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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1. 그들과 그녀의 사정, 그리고 술 마신 날
소림사 참회동(참회동).
사마외도 그리고 정파의 변절자를 잡아 가두는 곳이다.
십팔나한의 엄중한 경계 속에 물샘틈없는 감시가 펼쳐지
는 이곳.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박달나무로 짜여진 형옥문이 열리
고 무맹 밀사(밀사)는 참회동주 혜인(혜인)과 함께 참회동
안으로 들어섰다.
"아미타불! 한신(한신) 시주는 나오시오."
혜인의 부름에 한신은 다리 사이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출동(출동)이오."
순간 그의 눈은 번쩍 빛을 발했다.
'출동?'
사문을 능멸한 죄에다가 소림이 승려를 죽인 죄까지 더해
져 이곳에 영원히 갇혀 있으리라 했는데.....
그때 누군가가 그의 앞에 섰다.
소림의 승려는 아니다.
'조건이 있소!'
"조건?"
한신의 가쁜 호흡소리를 들으며 무맹 밀사는 그 앞에 형구의
열쇠를 던졌다.
"일 년가 척마당에 들어가 무맹의 명령에 따라야 하도. 만
일 이 조건을 허락한다면 당신의 죄는 영구히 사라질 것요."
그리고 끝으로 물었다.
"어떻소?"
한신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열쇠를 움켜쥐었다.
어디를 가든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종남파 제일의 고수였으나 십여 년 전 사문의 반도로 전
락하여 쫓기다가, 그 와중에 우연치 않게 시비가 붙은 소림
제자를 죽이고 그 때문에 참회동에 갇힌 유운도객(유운도
객) 한신은 이렇게 해서 참회동을 벗어날 수 있었다.
***
"안 된다! 이놈!"
아버지의 불같은 노호성에도 불구하고 꿇어 엎드린 남궁
악(남궁악)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허락해 주십시오! 아버님!"
하남 남궁세가의 현임 가주인 남궁의(남궁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막내아들을 내려다봤다.
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그 중 첫째 남궁준(남궁준)과 지금 눈앞에 있는 막내 남궁
악은 그의 본부인에게서 난 적자고, 현재 남궁세가의 소가
주인 남궁비는 첩에게서난 서자(서자)다. 서자 남궁비는 특별
히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고, 그 어미 되는 여인의 미모에
혹해 첩으로 들이고 희롱하다 보니 생겨난 자식이다.
당연히 그의 총애는 본부인에게서 난 두 자식에게 향해
있었지만, 오 년 전 장남 남궁준이 돌연사한 뒤 어쩔 수 없이
서자인 둘째에게 소가주의 자리를 줘야 했다. 하지만 그것
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적자인 남
궁악을 후계자로 만들려 하고 있던 그다.
그런데, 그런데...
그 천금같은 막내 녀석이 돌연 무맹의 척마당인가 뭔가
하는 당에 투신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곳의 향주로 내정이 됐다나 뭐라나?
그가 소문을 듣기로는 그 척마당은 매우 위험한 조직이다.
싸움의 최선봉에 서야하는....그 만큼 죽을 확률도 높은...
그 척마단은 비공개로 뽑힌 사람에 한해서만 들어간다던
데 어떻게 막내가 거기 뽑혔을까?
'분명 뭔가 착오야! 암, 우리 남궁세가가 어떤 곳인데, 그
후계자가 될 귀한 막내를 그런 곳에 보낼까! 절대 허락할 수
없다!'
그는 막내아들을 달랬다.
"무맹의 향주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차라리 정무
당에 드는 게 어떻겠느냐? 그곳에 쟁쟁한 젊은이들이 많다
지만 사대 세가 중 하나라는 우리 남궁세가의 후광에다가
네 형이 무맹의 군사니 너를 위해 향주 한자리 정도는 마련
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남궁악의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그는 환상에 젖어 있다.
무림대의를 위해 한 목숨 초개와 같이 바치겠다는...
그 이면에는 남궁비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다.
집에는 비밀로 하자며 남궁악에게 은근히 척마당에 들 것
을 권유한 게 남궁비다.
겉으로야 척마당이야 말로 진정한 무림 대협의 모임이라
고 남궁악을 꼬드겼지만 실상 남궁비의 속셈은 따로 있다.
