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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본문 : 누가복음 1:31~38
2012-12-16 / 주일 낮
할렐루야! 범사에 주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날이 많이 춥습니다. 요즈음 목감기에 많이 고생들하시는데 건강하시라고
옆의 분들과 “건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인사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리에서 만나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가장 복된자리가 될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교회력으로 대림절/대강절 기간입니다.
성탄절 이전의 4주 동안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인데 이제 오늘까지 10일이 남았습니다. 대림절을 맞이하여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예수님 나심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합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나누고 베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요즘 살기가 어려워져서인지 잘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먹고살기가 바쁘셔서 그런지 교회에 사람이 줄어서인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서인지 주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고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들과도 사랑 할 수 없게되어 참으로 비정한 사회 각박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눅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면 결국 가족이나 이웃들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 가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하나님이 너무 가난하게 합니다.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정말 풍성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맞이한다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절(대강절)에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풍성하게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맞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성경에 있는 4개의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를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탄생 기록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쓰여졌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탄생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은“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을 태초에 계신 말씀(요1:1)으로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달리
-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앞서 세례요한의 탄생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출생을 비교 대조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먼저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에게 세례요한이 출생할 것을 알렸습니다. 그 두 사람은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던 하나님 앞의 의인’이었습니다. (눅 1:6)
한 마디로 흠 잡을 데 없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두 사람은 이미 나이가 많았습니다.(눅1:7) 자식이 있다없다로 그 사람의 믿음이나 신실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의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늙도록 자식이 없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가운데 그런 시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누가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아카데미, p.108. 참조.>
사가랴는 “성전에서 기도할 때”가브리엘 천사를 만났습니다.
가브리엘을 본 사가랴는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눅1:12)
하늘에 천사를 땅에서 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인물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거나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면 사가랴처럼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낯설고 경이로운 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두려워하는 사가랴에게 “…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1:13)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미루어 보면 사가랴는 자식이 없었고, 나이가 많이 늙었지만 자식을 위해 계속 기도했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위해 기도한 아즈 신앙이 좋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입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렸기에” 아들을 허락해주겠다고 응답받았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으니이다”(눅1:18) 라고 되물었습니다. 아주 믿음이 좋은 믿음이 있고, 제사장인 사람이 진실하게 기도하였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이 왔는데 하나님의 심부름꾼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눅1:20)
사가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흠이없는 좋은 신앙인이요. 의인입니다. 그가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에 가브리엘 천사를 만납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뜻을 믿지 않았고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흠 잡을 데 없는 의인이었음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위해 초대교회에 많은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베드로는 주의 사자에 이끌려 감옥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때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베드로가 온 것을 보고 “베드로선생님이 왔어요”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 여자 아이를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행 12:15)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음에도 그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가 자신들 앞에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어도 … 깨닫게 되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고, 이해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고 받아들여도 여전히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여 일하심을 믿어도 우리들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가랴 제사장처럼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응답은 정상적인 사람의 생각에 미친 일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한 부인이 식료품 가게에 와서 성탄절 만찬에 아이들을 먹일 수 있을 만큼만 음식을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고, 그 여인은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서
기도 밖에는 정말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신의 기도를 종이에 써서 저울에 달아 그 무게만큼 식료품을 주겠소.” 라고 했습니다.
아마 주인은 그 여인을 골탕 먹이려거나 내쫓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 부인은 노트를 꺼내 주인에게 주면서 “우리 어린애가 지난밤에 아파서 병간호를 하며 기도를 적어둔 게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읽어 보지도 않은 채 (구식)저울에 달았습니다.
빵 한 덩어리를 놓았는데 놀랍게도 저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식료품을 올려놓았는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인은 더욱 당황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저울에 더 올려놓을 수 없으니 당신이 봉지에 담아가시오.”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주인은 저울이 고장 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 그 일이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 왜 그 부인이 미리 기도를 써 가지고 왔을까?
- 왜 그 부인이 하필 저울이 고장 났을 때 왔을까? 하고 의아 해 했습니다.
그 부인이 기도를 적은 종이에는‘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마가복음11:24.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했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25년 전에 제가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로서 처음 교회를 개척했던 교회의 창립기념주일이 1월 첫 주일인데 2주일 후면 말씀이 행복한 교회 창립 25주년이 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부산교회-부산의 복음화를 위한 “처취 인 부산” 부산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었습니다.
