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이후로 로즈는 살인과 살인자에 대한 궁금증을 품었다.
끝장을 봐야 하는 이유는 결국 부분적으로는 어떤 효과를 얻기 위해서인 걸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다고, 가장 무시무시한 허튼짓도 정당화될 수 있고 그 행위에 어울리는 감정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한 사람의 관객에게 - 교훈을 깨닫더라도 깨달음을 표시할 수도 없을 상대에게 - 증명하기 위해서일까?
==
해트 네틀턴.
백세 노인이 된 말채찍 난동꾼.
생일에 사진 촬영을 하고, 간호사들의 유난스러운 보살핌을 받고, 모르긴 해도 여자 기자의 뽀뽀도 받았을 것이다. 그를 향해 터지는 플래시.
그의 목소리를 빨아들이는 녹음기. 주민 중 최고령자. 말채찍 패거리 중 최고령자.
우리를 과거와 이어주는 살아 있는 고리.
부엌 창가에서 차가운 호수를 내다보며 로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들으면 좋아할 만한 사람은 플로였다. 최악의 의심이 멋들어지게 확인되었다는 뜻으로 그녀가 세상에! 하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플로는 해트 네틀턴이 죽은 바로 그곳에 있고, 로즈는 어떻게 해서도 플로에 게 가닿을 수 없었다. 그 인터뷰가 녹음될 때도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비록 그 인터뷰를 듣지도, 그에 대해 알지도 못했겠지만.
이삼 년 전 로즈가 양로원에 입원시킨 이후로 플로는 말문을 닫았다.
플로는 스스로를 완전히 거두어들였고, 하루종일 교활하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칸막이를 두른 침대 한구석에 앉아 서 누가 뭐라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씩 간호사를 깨물어 감정을 드러내는 때를 제외하고는.
==
학교 자체도 개선되었다.
창문을 교체했고 책상은 바닥에 나 사로 고정했으며 지저분한 낙서는 흐린 빨간색 페인트로 군데 군데 덧칠해 가렸다. 남학생 변소와 여학생 변소를 철거하고 구덩이도 메웠다.
정부와 학교 위원회는 지하실을 치우고 거기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번스 씨는 여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집을 산 사람들은 욕실을 설치했다.
그들은 또한 닭장용 철조망을 높이 세워 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뻗어 라일락을 꺾어가지 못하게 했다. 플로도 그즈음에 욕실을 들였다.
그들도 공사를 하는 게 낫겠다고 플로가 말했다. 전시 부흥기였다.
코라의 할아버지는 은퇴해야 했고, 그를 마지막으로 꿀 푸는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다.
==
아버지에게 플로는 바람직한 여자의 전형이었다.
로즈는 그것을 알았고 실제로 아버지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여자는 활달하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무엇을 만들거나 비축하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빠릿빠릿해야 하고 흥정과 관리에 능해야 하며 사람들의 가식을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지적인 면에서는 어수룩하고 아이 같아야 하며, 지도나 긴 단어나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을 우습게 보고, 아기자기하면서 알쏭달쏭한 생각, 미신, 전통에 대한 믿음 등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여자의 정신은 달라." 아버지는 로즈가 약간 더 어렸을 때, 평온했고 심지어 친밀하기까지 했던 어느 시기에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로즈도 여자라는 것, 혹은 곧 여자가 된다는 것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지. 여자들 생각은 따라가기가 불가능하잖아."
그는 집안에서 고무 덧신을 신고 다니면 눈이 멀게 된다고 믿는 플로를 가리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가. 그게 그들의 재능이야.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지. 여자가 남자보다 더 뛰어난 어떤 부분이 있어.”
==
새로운 고등학교에는 자동차 정비공을 양성하는 자동차 정비소, 미용실 운영자를 양성하는 미용실, 그리고 도서관, 강당, 체육관이 마련되어 있고, 여자 화장실에는 손을 씻을 수 있는 분수대 같은 장치도 있었다. 또한 코텍스 자판기도 잘 작동했다.
