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노도의 시절
사람에겐 남에게 숨기고 알리기 싫은 비밀이 하나씩 있다. 그때가 아마 9월 이었을 것이다. 욕지도의 아침 날씨는 가을이 오자 쌀쌀해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자살은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고등학생 때 가장 친한 친구가 자살하자 자원입대하여 자살용 실탄을 내 GMC에 싣고 다녔다. 사고가 일어나길 기다렸다. 자살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근처에서 15P 헌병을 구타하여 부산 전체에 비상이 걸리게 한 적 있으나 끝내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 제대 후 남해로 갔다가 더 외로운 욕지도로 갔다. 그러자 차츰 친구들과 가족들 연락이 끊어졌다. 나는 밤에 촛불을 켜놓고 성경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고, 신과의 대화가 불가능함을 알고 절망했다. 신이 없다는 확신을 했고, 안개 가득한 깊은 밤 눈물을 흘리며 해변을 헤매고 다닌 적도 있다. 그러다가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서 이승을 떠나고 싶었다. 죽기 위해서 술을 먹고 유서를 품에 품은채 위험한 절벽을 내려가기도 했다. 군대 3년, 섬 2년, 5년 동안 내겐 수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끝내 자살 기회는 오지 않았다. 죽음의 신이 나를 피해가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운명의 신이 나를 피해간다면 초조할 거 없다. 그가 날 찾아오면 그때 가면된다고 작정했다. 내 마음은 거칠고 차급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런 속에 폭풍노도와 같던 청춘 시절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내 마음은 태풍 지나간 해변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청정해지고 있었다. 외딴 수도원 수도승처럼 혼자 살겠다고 몇번 다짐했다. 그는 욕지도 와촌이라는 호젓한 동네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다. 부친은 삼천포 모은행 지점장이라 했다. 자기와 넓고 넓은 바닷가에서 평생 아이들 가르키며 풍금을 치며 살 것을 그가 제의했다. 초도에 살던 처녀도 있었다. 그는 외딴 작은 섬에 태어나 초등학교도 못나왔지만 동백꽃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그와 밀감밭 가꾸며 흙담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볼 생각도 했다.
그런 가을 아침 형님이 날 찾아온 것이다. 자정이 넘도록 벤쳐스악단의 ‘Come september’ 연주를 듣고 잠들었는데 누가 방문을 뚜드렸다. 보니, 문 밖에 형님 얼굴이 보였다. 당시 서울서 욕지도까지 오는 길은 지금하곤 다르다. 서울서 진주까지 기차로 12시간 걸린다. 진주서 삼천포 가서 삼천포서 욕지로 배를 타고 6시간 와야 한다. 산길 물길 천리 넘는 그 길을 달려온 형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형제가 하나는 서울대, 하나는 고대라 사람들이 다 부러워한다. 그런데 네가 자살한다고 욕지도 와있으니 마음이 허전하다. 서울로 같이 올라가자.' 따뜻한 그 말 한마디에 내마음이 녹아내렸다. 이미 자살은 반쯤 포기한 상태. 바람 부는대로 물결 치는대로 살기로 한 터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짐이래야 성경 한 권, 원고지 몇 장이다. 아튿날 배를 타고 욕지도를 떠났다. 그리고 서울 명륜동 형님 자취방에 꼽싸리 낀 것이다. 형은 문산 출신인 태석 형과 과외선생을 하고 있었다. 태석 형은 키가 작고 얼굴 새까만 전형적인 촌놈이다. 그러나 영어 하나는 귀신이다. 인물 훤하고 마음 착한 우리 형은 문리대 화학과 복학생이다. 수학이라면 알아준다. 당시 서울에서 부자 동네로 꼽히던 명륜동에서 두사람은 영어 수학을 꽉 잡고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에게 체능을 가르쳤다. 대학 학장, 중앙청 과장집 딸 손목을 잡고 운동장 뜀박질 시켜주고, 넓이뛰기 같은 걸 가르쳤다. 명륜동 우리가 자취하던 집은 딸 둘 달린 과수댁 집이다. 문리대 건너편 골목 안에 마당이 손바닥만한 작은 한옥이다. 말만하던 두 딸은 지방 출신이나 머리 좋은 형들을 좋아했다. 간혹 먹을 걸 바구니에 담아 주었다. 밥은 서울대 의대 정문 옆의 식당 식권 끊어놓고 매식했다. 밥은 항상 남의 밥이 커보인다. 식당 여주인이 공기밥 건네주면 우리 세사람은 어느 밥이 큰가 항상 서로 눈치를 보았다. 월말 과외비 받으면 태석 형이 한 턱 쏘곤 했다. ‘창현아! 몸보신 하러가자' 순대국집에 가곤 했다.