25년 전에 함께 신앙생활 했던 분들과 함께 수정동4동-수정3동-초량동-좌천동-대연동으로 그리고 바로 이 자리 수정2동으로 개척멤버들과 함께 였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과연 하나님의 몸된교회를 개척하는 그 일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 당당해야 합니다. 떳떳해야합니다.
-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현장인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눅들게하는 일은 그 어떤 경우에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은혜를 받게 됩니다. “겸손한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도다”
그 누구가 큰소리를 못 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훈련을 받습니다. 연습, 경건의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확실하게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이요, 행복이요, 영원한 삶이기에 나는 십자가를 집니다. 나를 희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사랑으로 사는 사람으로 훈련반도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아가는 훈련의 장소에서 자기를 드러내기위해 큰 소리를 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참뜻은 업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납작 업드려 자기를 보이지 않도록 하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지요, 두 사람이 유력하지요,
아주 박빙이라는 여론조사입니다. 누가 될지 모릅니다.
투표는 개인적인 성향입니다.
솔직히 저는 누가 되든지 상관없습니다.
누구를 선호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팩트/사실을 가지고 당당하고 떴떳하게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은 똑같이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자신을 잘났다하고 자기 고집을 가지고 큰 소리 치고 자기고집대로 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실상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회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못하고 그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받지 못하면 교인도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사람이 안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대언하는 목회자가 말씀을 잘못 전하는 경우가 거의 있을 수 없는 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는 보혜사 성령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절대로 잘못 전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목회자가 잘못 전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그 목회자가 하나님께 징치를 받는 것입니다.
성도가 목회자를 판단하고 성도가 심판하고 큰소리를 치는 일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목회자인 저의 입장은 보혜사 성령님이 산울로 둘러주시고 보호인도해 주시고, 성도들이 아주 강하게 기도해주시고 아주 큰소리로 판단해 주시는 것 그것이 옳든 그르든 교훈을 많이 받아서 좋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훈련받고 연습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뜻을 받고 받들어야 하는 곳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레마로 들어야 하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고, 도무지 인간 개인이 끼일자리가 있다면 오직 아멘이요, 오직 겸손이요, 오직 고요한밤, 거룩한 밤이 되는 성스럽고 거룩한 곳이요, 임재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는 자리인데 어떻게 내가 화를 내고 분을 내고 큰소리를 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 앞에서 예의를 상당히 벗어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잘 모르고 구습에 젖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소리를 하지 않고 저도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하면 하나님이 하고 싶은 말씀을 이 교회 안에서 도무지 할 수 없어 이 교회는 인간의 눈치나 보고 인간욕심에 뭍혀서 하나님을 없고 말씀이 없고 성령도 없는 교회가 아닌 교회로 타락한 교회로 전락하게 되기에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든 목회자든 당당해야 합니다. 떳떳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의 교회에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다면 …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인 목회자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가 하나님의 하실 일을 전해 주었다면 … 쉽게 아멘 할 수 있을까요?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말씀대로 살겠다고, 순종하며 살겠다고 …
말은 잘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을 때 ‘아니요. 믿지 못하겠는데요. 무슨 말씀이세요?’하며 받아들이지도/믿지도/순종하지도 않았던 순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은혜를 받은 자여
마리아도 사가랴처럼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맨 처음 일어난 매우 중요하고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가 선정되었느냐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마리아 이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마리아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마리아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가 전 인류를 대표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영광의 위치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보고“은혜를 받은 자여”(눅1:28)라고 하였고,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눅1:30)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천사를 통해 예수님을 낳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이 땅 대한민국의 충청도 금산에서 길씨 집안의 남자로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지 압니까? 내가 말씀이 행복한교회 목사요, 집사요 권사가 된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것, 하나님의 은혜요, 뜻입니다.
지금 살았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恩惠)는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속성 중 하나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은혜는 확고부동한 사랑의 의미로 ‘헤세드’라는 단어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베푸는 은총인 ‘헨’으로 번역됩니다.
신약에서는 친절과 호의의 의미를 가진‘카리스’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어떠하느냐와 상관없이 주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내 의지대로가 아닙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마음대로입니다.