하지만 이제 십칠 세에 불과한 남궁악은 이복형의 어두운
속마음을 짐작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수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릎쓰고 남궁악은 결국 그 밥으로 떠나
버렸다.
이 협의지심에 불타는 소년의 목적지는 이복형의 음모가
기다리고 있는 무맹 척마당이다.
***
시비를 건 화산 제자 하나를 떡이 되도록 두드려 팬 팽조
운(팽조운)은 무맹 하급 무사들이 단체로 같이 쓰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소속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넌 오늘부터 척마당에 배속됐다. 그곳은 건물을 따로 쓰
니까 짐 정리해서 당장 나가라."
여태껏 팽조운이 사고 치고 돌아다닌 것을 수습하느라 부
쩍 늙어버린 향주는 싱글싱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팽조운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짐을 정리해 숙소를 나섰다.
출입문을 세차게 발로 차 열고 젖히고 나가는 그의 불량
스런 모습에 숙소 안에 있던 무맹 하급 무사들은 다들 가슴
을 쓸어 내렸다.
'다시는 오지마라!'
팽조운은 화산으로 올라가며 매서운 눈빛을 던졌다.
"이 년 만인가? 내가 간다! 기다려라, 남궁비!"
***
남궁비는 애인과 동침한 침실에서 동생 남궁악이 무맹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모든 게 완벽했다.
자신에게 거치적거리는 녀석은 모두 척마당에 쓸어 넣었다.
그 '거치적거리는' 대상에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도 포함된
다. 그러나 세인들은 속사정도 모르고 자신을 칭송할 것이
다.
대의를 위해 동생마저도 무림에 바쳤다[대의멸친].
'때가 되면 어리석은 동생을 위해 좀 울어줘야겠지? 그래
야 무맹주의 지위가 좀더 가까워질 테니까.....'
자신의 꼭두각시가 될 사람도 끌어냈다.
약점을 잡힌 그자는 결국은 죽을 운명이란 것도 모르고
남궁비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서 내 인형 노릇을 해야 되기 때문
에 그에 갈맞는 강한 자를 골랐으니, 이제 써먹을 대로 써먹
는 일만 남았군.'
남궁비는 누군가의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마음대로 주무
르는 즐거운 상상을 하다 말고 옆에 알몸으로 잠들어 있는
화산파의 젊은 여제자 화산옥봉(화산옥봉) 이미연(이미연)
을 바라봤다.
'음! 이 계집도 이제 처리해야 할 텐데.....'
그 동안은 화산 장문인이기도 한 무맹주 유종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미연과 사귀어 육체 관계까지 맺었지만 이제
이 여자는 필요 없었다. 매끈한 육체에 화사한 얼굴, 경국지
색(경국지색)의 미녀지만 그녀는 더 이상 남궁비를 자극하
지 못했다.
이미연보다 조금 덜 예쁘기는 해도 더 먹음직스러운 배경
을 지닌 복화운이라는 먹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좀더 이
용 가치가 큰 쪽으로 육욕의 대상을 바꾸기로 그는 이미 마
음먹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미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필요 없는 물건, 버리기 전에 마음껏 주물러나 보자는 그
런 심정이다.
그녀가 잠결에 거기 호응해 왔다.
'자! 그럼, 너도 척마당으로 가줘야겠다.'
***
온 무림에 떠들썩하게 소문을 낸 지 보름 만에 이루어진
정무당과 척마당의 창단식은 거창했다.
정무당 영반인 남궁비와 척마당 당주인 상운양이 중인화
사리(중인환사리)에 각각 나와서 천지신명께 마맹을 멸망시
키고 무림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멸사봉공(멸사봉공)하겠
다는 맹세를 한 후 맹주 유종의가 신물과 신표를 나누어주
었고, 여러 무림 명숙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공식 행사
가 끝나자마자 두 당의 위상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남궁비는 무림명숙과 각 파의 대표들로 부터 축하인사를
받느라 분주했지만 상운양 곁에는 복화운을 제외하도는 아
무도 없다.
'하긴 나는 어쩌다가 이 자리를 맡게 된 것뿐인데.....'
상운양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게 어색해서
자리를 떴다.