델 페어브리지는 장의사를 경영했다.
런트 체스터턴은 회계사가 되었다.
호스 니컬슨은 건설업자로 돈을 많이 벌다가 정계로 나갔다.
그는 어느 연설에서 학교가 하느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가르치고 프랑스어는 훨씬 더 적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
그는 정말 목사였을까, 아니면 말로만 그런 것일까?
플로는 목사가 아니면서 목사처럼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었다.
목사이면서 목사가 아닌 것처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혹은 더욱 이상하긴 하지만, 목사가 아닌데 목사인 척하면서 목사가 아닌 것처럼 입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쨌든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태에 그토록 가까이 갔다는 사실은 유쾌하지 않았다.
로즈는 유니언역을 통과해 걸어가며 십 달러가 든 조그만 주머니가 피부에 닿는 것을 느꼈고, 계속 피부에 스치며 교훈을 상기시키는 그 주머니를 하루종일 느끼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
"하지만 나는 좋아." 패트릭이 말했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누구?"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 알잖아. 그림 말이야. 그 그림 몰라?”
패트릭은 술수를 부릴 때가 있었다. 아니, 그건 술수가 아니었다, 패트릭은 술수를 부릴 줄 몰랐다. 패트릭은 자기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 때 그 나름의 방식으로 놀라움을, 조롱 섞인 놀라움을 표현하곤 했다.
또한 자기가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굳이 알고 있을 때에도 비슷한 조롱과 비슷한 놀라 움을 표현했다. 그의 오만과 겸손은 양쪽 다 기묘하게 과장되어 있었다.
오만은, 로즈가 시간이 흘러 판단한 대로,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패트릭은 자신이 부유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군 적이 결코 없었지만 말이다. 그의 누이들을 직접 만났을 때도 그녀는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말이나 요트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는데, 마찬가지의 혐오감을 예컨대 음악이나 정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에게도 느꼈다.
패트릭과 누이들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이 그저 혐오감을 내뿜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만에 관한 한 빌리 포프 역시 심하지 않나? 플로 역시 심하지 않나? 아마도.
하지만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빌리 포프와 플로는 보호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것들이, 가령 D.P.와 같은 사람들, 라디오에서 프랑스어로 말하는 사람들, 변화 등이 그들을 건드렸다.
패트릭과 그의 누이들은 그 무엇도 자신들을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식탁에서 다툴 때 그들의 목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유아적이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요구하는 모습이나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 식탁에 올랐을 때 짜증을 내는 모습은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타인의 뜻에 따르고 자신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호의를 얻어야 했던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었다. 부유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
패트릭의 부모는 밴쿠버섬의 시드니 근처에 살았다.
반 에이커 정도의 땅에 짧게 자른 푸르른 잔디 - 한겨울에 푸르른 잔디라니, 로즈에게 3월은 한겨울 같았다 - 가 돌담까지 경사져 내려갔고 그 너머로는 좁다란 자갈 해변과 바다가 펼쳐졌다. 집은 반은 돌로, 반은 벽토와 목재로 지어졌다.
튜더양식과 다른 양식이 절충된 집이었다.
거실과 식사실과 서재의 창문 모두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는데, 해변에서 때때로 불어오는 강한 바람 때 문에 창문은 모두 두꺼운 유리로 되어 있었다.
핸래티의 자동차 전시장 유리창과 같은 판유리일 거라고 로즈는 생각했다.
바다에 면한 식사실의 벽 한 면은 전체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돌출한 내닫이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두꺼운 곡선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면 꼭 병 밑바닥을 통해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벽에 놓인 찬장 역시 가운데가 곡선형이고 광택이 났으며 보트처럼 커보였다. 어디를 가나 크기가 눈에 띄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께였다.
수건과 러그, 나이프나 포크 손잡이의 두께, 그리고 침묵의 두께.
그곳에는 사치와 불안이 만연했다.