우리가 항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받은 구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하였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죄 값인 죽음을 치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은 죄 값을 더 이상 치루지 않는 값없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값이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값을 하나님이 치루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하였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은 것,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된 것, 예수 믿어 천국 백성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도 아니고, 똑똑해서도 아닙니다.
돈이 많기 때문도 아니며, 인품이 뛰어나서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값없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주시는 분이 값을 치루시는 것이 선물입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 값없는 공짜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뜻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내게 이루어지이다.
사가랴는 천사 가브리엘을 만났을 때 의심의 반응을 보였지만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세례요한을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천사 가브리엘은 나사렛에 있던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눅1:28)
그 말을 들은 마리아는 역시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만큼 영혼이 깨끗했습니다. 평상시 마리아는 정말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기에 당당하고 담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11:14.에 보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하였습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천사 같은 존재가 나타나더라도 정말 천사일 수도 있고, 사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담대한 삶, 겸손하고 진실한 삶이 아니면, 우리 영혼이 깨어있지 않다면 그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천사인지 사탄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가브리엘의 말을 듣고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눅 1:29)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눅 1:29, 쉬운성경)
“What does this mean? (The Simple English Bible)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분별할 영안(靈眼)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 보내시는 중대하고, 중요한 일을 아무 데나 있는 아무에게나 맡기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큰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그녀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하심 가운데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알아볼 만큼 영의 눈을 뜬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택하신 것입니다.
가끔 기도하다가 갑자기 응답받았다며 … 환상을 보았다며 … 시끄럽게 떠들면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환상 중에서 말씀하시지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시끄럽게 굴지 않습니다. 침묵하며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잠잠히 그 말씀에 당당하게 담대하게 순종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천사로 분별할 수 있었고, 천사의 계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가브리엘의 말에 겸손하게 응답합니다.“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이는 평상시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겠다는 담대한 믿음의 결단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게 해달라는 갈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명을 건 마리아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결혼 풍습에서의 약혼은 우리가 생각하는 약혼과 크게 다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약혼은, 완전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으로 결혼과 동등한 효력을 가졌습니다.
서로 동거만 하지 않을 뿐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부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약혼을 한 상태인데도 함께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올라간 것입니다.(눅2:5)
그렇다고 약혼 기간에 동침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을 때 아이를 가졌다면 돌에 맞아 죽음을 당할 위험이 있었음에도 마리아는 당당하게 담대하게 죽기를 각오하고 생명을 걸고 순종합니다. “예,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에게 임한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죽을수도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예,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내놓고 일합니다. 선교지에 나가 있는 선교사를 봐서도 알 수 있고, 평신도로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 위해 목숨을 건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피해를 보고 손해를 보면서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성탄절을 기다리시고 어떤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학교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내가 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내가 달라지기 위하여 새롭게 도전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금년 12월 31일 송구영신예배 때
여러분에게 도전리스트를 쓸 색깔이 있는 에이포용지 한 장씩 나눠드릴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에 내년에 도전할 여러 가지 항목을 적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 개인, 가정, 교회 … 등 여러 도전 항목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기 전에 지금부터 미리 기도하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내년에는 제가(저희 가정이) 이렇게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이런 것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 하나님! 내년에는 제 일터에 이러한 변화가 있게 하옵소서.
가정도, 일터도,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 그 일을 위하여 이렇게 도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쩌면 단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기에 단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하늘의 복에 도전한다면 그가 2013년 한 해는 천지만물지중에 그가 주인공이요, 주가 하늘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리아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마리아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대하는 복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다 고개를 끄덕거릴 수 없어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하여, 내 가정을 통하여, 내 일터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기다리며 받아들이는 믿음의 용기를 가진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들 마음속에 주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세상에 밝히기 위하여 베풀고 나누는 일에도 기꺼이 동참하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4. 5. 26
복을 이어가는 사람들
창세기 12:1~3 (입교예식주일)
오늘본문에서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2절에서 “너는 복이 될지라” 옛 번역 개역한글에서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했습니다.
어찌 아브라함만 복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내가 우리 가정이 구원받은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당당하게 선포하고 새로운 믿음의 세계를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나는 복이다. 우리 가정은 복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복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말씀하실 때 항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태복음 1:1)
신약 성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은 아브라함의 소명장입니다.
