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걸림 없는 구경열반의 경지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 스님 선시사상 온전히 전하지 못해 아쉬워
진리는 취하고 버리는 선택 없어
분별심 일면 미혹으로 빠져들어
삼척 영은사 설선당 / 글씨 탄허택성(呑虛宅成 1913~1983) 스님.
山河高立水河流 兩在十方空裏浮
산하고립수하류 양재시방공리부
[山河高立水何深 雲在十方空裏淨]
[산하고립수하심 운재시방공리정]
浮不取空空不浮 元無一事掛心頭
부불취공공불부 원무일사괘심두
(산은 높고 물은 깊으며/ 구름은 시방의 허공 속에 청정하네./ 뜬구름은 허공을 허공은 뜬구름을 취하지 않으니/ 원래 하나의 일도 마음에 걸림이 없다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하셨던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59) 스님의 선시(禪詩)다. 한암 스님은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셨다. 1950년 한국전쟁 중 군사작전을 이유로 상원사를 불 지르려고 했을 때 스님의 덕화로 무사히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1951년 좌탈입망(坐脫立亡)하셨으며 제자로 탄허택성 스님 등이 있다. 이 시문을 취하여 주련을 삼은 합천 해인사 홍제암은 영은사 주련을 번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주련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구절이 원문에서 어긋나 있어 한암 스님의 사상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따라서 설명은 원문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첫 구절의 하(河)를 하(何)로 소개하는 예도 더러 있으나 원문은 하(河)다. 산은 산대로 높고 물은 물대로 깊음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산은 산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물은 물을 의지하지 않는다. ‘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에 두두물물(頭頭物物)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삼라만상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낱낱의 개체마다 진리가 함장되어 있기에 ‘화엄경’에서는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했다. 이를 바로 알면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므로 진로현신(眞露現身)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산은 높고 물은 깊다고 하는 것은 진리의 당체를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 구절에서 ‘구름은 구름대로 시방의 허공 가운데 청정하다’라는 것은 만물은 제각기 원만 상을 이루고 있음을 밝힌다. 진리는 부동(不動)하다. 따라서 진리는 취하고 버리고 하는 선택이 없음이다. 만약 진리를 취하고 버림이 있다면 이는 분별심이다. 고덕이 말하기를 ‘청산원부동 백운자거래(靑山源不動 白雲自去來)’라, 청산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흰 구름이 오고 갈 뿐이라고 했다.
세 번째 구절의 ‘뜬구름은 허공을 취하지 아니하고 허공은 뜬구름을 취하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음은 집착심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중생은 집착심이 고질병이다. 집착으로 인해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무명의 세계를 일으키어 스스로 참됨을 등지고 미혹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무심의 경지를 노래하고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라 하여 근본 실상을 찾으려면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라고 했다. 형상에다 도장을 찍으면 허사다. 마음에 도장을 찍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은 미혹해 마음도 형상으로 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한 것이 문제다.
본심은 본디 청정해 작은 티끌 하나에도 걸림이 없거늘 중생은 스스로 본심을 가리어 걸림이 있음이다. ‘전심법요(傳心法要)’에 보면 ‘오로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마음이 본래 부처님을 단박에 깨달으면 얻을 수 있는 법이 하나도 없고 닦을 수 있는 수행이 하나도 없음을 단번에 깨달아야 이것이 가장 으뜸가는 도이며 참으로 여여한 진여불(眞如佛)’이라고 했다.
분별은 우리가 조작해내는 인식의 도구이기에 불법을 깨닫는 데는 오히려 방해만 된다. 따라서 한암 선사는 지금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심중한(心中閑)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의 일에도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반야심경’에서는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고 했으며 작은 일에 매달려 집착하면 어리석은 원숭이가 우물 속에 달을 건지려는 것과 같다라고 해 이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고 한 것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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