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요소
본 문: 막 1:35-39
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몹시 가물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어느 정도인지 실감을 할 수가 없다. 시골
같으면 우물이 마르고 시내물 줄기가 줄어들면 '아 몹시 가물구나 !'하고 느낄터
인데 수도물은 여전히 잘 나오고 먹고 사는데 별반 어려움이 없어서인지 그렇게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 기쁜 마음으로 이곳에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에게 마르지 않는 시내
시절을 좇아 맺는 열매처럼 은혜가 풍성하게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
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앞길 멀고 험해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 까지는 늘 보호 하시네
지난 주일 저는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다.
늦게 와서 한시간 만 일한 사람을 주인은 후히 대접하였다. 아침부터 일을 한 사
람이 주인을 원망하였다. 어떻게 종일토록 일한 자기들과 같이 할 수 있는가 ?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이 일반적인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먼저 믿은 자
나 늦게 믿은 자에게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
씀을 통하여 뒤늦게 믿은 자의 열심을 칭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여러분
의 열심은 불러주신 그 분의 은혜를 감사하여 행하는 열심인 줄 믿는다.
늘 울어도 그 눈물로 못 갚을 줄 알아 이 몸 밖에 더 없어서 이 몸 드립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신 내용이다.
1. 예수님은 전도하러 가시기 전에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능력의 배후에는 언제나 기도가 있었다. 전도하러 나가기 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가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분이 비록 하나
님의 아들이시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제외하지 않으셨고 하늘 아버지와의 하트 라
인 곧 언제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직통전화를 가동시키신 분이시다.
마가복음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은 기도하는 예수님이시다. 생애 초기 - 본문
35절을 보니 기도하신 방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새벽미명에 기도하셨다. 새벽미명
이란 아직 아침이 되기 전이라는 말이다. 미명/밝기 전 .... 우리 예수님께서 가
지신 새벽기도회의 모습이다. 중기 - 6:46 오병이어 사건이 끝나자 예수님
은 무리를 작별하신 후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종결14:32-42 겟세마네 동산
의 기도/ 십자가 지시기 직전에 가졌던 뜨거운 기도였다.
E.M. 바운즈라는 사람은 기도에 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기도없는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다.
1939년 5월 15일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최 봉석 목사는 신앙이 매우 특출하
신 분이시다. 어느날 사모님이 목사님을 면회 갔더니 최 목사님은 부인을 향하여
'항상 기뻐하라' 하더란다. 이 말을 들은 사모님은 곧 '쉬지말고 기도하라 !' 고
대답을 하였더란다. 이것이 그의 면회의 전부였다. 그들은 신세타령을 하거나 타
협을 하지 않았다.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하나님 나라를 꿈 꾸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말씀하셨고 천국을
사신 분이시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의 제단을 쌓는 이들은 천국생활을
꿈꾸는 자들이며 천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축복을 이미 소유한 사람이다.
새벽기도하는 분이 악을 도모할 수 있을까 ? 이른 새벽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 가는 분이 어떻게 악한 것을 생각하며 죄인의 길을 행할 수 있을까 ?
새벽에 기도하는 사람은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새벽시간에 나아와 기도
하는 소리를 들어 보라. 그들은 영혼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사모하는 사람
들이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란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굽어 살피신다.
(시 34:12-17) 이른 아침에 주의 성전에 나아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
은 진주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이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의 기도보다도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신 주님을 생각하자. 특별히 다른 사
람의 영혼을 위하여 마치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의 그 아름다운
기도를 들어 보라 !
아브라함은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간다는 천사들의 경고를 들은 후 엎드
려 기도하였다. 하나님이여 의인 50 이 있으면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리이
까 ? 기생 라합은 여리고를 정복하려고 찾아 온 정탐군에게 내가 당신들을 선
대한 표를 내라고 주문을 하였다. 라합의 집에는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붉은 줄이 창가에 매달아졌다.
저는 오늘 여러분 집에 언제나 기도의 붉은 줄이 드리워져 있기를 위하여 기
도한다. 영혼을 사모하며 좋은날 보기를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축
복이 크게 임할 줄로 믿는다.
2. 모든 사람들은 주를 찾았다.
그들은 누구인가 ?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일러드린 말씀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주를 찾은 것은 오다가다 들른 것이
아니다. 드라크마를 잃은 여인이 그 동전을 찾듯이 눈에 불을 켜고 열정을 가지
고 찾은 것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
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를 찾아야 한다.
어느 정신병동에서 있었던 사건 한가지.
진료를 위하여 의사가 환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환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의사는 환자 곁으로 다가가 '이 사람아 왜 대답을 않는가 ?'
했더니 자기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제 밤에 자기 이름을 나폴레
온으로 바꾸어 주셨으니 이제는 나폴레온으로 바꿔서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이 환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곁에 있던 다른 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자네 이름을 나폴레온으로 바꾸었다는 말인가 ? 나는 결코 자
네의 이름을 고쳐 준 일이 없네 !'하고는 돌아 눕는 것이었다.
걸리버여행기의 저자인 조나단 스위프트가 어느날 연회에 참석하였을 때 중년
부인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부인은 당대의 명사이며 성직자와 함께 있
음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자꾸만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제가 만일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 보며 나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
되어 있다면 그것이 죄가 되나요 ?' 조나단은 부인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아 아닙니다. 부인 그것이 죄가 될리 있나요 ? 다만 부인 자신의 착각일 뿐입니
다.'라고 대답을 하였다.
자기를 나폴레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자기를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사람
들 모두가 다 착각에 빠져 있다. 자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중년부인처럼 어쩌
면 나는 잘 믿고 있지 ! 나는 잘 하고 있지 !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 다름 아
닌 우리 자신이다. 이것은 다 종교적인 착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찾아야한다. 모
든 사람이 주를 찾듯이 그들 중에 우리도 함께 있어야 한다. '주여 ! 우리가 주
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이것이 잘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이다.
3. 가까운 마을로 가자 !
가까운 마을로 가고자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거기서 전도하기 위함이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38절)
전도는 예수님께서 모범으로 행하신 일이다.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
다고 친히 말씀하셨다. 전도는 우리 성도들에게 맡겨 주신 책임이다. 믿습니까 ?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 !' 하나님의 복음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 전해져야 한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부탁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우리 주님의 크고 위대한 유언이다.
주님의 전도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모범이다.
천국을 소개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할 중요한 일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성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과연 몇사람
이나 천국으로 인도하였던가 ?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
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게 하시리라 약속
하였다. (단 12:3)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이신 원일가족 여러분 !
여러분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는 그의 자녀들인 줄 믿는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주이심을 믿어 의롭게 되신 성도인 줄 믿는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에
게 속한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따라 사는 분들이다.
이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서해 훼리의 사고에 누군가 말하였다고 한다. '안됩니다. 오늘같은 날씨에 무
리한 승선은 위험합니다.' '안됩니다. 이러한 풍랑에는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 아
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그때 만일 순종했더라면 위험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고에는 10 여명의 많은 경제기획원 엘리트들이 희생되었
다. 사정관련 감사업무를 마치고 머리를 식힐겸 함께 내려갔다가 사고를 입었다.
그러나 기획원 직원중 한 사람은 그의 아내가 '여보 주일 날 낚시하러 가는게 아
니에요. 오늘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간곡하게 부탁하기에 따라 가지
않았더니 생명을 지키게 되었다고 한다.
누군가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죄와 죽음의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여기 살 길이 있노라 말해야 한다.
나는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여러분들에게 명한다. 일주일에 하루 한
시간을 온전히 전도하는 일에 힘쓰자.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전도를 위한 기도에 시간을 사용하자 !
전도를 위한 봉사에 몸을 사용하자 !
전도를 위한 헌신에 물질을 사용하자 !
우리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오셨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이 일에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다.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을 따라 가자.
전도자의 자세
성경:막2:1-12
<서론>
오늘 본문은 자신의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하는 한 중풍병자가 친구들에 의하여 예
수님께 인도되어 영육간에 치료받고, 구원받는 감동적인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일 동안 여러 갈릴리 회당을 순회하시면서 전도 하시다가 마침내
가버나움 까지 일르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당도 하시자 그 소문은 삽시간
에 퍼져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집을 찾아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퍼지는
것은 빛을 어둠 속에 감추어 둘수 없는 것과 같았으며, 향기를 봉해 둘수 없는 것
과 같으며, 생명을 가두어 둘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시요, 생명
이시요, 진리 이시기 때문에(요14:6) 예수님의 소재는 알려 질수 밖에 없었으며 사
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을 필요로 하기에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는 언제나 생명과 구원인 전도의 역사가 나타
났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중풍병자는 그를 운반해온 사람들
의 섬김과 믿음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전도를 어떤
자세로 해야 될 것인가를 잘 보여 주는 본문입니다
1.불신자는 모두 다 전도의 대상입니다.(불신자=영적중풍병자)(3절)
본문 3절에서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치심과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예
수님의 능력이 갈릴리 전지역에 걸쳐 베풀어지고 그 소문은 점점 널리 전파 되어나
갔습니다. 이같은 예수님의 소문을 몰고 마침내 가버나움에 당도 하시니 호기심과
관심 많은 수많은 사람들과 병자들이 몰려 온 곳입니다.