오늘 본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기 전 그는 어디서,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았는지
성경은 자세한 정보를 성경 독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11장 마지막에 그 아버지 데라에 대한 짤막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 소중한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 그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기 전, 인생은 어떤 가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아버지와 함께 살던 갈대아 우르는 우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땅입니다.
여호수아 24:2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데라는 큰 기업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상을 만들 어 판매하는 우상 기업체였다.
그래서 돈을 꽤나 잘 벌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가정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 믿음의 조상을 삼으신것입니다.
이때부터 “혜예 베레카”-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그때부터 혜예 베레카,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식구가 천국 복을 받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자녀들이 하늘의 복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순간 복의 통로가 됩니다.
너로 말미암아, 인하여, 때문에, 덕분에, 통하여 다 같은 말입니다.
나 때문에 내 부모가 가슴앓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잘못된 자식이지요.
나 때문에 내 자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될 복의 그릇이 찢겨 져서 가슴 아파하고 있다고 한다면 부모 노릇 못한 것이지요.
나 때문에 내 공동체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아파한다면 잘 못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 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 나는 복의 통로다. 나는 복의 유통자다. 나는 복의 생산자다.
나는 복의 발원지다. 나는 복의 근원이다.믿습니까?
우상 장사의 아들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불러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신 그 말씀 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열국의 아비, 하늘의 별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은 수많은 자손들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지금 지구상에 80억 명 정도가 삽니다.
그 가운데 절반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고백을 합니다.
크리스챤, 천주교인, 유대교인, 이슬람교도들이 모두 한결 같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잘난 사람, 잘난 가문에서만 복덩이들을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어떤 조건이 있어서 자격이 있어서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자격이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고 불렀다. 이것이 유일한 자격입니다.
이것을 무조건적인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나는 복의 통로가 되어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구원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꿈도 꿀 수 없었던 일들이 우리 가정에 자손 대대를 통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40년 전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찾아오실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까?
한반 도는 강대국들의 전쟁터였습니다. 임금이 끌려 나갑니다.
황후가 일본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지성인들은 절망감에 통곡하고 젊은이들은 자괴감에 자살을 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이때부터 우리 민족은 복의 근원으로 물씬물씬 성장하고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붙들 것이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일본에, 열강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무릎 꿇어 기도했습니다.
희망없는 땅이 소망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땅바닥을 기던 백성이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성장되었고 나라는 부강해지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한 마디 말씀을 아멘!
그 말씀 내 것! 그 말씀 우리 가정에 주신 축복! 고백하면 복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세계 최강 선교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가난했던 나라가 서구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이게 기적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II.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오늘 본문 창세기 12:1~3 사이에 적어도 9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주동사는 “가라”입니다. 무엇을 떠나가라는 겁니까?
고향, 친척, 아비의 집,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런 가치관, 그런 비전, 그런 삶의 방식 으로 살지 말라는 겁니다.
어디로 가라는 겁니까? 가나안 땅으로 가랍니다.
약속의 땅으로, 말씀이 있는 땅으로, 하나님이 인도하는 땅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 보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비전, 꿈이 무엇입니까?
청소년들, 청년들이 요즘 의료 분쟁으로 의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 가운데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왜요? 돈을 더 잘 벌기 때문입니까?
한국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은 최초의 서양 의사들이었습니다.
사람을 고치고 치료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이 고치는 일로 나는 복음을 전한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나의 선한 봉사로 하나님이 백성들의 영혼을, 공동체를,
그 육체를 치료하는 데에 내가 쓰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거 근사한 일이다.
그래서 의사가 되는 이유였습니다.
돈 버는 기업인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물질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돈으로 나는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기업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돈은 목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이 목적이 되는 순간 속물이 되는 겁니다.
타락이 되는 겁니다.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 돈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이 알았던 것입니다.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춤과 드라마, 예능, 예술, 그 직업은 왜 우리 자녀들이 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인기가 있으니까? 돈을 잘 벌 수 있으니까?
모든 예술은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내 삶으로, 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나는 예능인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그 길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유명인이 되어도 속물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갈대아 우르의 가치관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가나안 땅의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따라 살라는 겁니다.
돈 벌면 좋지요. 인기 있으면 좋지요. 그러나 그건 수단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달라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자녀들에게 성인식을 하면서 젖과 꿀을 준 거예요.