차라리 그가 맡게 될 척마당 사람들과 상견례나 하는게
더 바람직할 것 같았다.
복화운은 그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무맹주 유종의가 무림
명숙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해서 어쩔수 없이 남았다.
무맹 한 구석으로 홀로 걷는 상운양을 쳐다보며 사람들에
게 둘러싸인 남궁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상운양은 가는 길에 당주로 임명되며 건네 받은 [무맹(무
맹) 조직표(조직표)] 라는 대외비(대외비)의 책자를 펼쳐
자신이 당주로 임명된 척마당의 편제를 살펴봤다.
보통 일개 당은 여덟 명의 향주로 구성된다. 그런데 상운
양 밑에는 세 명의 향주밖에 없기 때문에 규모로 보자면 무
맹의 다른 당에 비해 한참 떨어졌다.
더더구나 한심한 것은 세 명의 향주 아래 각기 열 명씩의
인원이 있을 예정이었지만, 급하게 조직됐다는 이유로 하여
그 인원의 절반인 다섯만으로 구성돼 버렸다.
나머지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부당주가 한 명.
결국 척마당의 총 인원은 자신을 포함해도 이십 여명으로
당(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상운양은 같이 창단된 정무당의 편재는 어떤지 궁금해졌다.
그는 '정무당'항목을 살펴봤다.
책자에 의하면 정무당은 영반인 남궁비를 중심으로 이십
명의 향주와 각 향주 밑에 정규 편성인 열 명의 조원과 예비
인원 오명식, 총 십육 명이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또 사
범단(사범단)이라 하여 무림 명숙들이 대거 얼굴을 내밀고
있는 조직이 따로 붙어있다. 그 외에도 장차에는 무맹으 주
력 중 상당수가 정무당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걸로 계획돼
있다.
상운양은 혀를 내둘렀다.
비교하자니 자신이 맡은 당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껴졌지
만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어차피 자신은 무맹에 아무런 기반도 없고, 몇 개월 뒤, 소
림의 스님들이 회복하면 물러날 처지다. 애초부터 정무당과
비교하여 이것저것 자격지심을 지닐 이유 따위도 없다.
어느덧 급하게 대충 지어진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설프게 급조된 그 건물에는 <척마당>이라는 현판이 걸
려 있다.
상운양은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했다.
'어쨌거나 처음으로 맡은 감투인데 의젓하게 행동해야지.'
그는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한 뒤 바싹 긴장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상운양은 척마당에 소속된 사람들, 아마도 자신의 부하일
그들을 눈앞에 뒀다.
그는 그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세명의 향주 중 가장 첫 번째 인물.
자신의 이름이 한신이라고 말한 뒤 입술 한 번 달싹이는
법 없이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얼마나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
했는지 창백하다는 수식어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아니,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정도다.
거기다 무서우리만치 비쩍 말랐다.
싸구려 청의(청의)를 걸치고 한 자루 왜도(왜도)를 매만지
는 그의 무심한 얼굴에 상운양은 말 걸기조차 거북했다. 그
래서 재빨리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번째 향주는 적당히 나이 먹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별호는 천리유객(천리유객), 이름은 이유(이유)라고 했는
데 오량의 강력한 추천으로 척마당에 들었다고 했다.
그는 <무공은 별로지만 중원의 지리에 달통해 있고, 각지
의 방언과 풍습에 능통하여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비
천개 오량의 소개장을 불쑥 나맬었다.
전반적으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 같은 얼굴로, 여
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인상이 좋은 것 같았다.
척마당 사람들은 의외로 다들 얼굴이 험상궃었다.
세 번째 향주는 놀랍게도 애송이였다.
열여섯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년이 머리에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손에는 한 자루 보검을 든 채 버티고 서 있는
데, 그 용모만큼은 절로 감탄사가 나올 만큼 영준했다.
그러나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쓸어보고 있긴 하지만 아직
어린 티가 채 가시지 않은 데다, 그 눈초리에는 '날 무시하
지 마! 난 애가 아니야!'라는 말이 쏟아져 나오는 게 훤히 보
였다.
이 애는 업신여기지 않으려고 꽤나 신경 쓰는 중이었다.
이름이 남궁악으로, 남궁세가의 인물이라고 했으나 상운
양은 무심결에 넘겨버렸다.