이때에 한 중풍 병자가 네 사람의 친구들로부터 들려온 것입니다. 중풍병은 암처
럼 치명적인 병도 아니며, 문둥병 처럼 더러운 병도 아니고, 콜레라처럼 급사하는
병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자기 혼자로서는 마음대
로 활동할 수가 없으며, 심한 경우에는 전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병입니다.
여기서 중풍병자란? 모든 인생들의 실상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의 역활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부분적인 것이며, 그것 또한 완벽
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항상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
니다. 더구나, 인간은 스스로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
님과의 교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서 만이 인생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
스도도 우리가 마음대로 만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성령님과 전도자의 도움
이 없이는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죄는 지금까지도 고통과 질병과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의 핵심인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죄 문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 옴으로서 만이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아 올 수 없습
니다. 마치 반신불수 인간인 중풍병자의 모습과 흡사한 것입니다. 주위 사람의 도
움이 있어야만 합니다. 전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는
전도자의 도움이 있을때 성령께서 전도자를 통하여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모든 현대인들은 세상일로 분주하게 뛰어 다니며,
활동 하지마는 사실, 그 영혼은 죽음을 향해 가고있는 반신불수 중풍병자나 다름없
습니다. 영육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이 땅의 생활이 생명력있는 참 삶이 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지위고하, 남녀노소, 빈부귀천
을 무론하고 육적으로는 성공하고 있을지 모르나 영적으로는 모두 중증환자로서 반
드시 그리스도께로 들려와야 할 중풍병 환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능력이 없는 중증환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한사람이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전도 혹은 선교라고 일컫을수
있습니다. 나를 죄악의 중병 가운데서 건지시도록 사랑의 전도자들을 보내어 주셨
던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빚을 갚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러므로 쉬고있는 전도의 사명을
다시 일깨웁시다. 전도의 대상을 다시 정하고 힘든 대상도 재 도전의 각오를 새롭
게 하십시다.
2.관심을 통해서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4절)
복음을 통하여 한 영혼을 구원 시키려면 맨 먼저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
이 있어야 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일수록 자기자신 만을 위하여 살지 않고 타인의 축복을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처럼 환자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께 인도하게 되는 전도의 문이 열
리게 되었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불쌍한 친구를 도울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깊은
사랑과 연민의 관심이 구원으로 인도 하게되는 시작이 됩니다.
일찌기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백성이된 우리들이 전혀 어떠한 도움도 없이 스
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님과 다
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 앞에 다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갖 구원과 생명의 특권을 누리고 있으면서 개구리 올챙이 시절
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복음의 빛이 가리워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
기는 것을 우리 자신의 위안과 평안 만을 구하며, 자신 만의 보호와 도움을 추구하
는 이기심을 버리지 않는 한은 영적 중풍 병으로 죽음 만을 무료하게 소망없이 기
다리고 있는 불쌍한 자들을 더욱더 죽음의 어두운 구석으로 밀어 넣어버리고 마는
매정하기 이를데 없는 사람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완전한 자도 의인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죄인을 필요로하
며, 앞 길을 전혀 내다볼 수 없는 소경을 필요로합니다.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문
둥병자들을 요구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반신불수 인생인 중풍병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회 자체의 안락 만을 추구하는데 열중하지 말고 세
상을 구원하는데 더욱더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을 세상의 출
세나 잘되는 일 보다도 복음 전도에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의 우선 순위가
무었인가에 따라서 복음적일 수도 있으며, 복음을 거스리는 거침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흥회나 기도원에서 열리는 집회 등에서 강사 목사님께서 '질병으로 고생하는 자
들이 질병에서 놓임 받기를 축원합니다!'하면 성도들은 일제히 '목청 돋우워 '아멘
!'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사업의 문이 열려 쏟아 부으시는 물질의 부요를 누리
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하면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제히 '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모두 머리가되며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하면 '에멘! 아멘!'을 연발하며 간절히 그 축복을 사모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사 목사님이 헌금에 대한 광고를 하고 지금 이시간 최고
의 정성으로 헌금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하면 그렇게 우렁차고 갈급해 하던 아
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찬물을 끼얹은듯 입에서 아멘이 멈추어지고 마는 것을 보
았습니다. 강사 목사님의 책망과 재촉에 못이겨 억지 아멘을 하게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 학생들도 '여러분이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게되
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했더니,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 하였습니
다. 그런데, 이어서 '여러분이 학교에 가서 열심히 친구들을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
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했더니 아멘 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변하
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무었을 의미하는 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복
에 대한 개념이 너무도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해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입으로 아멘
잘하고 마음으로 쉽게 믿어서 나의 계산에 맞아 떨어지는 복을 축복으로 여기는 저
의가 그 바탕 깊은 곳에 깔려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계산에 손해 나고
피곤해 지고 고통과 어려움이 생기는 복이라면 거져 준다고 하더라도 다시 재고해
보고 추춤거리다가 꽁무니를 감추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일류학교를 나오는 것, 좋은 결혼을 하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것,죽
을 병에서 낫는 것, 자녀들이 잘되는 것, 유명해 지는 것, 오래 사는 것 등을 복이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와같은 것들이 나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도 이러한 복들을 싫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좋아 하실 것입
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서운 함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함정입니까? 껍질
을 가지고 알맹이라고 착각하고 마는 함정입니다. 장가 잘가고 좋은 신랑을 만나며
일류대학 가며, 오래살며, 유명해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리고 나아가 교인수
가 늘어나고 교회 건물을 증축하며, 교회 기도원을 짖고, 교회 묘지를 구입하는 등
의 일들은 모두 복 그 자체가 아니라 진정한 복의 외형적인 형상에 불과한 것입니
다. 즉 복의 알맹이 씨로 부터 파생되어 나온 열매요, 부산물이지 복 그 자체는 아
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었이 진정한 복이며, 알맹이 복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께 인정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파생되어진 복이 진정한 복의 열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 즉 알맹이 복이란 무었일까요
그것은 마5장의 예수님의 팔복에서 말씀하신 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음이 청결
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복을 받
을 수 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소개하신 복에는 건강하며, 승리하며, 출세하며,
만사형통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며, 바보같
이 당하기만 하며, 욕을 먹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이같은 자세가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형통한 자가 되는 나타나는 복을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
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며 만족을 드리면서 세상의 복
을 받았느냐? 하나님을 제쳐 놓고 자신의 수단과 방법과 생각으로 성취한 복인지를
구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기뻐시게 해드리지 못하면서도
온갖 세상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
님을 기뻐시게 하는 복인지 마귀를 유리하게 하는 복인지는 인간의 눈으로 그냥 보
아서 알 수 없습니다.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과정을 밟고서 얻은 축복인지 주님의 팔복의 핵심이 빠진 축복인지를 살펴 볼때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인지 인간으로 말미암은 축복인지를 검사할 수 있는 것입
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고하고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팔복의 복음적
인 축복이 아닌 복은 공중 누각과 같은 축복이요, 솜사탕과 같이 쉽게 없어질 복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으로 부터 인정 받으며 심령의 평안과
만족이 따르는 축복인 것입니다.
EX> 일본 이와꾸니 에서 바다가 오염되어 생선을 못먹게 되었습니다. 오염의 근원
지인 동양 방직 회사에서는 이 오염된 생선을 어부들에게서 무제한으로 사서 버리
기로 했습니다. 어부들은 처음에는 돈 받는 재미로 열심히 생선을 잡았습니다. 그
런데 그것이 얼마 안가서 모든 어부들이 고기잡이 하는 일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었인가 하면 어부들이 처음에는 생선을 돈으로 환산만 하면 만족되리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그렇지를 못했다는데 원인이 있었습니다. 결국, 어부들
은 그들의 보람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잡은 생선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
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부들이 돈버는 문제는 이상이
없었지만 그들의 고기를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점차 그같은 일에
보람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보람은 자기 혼자 복받아 만사형통 평안하는 것에 있지 않습
니다. 교회의 보람은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유복하게
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지 않고 인정해 주시지 않는 복이라면 허무
한 축복으로 끝나고 말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복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복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이라면 영원히 보람된 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면 하나님을 기뻐시게 해드리는 보람된 복이 될수 있
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 가게 될때에 하나님을 기뻐시게 해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이 세상적으로 볼때에는 그렇게 드러나는 축복이라고
는 하나도 없고 모두 무기력하고 당하기만 하는 하는 고생 이라고 여겨 질지 모르
나 그것이 복음을 위해 사는 자의 삶이기에 가장 복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찌하던지 한 사람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게 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을 크게 기뻐시게 해드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안락을 추구 하는데 열중하지 말고 세상을 구원하는데 더욱 힘써야 할 것입
니다. 다시말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
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고난과 고통을 통과한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좋은것
들을 주시되 백배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교회에 김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을 모시고 이사 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예날 판자촌 시절을 기억하며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집사님은 옛날
에 비하여 너무도 축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히 생긴 기적이 아
니라 김집사님의 한평생 삶의 결과였습니다. 집사님은 항상 가난했습니다. 남들처
큰 것을 달라고 해본적도 없고 그저 우리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
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집사님은 항상 애통해 했습니다. 교회건축을 위해 적은 적금이나마 드리려고 품
팔이를 하시며 몸부림치셨고, 목사님을 몰아내려는 세력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하
나님께 기도할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집사님은 항상 온유하였습니다. 어느날 이라도 그 얼굴에 그늘진 적이 없었
습니다. 그리고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셨습니다. 남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하
시면서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너무도 목말라 하는 표정은 어미 새가 물어온 먹이를
받아 먹으려는 새끼새들과도 같았습니다.