왜냐하면 지금부터 네 삶은 속물의 삶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게 아니다.
죄악의 도성 애굽을 떠나서 거친 광야를 지나서
너는 반드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복, 바라크입니다.
일곱 가지를 약속합니다.
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② 네게 복을 주어서, 구원만 주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겁니다.
③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 네가 어디에 가든지 간에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④ 너는 복이 될지라. 네가 받은 복으로 세상을 섬기라는 겁니다.
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겠다.
여러분 하나님과 편 먹고 살아 보셨습니까?
꽤나 근사합니다.
⑥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내 새끼 해치고 저주하는 놈들 어찌되나 보라는 겁니다.
⑦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성공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쓰임 받고 싶은게 우리 자녀들의 비전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 77명이 입교예식을 가졌습니다. 모두 청소년부 자녀들이었습니다. 청소년은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를 틴에 이져(teenage)라고 그래요. 그 나이에는 영어로 모두 teens 자가 붙어 있어요. 13세 (thirteen) 14세(fourteen) 15세(fifteen) ... 19세(nineteen)까지. 틴에이져(teenage)는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이때 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으면 속물로 살아갈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때는 비전, 인생의 꿈을 간직하는 때, 이때 꿈이 잘못되면 썩은 냄새 풍기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른 정신 배우는 때가 이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틴에이져들이 이걸 못 배우고 틴에이져를 스쳐 지나갑니다. 학교에 기대가 안 됩니다.
우리 교회가 가정이 엄마가 아빠가 바른 가치를 바른 정신을 바른 신앙을 바른 믿음을 바른 인생의 철학을 가르쳐야 될 때가 틴에이져라고 하는 겁니다.
III. 부모의 손과 입에 축복권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여 부르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것입 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가면 앞장서서 도와주십니다. 내 옆에서 동행하시며 나를 도와주십니다.
♪나의 둥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내 새끼 건드리는 놈 내가 가만 안 둔다. 보호가 됩니다.
그러나 엉뚱한 길, 이 아이가 가서는 안 되는 길 걸어가면 하나님이 앞장 서서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옆에 서서 태클을 걸지마! 해도 태클이 걸려 와요. 등 뒤에서 잡아 당깁니다.
너 그리 가면 망해! 너 그 길 가면 죽어! 일부러 망하게 실패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놈들은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왜? 그 길 가다가 망하 면 그만이지, 지옥 가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유기” 버려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정이 존재하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었다. 축복권이 내 손에 있는 거예요. 내가 어머니가 되었다. 축복의 권사가 이입에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어떤 축복을 했는지, 어머니가 입으로 어떤 축복을 쌓아 놓았는지,
이게 자식의 인생의 미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야곱처럼 아버지의 복, 어머니의 복을 받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요셉은 말년에 아버지에게 복 받으러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들어 누워 있습니다.
움직이 지 못하는 아버지 가슴에 얼굴을 파묻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손을 들어서 자기 머리에 얹습 니다. 기도는 자기가 합니다.
그 꼰대 할아버지, 꼰대 아버지가 축복하면 그게 그대로 이루 어질까?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부족한 엄마가 기도하면, 이 말씀대로 아이가 복을 받을까? 그대로 복을 받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데 내 자식이 심판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너 에서 끝나고 그 자식 어찌하고 너 혼자 왔느냐?
이 생명책에 네 새끼 이름이 없어? 그 자식 어디 두고 왔어? 이게 심판이라는 거예요.
믿음의 가정에 태어나서 믿음을 이어가지 못하면 그 자식 심판대 앞에 섰을 때에
그 좋은 부모 밑에서, 기도하는 어머니 밑에서, 신앙생활 잘하는 아버지 밑에서 너 뭘 얻었니? 뭘 배웠니? 뭘 가졌니?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가 될 때 목사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딸이, 내 아들이 태어날 때에 나는 아빠로서의 기름 부으심을 받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로서 기름 부으심을 받은 겁니다.
내 아이의 인생에 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평생 중보자가 된 것입니다. 축복의 권세가 내게 있는 겁니다.
예언자가 된 겁니다. 부모는 자식의 예언자입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고전 14:3)
자식이 힘들어 쓰러져 있을 때에 그 자식을 일으키는 게,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을 때에,
말씀으로 기도로 눈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일으켜 세우는 게 덕을 세우는 겁니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그것을 바른 길로 돌이키는게 권면입니다.