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다. 그러나 형님은 친구가 많았다. 그 바람에 나는 당시 서울대 다닌 진고 선배들을 훤히 알았다. 선배들은 사람마다 수재고, 모두 비범했다. 모두 가난했고, 가난이란 공통점을 공유해 서로 믿고 의지했다. 강인호 선배는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한 선배다. 옛날로 치면 장원급제했는데, 졸업 때도 상대 수석이었다. 신문사 지국장인 그분 부친은 교육감이던 우리 아버님 바둑 친구였다. 서울대 다니던 진고 선배들은 공부에 도사이다. 인간성도 좋았다. 졸업 후 다 한자리씩 했다. 태석 형은 행정고시 합격했고, 호를 소르본이라 불러달라던 길승 형은 나중에 선경그룹 회장 지냈다. 길승 형은 군대갈 때 내가 숙대 다니던 그의 애인과 용산역에 나가 전송했다. 문제 형은 부산 한국은행 지점 근무했다. 그 때 장모님이 친구들에게 하도 사위 자랑을 하니까, 장모 친구들이 ‘아따 그 잘난 사위 어디 얼굴 한번 봅시다' 했다. 사위 인물을 보자 부산 마님들이 모두 뒤로 홀라당 나자빠졌다. 서울대 출신에다, 얼굴 미남이지, 매너 좋지. 대한민국 최고 신랑을 보자, 부산의 재력가 마님들이 그냥 물러 서겠는가. ‘조서방! 자네 친구 중에 자네같은 사람 없나? 물었다. 그 대답이 걸작이다. ‘친구들은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많습니다’. 그래 행동파 한 분이 즉시 날 잡아 서울로 올라와 한 명 선을 봤다. 그가 나중에 서울대 교수한 정인 형이다. 집 하나 가난한 것 빼고는, 키 크고 인물 좋고, 매너 좋다. 장모될 사람이 즉각 제기동에 한옥 한 채 사놓고 딸과 결혼시켰다. 그때 진고 선배들 나중에 다 성공했다. 삼성, 전경련, 선경, 석탄공사, 한독약품, 삼호방직, 한국제지, 한국은행 등에서, 회장, 부회장, 사장, 공장장 한자리씩 차지했고, 서강대 강원대 대학 총장도 두 분 나왔다.
나는 공부 도사들인 이분들에게 내 비밀은 끝까지 감추었다. 빈대도 낮짝이 있다. 챙피해서다. 고대 1학년 첫 학기 6학점 미달로 제적 받은 사실은 끝까지 일급비밀 이다. 친구 자살했다고 인생이 허무한 거라고 시험지에 낙서 그려서 냈다가 학점 못받은 건 자랑이라 할 수 없다. 사실을 끝내 숨겼다. 대신 딴청을 부렸다. ‘이제 키엘케골 쑈펜하우엘 염세철학 때려치우고 사대 체육과 가서 체육선생 되고싶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노선변경을 천명한 것이다. 선배들은 내가 자살할려고 섬을 돌아다닌 사실은 잘 안다. 그래 모두 마음 변한 걸 환영했다. 특히 사대 영문과 다니던 판식 형이 환영이었다. 아란드롱처럼 생긴 형은 장위동에서 하숙했다. 거긴 방 앞 논에서 개구리가 울어대고, 방 바로 옆은 소 키우던 우사가 있어 누렁이 황소가 여물을 씹고 있었다. 판식 형은 문학을 좋아해 책상에 원서로 된 헤밍웨이 소설 같은 것이 꽃혀있었다.
사실 나는 운동이 체질적으로 잘 맞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백미터, 높이뛰기, 투창, 투원판 선수였다. 대학 시절에는 미식축구 선수였다. 장래 고등학교 체육선생이 딱이다. 그래 학관에 등록했지만 공부가 문제다. 그동안 5년 세월 영어 수학을 완전히 까먹었던 것이다. 답답한 놈이 우물 판다. 진퇴양난 속에 궁리한 것이 고대에 가서 한번 물어나 보자는 것이다. 기가 죽어 학적과에 가서 문의하니, 3학점 짜리 두 과목이 재시험에 해당되니, 일단 등록하고 학점 나오면 복학 된다고 한다. 이런 걸 구사일생이라 한다. 복학의 길을 찾자, 나는 두 과목 학점 딸려고 힘을 몽땅 쏟았다. 미식축구에선 '레디, 핫 완, 핫 투, 핫 쓰리!' 구령 끝나면 선수들은 죽기살기로 공을 들고 뛴다. 5년 전 프래시맨 시절 나는 미식축구 선수였다. 왕년에 서울운동장에서 한양대, 성균관대, 중앙대, 서울농대 팀을 격파한 고대 미식축구 라이트 가드 34번 선수였다. 다행이 나는 체력이 좋다. 그때부턴 럭비 공처럼 책가방을 안고 도서관과 하숙집을 들고뛰었다. 도서관에서 밤 10시에 청소하는 사람들이 와서 의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청소 시작한다. 그때사 마지막으로 나왔다. 한여름에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 물집이 생겨도 일어나지 않았다. 빤쓰에 피가 묻어나오곤 했다. 하숙집에서 밥 먹으면서, 화장실에서 일 보면서 깨알같은 메모지 글을 읽었다. 개운사 근처 하숙집에서 학교로 걸어가며오며 메모지 읽었다. 촌음도 아꼈다. 영어는 전 과정을 모두 통째로 외었다. 철학개론도 좔좔 외웠다. 나는 그동안 철저한 고독을 맛보았다. 뜻없이 학우들과 잡담할 시간이 없다. 쉬는 시간에 학우 외면하고 공부만 했다. 그리고 한 학기 끝나 교무과에 갔다. 재시험 두과목 성적표를 확인하니 둘 다 학점이 나와있다. 지옥에서 생환된 것이다. 아마 그때 내 눈시울엔 눈물 맺혔을 것이다. 나는 두 과목 학점만 확인한 후 성적표를 윗포켙 속에 넣었다. 본관 앞 라일락 벤치에 앉았다. 그 벤치는 서울 출신 여학생들이 좋아하는 벤치다. 나는 앞으로 그 이쁜 것들과 사귈 일만 남았다. 나는 다시 한번 고대생이 된 것이다.