집사님은 항상 긍휼에 흘러 넘쳤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닮아 가려는 듯 그에게 도
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에게 빈 손으로 보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없으면
남에게 빌려서라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집사님은 항상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았습니다. 교회 생활에서 성경에서 이탈된것
이 있으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무력으로 저항하는 것은 아니었습니
다. 그러나, 교회의 세력자들로부터 항상 무거운 핍박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수년
이 지나 김집사님은 권사님이 되셨고, 남편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남편이 투표에
서 피택되었는데도 장로 장립을 시키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 교회 앞에 세우셨습니다. 그후, 육신적으로도 너
무나 큰 축복을 주셨고, 자녀들도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 될만큼 믿음도 훌륭하고
사회적으로도 크게 쓰임받고, 사위감 며느리감도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 만이 복이라고 고집하던 무식한 여종은 신앙의 싸움
에서 결국, 하나님의 팔복을 통한 백배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적인 축복입니다. 복음적인 축복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영혼에 대한 관심은 구하게하며, 찾게 만들며, 두드리게 해 줍니다. 그러므
로 기도는 곧 관심입니다. 다시말해, 기도하는 자에게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내부
모 형제 친척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정말 있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
도해야 할 것입 니다. 그 기도의 관심이 전도의 문을 열어 놓게 될 것입니다.
3.섬기는 행동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힙니다.(3-5절)
중풍병자의 4 친구들은 친구의 불쌍한 처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표시하는 것
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친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었 인지를 분명히 알
고 있었으며, 그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복음전파는 말과 생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희생
적으로 행동하며 섬김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구
원을 위하여 하늘 보좌에 앉아 머물러 말로만으로 하시지 않고 친히 인간의 몸으로
내려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며, 섬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전도의 열매를 원한다면 주님처럼 낮아지고, 희생하며, 섬기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
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하는 것이 생각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본문 4절에서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에 지붕을 뚫
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은 상을 달아내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일을 해결해 보려고 했을때 실제적인 난관과 어려움이 가로 막고 섰
습니다. 이것은 단지 동정을 베푸는 그 이상의 요구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도정
하며 관심을 갖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
다. 오히려 수많은 어려움들이 기다리기가 일쑤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성
도들이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전도
의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나기 까지는 수많은 난관과 고통과 부르짖음과 눈물과 땀
이라는 섬김의 과정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히기 위해서 다가오는 여러가지 난관
과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 신실한 인내로 섬김으로 전도의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전도는 사탄의 가
장 싫어하는 일이기에 여러가지 방해의 난관이 있을 수 있음을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은 사탄과의 싸움이요, 전투입
니다. 싸움과 전투가 쉬울리가 없습니다. 어려움과 난관이 다가올때에 그것을 이상
하게 여기고 사기가 떨어져 쉽게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군사된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단의 시험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신실성을
시험하시며, 총명을 일깨워 주심으로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케 하시며, 능력있
는 성도로 성장 시키시고자 하시는 더 깊은 섭리가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전도의 난관은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중풍병자의 친구
들은 반드시 예수님께선 친구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에 흔들리지 않고 난관의 장벽 앞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고침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어떠한 난관과 장
애가 나타나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주님께 나
아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힘들고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친다고 할지라도 신실한 인
내로 전도 대상자를 섬기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주님께서 구원
하실 수 있으며 구원 받게 되리라고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말고 굳게 믿으시기 바
랍니다.
그리고 중풍병자의 믿음도 있었겠지만 친구들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한 영혼을 구
원받게 만들었으며 살려 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불
쌍한 한 영혼을 살려 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쉽게 포기해 버리는 이 나약한
믿음 때문에 우리의 주변에 수많은 장기 결석자들이 세상의 늪에서 헤어 나올 줄을
모르고 있으며, 우리의 포기 잘하는 인내하지 못하는 믿음 때문에 전도의 열매를
맺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반드시 이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
음으로 생명을 구원하고 살려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일 평생을 영혼 구원의사역을 위하
여 충성해야 할 사명을 주님께 받은 자들 입니다. 우리가 선 위치에서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학교에서 이웃에서 가정에서 복음전도의 열매를 맺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불신자들을 반드시 전도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기도할 뿐 아니라 생각하며, 기도한 것을 희생이 되더라도 섬기는 자세로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 있는 믿음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것입니
다.
죄를 사하는 권세자
성 경: 막2:1-12
<서론>
우리들이 복음서들을 살펴볼때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통해 자신의 신분과 인격을
계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신지를 여러 계
기들을 통해 나타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데려온 친구들의 행동을 계기로 하여
예수님이 자기자신을 계시한 사건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요 이 땅에서도 그것을 행사 하신 분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중심은 중풍병자의 믿음이거나 친구들의 믿음
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 말씀의 중심은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과 죄사하시는 권세
가 그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권세를 살펴보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한 중풍병자의 치료 사건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죄사하는 권세를 밝히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에 집중하기 보다는 중풍병자
의 고침받은 것이나, 네 친구들의 믿음에 강조를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문의 말씀을 옳게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마가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의 권세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목적에 따른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합니다.
<본론>
1.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충분한 믿음을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여기의 믿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수님은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은 아닙니다. 더우기 '죄사함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은 더욱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라고 했으므로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온것은 예수님의 이적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온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도 많이 쫓아 내셨습니
다. 그리고 이에대한 소문은 이미 온 지방에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믿음은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치료 하시는 분, 귀신을 쫓아 내
시는 분 정도로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을 주신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 는 말씀은 그들의 상황과 상태에서의 믿
음입니다. 더우기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온전한 지식의 믿음이 아니었습니
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에 새로운 인식과 지식을 더 넣어주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어설 자리도 없이 많이 모인 인파들 앞에서 자신의 또다른 권
세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보신 저희의 믿음은 '아직 부정확한 믿음이요 불 충분한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사실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려 하
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새로운 사실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신의 죄 사하는 권세" 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새롭게 드러내신 사실은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의 소유자' 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땅에서 즉시 죄를 사하는 절대적인 권
세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의 가장 중요한 권세인 죄 용서의 권세자 이심
을 밝히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믿는것은 대단히 중요한 믿음입니
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의 믿음도 불충분한 경우가 흔합니다.
더우기 초신자의 경우 예수님의 죄사하시는 권세 보다는 '병고침이나 세상적 복
을 받으려'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흔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자되게 하시는 분, 삶에 평안을 주시는 분, 복 주시는 분,
병고치는 분, 귀신 쫓아 주시는 분, 만사형통케 하시는 분' 등으로 알아 불충분
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죄사해주시는 분으로 획실히 인식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을 봅니
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절에 다니는것 대신 교회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과 훌륭한 수양을 닦는 듯이 교회 출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인됨과 죄사함 받을 필요성에 대해선 무관심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충분한 믿음은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그러한 불충분한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의
죄사하는 권세를 계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주시는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하시는 권세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다
면 오늘 우리는 죄용서의 권세자이신 예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죄사
함의 권세자이신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죄사함의 은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죄사하는 권세를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증명해 보여주셨읍
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있는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
신 이 말씀은 즉각 그 자리에 있었던 서기관들에게 문제 의식과 충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죄사함을 선언' 한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외에는 누가 능
히 죄를 사하겠느냐"
사실 서기관들의 말은 사실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사해 주실 분
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속으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속으로 의논했다'는 것은 '각자의 자기 마음속에 생각했던 것을 의
미' 합니다.
그들은 서로 주고 받고 한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마음 속으로 스스로 논의하고
추론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가지 결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예수는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예수는 지금 사
람들에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중풍병자를 고칠 수 없으니까 '죄사함 받았다'고 둘러대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의 사실은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풍병자가 일어나는 일은 눈으로 직접 확인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쉬운 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쉬운편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
는 죄사함의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관들은 예수가 사기를 치고있다는 것으로 심중을 굳혔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기관들이 이러한 결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이유는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심중의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
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물론 서기관들의 결론은 눈으로 볼 수없는 것, 확인 할 수없는 것이 쉬워 보였습
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의 결론입니다.