한 이틀을 그곳에서 보낸 뒤 로즈는 너무도 기가 꺾여 손목과 발목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집는 것도 고역이었고 완벽하게 조리된 로스트비프를 자르고 씹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숨이 가빴다.
장소가 사람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숨을 막아 생기를 완전히 빼놓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심히 적대적인 장소에 있어본 적은 전에도 많았지만 이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처음이었다.
==
"아니," 패트릭의 어머니가 말했다. "석공은 아니었을 거야."
그녀에게서 부연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모욕, 반감, 낭패감 같은 것, 자기 남편의 가문이 육체노동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기분이 상했는지도 모른다고 로즈는 생각했다. 그녀를 좀더 잘 알게 되었을 때 혹은 더 오래 관찰하고 난 뒤에, 왜냐하면 그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 로즈는 패트릭의 어머니가 대화에 상상이나 추측이나 추상적인 말이 끼어들면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로즈의 수다스러운 말 투도 싫어했을 것이다.
눈앞에 실재하는 것 - 음식, 날씨, 초대장, 가구, 하인들 - 에 대한 사실 관계를 넘어선 관심은 어떤 것이든 부실하고 본데없고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푸근한 날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런 날에는 예전에 이러저러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라고 하는 건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기억이 떠오른다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패트릭의 어머니는 밴쿠버섬의 초기 목재업계 부호의 외동딸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북부 정착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패트릭이 어머니에게 과거에 대해 말을 시키려 할 때마다, 지극히 단순한 정보를 구하는 질문을 할 때마다 - 어떤 증기선들이 해안가로 들어왔는지, 어느 해에 정착지가 폐쇄되었는지, 최초의 벌목 기차 노선은 어디에 놓였는지 - 그녀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난 몰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니?"
그런 짜증을 낼 때가 그녀의 어조가 가장 강해질 때였다.
패트릭의 아버지 또한 과거에 대한 이런 관심을 좋아하지 않았다.
패트릭과 관련한 많은 것들, 대부분의 것들이 아버지에게는 나쁜 조짐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런 걸 왜 알고 싶어하는 거냐?" 그는 식탁 머리에서 소리쳤다.
그는 작은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지고 얼굴이 붉으며 깜짝 놀랄 정도로 호전적인 남자였다. 패트릭은 어머니를 닮았는데, 그녀는 큰 키에 피부가 희고 최대한 억제된 방식으로 우아했으며 옷이나 화장이나 전체적인 스타일이 이상적인 중용을 염두에 두고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
"아마 로즈도 패트릭처럼 천재 지식인인가보구나."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자 패트릭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 모두를 향해 큰 소리로 로즈가 받은 장학금과 수상 내역을 읊기 시작했고 이에 로즈는 질겁하여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런 자랑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더한 멸시를 받을 뿐임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걸까?
그의 가족 전체가 의기투합하여 패트릭에게, 그의 요란한 자랑 거리에, 스포츠와 텔레비전을 경멸하는 태도에, 그의 소위 지적인 관심에 대항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동맹도 잠시뿐이었다.
아버지가 딸들에게 느끼는 혐오감은 그가 패트릭에게 느끼 는 혐오감과 비교할 때라야만 심하지 않았다. 그는 할애할 시간이 생기면 딸들에게도 꾸지람을 늘어놓았다.
딸들이 여러 스포츠에 들이는 시간을 두고 비웃었고, 그들이 쓰는 장비와 요트와 말에 들어가는 경비에 대해 불평했다.
그리고 딸들끼리도 점수와 빌려간 물건과 손상 등에 관한 알아듣기 힘든 문제를 두고 옥신각신했다. 음식은 풍성하고 맛도 좋았지만 가족 모두가 어머니에게 음식에 대해 불평했다.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말만 했는데, 사실 로즈는 그런 어머니를 탓할 마음이 들지않았다.