그때 63년도 일이 생각났다. 고대 시험 치려던 전날 밤 꿈이다. 산에 올라가서 호랑이 새끼 두마리를 품에 안고 내려왔다. 그때 형은 진고 후배 길승 형과 이정인, 김태석 형들과 돈암동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내가 아침 밥상에서 꿈 이야길 꺼내니 형들이 말렸다. 아침에 꿈을 발설하면 길몽 효력이 없어지니 밤에 하란 것이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수학 주관식 큰 문제 둘이 바로 전날 밤에 풀어본 문제다. 주관식 문제 둘다 각각 30점씩이니 60점 공짜로 먹은 것이다. 나머지 객관식 문제 합해 대충 85점 나올 것이다. 고대는 시험 문제 어렵기로 소문난 곳인데, 수학에서 85점 나오면 합격은 떼놓은 당상이다. 전날 길승 형이 오늘 밤은 마음 뒤숭숭 공부 안될테니 나하고 서울 구경도 할 겸 고대와 서울상대 후배들을 위해 격려 삐라라도 붙이자 해서 따라나가 내 손으로 삐라 붙이고 와서 수학 문제 둘을 풀어보고 잠 잤다. 그리고 이튿날 시험장에서 대박 터트린 것이다. 꿈이 참 신기하다. 꿈에 호랑이 새끼 두 마리 품에 안고 온 것이 뭣이던가. 두번 고대에 들어갈 걸 미리 현몽한 것이다.
행복한 마음으로 내가 라이락 벤치에 앉아있는데, '창현아! 학점 나왔냐?' 입학 동기 놈 하나가 닥아왔다. '나왔다' 그러나 녀석이 믿지 않는다. '나왔으면 보자' 녀석이 끝내 우기고 성적표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아니 이게 네꺼 맞냐?' 하고 물었다. 전과목 90 이상이라는 것이다. 나는 재시험 두과목만 확인했지, 다른 건 보지도 않았다. '너 특대생 된 거 같다. 학적과에 가보자' 그래 둘이 학적과에 가보니 과톱 장학생이라고 한다. 부랴부랴 장학금 수령할 서류 보내주십사 하고 진주 아버님께 전보쳐 난생 처음 효도 했다. 사실 나는 이전엔 공부란 걸 해본 적 없다. 맨날 학교 다녀오면 해인대학에서 평행봉만 했지, 책가방 열어본 적 없다. 책가방은 그대로 얌전히 가져왔다가 그대로 가져갔다. 그래도 유전 영향인지 항상 중상 정도의 성적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색찬연한 고대에서 엉뚱하게 특대생 된 것이다. 공부란 묘한 것이다. 한번 특대생 되자 다음 학기엔 특별히 한 것 없어도 이하 동문이었다. 그래 졸업할 때 문과대 수석으로 나왔다. 아마 형님 자취방에 있으면서 공부 도사들 진고 선배 기를 받았던 것이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의 청춘은 친구 자살을 전후해서 크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 파란 끝에 엉뚱하게 특대생이 탄생했다. 인생은 알 수 없다. 사대 체육과 나와 체육선생 할려던 사람이 신문기자, 재벌 회장 자서전 작가를 하고 살았다. 은퇴하여 지금 80을 앞두고 있다. 나는 청춘 시절의 폭풍노도와 같은 체험을 아무에게나 추천 할 순 없지만, 어쩌면 한번 겪어도 볼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첫댓글 선생님의 질풍노도의 인생길 스토리입니다. 감동이군요.
탁월한 유전자에 각별한 노력으로 잘 살아오셨습니다. 아카라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