영혼이 병들어 있을 때, 마음이 병들어 있을 때,
가치관이 썩어 있을 때에, 몸이 병들어 있을 때에 기도해서 그 아이를 건강하게 세우는게 안위하는 겁니다.
왕의 권세가 있는 겁니다. 얘야, 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야. 하나님 한 분이 네 인생의 주인이요 왕이란다.
어디에 가든지 네가 있는 자리에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섬기며, 너보다 약한 약자를 섬기며 사는 거야.
그게 왕의 권세입니다.
그 권세가 엄마 아빠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IV. 복을 이어가는 신앙 명가문 미국의 명가문을 연구했던 교육학자 알버트 윈쉽(Albert E. Winship)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4대에 걸친 후손 1,400여명을 찾아 조사 했습니다.
그 가문의 사람들은 대부분 몇 가지 신앙원칙을 기억하고 꾸준히 지키며 살더랍니다.
그 가문을 통하여 부통령 1명, 대학총장 13명, 3명의 주지사, 3명의 시장, 변호사 149명, 판검사 48명, 116명의 선교사 목사,
성공한 기업가 75명, 과학자 25명, 교수가 66명 차관급 공무원이 82명, 68명의 의사 중 많은 사람들이 선교지와
오지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자녀들도 구원얻은 백성이 되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며 세상을 섬기고 있었다 는 것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기억하는 5가지 신앙원칙, 삶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어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특히, 위기의 순간에 성경적 가치와 원칙을 따라서 살더라.
두 번째, 너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의 교회에서 칭찬 들을만한가를 늘 기억하더라.
세 번째,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드러내지 말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서 살더라.
네 번째, 사람 관계에서 똑똑한 사람이 되지 말고 덕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더라.
다섯 번째,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내 후손들이, 내 자식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기록해 놓을 것인가?
항상 그것을 기억하고 살더라.
이게 복을 이어가는 가문의 가치관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 많은 복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이 손바닥으로, 이 입술로 복이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 아이가 집을 나설 때,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면,
이 아이들은 자신의 천사가 하루종일 자기 자신과 동행한다고 믿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불러다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이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인지 서로 기도하자.
아이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 기도합니다.
직장을 선택할 때, 대학을 선택할 때, 전쟁터에 나설 때, 군대 갈 때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의 부모가 손을 얹고, 권위자가 손을 얹고, 포옹을 하고
그리고 성령의 도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좋은 말을 하는 것 이게 축복입니다.
이 짤막한 가치관을 통해서 복을 이어가는 가문에 기독교 명가문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에게 주신 복이 복의 가치관, 복의 근원의 가치관을 통하여 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너와 나는 오늘 복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알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몇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마는, 오늘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 나라들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해 보면 자유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서독을 번갈아 여행해보면 쉽게 비교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데 국경만 넘어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입니다.
혁명(革命)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 자체의 개념을 깊이 상고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주아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정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나 아닌 그 무엇, 이를테면 사회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투쟁하려듭니다. 투쟁하여 얻은 것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40년 내내 혁명이요, 아직도 혁명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싸워서 얻은 바에는 당연히 감사가 없습니다.
백두산 정상은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천지(天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씩 기다려서도 못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세 번을 갔는데도 번번이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아쉬워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들어가려면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다섯시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백두산으로 떠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 평탄케 해주시고 백두산 천지 좀 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기도 같은, 참으로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하게 열린 천지의 장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장로님이 대표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공산주의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시종 못마땅해하던 그가 입을 열어 빈정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재수(財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운(運)이 좋았다---일마다 이렇게 여기는 자연주의자, 무신론자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또한, 노예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뿌리」라는 영화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그 영화를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노예상인에게 붙들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이후로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준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는 것 하나로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定配)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감사란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서 일한다---보수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본의 아니게 그 집 부부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무엇을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니 더 달라고 출근하는 남편을 조릅니다.
남편은 월급 가져다주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하냐 하고, 아내는 모자란다, 더 필요하다 하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돈이 있어야 찼지요. 하는 수없이 감추어둔 비상금을 꺼내주며 투덜거립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빼앗기기만 한다. 월급봉투 고스란히 가져다주고 어쩌다 생기는 돈까지 고스란히 바치지 않느냐?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나는 이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고 고생만 하는 머슴이다." 이르는데 그 아내가 가만있겠습니까?
