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것은 천부적인 자질에 후천적인 훈련으로 더해진 지도자의 강렬한 카리스마였다. 중대한 사태가 발생하자 숨어있던 그의 능력이 외부로 표출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윤찬경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맺혔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양화군의 지시에 불만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음 대의 대한호국회주였고, 그만 한 역량을 가진 것으로 이미 원로원의 장로들로부터 공인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양화군이 손짓을 하자 하경운과 진영충, 주광 장로, 윤찬경과 사도평, 사도평 또래의 건장한 사내 등 여섯 명만이 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밀실을 나갔다.
양화군은 남은 사람들을 차례로 둘러보며 말문을 열었다.
강 장로님은 돌아가실 당시 윤 지회장님에게서 비전을 받아 살펴보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자는 장로님의 사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강 장로님의 품에 가루가 된 책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 양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절반 이상의 책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 책자를 가져간 자는 의심할 바 없이 강 장로님을 살해한 잡니다.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숨이 긴장으로 잦아들었다. 양화군의 눈빛이 강해졌다.
비전은 한국지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자룝니다. 비전의 절반 정도가 온전하고 지금 상황으로 보아 그것을 가져간 자가 임한이 분명한 이상 한국지회에 대한 추적과 타격이 곧 있을 겁니다. 그자와 함께 움직이던 여자가 국정원으로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임한은 경찰에 속해 있는 자고. 결국 이 나라의 공권력이 우리를 향해 칼을 거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의 시선이 윤찬경을 향했다.
각 지부에 연락해 모든 자료를 은닉하도록 하십시오. 지부도 당분간 폐쇄하고 그 움직임은 극비로 하며 어떤 활동도 내 지시가 없이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한국지회의 모든 역량은 임한을 찾기 위해 투입하십시오. 그자를 잡지 못하면 한국지회는 소멸될 겁니다. 이 나라가 작다고는 하나 군사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나랍니다. 우리 힘으로 나라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나라의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는 건 우리의 입지만 좁게 하고 우리의 조국에 대한 이들의 경각심을 높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냥 맥없이 당할 수는 없죠. 시간이 없어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다면 우리의 힘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흔적을 남기십시오. 조사가 완료된 후 임한과 한충우를 바보로 만드는 그런 흔적을.
알겠습니다. 소회주님. 그리고 임한은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양화군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윤찬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자의 가장 가까운 자들 중 두 명의 장례식이 며칠 이내에 있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 분명 나타날 겁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그 광주의 향토사학자와 그 아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정운이라는 중은 사찰의 장례 절차를 밟을 듯합니다. 그 시간이 아무래도 민간의 장례식보다는 오래 걸리기 때문에 임한이 그곳에 먼저 나타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임한은 중의 장례식보다는 광주에 먼저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됩니다. 그들은 임한의 몇 안 되는 친인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놈은 위험하다고 꼬리를 마는 스타일이 아니니 그 자리에 분명 나타날 겁니다.
윤 지회장이 그들 부자를 처리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감히 대륙에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했다고 주장하는 스스로의 주제도 제대로 모르는 오랑캐들을 제 명대로 살다가 죽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들의 운명은 예전부터 비명횡사로 정해져 있었어. 게다가 그들의 죽음으로 임한이라는 자도 끌어들일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말을 한 자는 장로 주광(朱狂)이었다. 주광은 곽병량과 비슷할 정도로 체구가 크고 눈에는 정광이 번뜩이는 노인으로 외견상 육십 대 후반 정도로 보였지만 실상은 다른 장로들과 비슷한 팔십 대의 나이였다.
성격이 불같은데다가 골수까지 천하의 중심은 한족(漢族)이라고 생각하는 자였는데 지난날 천외천부의 사람들은 그를 일권번천이라고 불렀다.
그의 드러난 두 주먹은 어린아이의 머리통 만했고 손등은 미세한 금이 수도 없이 얽혀 있었다. 한번 뻗으면 견뎌내는 것이 없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주먹이었다.
주광의 말에 양화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대한호국회는 한족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설립되었고, 회에 소속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꿈을 갖고 있었다.
일반인들이 들었다면 주광은 이름처럼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주광이 한 말의 내용은 당연한 것이었다.
양화군처럼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젊은이조차도 예외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양화군은 주광보다도 더한 중화주의자였다. 그가 태어난 양씨 가문은 천수백 년 동안 실질적으로 대한호국회를 이끌어 온 가문인 것이다.
하, 진, 주 장로님과 이 나라에 지원된 호국무단 소속의 열 명 모두 광주로
가십시오. 그자를 발견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참살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더 이상의 실패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주지하도록 하십시오.
알겠소이다. 소회주.
알겠습니다. 소회주님.
장로들 중 가장 연장자는 하경운이다. 그는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대답한 사람은 사도평 옆에 있던 강인한 인상의 사십 대 장년인이었다.
단단한 어깨와 균형이 잘 잡힌 육체, 신광(神光)이 번뜩이는 눈은 그가 간단치 않은 능력을 가진 자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이름은 자운룡(紫雲龍)으로 그는 양천종의 지시로 한국지회에 지원된 대호국무단 소속 십 인의 고수들을 이끌고 있었다.
양화군의 말은 계속되었다.
윤 지회장님은 한국지회의 사람들을 정운이란 중 주변에 풀어놓도록 하시고. 어느 쪽에서든 임한의 흔적이 발견된다면 전력을 투입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소회주님.
윤찬경의 대답을 들으며 양화군은 사도평을 응시했다.
은현진인의 행방은?
광주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진인을 찾기 위해 호남지부 소속의 전 인원이 광주에 풀려 있습니다. 거의 따라잡았으니 오늘 내로 진인의 목적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사도평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묘한 우연이긴 하지만 잘된 일이다. 이준하 부자의 장례식도 광주에서 있고, 진인도 광주에 있다. 임한이든 진인이든 먼저 만나는 자에게 힘을 집중할 수 있다. 임한은 현재의 위협이지만 은현진인이 쫓고 있는 그 물건은 미래의 위협이다. 진인을 놓쳐서는 안 돼. 그 물건은 반드시 우리가 손에 넣어야 한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양화군은 신형을 돌렸다. 그가 밀실을 빠져나가자 사도평이 그 뒤를 따랐다. 모두 사라진 밀실에 남은 것은 강우림이 누워 있는 대리석 관뿐이었다.
밀실에 괴기한 적막이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