부당주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남은 열다섯 명의 하급 무사는 지닌바 능력은 어쨌든지
간에 그 인상만은 다들 삭막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인상만
으로도 적을 물리칠 수 있을 만큼 험악하게 생겼고, 또 성격
도 그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들이 대체 어떤 경
로로 이곳 척마당까지 왔는지 상운양도 쉽게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들은 아마 상관의 적극적인 추천을 통해 여기로 보내졌
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인사말과 함께.....
이 열다섯은 여기저기서 모은 듯 복장도 무기도 갖가지였
지만, 구태여 공통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상운양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윽고 상견례가 끝나자 어색한 침묵이 계속됐다.
상운양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뭔가 한마디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러분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가 이번에
미력하나마 이 척마당을 맡게 된 상운양이라 합니다."
그런데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디에건가 비웃음이 터
져 나왔다.
"후후! 우습군. 무림 대사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향주는
종남의 반도에다가 남궁비 놈의 어린 동생!"
상운양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에도 왠지 시비조인 말은 계속 이어졌다.
"당주는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에다가 부당주는 남궁비의
계집년이라니....."
'청년'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삭아버린 이십대 사내가 그곳
에 있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였는데 상운양 못지않게 큰 체격에,
다듬지 않은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 등 뒤에는 큰 감산도 하
나를 비끄러매 전체적인 형상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
상운양은 그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통 알 수 없었다.
도대체 모를 말투성이다.
'종남의 반도?'
'남궁비의 동생?'
'남궁비의 계집년?'
뜻을 모르니 화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대신해서 화
를 내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 남궁비의 배다른 동생 남궁악
이다.
"당신은 누구기에 형님을 '놈'이라 하는 거요?'
남궁악이 그 준수한 얼굴을 붉힌 채 대들자 그 이십대 사
내는 바닥에 침을 탁, 뱉더니 같이 핏대를 올렸다.
"나 말이냐? 간악한 네놈의 형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곳까지 굴러 들어온 하북(하북) 팽가(팽가)의 팽조운(팽
조운)이라 한다."
"누구더러 간악한 놈이라 하는 거요?"
"누구긴 누구야, 남궁비 그놈이지!"
"그, 그말 취소하시오."
입씨름이 점점 험악해졌지만 아무도 말릴 생각을 않는다.
오히려 이죽거리며 바라보기까지 한다. 오로지 천리유객 이
유만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따름이
다.
상운양 역시 두 사람의 전후 사정이 짐작 가지 않아 어떻
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무림중(무림중) 은은원원(은은원원)이라더니.....'
상운양이 나서지 못한 채 전전긍긍할 때 갑자기 문이 열
리고 한 여인이 청년을 대동하고 들어왔다.
상운양은 나타난 여인과 청년을 바라보고 놀랐다.
여인은 생전 처음 보는 바이지만 청년은 다름 아닌 정운
(정운)이다.
항주에서 순천부까지 보표행을 같이 했던 정운.
이런 곳에서 정운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기에 무척이나
놀랐다.
정운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잠시 우뚝 서 있었으나 곧 정
신을 차리고 상운양에게 다가왔다.
얼굴에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상 형, 오랜만이야. 이런 데서 상 형을 보게 될 줄은 몰랐
는데? 상 형도 무맹에 투신했어?"
"그런 셈이지. 그런데 정 형은 무슨 일로 여기에?"
상운양의 물음에 정운은 손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계속 싱
글거렸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소림 속가제자야, 그런데 구파일방
이 마맹하고 크게 한번 싸우기로 작정했는지 요즘 대대적으
로 속가제자들을 동원하고 있거든, 그래서 우리집도 아버지
랑 형제들 모두 소림사 깃발 아래 뭉쳐 무맹까지 오게 됐어.
여기 와서 각자 여기저기 흩어졌는데 나는 이번에 새로 창
단된 척마당에 가라던데."
상운양은 사정이야 어떻든 뛸 듯이 기뻤다.
모르는 사람 천지인 이곳 척마당에 아는 사람이 한 명이 들
어왔다.
'정말 다행이다.'
정운 또한 이 재회를 기꺼워했다.
그 역시 이 척마당에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상 형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지? 순천부에 갔던
일이 잘 안됐나 보지?"