진심어린 악의가 한 장소에 그토록 강렬하게 집중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빌리 포프는 편견과 불평이 심한 사람이고 플로는 변덕스럽고 불공정하고 뒷말을 즐기는 사람이며 아버지는 생전에 냉혹한 판단과 가차없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지만, 패트릭의 가족에 비하면 로즈의 가족은 하나같이 유쾌하고 매사에 만족하는 사람들 같았다.
==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말했다. "사랑하지 않아.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침대 위에 쓰러져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어쩔 수가 없어."
잠시 후 패트릭이 말했다.
"좋아.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날 사랑하라고 강요하진 않아."
이성적인 말의 내용에 견주어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과 앙심을 풍겼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가 말했다. "스스로가 뭘 원하는지 네가 알고 있는가 하는 거야.
난 아니라고 봐. 난 네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전혀 모른다고 생각해.
그냥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 거지."
“뭘 원하는지 알아야 뭘 원하지 않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로즈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
“쉿! 다른 애들 깨겠다. 우리 그만해야 돼."
"사랑한 적 없다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어. 실수였어."
"좋아. 좋아. 네 말 알아들었어."
"왜 내가 자기를 사랑해야 돼? 왜 자기는 내가 그러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구는 거야? 당신은 날 경멸하잖아. 내 가족과 내 배경을 경멸하면서 내게 엄청난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
그녀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털어놓지 않았던 얘기는, 때로 그것이 동정이나 탐욕이나 비겁함이나 허영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었다.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
그녀가 그간 남들에게 해왔던 다른 모든 얘기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것 같은데, 그녀는 정당화를 할 수가 없다.
이는 그들의 결혼생활에 벽지를 바르고 휴가를 떠나고 식사를 함께하고 쇼핑을 하고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길고 분주한 기간처럼 완벽하게 평범하고 견딜 만한 시간도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로는 이유도 조짐도 없이 행복이, 행복의 가능성이 나타나 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는 의미다.
그런 때 그들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외피를 두른 것 같았고, 눈부시게 상냥하고 순결한 로즈와 패트릭이 각자의 평상시 자아의 그림자 속에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때, 그에게서 자 유로워진 상태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열람석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그녀가 본 사람도 바로 그 패트릭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때 그를 내버려뒀어야 했다.
로즈는 자신이 패트릭을 그렇게 바라보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안다. 그런 일이 다시 한번 벌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한밤중에 토론토공항에 있었다. 패트릭과 이혼한지 구 년 정도 지난 뒤였다.
그즈음 로즈는 상당히 유명해져서 국내의 많은 이들이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정치인, 배우, 작가, 화제의 인물, 그리고 정부나 경찰이나 조합 등에 분한 일을 당한 많은 일반인들을 인터뷰했다.
때로는 이상한 광경을 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UFO나 바다 괴물, 보기 드문 재주나 수집품을 가진 사람, 이제는 사라진 풍습을 계속 지키는 사람 등등.
그녀는 혼자였다. 배웅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옐로나이프에서 연착한 항공편으로 막 도착한 참이었다. 피로에 지치고 후줄근했다.
그녀는 커피 바에 서 있는 패트릭의 뒷모습을 보았다.
레인코트 차림이었다. 전보다 살집이 붙었지만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녀는 예전과 똑같은 기분이 되어, 자신과 하나로 묶인 사람은 바로 이 남자라고 느꼈다. 마법 같지만 실현 가능한 어떤 비법으로 두 사람이 서로를 찾고 신뢰할 수 있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고 행복해서 깜짝 놀라게 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걸음은 멈추었다.
그가 돌아서서 커피 바 앞에 모여 있는 작은 플라스틱 탁자와 곡선형 벤치들 중 한 곳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다.
깡마른 앙상함과 학자 같은 추레함과 고지식한 권위주의는 그에게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매끈하게 펴지고 채워져서, 너무나 세련되고 유쾌하고 믿음직하고 약간은 안일해 보이는 남자로 변해 있었다. 모반도 희미해졌다.