사실 서기관들의 생각은 일리가 있습니다.
눈으로 확인 할 수있는 것보다 할 수없는 것이 사람을 속이고자 하는 이사람에겐
쉽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의 생각은 '예수는 지금 사람을 속이고자 쉬운것을 말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눈으로 즉시 확인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후속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사함이 공론이 아닌 사실임을 보이셨습니다.
자신의 죄사함의 선포가 실재상황임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풍병자를 온전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하노라' 그리고
즉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러자 그가 곧 일어나 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 말씀 한 마디에 중풍변자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사죄 권세가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죄용서는 허튼소리가 아닌 실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죄사하시는 분임을 확실히 계시하고 증명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의 독백대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시기 위해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하려
함이라" 고 하신 직후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은 이미 소문난대로 여러병자를 고치
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들과는 그 목적이 다릅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 자신께서는 단순히 병자를 고치시는 의원이나 귀신 추방자가
아니라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심입니다.
결국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다 놀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기 상을 번쩍
들고 갔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서기관들도 입을 다물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걸어갔으니 예수님의 주장이 사실임이 증명된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사하는 권세자요 하나님이심이 증명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놀람은 단순히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셨다는 사실에 놀랐다
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여러 병자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
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특별히 더욱 놀라게 된 것은 다른데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람이 죄사함을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가 죄사함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것에 놀랐습니
다.
그리고 이런 기이한 일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역에 놀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우리들은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죄사해 주시는 분임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용서나 죄사함에 대한 확신은 매우 부족한 것이 보통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죄를 자
백하고 회개 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하여 용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죄의
용서를 반복 요구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과거에 이미 용서를 구하고 용서 받은
것들을 다시 되풀이하여 용서를 구하기 일쑤입니다.
특히 부흥회를 한다거나 회개기도를 한다고 하면 그러한 짓을 반복합니다.
우리가 방금 전에 용서를 구하여 용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 다시 생각
나면 또 다시 용서를 간구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되 다시는 기억지 않는 방식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반복해서 또 구하고 또 구하는 어리석
음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죄사하는 권세자 이심을 확신하는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
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어떤 친구의 집에서 그집 녹음기가 맘에 들어 훔쳤다고 합시
다. 그런데 양심의 가책이 되어 그것을 돌려 주었습니다. 돌려주면서 "내가 잘못
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 친구는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길거리에서 만날때마다 그때의 죄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만날
때 마다 한다는 말이 "친구여 나를 용서해 주게 전에 녹음기 훔친 죄를 말일세"
라고 말한다면 그 친구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나를 '좀 미쳤다거나 대
단히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또는 "이 친구가 나를 이렇게도 못 믿나?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라고
도리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
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미 용서를 구한 과거의 죄를 자꾸 반복한다면 그
것은 불신앙이거나 매우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욕
되게 하는 것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분임을 확신한다면 그 분의 용서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용서하심에 감사하는 신앙생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결론>
성도여러분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사하시는 권세자 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죄를 사하시고 모
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죄사함의 확신을 가지십시요.
하나님의 용서를 믿으십시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확실히 없애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백한 무슨 죄든지 잊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 권세자이신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확신 하십시요
믿으십시요 !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우리 죄를 자백하여
용서의 기쁨과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시기 원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성경:막5:25
(서 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
이 많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나는 체험이 없으면
인생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기독교는 종교나 수
양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훈련도 역시 아니다.
죽으셨다 부활하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마음속에 적극
초청하여 모셔들이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그
리스도와 동행하는데 밟아야 할 단계를 살펴보겠다.
(본 론)
1. 예수님을 만나고 생명얻기를 열망하여야 한다.
1) 본문엔 삶을 열망하는 한 비참한 여인의 상황이 기록.
(1) 12년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었다.
(2) 많은 의원에게 찾아다녔다.-재산 탕진
(3) 수많은 고통을 참았다-당시 혈루병을 앓는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혀 정신적 고통이 더욱심함.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삶에 대한 줄기찬 의욕을 버리지않음
2) 예수님은 삶을 열망하는 자를 만나 주신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사렙다 과부와 수
리아 사람 (눅4:25-27) 또한 본문의 혈루증 앓는 여인의
공통점은 그들이 주님을 갈급히 찾고 적극적으로 생명을
얻기 원하였다는 점이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또 이런 사람과 만나 주신다.
2. 생명의 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 주를 아는 지식.
1) 혈루병을 앓는 여인에게도 누군가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 전하여 주었다.
2)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접하자. 마음속에 믿음이 생겼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롬10:14-15, 롬 10:17).
3. 신비한 실체 즉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가?
1) 믿음은 이해가 아니다. 2) 믿음은 희망이 아니다.
3) 믿음은 언제나 현재이다 - 장래일이 아님.
4. 믿음의 출발점을 가져야 한다(믿음을 행동화하는 출발점).
1)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2) 그 이름을 바꾼 아브라함.
(결론):혈루병을 앓는 여인은 삶을 열망했고 주님에 관한 말씀
을 듣고 믿음의 바탕을 마련하였으며, 또한 간구하여 하나
님께로 부터 믿음을 얻었고 믿음을 얻자 곧 실천해서 치료
와 행복과 기적을 얻어 그의 운명이 달라졌다. 우리도 진정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는 삶을 살자.
봉사의 길
구 절 : 막2:1-12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말은 사람들은 혼자 고립되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이웃을 위한 봉사의 생활을 강조하고 있으며 남을 위한 희
생적 삶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남이 잘되면 축하해 주고 남이 잘못되면 안타
깝게 여겨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구경꾼 노릇만 하는가 하
면 심지어는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형제들 간에 우애있고 서로 돕고 사는 것을 볼때 부모님께서 기뻐하
시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도 피조물인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봉사
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시며 그러한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하지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있어서 봉사의 생활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본문을 보면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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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움을 극복하며 그를 위해 봉사함으로써 한 사람의 운명을 변화시
킨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네 친구들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그 비결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봉사생활을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네명의 친구들이 예수님께 중풍병 환자를 데리고 나아온 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
다.
이들이 의심없이 믿었고, 순수하고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이러한 믿
음이야말로 봉사를 위한 기본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친구를 고쳐보겠다고 예수님께 나왔을리도 없고 사람
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을 때 그만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일에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할 줄로 믿고 결
코 포기하기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되자 여러가지 방
법을 생각하다가 옆 계단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리고 지
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으로 중풍병 환자를 침상으로 달아 내렸던 것
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기꺼이 중풍병 환
자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봉사생활을 하려고 할 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
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려움이 쉽게 극복이 됩니다. 우
리는 이러한 경우를 본문에서 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별히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이와같은 불굴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가고자 할 때 앞서
12명의 정탐꾼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그중에 믿음이 부족했던 10명
의 정탐꾼들은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
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민13:28-33)
고 정복 불가능론을 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의 두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
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
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
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
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
워 말라"(민14:7-9) 고 적극적으로 정복 가능론을 주장하였던 것입니
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앞에 장애물이 생기면 뒤로 물러서고 말지만 믿
음의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밥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 주시는 불굴의 믿음으로 봉사생활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봉사생활을 하려면 협동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병자를 누인 침상을 끈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이때
서로의 마음이 하나되지 않아 침상이 기울어지면 그 환자는 그만 바닥
에 떨어져 곤욕을 치루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마음이
되어 조심스럽게 침상을 달아 내렸고 이를 통해 버림받은 인간이 새
삶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두 사람이 누워야 따뜻하고 삼겹줄을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9
전4:11-12) 고 하였습니다. 우리들 혼자서 미약해도 서로 힘을 합치
면 큰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독불장군이 없다라고 하였듯이 피차에
서로 양보하고 양해해서 협동하는 정신이야말로 봉사를 위한 필요 불
가결한 요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각각 키가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게 하신 것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싸우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피
차에 장점을 살려서 협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이 사회
를 위해 봉사하라고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서로 도와주며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여러가지로 봉사할 수 있지만 신앙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봉사는 기도의 봉사이며 기도 중에서도 협동을 필요로 하는
합심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기적의 손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의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18:19에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
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혼자 기도할 때 천을 이기나 둘이서 기도하
면 만을 이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친구들의 합심기도를 받는 것
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나혼자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서로 마음과 뜻
을 같이하고 힘을 모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생활에 앞장서는 여
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봉사생활을 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네명의 친구들이 지붕에 올라가 남의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환자
를 내려 보낼 때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주인을 비롯하
여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쳐다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엿
을것입니다.
그러나 네명의 친구들은 주인이 노발대발하던 사람들이 쳐다보며 수
군거리던 상관하지 아니하고 일을 진행하였습니다.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재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과
협동 그리고 인내심 있는 봉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할지라도 우리는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난관에 부딪
칠 수밖에 없습니다.