상운양은 정운에게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해주려했다.
그러나 방안 다른 쪽에서 벌어진 상황은 상운양으로 하여
금 한가하게 지우(지우)와 회포를 풀 틈을 주지 않았다.
남궁악과 팽조문은 그새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치닫고 있
었다.
그들은 언제 빼 들었는지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일이 이렇게 살벌해지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긴 했지만 그
래도 당주였기 때문에 상운양은 어쩔 수 없이 참견하려 했
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먼저 정운과 같이 온 여인이 이들을
말렸다.
"팽 소협, 그리고 남궁 소협, 왜들 이러시죠? 이렇게 좋은
날 칼부림이라니요. 좋게좋게 말로 해결하세요."
그녀의 말이 효력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지만 두
사람은 칼을 거뒀다.
솔직히 사사로운 싸움을 하기엔 여긴 자리가 안 좋았다.
그런 연유로 무기를 거두며 팽조운은 "너 오늘 재수 좋은
줄 알아라!" 하고 비아냥거렸꼬, 남궁악도 여기 지지 않고
"누가 할 소리!" 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싸움이 흐지부지 끝나자 그녀는 상운양에게 다가
왔다.
"상운양 당주시죠?"
상운양은 그제야 그녀를 자세히 볼 기회를 잡았다.
나이는 적어도 스물둘 정도, 자신에 비해 연상인 것 같았다.
그녀는 눈에 띄는 화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인이었다.
글씬한 키에, 허리까지 닿든 차랑차랑한 긴 머리를 묶고
있고, 날렵한 홍의 경장 차림에다, 선명하고 도발적인 미모
로, 복화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여인이 훨씬 예뻤다.
상운양은 여인의 그런 미모를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다가
어떨결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만, 소저는 누구신지?"
상운양의 붉어진 얼굴에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후후...., 말씀 낮추세요. 저는 이번에 부당주로 임명된
화산 제자 이미연이라고 해요. 잘 부탁 드려요!"
"아, 예!"
상운양은 쩔쩔맸다.
쳐다보기만 해도 얼굴 붉어지는 미모의 여성이 부당주?
그는 최소한 삼십대 이상의 노련한 무림 고수가 부당주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크게 빗나가 버렸다.
서로 간에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 애초부터 마음이 안
맞는 것처럼 보였던 척마당 소속의 무사들은 흩어지고 그
자리에는 세 명의 향주와 팽조운, 그리고 정운만이 남았다.
부당주 이미연 역시 볼일이 있다면서 횅하니 나가버렸다.
대화의 단절이 이어지다가-주로 팽조운과 남궁악에 기
인한 바가 크지만-참다 못한 정운이 상운양을 넌지시 불렀
다.
"당주님!"
이미연과 상운양의 산견례를 통해 상운양의 직책에 대해
알게된 정운은 어색했지만 이렇게 불렀다.
공과 사는 엄하게 구분해야 한다는 게 대대로 무학사를
해온 그의 집안에 있어 만고불변의 진리다.
때문에 그는 일단 상운양에게 존칭을 붙였다.
하지만 정운에게 이런 호칭을 듣는 상운양은 다소 껄끄러
웠다.
"저, 정 형. 옛날처럼 그냥 이름을 불러. 좀 어색한데..."
정운은 상운양이 이렇게 말을 더듬자 그 얼굴을 마주보고
실소를 흘렸다. 방금 전까지 호형호제(호형호제)하던 사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호칭을 하려니 그 자신도 혀가 굳어
지던 참이다.
젊은 두 사람은 의논끝에 공석에서 꼭 필요할 때만 당주
라 칭하고 그 외에는 호칭에 크게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호칭문제가 해결되자 정운은 상운양을 문으로 잡아끌었다.
"자, 자! 상 형 우리 가자구!"
상운양은 어리둥절 했다.
'가자니, 어디로?'
"잊었어, 상 형? 다시 만나면 한잔하기로 했잖아. 가자고!
오늘 상 형을 만난 기념으로 실컷 마셔야겠어."
비로서 상운양은 정운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았다.
분명히 순천부에서 헤어질 때 다시 만나면 한잔하기로 약
속한 적이 있다. 농담이겠거니 하고 살펴봤으나 정운은 진
지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진심인 것 같다.