대거리를 합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주고 아기 낳아 키워주고…… 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한다."
보다못해 제가 말다툼을 멈추게 하고 한마디했습니다.
"이 집은 머슴과 식모가 사는 집인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머슴노릇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 나는 이 집의 식모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쩌다 부부싸움 할 때에, 한번씩 하는 소리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농부는 여름 동안 땀흘려 수고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해서 농사를 지어놓고 가을이 되어 추수 때가 되면 저들은 생각합니다.
더욱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추어주시어 오늘 이렇게 귀한 추수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 곡식을 내려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아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정치하느라고 바쁘게 나다니다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내 친구 누구는 자기 아버지하고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하루 시간을 내어 종일 아들과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 날 잠자리에 들기 전, 각자 일기장에 하루일 을 적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해서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요 다른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비참해집니다. 불평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determined will'--결정적 의지와 'desired will'--소원적 의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정․섭리․능력․지혜․권능……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절대적 주권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입니다.
또한 의도적이고 포괄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에 소원적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이며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으면서 부모는 저마다 자녀에 대하여 소원을 가집니다.
'너는 장차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하는 부모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도 첫아이를 낳고 보니 그 생각이 간절합디다.
아직은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여서 커서 무엇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당장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 그래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어떤 여건에 준한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가진 소원입니다. 이것이 소원적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소원에 맞도록,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기도로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초환경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곧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환경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라 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다가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기도하고 저럴 때에 안하고, 이럴 때에 조금 진실하게 하고 저럴 때에 건성으로 하고--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하게 했다가 실패하게 하고, 건강하게 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게 되면 좋아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금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마는, 그렇게 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어떤분이 제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두 잃기만 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얻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답답하니까 기도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만족하고 한번만이라도 성전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뻔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자동차 사고라도 크게 나서 죽을 뻔하다 살아나야 감사를 합디다.
병에 걸려도 감기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나야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랬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그때는 아마 그 약이 효험이 있었나봐" 해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고 변덕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범사에 감사하려면 절대 감사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바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라는 말이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결혼이란 본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본뜻입니다 마는, 요즈음에 와서는 다이아반지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하는 문제들로 결혼의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가 건강하니 고맙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고맙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니 고맙지 않은가? 이것밖에 더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큰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많은 변화 속에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로마 교외에 카타콤(Catacomb), 곧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죽어 매장된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지금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식량조차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고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냐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니다, 자유를 되찾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쑤요, 심지어 숙청 당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말이나마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유지해온 체제가 아닙니까? 되찾은 자유만으로 만족합니다. 굶어도 좋습니다. 자유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야 진정 자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끔 차를 몰고 지나다니다 보면 중국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두 내외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이제는 알만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일부러 차의 속도를 낮추어서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아마도 아내는 남의 집의 파출부로, 남편은 막노동판에서 인부로 일할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끝난 저녁에 이렇게 만나서 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로 만족해합니다. 얼마동안 더 고생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도 부럽지 않습니다. 좋은 집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 자유 하나로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더는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필요성, 감사의 무한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와 감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강한 주권으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반드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라시는 바를 알고, 속히 기뻐하시는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알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몇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마는, 오늘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 나라들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해 보면 자유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서독을 번갈아 여행해보면 쉽게 비교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데 국경만 넘어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입니다.
혁명(革命)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 자체의 개념을 깊이 상고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주아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정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나 아닌 그 무엇, 이를테면 사회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투쟁하려듭니다. 투쟁하여 얻은 것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40년 내내 혁명이요, 아직도 혁명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싸워서 얻은 바에는 당연히 감사가 없습니다.