그녀는 구겨진 트렌치코트 차림에 흰머리 섞인 긴 머리가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눈 밑에는 한참 전에 바른 마스카라가 번져 있는 자신이 얼마나 초췌하고 삭막해 보일지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보고 낯을 찌푸렸다. 진정한 혐오감과 맹렬한 경고를 담은 얼굴, 유아적이고 제멋대로이지만 정확히 계산된 표정이었다. 역겨움과 증오의 때맞춘 폭발.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았다.
때로 로즈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그들에게서 낯을 찌푸리고 싶은 욕망을 감지하곤 했다. 그런 욕망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서 감지되었다.
수완 좋은 정치 인이나 재치 있고 관대한 주고, 존경받는 인도주의자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를 목격한 주부나 영웅적인 구조작업에 뛰어들었거나 장애연금을 편취당한 노무자에게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사보타주하기를, 낮을 찌푸리고 더러운 말을 하기를 갈망했다.
그들 모두가 드러내고 싶어하는 표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누군가에게,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표정이?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상황이 필요했다.
조명이 강렬하고 비현실적인 장소, 한밤중의 시간대, 다리가 풀리고 어질어질한 피로, 갑작스레 환영처럼 나타난 진정한 적.
그녀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 갖가지 빛깔로 장식된 긴 복도를 따라 부들부들 떨며 걸어갔다. 그녀는 패트릭을 보았고 패트릭도 그녀를 보았다. 그가 그런 찌푸린 표정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적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누구든 어떻게 로즈를 그토록 증오할 수 있을까?
그녀가 선의와, 미소로 고백하는 피로와, 예의를 갖춘 서막을 기대하는 소심한 분위기를 띠고 막 다가서려 한 바로 그 순간에?
오, 패트릭은 할 수 있다. 패트릭은 그럴 수 있다.
==
"그런데 내가 당신을 위해 그 진실을 무너뜨려줄게." 클리퍼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는 맥주를 병째로 마시고 있었다. 그는 진보다는 맥주가 자신에게 더 이롭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나가기를 원했다는 건 절대적인 사실이야.
그런데 안에 있기를, 안에 남아 있기를 원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지.
난 당신과 부부로 지내기를 원했고 지금도 원해. 당신과 부부로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고 지금도 참을 수 없어. 그건 정태적인 모순이야."
“끔찍한 상태 같군요." 로즈가 말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냥 이게 중년의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뿐이지."
"아, 그건 아마 지나친 단순화였을 거예요." 로즈가 말했다.
그렇긴 해도, 라고 운을 떼며 그녀는 그때까지의 분별있고 현실적이고 시골 티가 나는 분위기를 유지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들은 온통 클리퍼드에 대한 얘기만 하고 있다.
클리퍼드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클리퍼드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스튜디오가 필요한가, 휴가가 필요한가, 혼자 유럽에 다녀올 필요가 있는가?
로즈는 물었다. 도대체 왜 그는 조슬린이 자신의 안위를 끊임없이 신경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슬린은 그의 어머니가 아니다.
“그리고 그건 네 잘못이야." 그녀는 조슬린에게 말했다.
"클리퍼드에게 행동을 하든가 닥치든가 하라고 말하지 않은 건.
네 남편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는 상관없어. 나가, 아니면 닥쳐.
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것뿐이야. 닥쳐요, 아니면 나가요."
그녀는 클리퍼드에게 퉁명스러운 말투를 꾸며내며 말했다.
"미안하네요, 섬세하지 못해서. 아니면 너무 호전적으로 솔직해서.”
그녀는 자신의 말이 호전적으로 들리더라도 해될 것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해가 될 수 있는 것은 점잔 빼고 무관심한 태도였다.
지금처럼 말하는 것은 그녀가 두 사람의 진정한 친구이며 그들을 진지하게 여긴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는 그러했다, 어느 정도까지는.
"로즈 말이 맞아, 이 씨발 개새끼야.." 조슬린이 시험삼아 말했다. "닥쳐, 아니면 나가”
==
그 괴로움. 그건 무엇이었을까? 모두 낭비였을 뿐,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너무도 불미스러운 슬픔. 짓밟힌 자존심과 웃음거리가 된 환상.