에디슨이 백열등을 처음 발명할 때에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
아도 안되자 마지막에는 열흘동안 아예 집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실험
실에서 자고 먹으면서 계속 노력하다가 마지막에 성공하고 말았던 것
입니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할 때 한달간 계속된 망망대해의 항해로 말
미암아 선원 대다수가 돌아갈 것을 주장하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
지만 콜롬버스는 낙심하지 아니하고게속해서 격려하며 항해를 계속한
결과 신대륙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모든 일에 인내가 필요하
지만 특별히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더욱 인내가 필요합니다.
갈6:9,10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
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다
보면 엉뚱하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억울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
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처음 신앙생활 할 때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
고 봉사하다가 얼마 안되어 그만 낙심하여 열심을 잃어버리고 나중에
는 교회까지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며 일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기 십자가
를 지고 끝까지 인내하는 자가 승리와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
므로 선한 일에 낙심치 말고 항상 인내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봉사
생활에 앞장서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이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서로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 되기를 원하십니
다. 그러므로 믿음과 협동과 인내로 하나님의뜻을 이루는 여러분되시
기를 바랍니다.
금식
성경:막2:18-22
<서론>
예수님당시 엄격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을 행하며 지냈습
니다.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도 아마 공식적으로 정해진 중
요한 금식일에 금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금식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나선 자들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에 특별히 열심이 있었던 바리새파 사
람들 이었리라 짐작됩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스스로 죄사하는 권
세를 가졌다고 선포(10절)한 사실이나, 부정한 자로 간주된 죄인들과 함
께 어울려 생활하는 모습(15절)을 보고서 예수님을 핍박하고 제거시키기
로 마음을 굳히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을 힐난
한 것은 금식규례 그자체의 준수 여부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를
기화로 삼아 예수님을 제거할 단서를 찾고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이러한 저의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에 주님의
답변은 단지, 금식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다 궁극적이고도 포괄적인
문제를 거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는 금식에대한 올바른 자세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
고있습니다.
1.금식자체(형식)보다 그 목적과 정신(내용)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18-
20절)
당시 금식하던 바리새인들 대다수가 금식 본래의 의의나 목적보다 오히
려 금식 그자체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습니다.
2.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금식)로가 아니라 은혜로(
믿음) 되어지는 것입니다.<금식보다 은혜가 더중요함>
3.금식은 해야할때와 하지 말아야할 때가 있다.(19-22절)
낡은 종교와 새종교
마가복음 2장 21-22절
예수님께서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두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깁는 이가 없다는 비유입니다.
생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그나포스( )인데 이는 한번도 세탁한 적이 없
는 천을 가리킵니다. 그 새천을 물에 빨아 말리면 줄어듭니다. 그러나 낡은 옷감
이란 거듭거듭 여러번 세탁을 해서 쭈그러질대로 다 쭈그러진 그런 옷감입니다.
그러나 새 옷감은 한번도 세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물에다 담궈서 빨면 쭈그러드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옷감에다가 새 천을 가지고 기워 놓으면 그 다음에
세탁을 할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낡은 옷감은 쭈그러 들지 않는데 새
옷감은 힘이 넘쳐서 쭈그러들기 때문에 결국 낡은 옷감도 버리게 되고 생베 조각
도 버리게 된다고 하는 그런 뜻의 비유인 것입니다.
생베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낡은 옷이
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낡은 종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
운 복음을 옛 낡은 종교인 유대교 의식에 접을 붙이려고 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
도의 싱싱한 복음의 힘에 의해서 감당치 못하므로 허물어 지고 마는 것입니다. 바
리새인들의 교리는 많은 금식과 또 금욕주의적 의식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것은 예
수 그리스도의 새 복음과는 서로 조화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교리들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교리들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며 이
두교리를 접목 시키려고 하면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고 또 이 낡은 종교가 생명력
이 넘치는 새로운 기독교 복음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가죽부대라는
것은 옛날 중동 사람들이 양이나 염소를 잡아가지고 통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에
목 부분 이상을 떼어 내버리고 기름을 빼서 말려서 그것을 항아리 비슷하게 사용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가 낡아서 튼튼하지 못할 경우 거기에다가 새
술을 담는다고 하면 새 술은 발효력이 강하기 때문에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경우에는 터져버리므로 낡은 가죽부대도 버리게 되고
새 술도 쏟아져 버리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바리새인들의 낡은 가르침과는 공존할
수 없다고 하는 교훈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한 복음을 낡고 생명력
이 없는 바리새인들의 전통과 의식이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 의미의 말씀인데 옛
언약이란 새 언약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
교를 어떤 전통적인 종교나 기성종교와 접목을 시키거나 배합하려고 하면 두개 다
파괴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 옷감은
새 옷에만 기울 수가 있는 것이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만 담을 수 있다는 말씀
입니다. 포도주를 수식하는 '새' 라고 하는 형용사는 네오스( )라고 하는 말로
서 전혀 훼손되지 않고 매우 양호함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지금 새로이 시작하는 것으로서 그의 가르침과 그의
나라는 형식과 전통의 종교인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것임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교의 전통과 형식속에 부어 넣으려고 하면 부대
가 터져서 예수님의 복음도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도 쓸모없게 되어 버린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이 낡은 유대교의 전통과 교훈과 의식에 알맞게 변형될 수
도 없는 것이며 또한 그 전통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능가
하는 새로운 질서인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 말하는 금식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
며 이 율법의 계명과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로 낡은 종교와 새 종교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낡은 종교는 유대교를 의미하고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의미하는데 반해서 새 종교
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낡은 종교는 생명력이 없고 전통과 의식에 얽매여 있을 뿐입니다. 낡은
종교는 금식, 할례, 제사, 절기, 구제 등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이행할 뿐이며 생
명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레에 두번씩 금식을 했으나 그것은 마음으로 우러나와
서가 아니라 계명에 얽매여서 억지로 하는 금식이었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지만은
그것 역시 마음에서 우러나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었습니다. 제사
를 지내지 아니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에서 할 수 없이 억지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제사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존경하
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입술로 나를 가까이 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있다"
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성회와 대회와 안식일과 월삭을 지켰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부모님이 생존해 계실 때는 불효를 행하다가 부모님이 세
상을 떠나시면 사람들 체면 때문에 장례를 거판스럽게 하며 제삿날이 돌아오면 효
자인채 제사를 지낸다든지 하는 것과 같이 형식적인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하
나님께서는 그러한 외식적인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신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처럼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성전 뜰만 밟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너희가 성회와 더불
어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성회를 맞이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왔다고 하면서도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리고 악만 행하며 서로 싸우
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다툼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그런 것을 원하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과
저는 마음과 뜻을 모두어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산 예배
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새 종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능
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
음은 사람을 구원해 내는 능력이 그 복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확신하고 믿으며 증거하여 이 복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
어 지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13장 12절에 어떤 사람이 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사람의 시신을 관에다
담아 가지고 상여에 메고 공동묘지를 향하여 가던 도중에 적군인 모압군대가 갑자
기 쳐들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너무 급해서 시신을 장지까지 운구할 수 없
게 되었는데, 마침 길 옆에 엘리사의 무덤이 있어 그 시신이 든 관을 엘리사의 무
덤에다가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엘리사의 무덤에 시신이 닿는 순간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았을 때에 곧 회
생되어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엘리사의 시체를 영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가 있는 것입니
다. 오늘 이 세상에는 육체만 살아 있을 뿐 영혼이 죽어있는 시신과 같은 그런 사
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의 심령이 예수 그
리스도의 복음에 접촉되기만 하면 그 영혼이 벌떡 살아 일어나서 뛰기도 하고, 걷
기도 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죽은 해골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말
씀을 대언하노니 사망을 당한 뼈들아 일어날찌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뼈들
이 소리를 내더니 머리뼈, 손뼈, 척추뼈, 발뼈 들이 자기 위치로 가서 연결을 하
게 되었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자 살이 덮히고, 힘줄이 생기고, 핏줄
이 생기고, 가죽이 덮혀서 사람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또 생기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생기가 그 사망을 당한 사람 속에 들어가니 이 시신이 벌떡 일어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더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이 복음을 외치고 증거하기만 하면 사
망을 당한 영혼들이 살아나서 벌떡 일어나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는 군대가
되며 십자가 군병이 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심령 속에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
으키며 새로운 활력과 소망과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유대교는 낡은 종교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것만 추구하게 했지만은 새 종교인 예
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적인 것이므로 영혼을 살려내며 신령한 능력을 공급해 주
며, 낡은 종교는 의식을 중요시 하지만은 새 종교는 믿음을 강조하고, 낡은 종교
는 사람들을 의식으로 얽어매지만 새 종교는 영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
다. 낡은 종교는 문자로된 율법을 강조하지만 새 종교는 심령을 소중히 여기며 심
비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넣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비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여러분의 마
음 속에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범
하려고 해도 남의 것을 훔치려고 해도 하나님의 것을 훔치려고 해도 하나님의 음
성이 우리의 마음속에 울려 퍼져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 하나님의 것을 훔치지 말라, 십일조를 온전히 하나님게 드리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낡은 종교는 인간의 의를 강조하지만 새 종교인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
를 강조하며 낡은 종교는 육에 속한 사람을 만들어 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성
령께 속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으며 또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말씀했으나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가 있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께
서 우리의 마음 속에 계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셋째로 새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행위에 근거하고 있으나 새 종교인 기독교는 하
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믿음에 근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 종교의 성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성도들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성전도 있습니
다만 이 눈에 보이는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이고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시는 살아 움직이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이 성령님을 모시고
다니는 성전임을 확신하고 긍지를 갖고 성전답게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새 종교에 있어서 예배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4장 21절 이하에 보면 "이 산에
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참된 예배는 형식적이거나 의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인 것입니다.