백두산 정상은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천지(天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씩 기다려서도 못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세 번을 갔는데도 번번이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아쉬워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들어가려면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다섯 시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백두산으로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 평탄케 해주시고 백두산 천지 좀 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기도 같은, 참으로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하게 열린 천지의 장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장로님이 대표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공산주의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시종 못마땅해하던 그가 입을 열어 빈정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재수(財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운(運)이 좋았다---일마다 이렇게 여기는 자연주의자, 무신론자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또한, 노예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뿌리」라는 영화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그 영화를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노예상인에게 붙들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이후로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준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는 것 하나로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定配)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감사란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서 일한다---보수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본의 아니게 그 집 부부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무엇을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니 더 달라고 출근하는 남편을 조릅니다. 남편은 월급 가져다주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하냐 하고, 아내는 모자란다, 더 필요하다 하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돈이 있어야 찼지요. 하는 수없이 감추어둔 비상금을 꺼내주며 투덜거립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빼앗기기만 한다. 월급봉투 고스란히 가져다주고 어쩌다 생기는 돈까지 고스란히 바치지 않느냐?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나는 이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고 고생만 하는 머슴이다." 이르는데 그 아내가 가만있겠습니까? 대거리를 합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주고 아기 낳아 키워주고…… 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한다." 보다못해 제가 말다툼을 멈추게 하고 한마디했습니다. "이 집은 머슴과 식모가 사는 집인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머슴노릇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 나는 이 집의 식모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쩌다 부부싸움 할 때에, 한번씩 하는 소리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농부는 여름 동안 땀흘려 수고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해서 농사를 지어놓고 가을이 되어 추수 때가 되면 저들은 생각합니다.
더욱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추어주시어 오늘 이렇게 귀한 추수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 곡식을 내려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아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정치하느라고 바쁘게 나다니다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내 친구 누구는 자기 아버지하고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하루 시간을 내어 종일 아들과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각자 일기장에 하루일 을 적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해서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요 다른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비참해집니다. 불평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determined will'--결정적 의지와 'desired will'--소원적 의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정․섭리․능력․지혜․권능……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절대적 주권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입니다. 또한 의도적이고 포괄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에 소원적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이며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으면서 부모는 저마다 자녀에 대하여 소원을 가집니다. '너는 장차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하는 부모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도 첫아이를 낳고 보니 그 생각이 간절합디다. 아직은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여서 커서 무엇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당장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 그래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어떤 여건에 준한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가진 소원입니다. 이것이 소원적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소원에 맞도록,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기도로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초환경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곧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환경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라 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다가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분들이 나옵니다. 근 이천여 명이 매일 아침 나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이 일년 중 가장 많이 나올 때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대입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고3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너도나도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머니가 기도 안 해서 떨어졌다고 할 판이니 적어도 그 원망만은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나와서 애를 쓰는 것까지는 고마운 일이고 잘하는 일이다 싶습니다마는, 시험이 끝나면 다음날부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변덕입니다. 이럴 때에 기도하고 저럴 때에 안하고, 이럴 때에 조금 진실하게 하고 저럴 때에 건성으로 하고--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하게 했다가 실패하게 하고, 건강하게 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게 되면 좋아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금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마는, 그렇게 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어떤분이 제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두 잃기만 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얻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답답하니까 기도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만족하고 한번만이라도 성전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뻔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자동차 사고라도 크게 나서 죽을 뻔하다 살아나야 감사를 합디다.
병에 걸려도 감기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나야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랬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그때는 아마 그 약이 효험이 있었나봐" 해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고 변덕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범사에 감사하려면 절대 감사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바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라는 말이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결혼이란 본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본뜻입니다 마는, 요즈음에 와서는 다이아반지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하는 문제들로 결혼의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가 건강하니 고맙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고맙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니 고맙지 않은가? 이것밖에 더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큰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많은 변화 속에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로마 교외에 카타콤(Catacomb), 곧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죽어 매장된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지금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식량조차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고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냐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니다, 자유를 되찾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쑤요, 심지어 숙청 당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말이나마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유지해온 체제가 아닙니까? 되찾은 자유만으로 만족합니다. 굶어도 좋습니다. 자유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야 진정 자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끔 차를 몰고 지나다니다 보면 중국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두 내외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이제는 알만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일부러 차의 속도를 낮추어서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아마도 아내는 남의 집의 파출부로, 남편은 막노동판에서 인부로 일할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끝난 저녁에 이렇게 만나서 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로 만족해합니다. 얼마동안 더 고생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도 부럽지 않습니다. 좋은 집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 자유 하나로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더는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필요성, 감사의 무한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와 감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강한 주권으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반드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라시는 바를 알고, 속히 기뻐하시는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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