상운양은 잠시 망설였다.
그는 아직까지 제대로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지 않다 보니, 그 역시 아버지의 영향
을 받아 거의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 가자!'
인생 살다 보면 어쩔수 없이 술 마셔야 할 때도 있는 법이
다.
***
무맹이 있는 화산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수우촌
(수우촌)의 유일한 주가(주가) 왕가점(왕가점)의 주인 왕팔
(왕팔)은 오늘이 꽤나 재수 없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무맹에서 무슨 창단식을 한다던가 하면서 후하게 값을 쳐
준 뒤 근처 백 리 안의 술 동이를 모조리 쓸어가는 일이 생겼
는데, 다른 마을 주가들은 팔 술이 모자란다고 즐거운 비명
을 지르는 이때, 그의 가게 술만은 그 엄청나게 남는 장사에
서 제외됐다.
물론 그의 가게에도 술 동이를 사러 무맹에서 오긴 왔었다.
그런데 왕팔은 최근 불경기이다 보니 그만 돈 욕심에 술
에다가 마구 물을 타서 양을 대폭 늘려 무맹에 넘기려 했다.
일은 다 잘되어 가는 것 같았다.
한데 무맹 사람들이 막 술 동이를 마차에 실으려는 순간
웬 거지 하나가 들어와서 코를 벌름거리더니 술에 물 탄 것
을 귀신같이 알아내고는 훼방을 놓아버렸다.
새하얗긴 하지만 한 백 번은 기워 입은 듯한 옷, 거지답지
않게 깔끔한 차림새, 손에 든 개방도의 신표, 매듭있는 죽장
만 아니었다면 거지라고 생각되지도 않을 그 중년 거지는
제법 지위가 높은 듯, 그가 한마디하자 무맹 사람들은 찍소
리 한 번 못하고 술 동이를 다시 내려놓고서는 그냥 가버렸
다.
덕분에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술 동이를 다시 창고에 들여
놓으며 그는 분노에 떨어야 했다.
물론 자신의 장사를 망친 그 거지 녀석에게..
왕팔이 한참 씩씩거리고 있을 때 주가의 문이 삐거, 하며
열리더니 몇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왕팔은 손님이 들어오자 얼른 인상을 펴고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허리에, 등에 병장기를 차고 비끄러맨 품
이 무림인들 같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무림인이라면 무맹
사람밖에는 있을 턱이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왕팔은 "어서 옵쇼!" 하며 허리를 숙였다.
잘만하면 오늘 본전 뽑을 수 있겠다, 싶었다.
'장사 안 되는 날 들어오는 손님은 덤테기 쓰는 걸로 술장
사는 정해져 있으니 나를 너무 원망 마라.'
왕팔의 머리는 벌써 술 값을 몇 배로 부풀릴지 계산하느
라 분주하다.
술집에 들어서며 상운양은 어쩌다 이 많은 사람이 함께
오게 됐는지 되짚어 봤다.
일행은 일곱 명이나 됐다.
우선 자신, 그리고 술 마시러 가자고 그를 끌고 온 정운이
있다.
다음으로 따라 나선 것은 천리유객 이유인데, 그는 "이왕
같이 지내게 된 것 친해보세." 라면서 왔다.
그 다음 "에잇! 속상한데 술이나 퍼마셔야지!" 하면서 팽
조운이 같은 주가로 왔고, 무슨 생각에선지 남궁악이 이를
뿌드득 갈면서 그 뒤를 쫓았다.
또 의외였지만 한신도 있다.
그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술이라...."하며 따라왔는데,
그 목소리는 너무나 작아서 상운양은 한신이 진짜 그런 말
을 했는지 어쩐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화산의 산문을 나서다가 이미 어딘가에서 마
실 만큼 마신 오량을 만났는데, 그는 이유과 친구인지 "야!
이가야. 같이 한잔해야지." 라며 일행이 됐다.
오량은 주가에 거의 다다라서 잠시 소피를 보고 오겠다며
숲으로 들어갔는데 아마 곧 이 술집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자리에 앉은 일행은 술이 나오자 마시기 시작했다.
성격이 다른 만큼이나 마시는 방법도 달랐다.