새 종교에 있어서 제물은 무엇입니까? 이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하
나님께 드리셔서 속죄를 완성해 주셨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고 우리의 몸을 하나
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죄의 노예로 바치지 말고 마귀의 종으로 주
지말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 산 제물로 바칠 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
사가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새 종교에 있어서 향은 무엇입니까? 초상이 났을 때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안에 항상 향불을 피웠는데 그것은 의식적인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신약시
대에 있어서 생명있 기독교의 향불은 기도인 것입니다. 계시록 5장 8절에 천사
들이 성도들의 기도를 금 대접에 받아가지고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기도할 때 천사들이 금대접을 가지고 나타나서 여러분 한분 한분앞을 지나
가면서 천사가 향기로운 기도를 담아가지고 하늘 보좌로 올라가게 되어질 줄로 믿
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기도, 의식적인 기도는 천사가 담아 가질 않는데 신약시
대의 향불은 성도의 생명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등불은 무엇입니까? 구약시대의 성전 안에는 항상 일곱 촛대에 이 등
불이 밝게 켜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 있어서 등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것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비취는
성도들의 행실이 바로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성령충만을 받아 우
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모시고 삶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비춰주시는 그 빛을 어
두운 세상에 밝게 비춰줄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신약 시대의 시은소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성도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
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적에 예루살렘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
까지 쫙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담대하게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
게 된 것입니다.
멧세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 것입니다. 율법
종교의 중요 의식은 세례와 성찬이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바꾸어지게 된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중생과 성령의 내주를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늘 거듭나는 체험을 해야하며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그런 살아 움직이는 신앙생활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생베조각으로 낡은 옷을 깁는 것이 아니고 생베 조각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이 기
독교이며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는 것이 아니라 새 포도주를 새부대에 담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구약의 종교를 개조한 것이 아니며 구약의 종교에 신약
의 종교를 접붙인 것이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
가와 부활의 권능으로 전혀 새롭게 만들어진 종교가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
다. 이 기독교의 복음은 생명을 살려내는 생명력이 넘치는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
므로 기독교 복음을 믿으면 우리가 들어가며 나가며 생명의 꼴을 얻게 되고 풍성
한 생명을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
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되어지기를 축원드립니다.
주여 쓰시옵소서
구약성경 : 이사야서 6:1-8
신약성경 : 마가복음 11:1-10
오늘은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
는 종려주일입니다. 오늘은 이 날 일어난 사건 가운데서 아주 작은 사건
하나에 우리의 관심을 기울여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 건너편을 거쳐 여리고를 지나셔서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동네인 베다니 벳바게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여행은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는 마지막 여행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는 도보로
여행하여 오셔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예루살렘을 앞에 두시고 새삼스럽게
나귀를 구하시어 타고 가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도 제자에게 분부
하시기를 건너편 베다니로 가서 아무도 아직 타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끌
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왜 몰고 가느냐고 묻거든 그저 "주께
서 쓰시겠다고 하라"고 분부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분부대로 행하여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이 나귀 새끼를 주님께 기꺼이 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마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으로 예수를 믿게 된 시람인지도 모릅니
다. 아니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친척인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주님이 쓰시
겠다고 할 때 자기가 소유한 짐승을 즐겨 바칠 수 있는 그 마음이 돋보이
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께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 새끼를 빌려 드릴
때 어떤 이해 관계를 계산하고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자들
처럼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때 한 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나귀 새기를 빌려 드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죽었던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굉장히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그 주님께서 자기의 나귀를 쓰시겠
다고 하자 즐거운 마음으로 그 요구에 응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을 때도 있지만 신앙 속에서 감동을 받을 때는
아낌없이 자기의 소유를 신앙의 대상에게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우상을 숭배하는 신앙의 형태가 어떤
면에서는 아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우상숭배는
어디까지나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기심이
없는 헌신이오, 상호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있습니다. 우상
숭배는 공포나 이기심이 바탕이 되어 있어서 거기에 어떤 인격적인 관계
즉 존경이나 사랑하고 그가 요구하시는 일에 인간이 응답하며 인간적인 교
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른 신
보다 높고 크신 분이라 한 것은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요구를 들어주시
고 또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려고 힘써 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떤 요구를 하시는 까닭은 인간을 사랑하심이요 인
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서 입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반에 들어가면 먼저 출석을 부르는데, 내게 펜이
있으면서도 앞에 있는 학생에게 펜을 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학년일
경우는 앞에 있는 학생들이 서로 먼저 자기의 펜을 주려고 경쟁을 하는 것
입니다. 선생님이 자기 것을 사용했다는 것이 학생에게는 기쁜 일이요, 이
런 관계를 통해서 사제지간의 존경과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요구하시므로 그의 사랑과 관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요, 우리의 기쁨으로 그와의 교제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
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을
때 우리의 생각에는 좀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아브라함
이 여기에 아무 항의도 없이 묵묵히 응답하므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
는 신뢰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
님은 아브라함을 신뢰하였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선한 분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어떤 세력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도 이런 관계였습니다. 사탄이 이 관계를 끊어 버
리고 욥이 가진 모든 재물과 자식을 빼앗고 그의 품에 종기가 나게 하였습
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곤경 가운데서도
결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저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물질적인 축복이나 어떤 세상적인 축복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런 인격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인격적인 관계라고 볼 때, 나귀의 주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주님의 필요에 서슴지 않고 응한 것은 그가 얼마나 주님께 대
한 열렬한 신앙을 가졌던가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주님과 더불어 거룩한 교제를 한다면서 주님의 요구에
는 일체 응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자기의 요구만 내세우고 주
님께 졸라대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내 요구만
철저하게 관철시키려 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는 지극히 적은 일이라도
사양하고 때로는 비겁하게도 주저하고 때로는 못들은 척 외면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으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이에 응답하여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때에 진정한 신앙이 싹트는 것입
니다.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전부를 드리지 아니하고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
계를 부부의 관계로 표현합니다. 부부의 관계란 서로를 전부 줌으로 이루
어지는 관계입니다. 거기에는 조금이라도 가리움이나 남기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을 때는 이미 부부 관계에 금이 간 것입니다.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
시려 올라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까지도 주시려 하시는 예
수님에게 이 나귀 새끼를 바친 그 베다니 사람은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과 교제를 나누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기쁨으로 주
님의 요구에 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심을
체험하였고, 그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곧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
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할 때 비록 보잘 것 없는 우리이지만 "주여, 어서 쓰시
옵소서"하면서 우리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자리에 이르려고 하는 것
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일은, 우리가 주님께 쓰인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
이라는 사실입니다. 쓰일 가치가 없는, 보잘 것 없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께서 쓰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선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
다니 작은 마을에서 이름도 소문도 없이 자라난 한 마리 나귀 새끼가 주님
의 영광스런 길에 쓰여졌다는 것은 이 짐승의 자랑이요,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전해지는 동안에는 이 이름 없는 나귀
새끼의 자랑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 나귀 새끼에게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
라 다만 주님이 이것을 택하여 자기의 소용에 사용하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변변치 않은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쓰시어 옛날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라9:9)
사람이 쓰임을 받는 꺾는 영광스러운 일이요, 버림을 받는 것은 수치스
러운 일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
는 아무 쓸데없어 밖에 버리어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는 말씀처
럼 사람이 아무 쓸모가 없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큰 수치와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해도 가정에서나 사회
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그처
럼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아무도 그의
가지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택하여 쓰신 인물들을 보면 결코 처음부터 위대한 인물
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지혜 있는 자나 능한 자나 문벌
좋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이었으며,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
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7-28) 장인이 버린 돌이
집모퉁이의 요긴한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대로 사람이 쓰지 못할 것이라고
버린 것도 하나님의 손에 쓰여질 때는 놀라운 기적의 역사를 이룩하게 되
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실 때는 보잘 것없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주님
이 쓰실 때에 큰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고재봉같은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
님이 들어 쓰시므로 놀라운 전도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
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던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
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쓰신다면 사람이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더욱 영광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오늘 내가 너를 쓰겠다"고 요구하고 계신
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보잘
것 없는 자이지만 주의 일에 써주시옵소서"하고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
다. 내가 어떤 자이건 상관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를 부르
고 계신 것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면 거기에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를 전부 드릴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주님과 진정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안동 교회의 새 역사도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시는 여러분들의 헌신과 믿
음을 통하여 이루어질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
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이
막 10:13-16