마치 망치를 들고 의도적으로 제 엄지발가락을 박살낸 것과 같았다.
그것이 때로 그녀가 하는 생각이다.
다른 때 드는 생각은, 그것은 꼭 필요한 사건이었다는 것, 파괴와 변화의 시작이었으며, 패트릭의 집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있는곳에 오게 한 과정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으레 그러하듯, 인생은 작은 효과를 위해 엄청난 소동을 피우는 법이다.
==
다음날 아침 로즈는 조슬린과 클리퍼드가 깨기 전에 집을 나와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가야 했다.
그녀는 탐색적인 굶주림을 느끼며 남자들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한동안 자신을 놓아주었던 그 차갑고 아픈 욕구. 그녀는 치미는 분노를 느꼈다.
클리퍼드와 조슬린에게 화가 났다.
그들이 그녀를 놀리고 속였다고, 그 일이 없었다면 의식하지 못했을 확연한 결핍을 보게 했다고 느꼈다.
그들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은 로즈는 그들의 이기심, 둔감함,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 편지가 머릿속에서 만족스럽게 완성될 무렵, 그녀는 시골로 돌아왔고 마음은 진정되어 있었다. 편지는 쓰지 않기로 했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계속 클리퍼드와 조슬린의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인생의 그 시기에 가끔은 그런 친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아침이 되자 애나는 발랄해졌다.
모두 괜찮다고, 집에 남고 싶다고 말했다.
아이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계속 함께 지내기를 원했다.
애나는 길을 걸어가다 중간에 뒤돌아서서 부모를 향해 손을 흔들며 날카롭게 외쳤다.
"이혼 축하해!”
==
그들은 동전을 세려 했으나 자꾸만 셈이 엉겼다.
대신 그들은 동전을 가지고 놀면서, 동전을 손가락 사이로 보란듯이 떨어뜨렸다.
늦은 밤, 산등성이의 빌린 집 부엌에서 아무 생각 없이 흥겨운 시간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터진 돈복.
상실과 행운의 연속.
그녀가 과거나 미래에, 사랑에, 혹은 그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때,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애나도 똑같이 느끼기를 바랐다.
==
점박이 물고기가 먼저 죽었고, 그다음으로 주황색 물고기가 죽었다.
애나도 로즈도 울워스에 다시 가서 검은색 물고기의 친구를 찾아주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검은색 물고기가 딱히 친구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불룩한 몸과 튀어나온 눈에 심술 궂으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물고기는 어항 전체를 홀로 누비고 다녔다.
애나는 로즈에게 자기가 간 뒤에 물고기를 변기에 넣고 흘려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로즈는 약속했고, 토론토로 떠나기 전에 어항을 들고 도러시의 집으로 가서 친구에게 반기지도 않는 선물을 떠안겼다. 도러시는 상냥하게 물고기를 받아 들고서 시애틀에 있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붙여주겠노라고 했고, 떠나는 로즈를 축복해주었다.
애나는 패트릭과 엘리자베스의 집에 가서 살았다. 연극과 발레 교습도 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특기를 길러주어야 하고 늘 바쁘게 돌려야 한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아이에게 원래 있던 네 모퉁이 기둥 침대를 주었다.
엘리자베스가 그 침대에 캐노피와 침대보를 만들어주었고, 애나에게 원피스 잠옷과 그에 어울리는 모자도 지어주었다.
그들은 애나에게 새끼 고양이를 사주었고, 침대 위의 꽃무늬 가득한 침구 한가운데에서 고양이와 함께 조신하고 흡족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아이의 사진을 찍어 로즈에게 보내주었다.
==
그때 그녀는 이 카페에 들어 오면서 사이먼에 대한 터무니없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를 만날지도 모르는 무대로만 보였던 세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침식사를 하자 졸음 이 밀려와 모텔에 들어가야 했다.
