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복쟁이 친구들.-수필-
정성헌
오랜 세월 타향살이를 거치면서 숱한 사람들과 만남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집이 없어 한자리에 오래도록 머물며 살지 못했으니 대부분 사람이 자연스럽게 구름처럼 흘러가 버리곤 했다. 정이 붙고 좀 더 많은 대화가 오갈 만하면 나는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했었다. 같은 지역에 살아도 자주 만나지 않으면 정(情)도 차츰 식어가기 마련이다. ‘멀리 사는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가깝다.’라는 말이 일리가 있음이다.
현대인의 출세에 있어 인맥(人脈)은 매우 중요한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그만큼 사람이 곧 재산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다. 내성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때문에 사람 사귀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나는 얼마 동안 지내다 보면 나의 진중한 성격과 성실성 때문에 상대방이 다가와 주어 인연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나를 기억하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몇몇 있기에 물질적으로는 부자가 아니지만, 인맥으로는 부자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스치고 지나간 수많은 사람과의 인연 속에 악연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음의 정을 나누고자 했지만, 그들은 교묘히 나를 이용하려 들었었고 내가 속기도 했다. 선천적으로 사람을 잘 믿고 인간애(人間愛)를 중시한 성향 탓도 있겠지만 사람을 가려보는 안목이 부족했음을 인정해야 하는 대목이다. 서운한 감정이 더 이상의 인연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단절을 불러오곤 했다. 그러면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처럼 사람 보는 안목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을 만나면 호의적인 내 마음을 내비치며 다가서는 용기도 생겼다. 산전수전을 겪은 사람들은 아무에게나 손을 내밀지 않는다. 사람에게 당한 아픔의 경험이 많으면 경계심이 높아지는 건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려 한다는 경험과 저변에 깔린 사회적 불신 때문이다.
나는 1955~1963년에 출생한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의 중심에 서 있다. 때문인지 비록 짧은 기간 시골에서 살았지만 내 연고지에 또래의 친구들이 꽤 여럿 있다.
나도 서른 후반 즈음까지는 고향 친구들과 교류가 드문드문 있었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광주, 목포 등 객지로 흩어져 살았던 친구들은 명절을 맞이하여 고향에서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밤새 나누곤 했었다.
그러던 내가 친구들을 피하게 된 사건이 생겼다.
씀씀이가 큰 아내는 돈을 벌겠다며 액세서리 가게를 냈지만, 생각처럼 장사는 안되고 유행을 좇아 신상품을 들여놓아야 하는 액세서리 가게의 특성 때문에 여유자금이 넉넉하지 않았던 내 수입(월급)은 적자인 액세서리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 써버리고 저축이 없어져 버리니 가정경제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에 탑승시킨 꼴이 되었고 새로운 물건을 들이기 위해 사채를 쓰고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가게는 결국 전복되고 교류하던 친구들과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나의 마음은 음산한 뒷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마치 음유시인(吟遊詩人)이라도 된 양 세상을 탓하기도 하였다. 의기소침해진 나는 자연 주변 친구들과도 만남이 뜸해지면서 멀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나 스스로 은둔하며 고도(孤島)의 외기러기 신세 그대로였다.
나를 돌아보는 참회(懺悔)가 시작되었지만, 마음과 가정경제의 상흔(傷痕)은 깊었다.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 정도로 고통은 컸다. 나중에는 수면제도 무용지물이었다 대신 술을 마셔봤다.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한 나는 술이 수면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은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깨복쟁이들이 더욱 그리웠고 밤마다 그들과 뛰놀던 연고지의 산천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어릴 적 놀았던 자연 전체가 우리에겐 그대로 놀이터였다. 봄이 오고 푸른 잔디가 덮인 바우베기 벌, 안은 우리들의 씨름판이었고 닭싸움을 하던 놀이터였다. 여름이면 마을 뒤에 있는 개 언덕 해변은 우리들의 시원한 수영장이 되어주었다. 수심이 얇고 모래가 깨끗해 많은 또래가 찾아와 수영을 즐겼다. 우리는 주로 개구리 수영을 하였고 도회지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들은 접영이나 배영으로 그럴싸한 무게를 잡았다. 잠수에 능한 친구는 잠수로 조개를 캐서 물 위로 번쩍 추어올려 자랑하기도 했다. 심심한 친구는 손바닥으로 물결을 쳐 물결로 얼굴을 공격하면 이에 질세라 맞받아 공격하면서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개 언덕에 오면 어른이나 아이 모두 알몸이기에 여자들은 이곳이 기피 지역이거나 접근금지 구역이 되었다. 겨울이 되면 저마다 한 고샅 비탈길로 비료 포대나 대나무를 쪼개서 불에 휘어 만든 썰매를 들고 언덕길에서 함성을 지르며 아래로 달음질쳤다.
당시에는 놀이를 위해 많은 도구를 스스로 제작하였다. 야구를 하려고 방망이도 깎고 글러브를 비닐 비료 포대를 접어 만들고 팽이, 연, 윷, 물총, 딱총, 등을 만들어 놀았고 자치기 딱지 따먹기를 하며 삼삼오오 어울려 놀았다.
나는 비로소 40대 초반에 고향 깨복쟁이들을 다시 만나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비록 온전히 마음의 평온을 되찾지 않은 상태였지만 더는 미룰 수는 없었다. 몇 년의 세월을 건너뛰고 만난 친구들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반겨주었다. 다시 모임을 결성하고 정기적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이젠 이순의 후반으로 어떤 친구가 언제 어떻게 훌쩍 떠날지 모를 나이가 되었고 지금이 제일 젊을 때이고 노후를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자는 생각에서 호남 동창회를 결성 가까이 사는 친구들과 정기적 모임을 하고 있는데 오늘 고향 함평에서 모임을 했다. 이제껏 객지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역시 깨복쟁이들이다. 어릴 적 함께했던 깨복쟁이들 가끔 만나도 항상 그 마음이고 서로의 집안 내력과 지금의 사정을 잘 알기에 체면이나 허세가 없다. 그들은 모두 고향을 닮았기에 넉넉하고 따뜻하고 포근함이 마음을 편하게 한다. -‘24년 06월 29일, 일기를 수필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