이 세계는 아직도 어른들 중심이고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해외 토픽 중에 불란서에서 한 특별한 전시장을 마련했는데 전시된 물건들은 모두 큰 것이 특징이랍니다. 가령 식탁이 있는데 어른들이 가서 앉아도 눈 높이 정도 오는 것이랍니다. 어른들이 여기에 한번씩 앉아보면 어린이들의 심정이 어떠하겠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이 세계가 얼마나 어른들 중심으로 되어 있는가를 실감케 하는 전시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다르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 어른들 중심이라면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어린이들 중심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 나라에 가면 모든 것이 어린이들에게 맞게끔 되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좁은 문이라고 했는데 어린이는 쉽게 들어가도 어른들은 허리를 굽히고 몸을 움츠리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확실히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어린이 중심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극히 작은 자들이 모두 천국 백성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확실히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누가 더 높으냐"는 문제로 서로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고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그 앞에 세우시면서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9:37). 결국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 작아지는 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의 큰 백성이 될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린이와 연관시켜 생각할 때 특히 환상적인 꿈의 나라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는 돈이 필요 없는 세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입니다. 슬픔과 고통과 죽음이 없는 나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는 열 두 진주문이 있고, 그 성벽은 벽옥으로 싸였고, 도시는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 있고, 그 성벽의 주춧돌은 각색 보석으로 꾸며졌는데 벽옥, 사파이어, 옥수, 비취옥, 홍마노, 홍옥수, 감람석, 녹주석, 황옥, 녹옥수, 청옥, 자수정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기 때문에 빛이 필요없는 곳이요,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가 흐르고 그 옆에는 생명나무들이 있습니다.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하나님의 나라인데 실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환상의 나라이기 때문에 환상을 볼 줄 아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람들은 이런 환상을 도대체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대부분 다 현실주의자들인 것입니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은 꿈을 꾸는 자들입니다. 환상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동화 속에 잠기기를 즐겨합니다. 어린 아이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환상 속에서 볼 수있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어린이 특집극이 있었습니다. 세계 어린이 편지 쓰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우리 나라 시골 어린이의 이야기를 그대로 극화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붙이면 우체부 아저씨가 하늘 나라에서 온 답장을 전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답장은 우체부 아저씨가 써 준다는 것을 그 아이는 알고 있었지만 답장을 받을 때마다 정말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 이러한 환상을 가진 자들의 나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던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는 월트 디즈니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환상 속에 살면서 그 환상을 실현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만화가로서 사업을 시작했지만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라 진정 모든 사람들에게 환상의 세계를 열어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돈을 버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만화 영화가 성공하여 편안하게 돈을 모을 수도 있었으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추구하는데 몰두하여 결국 네 번씩 파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여 살아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디즈니 랜드의 건설도 그의 환상의 산물입니다. 그는 이 놀이터를 꾸미기 위해 1천 7백만 달러를 들였고, 그 후에 150만 달러를 들여 알프스 산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네 차례나 파산 또는 파산 직전까지 갔었다. 한 번 더 파산한다고 뭐 큰일 날 것도 없잖은가."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플로리다에 뉴욕 맨하탄의 두 배나 되는 넓은 땅을 사들여 거기에 윌트 디즈니 월드를 계획했고, 그것은 그가 죽은 후에 점차 실현되었습니다.
공해가 없고 에어컨이 설치된 도시를 상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꿈이 담긴 아름다운 도시를 그린 것입니다. 그는 돈이 얼마 들 것인가를 한번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끝없이 꿈을 좇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무한한 꿈과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누구나 이와 같이 환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끝없는 환상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기껏해야 이 땅 위에서 복받게 해달라는 정도의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환상의 세계를 펼쳐 보이시며 그 세계 속으로 들어올 것을 바라십니다. 어른들은 쉽게 그리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이런 환상의 세계를 즐겨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이들의 꿈 많은 맑은 마음을 보셨습니다. 환상 속에 사는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보셨습니다. 이런 환상의 세계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거기에는 거짓이나 악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환상의 세계에서는 선이 악을 몰아내고, 정의가 승리하며, 사랑이 융단처럼 깔려있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속담에 "아이들이 많은 집에는 악마가 무력하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악
마는 힘을 쓸 수가 없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 아이의 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꿈꾸는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욕심과 거짓과 비밀과 온갖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진 어른들에게는 어린이의 맑고 순수한 환상의 세계가 어리석게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어린이들로 하여금 그 환상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처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특히 어린이들을 자기의 욕망의 도구로 만들어 가고 있는 부모들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과중한 짐을 지우고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의 축소판이 점점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생각할 것은 첫째는 우리 자신이 어린이와 같이되어 환상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의 세계에 물들지 않고 그들의 환상의 세계를 신앙으로 지도하여 나아가야겠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어린 아이들을 바로 키우려면 우리들 자신이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앙의 세계는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환상의 세계요, 소망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 환상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면서 실제로는 상상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어린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엘리 제사장을 보면 그는 평생 하나님의 성막에서 거룩한 직분을 담당한 자였으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었고, 그래서 그 자식들을 바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자식들은 제사 드리는 음식을 마구 가져다 배불리 먹었고, 거룩한 성막을 거룩하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 엘리 제사장에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그들 조상의 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현실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제사는 드려 무엇 하느냐?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뜻을 져버리는 자가 되었고, 그 집안에 비극을 초래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 부모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로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어려서부터 성막에 데려다가 키웠고, 그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부모의 이런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이지만 안 지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부모는 그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환상을 좇아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 집안의 멸망을 알려 주셨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이 때로부터 놀라운 환상의 세계를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세계를 볼 줄 아는 마음 그것이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만 믿는 우리야말로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들에게 신앙을 키워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먼저 타락한 성인 문화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야 할 것입니다.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으로 물들어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어린이들로 하여금 배우게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살벌한 살인 사회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고 기도를 가르쳐야합니다. 성경 이야기야말로 정말 환상적인 이야기요, 그들의 꿈을 키워주기에 알맞은 이야기입니다. 천지 창조 이야기,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사사들의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 혹은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등등 수많은 꿈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그대로 들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어려서부터 계속 듣고 자라난 아이들은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뿐 아니라 훌륭한 일꾼이 될 것입니다.
미국에 이민간 한인들의 골치는 자녀들의 교육문제입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에서는 자녀들에게 매일 영어와 한글로 성경을 한 절씩 외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한글도 잘하고 동시에 아주 훌륭한 아이들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는 얼마나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칩니까?
5월은 신록이 싱그러운 달입니다. 어린이에게 신앙적 환상을 심어 주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맑고 티없는 저들의 삶을 위해 기도하시는 계절이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
운명을 바꾸는 믿음
본 문 :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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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0년 전 10월 31일!
33세의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에 선 확신으로 젊음의 열정과 순교적
인 각오로 종교개혁을 추진해 갔습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를
대행하는 로마 교황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힘에 겨울 뿐 아니라 처음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절망하며 한숨짓고 있던 어느날, 1521년에 결혼한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 루터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보, 이게 웬 일이오? 상복을 입고 있다니, 도대체 누가 죽었단 말이오?
" 머리를 숙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네, 하나님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셨단 말입니다." 루터는 더욱 놀란
기색이 되어 흥분한 어조로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하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수 있단 말이오?" 카타리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까지 용기를 잃고 낙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루터는 아내의 이 지혜로운 교훈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확실
한 믿음으로 용기를 얻어 종교개혁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여리고 성 바디매오라는 소경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는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은 믿음'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십니다. 이 시간 각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믿음으로 문제에 도전하라
바디매오는 소경이란 신체적 결함이 자신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
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없었기에 구걸하는 거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 구걸을 시작해서 지금 얼마 동안 계속했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자신의 불행을 숙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운명의 변화에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인 기적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도전
장을 던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6:37). 빌립은 합리적인 판단을 앞세워서 불가능이라고 단정하고 문제를 피해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한 소년이 가졌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림으로 예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문제를 직면하고 도전해서 기적을 이끌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문제를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여리고에 오셨던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기회를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사실 이번의
여리고 여행이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믿음의 강한 의지를 소유한 사람은 다가온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지 않습니다 항상 현재가 최상의 기회입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는 바디매오는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예수님의 조용한 행렬에 소란을 피우고 있는 소경에게 적지않은 멸시, 조롱, 구박이 계속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더욱더 큰 소리로" 간청했습니다. 이것이 바디매오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어떤 상황 아래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역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승리는 "오직 믿음"(Sola Fide)의 승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절대신앙"의 승리였습니다. 이 믿음으로
당신의 문제에 도전하십시오.
2. 자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에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 7:15~16).
시편 기자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
65:2)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 니다.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탄식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며(롬 8:26)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며(롬 8:34)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살아 계신 주님이다(빌 4:6~7).