거기에서 옷을 입은 채로 해가 들이치는 창문에 커튼도 치지 않고 잠에 빠져들었는데, 그 일련의 과정이 시작되기 전의 풍성하도록 명료한 삼십 분 동안 그녀는 생각했다.
사랑은 세상을 지워버린다고, 사랑이 잘되어 갈 때만이 아니라 망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라고. 놀라울 것도 없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말 놀라운 것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아이스크림 접시처럼 두껍고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달아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실망, 상실, 파경만이 아니며 그와 정반대되는 것, 즉 사랑의 축복과 충격, 그 눈부신 변화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 것들이 안전하다 해도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둘 중 어떤 경우라도 결국엔 뭔가를, 자신만의 균형추이건 진실성의 작고 메마른 알맹이이건,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
"나 기억 안 나죠?" 여자가 말했고, 실제로 로즈는 그 여자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자 여자는 킹스턴에 대해, 파티를 열었던 커플에 대해, 심지어 로즈가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침내 로즈는 그 여자가 자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 다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외모가 상당히 달라 보였다.
값비싼 베이지색 바지 정장을 입고 베이지색과 흰색이 섞인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여자는 예전처럼 앞머리를 내리고 지저분하며 깡마르고 반항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가 남편을 소개하자 그는 로즈를 보고 툴툴거렸다.
마치 자기가 그녀를 보고 법석을 떨 거라고 기대한다면 착각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가 다른 곳으로 가자 여자가 말했다.
"불쌍한 사이먼, 그 사람 죽은 거 알죠?”
==
"췌장암이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스카프를 좀더 맘에 들게 고쳐 쓰려고 얼굴을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돌렸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교활한 목소리라고 로즈는 생각했다.
"사이먼을 얼마나 잘 아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여자가 말했다.
자기가 그를 얼마나 잘 알았는지 이쪽에서 의문을 품게 하려는 말일까?
저 교활한 태도는 승리의 확인일 뿐만 아니라 도움의 요청일 수도 있다.
저 여자는 불쌍해할지언정 신뢰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로즈는 그 여자에게 들은 말을 생각하기보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슬픈 일이에요." 여자는 턱을 안으로 밀어넣어 스카프에 매듭을 지으며, 부쩍 사무적으로 변한 말투로 말했다. "슬픈 일이죠. 오랫동안 병을 앓았거든요.”
누군가가 로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촬영 현장으로 돌아 가야 했다.
젊은 여자는 바다에 몸을 던지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일은 언제나 일어날 듯 말 듯 하다가, 매력 없고 지엽적인 인물들에게만 가끔 일어나고 끝났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예측 가능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고, 줄거리에 의심의 여지를 남기는 초점의 이동으로부터, 새로운 판단과 해법을 요구하면서 온당치 않고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창문을 열어젖히는 어긋남으로부터 자신들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사이먼의 죽음은 로즈에게 그런 어긋남으로 다가왔다.
터무니없었다, 부당했다, 그런 정보가 뭉텅 빠져버렸다는 것은.
로즈가 이 나이를 먹고도 오로지 자신만이 아무런 권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
로즈는 물론 네시 이후까지 남아야 했다.
미스 해티가 코바늘 뜨개질을 하는 동안 로즈는 씩씩거리며 시를 적었다.
베껴 쓴 시를 책상으로 가져가자 미스 해티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 했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 로즈에게 평생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전에도 단조로운 징소리처럼 자주 귓전을 울리던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 말에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제야 미스 해티가 가학적인 선생이 아 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하는 그 말을 수업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는 삼갔던 것이다.
미스 해티는 로즈에게 앙심을 품지 않았다.
시를 외웠다는 로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므로, 앙갚음으로 야단을 친 것도 아니었다.
미스 해티는 여기에서 가르치고자 한 교훈을 그 어떤 시보다도 중시했고 로즈가 그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미스 해티 외에도 꽤 많은 것 같았다.
==
“어떤데요? 술에 취해 있어요?”