상운양은 술을 생전 처음 마시는 거라는 내색도 못하고
들이켰는데 그 씁쓸함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정운은 여린 외모와는 반대로 얼마나 술을 좋아하던지 상
운양에게 신나게 권하면서 마셔대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
게 주량이 셌다.
한신은 탁자에 놓인 술잔을 감회어린 깊은 눈으로 바라보며
홀짝거리기만 했고, 남궁악은 정운에게 술잔을 받아놓고도
마실 생각은 않은 채 그저 인상만 썼다.
가장 무식한 방법으로 마시는 것은 팽조운으로, 그는 동
이를 통째로 들고 술을 목구멍에 콸콸 흘려 넣었다. 그의 옆
에서는 이유가 "저런 폭음은 몸에 좋지 않은데..."라고 중
얼거리며 자음자작 중인데 그는 이 자리에서 주도(주도)의
정석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마셔라! 마셔!'
왕팔은 신바람이 났다.
여섯 명이 마시는 술치고는 양이 많았다.
그건 팽조운이 무식하게 동이째 퍼마신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지만, 어쨌거나 왕팔은 장사가 잘되기에 아까의 불쾌
한 기분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인간 만사 새
옹지마라고 돌연 가게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서는
순간, 그의 기분은 다시 구정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나빠졌
다.
아까 그 중년 거지가 기세도 당당하게 가게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다. 그새 어디서 한잔 했는지 얼굴은 벌게져 있
고, 바지춤이 헤벌어져서 내의가 보이는데 내의 역시 겉옷
못지않게 많이 기워놓은 게 보인다.
그 거지는 주저함 없이 술 마시는 손님들에게 다가갔다.
'헉! 저 .... 저 작자가!'
왕팔은 우거지상이 됐다.
아까 한 걸로 모자라는지 그 거지 녀석이 또 장사를 망
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기우와 달리 그 중년거지는 손님과 일행인지 그들
과 동석하더니 마구 마셔댔다.
그제야 왕팔은 안심했다.
오량이 술판에 끼여들자 술자리는 더욱 난장판이 됐다.
오량의 주량 역시 만만치 않아 팽조운 못지않게 마셨다.
두 사람은 죽이 맞아 술 동이를 가운데 놓고 아예 주발로
퍼 마셨다.
"자, 우연한 만남에 건배!"
오량의 혀 꼬부라진 말이다.
평상시의 깔끔하고 단정하던 히상한 거지 오량은 어디로
가고 지금 뱃속에 술이 들어간 그는 그 누구보다도 지저분
하다.
역시 사람은 술을 먹어야 본성이 나오는 법이다.
"좋지요! 마십시다! 마셔!"
그 사이 한자리 낀 정운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팽조운의 고함이 압권이었다.
"어이! 주인 퍽퍽 가져 와!"
죽으라고 마셔대는 세 사람을 보며 이유는 혀를 찼다.
"쯧쯧! 뭘 모르는군. 오가 녀석은 주전신공(주전신공)을
익혀서 저러고도 괜찮겠지만 저 녀석들은 어떨지 몰라."
얼마 후 술에 취할 만큼 취한 세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마
시는 게 성이 안 차는지 찔끔거리는 상운양과 남궁악을 붙
들고 그들의 잔을 마구마구 채워줬다.
무림의 대선배인 오량의 권주에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된
두 사람은 얼마후 탁자에 고개를 쳐박아 버렸다.
거나하게 취한 일행은 정신을 잃은 상운양과 남궁악을 들
쳐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잘 마셨으니 이제 집에 가서 자야지!"
오량이 중얼거리며 술 값 계산도 하지 않고 나가자 왕팔
이 뒤를 쫓아 나왔지만, 오량의 "너 술에 물 탔지?" 라는 이
한마디와 팽조운의 무력 시위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서야
만 했다.
팽조운이 오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지막지한 주먹을
번쩍 들어서 탁자를 한 번 내리쳤는데 그 길로 탁자가 땔감
으로 쓰기 딱 적당한 크기의 장작나무로 변해버렸기 때문이
다.
왕팔은 울화통이 터졌지만 얼마 후면 기분이 좀 나아질
터였다.
오량이 은자 한 냥을 슬쩍 계산대 위에 던져놓고 나갔으
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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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