예수님이 가시던 걸음을 멈추시고 소경을 오라 부르셨습니다. 이때 바디매
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께 달려나갔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대단히 중요한 것, 즉 소유 중 가장 중요한 소유이며 전부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눈을 뜨는 것이 겉옷보다 더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더 값진 것을 위해서 세상적인 것을 포기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것이 벌써 가치관의 변화요, 운명의 변화인 것입니다.
운명의 변화를 기대하고 믿는 사람은 자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생활을 위해서 아마 저녁에 텔레비전 보는 것쯤은 포기해야 할것입 니다. 주일성수를 위해서 세상적인 오락이나 인간관계를 손해봐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죽으심을 위해 옥합의 향유를 깨뜨린 마리아처럼, 생명처럼 아끼던 통장을 깨어 쏟아부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입니 다. 바울은 예수를 알고 부활의 소망을 발견한 후 지금까지 즐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애굽의 생활에서 가나안, 고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오랫동안 삶을 지탱해 주었던 그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새삶을시작하는 방법입니다.
3. 밝은 눈으로 주를 따랐습니다
예수 앞에 선 바디매오, "주여, 보기를 원합니다"고 간청하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말씀하심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되었
습니다. 이 감격, 이 기쁨!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그런데 눈을 뜬
사람에게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 행위입니다. 밝은 눈으로 "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귀결이며 당연한
처사일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적지않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실패하기 쉽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당하며 새벽기도, 철야
기도를 열심히 하던 교우를 위하여 목사님이 눈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은 새벽기도, 철야기도, 주일․수요일 저녁예배를 빠뜨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주일도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만나면 죄송한 마음으로 "목사님,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신앙생활이
소홀해지고 있습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날 목사님께서 그 일터를 찾아서 분주한 가운데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랑하는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시거든 이 복을 거두어 주옵소서. 사업이 잘됨으로 영원한 생명을 잃고 있사오니 이 사업을 망하게 하사 영혼을 구원하게 하옵소서." 이 기도에 깜짝 놀란 성도의 회개의 눈물을 잊지 맙시다.
눈을 뜨고 보면, 그렇게 중요하게 기도하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소경으로 지낼 동안 얻지 못한 세상적
인 것에 욕심이 생기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세상으로 달
려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눈을 뜨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마십시오.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생애에 더 크고 귀한 것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하십니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천주교의 거대한 세력에 도전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수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속에 진리를 따르는 삶으로 위대한 종교개혁을 완성하였으며, 이 세상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는 하나님의 크신 얼굴이 되었습니다. "운
명을 변화시키는 이 믿음"이 오늘 여러분들의 것이 되게 하십시오. 아멘.
섬김으로 얻는 영광
본 문 : 막 10: 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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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태양", "20세기의 예수"라고도 불리는 알베르 슈바이처 박사가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서 일하다가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시장을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슈바이처 박사를 환영하기 위하여 열차의 도
착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드디어 도착하고 슈바이처 박사는 열차
에서 내려 환영하는 인파들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노파가 힘겹게 가방을 들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슈
바이처 박사는 그쪽으로 뛰어가 할머니의 가방을 받아들고 기차 안으로 들
어가 짐을 적당한 곳에 내리고, 좌석번호를 찾아 앉혀 드린 후에 내려와서
시장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시장님, 죄송합니다. 평소의 버릇 때문에
실수를 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모든 신문들은 노파의
가방을 들고 가던 슈바이처 박사의 사진과 함께 그의 섬김의 자세를 너무
나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섬김의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
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온 인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삶이 섬김의
본을 보였다면 그를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섬김으로 살
아야 하고,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얻게 된다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시간 "섬김으로 얻는 영광"이라는 말씀 속에서
함께 주님의 음성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섬김을 받으려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가 주님께 요
청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
에 앉게 하옵소서." 이 사실을 안 다른 제자들 모두가 심히 분노했습니다
(4). 우리는 이 부분을 대할 때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철없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입장에 서서 비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이 말씀
을 묵상해 보면, 이것은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서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셨
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며, 너
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창 12:2).
별볼일 없는 우상 숭배자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75세가 되도록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자식마저 갖지 못했던 사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
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모세의 설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했습니다.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신 28:12~13).
430년 동안 애굽의 종살이를 한 백성들에게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
게 하시리라"(신 28:1)는 위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 나라"를 약속하셨고, 므나를 나누어
준 귀인의 비유를 통하여 고을의 권세를 차지한다는 약속을 하신 바 있습
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는 않았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들을 현실적으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을 따르면서 그 말씀과 능력 행함 속에서 그만한 가능성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요한과 야고보와 다른 모든 제자들이 하나같
이 영광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결과적으로 요한과 야고보는
제자들 중의 제자들로 성장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는 사람은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과 그분께 대한 기대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
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2. 영광은 고난의 대가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얻기 원하는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습니
다. 오히려 제자들이 기대하는 세속적인 영광보다 더 크고 영원한 영광이
있음을 깨우쳐주시며 그들의 관심을 자연스럽게 바꾸도록 하셨으며, 그 영
광을 얻는 길은 세상적인 요행이나 횡재 같은 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
니라 고난의 대가를 지불함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혀주시기를 요청하신 일에
대하여서 예수님은 분명히 그 영광은 마련되어 있음을 확신시키시면서 그
영광은 주님과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고,주님의 세례를 받는 사람이 얻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동시에 이 영광은 세속적인 것과 다르다는 사실도
깨우치셨습니다.
이방의 집권자들은 사람을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지만 너희 중에 크
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로서는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가치관이란 하
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면서도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세상적인 기대와 하늘 나라의 영광 사이를 왕래하면
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배반의
쓴잔을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해서 예수의 공동체가 흩어지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 다시 모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참 제자로
서 살게 되었으며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 위대한 진리를 전해 주고 있다
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성서 속에서 그의 공동체인 교회 속에서 오
늘도 생명력을 지니고 역사하고 있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라." 고난의 대가를 지불하는 자,
바로 당신의 것입니다.
3. 모범을 보이신 예수
기독교 진리의 위대한 힘은 행동에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
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
23). 예수님은 진리를 몸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기려 하
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로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하셨습니다.
또한 인류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역사를 위하여 예수님은 "친히 나무에 달
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
니"(벧전 2:24). 이것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바울 사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
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혀 모든 이름 위
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 2:5, 8~9).
바울 사도는 주의 부르심을 받은 후 일생 동안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살았
습니다. 주님의 본을 따라 살면서 감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의 기쁨
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는 자 되라"(살전 1:6).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일하다가 모금차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었
는데 그때 그는 기차 3등칸을 타고 갔었습니다. 한 시대의 위대한 성자로
존경받는 그에게 "왜 3등칸에 타셨습니까?" 하고 묻는 사람들에게 빙그레
웃으면서 "4등칸이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진실로 모든 사람들에
게 영광을 받을 큰 사람은 겸손히 모든 사람들을 섬기며 희생하는 사람입
니다. 아멘.
주님의 성품
본 문 :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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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님께서 이 땅에 거하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모레면 그 무서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백성을 사랑하셨고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다시 한 번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첫째, 주님은 마지막까지 부족한 사람을 찾아 주신 분이십니다.
3절 말씀을 보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고 계셨다" 고 했습니다.
`문둥이 시몬'이라는 말씀으로 보아 그는 문둥병이 걸렸던 사람이요 주님께서 그를 치료해 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여하튼 당시 문둥병은 저주의 병이요 고립되어 살 수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런 시몬이었으나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예수님을 초청하여 식사 대접을 해 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초대하였고 주님께서는 그 초대에 기쁘게 응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제 생을 마감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문둥이 시몬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찾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이 땅의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낮은데로 임하셨으며, 상처 입은 자와 죄인과 병든 자를 찾아다니며 소망을 주셨고, 오늘은 문둥이 시몬의 집을 찾아 주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말입니다.
우리도 문둥이 시몬과 같이 주님을 내 마음에 초대해야 하겠습니다.
비록 죄인이며 문둥이 보다 흉한 죄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 일지라도 진정으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모시어 들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모시어 들이십시오.
주님은 노루처럼 달려와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 주님께서는 결코 가난한 자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했습니다.
이 때 4, 5절을 보면 펄펄뛰며 이 여인을 야단 친 사람이 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이 귀한 것을 어찌하여 헛되게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보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였고 야단을 친 사람은 가룟 유다임 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돈에 욕심이 나서 한 말이었습니다. (요12:5~6)
이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7~8절)
이 말씀을 역으로 보면 '너희의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이 항상 있으니 수시로 저들을 도와 주라'는 말씀입니다.
신 15:11절에는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다"는 말씀이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항상 두시는 것은 선행의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우연히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으나 주님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죽으시는 장례를 위한 헌신으로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가 항상 너희 주변에 있음을 경각 시키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 나라에 갈 때까지 영원히 실행해야 할 성도의 의무라고 생각됩니다.
이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다시 새겨 보며 우리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당부하시고 원하시는 뜻을 깨달아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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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