"그렇더라도 구분이 안 될 거다. 어쨌거나 흉내내고 다니는 건 똑같거든. 근래에 이사온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는 인물을 흉내낼 때가 절반은 되는데, 그들은 누구 흉내를 내는지 모르니까 그냥 랠프가 바보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밀턴 호머처럼요?
"맞아. 그 사람들이 그게 밀턴 호머 흉내라는 걸 어떻게 알 것이며, 또 밀턴 호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알겠니? 그 사람들은 모르지. 랠프는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몰라.
너무 밀턴 호머처럼 돼버려서 일자리도 얻지 못한 거야.”
==
로즈는 멈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다.
다른 곳에서라면 재미있고 친밀하며 별 뜻도 없이 대놓고 교태를 부린다고 여겨질 만한 태도로 말을 했다.
랠프 길레스피는 유심히 들었고 심지어 반기는 것 같기도 했지만 별 반응은 보이지 않았
다. 로즈는 말하는 내내 랠프가 그녀에게 원하는 말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는 분명 무언가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보고 소년처럼 수줍어하고 환심을 구한다고 느꼈던 첫인상은 수정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의 껍데기였다. 그 껍데기 아래에서 그는 자족적이었고 당혹감 속에서 사는 삶을 받아들였으며 어쩌면 긍지를 느끼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그가 바로 그 차원에서 말을 건네 주길 바랐고 그 자신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가 그들을 막았다.
그러나 뭔가가부족한 듯했던 이 대화를 나중에 떠올렸을 때, 로즈는 두 사람 사이에 우애가, 공감과 용서가 흘렀다고, 비록 분명 누구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이 물결이 되어 흘렀다고 회상했다.
그녀가 늘 떨쳐내지 못했던 이상한 수치심이 누그러진 것 같았다.
연기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허튼 것에만 주목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난만 전달했던 건 아니 었을까, 항상 그 이상의 어떤 것, 섬세한 결이나 깊이나 빛 등이 있는데 자신은 그것을 포착하지 못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은 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비단 연기와 관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때로는 실수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랠프 길레스피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처럼 강렬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랠프에 대해 생각할 때는 자신의 실수들이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그녀 역시 그 시대가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램프에 대한 느낌이 단순한 성적 호기심이나 정감이 아닌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번역을 통해야만 말해질 수 있는 감정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 감정들은 번역을 통해야만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번역은 의심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험하기도 하고.
그런 이유로 로즈는 아기들에게 의식을 베풀거나 그네 위에서 악마적인 행복감을 드러내던 밀턴 호머를 회상했을 때 브라이언과 피비에게 랠프 길레스피에 대해 더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아직도 핸래티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플로는 선물을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로즈에게 칠 년 구독권을 선물했었다.
그러면서 지극히 그녀답게도, 그 신문은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 만드는 것이니 가치 있는 읽을거리는 전혀 없을 거라고 말했다.
평상시 로즈는 신문을 재빨리 넘겨본 뒤 연소실에 넣었다.
하지만 언젠가 1면에 나온 랠프에 대한 기사는 읽었다.
전역 해군 사망
전역한 해군 하사관 랠프 길레스피 씨가 지난 토요일 밤에 재향군인회관에서 치명적인 두부 손상을 당했다. 본인 외에 사고에 연루된 사람은 없었으며, 길레스피 씨의 시신은 불행 히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 지하실 문을 출구로 착각하여 중심을 잃은 것이 원인이라고 파악된다. 해군 복무중 발생한 상해로 인해 부분적으로 장애를 입은 상태였기에 치 명적인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다.
신문은 아직 생존해 있는 랠프의 양친과 출가한 누이의 이름도 실었다.
장례식은 재향군인회관이 담당할 예정이었다.
로즈는 이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고이 간직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기뻤다.
물론 이야기 소재가 부족하다는 점이 고결한 억제만큼이나 큰 침묵의 요인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녀는 랠프 길레스피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여태 사랑했던 남자들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느꼈다는 것, 자신의 자리 바로 옆 칸에 존재한다고 느꼈다는 것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