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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살아오면서 창피함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것이 나를 가장 부끄럽고 당황스럽게 만들었을까요?
길을 가고 있는데 내 바지의 지퍼가 열려 있음을 발견할 때는 어떨까요?
예전에는 많이 창피했었는데 이제는 뭐 그럴 수도 있다 싶습니다.
바지 지퍼를 환하게 내놓고 다니는 사람은 저 말고도 너무 많이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를 하는데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아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 때 몹시 창피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저 역시 배우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러자 이 역시 그렇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제가 원했던 성적보다 낮게 나와서 부끄러웠던 과거를 떠올려봅니다.
이 역시 이제는 그렇게 창피하지 않습니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 공부 잘 못했어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것을 나만 잘 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때 창피했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신부가 되기 전까지 수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 근처만 가면 작아지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창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수영을 배워서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수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배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어떤 생활이든 창피한 생활이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한 것이 많은지요?
정말로 우리가 창피해야 할 것은 하나뿐입니다.
바로 주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아서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창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뒤에 어떠했습니까?
너무나 부끄러워서 도저히 자신 있게 자신들의 몸을 드러내놓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숨어 있으니 동산 나무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좋은 씨가 어떤 곳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길가, 돌밭, 가시덤불 속에 떨어져서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져야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 하나를 갖게 됩니다.
왜 농부는 길가, 돌밭, 가시덤불 같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곳에 씨를 뿌리는가라는 의문이지요.
이런 어리석은 농부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부분은 차별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악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구원의 길에서는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응답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주님 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우리였을까요?
부끄럽고 창피해서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 창피함을 극복해서 세상 밖으로 나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할 때,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은 처음부터 결정돼 있는 것일까?>
요즘 세상이 예전처럼 유동적이지 못해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이 매우 힘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수저, 혹은 흙수저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도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부터 인생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제가 신학교 들어왔을 때의 첫 피정에서 처음으로 했던 작업은
자신의 인생을 가장 처음부터 기억나는 대로 써 보는 것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저를 불러주셨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가장 첫 기억에서부터 저를 부르고 준비시키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로 부르심 받은 저의 삶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다른 사람은 아니고 왜 나는 불러주셨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인생은 그렇게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마치 주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가 말을 할 줄 모른다고 계속 거부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도 저의 인생을 그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느꼈을 때 일 년가량은 매우 강하게 반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부르시면 결국 응답할 사람인 것까지 잘 아시기에 멈추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부르심을 통해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는지도 이미 다 계획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그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삶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도 어렸을 때의 모습을 보며 미래를 감히 점칠 수 있다면,
주님이야 우리가 어떻게 자라고 살아가게 될 것인지 모르실 리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될 성 부른 나무를 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밭에 뿌려 놓은 씨 중에 자라나는 것들을 살펴보고
그저 될 성 부른 나무를 찾아 더 물을 주고 가꾸어주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도와주시는 것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을 다 성인의 삶으로 만들지 않으신 주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분이 되십니다.
마치 영재교육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아이들은 보통의 교육으로는 안 되기에 특별히 관리하기도 하는데,
주님은 될 성 부른 나무들을 그렇게 알아보시고 당신 도구로 특별히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씩이나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의지가 자녀에게 분명히 영향을 미치게 됨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사실 사람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안 가지고는
하느님께 달렸다기보다는 부모나 주위 환경에 더 많이 좌우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받을 조건을 다 갖추고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모두를 그렇게 창조하실 수 없으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뜻이 됩니다.
인간 자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녀들에게 신앙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지 못해 자녀들이 잘못된다면 얼마나 큰 책임을 져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즘 보면 자녀들과 함께 묵주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고
세상의 공부를 먼저 시키면서 신앙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것은 두 번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누군가의 의지를 떡잎부터 알아보고
그런 소명에로 이끌 수 있는 농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조선조 홍서봉의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고 합니다.
손님이 왔을 때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고기를 사오라고 하였는데 고기가 상하여서 땅에 묻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시집올 때의 패물을 모아 나머지 고기를 다 사오라고 하여 땅에 묻고는 집에 있는 것만으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남들이 그 상한 고기를 사갈까 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며 자란 홍서봉은 장차 어떤 인물이 되었겠습니까?
정승이 되어 선정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면 하느님보다 자녀에게 더 큰 영향을 자녀에게 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가 모두 이런 모습이기를 원하시지만
주님은 주님 나름대로 인간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는 한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희망을 주님께서는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할 뿐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주님께 될 성 싶은 나무로 키우는 길입니다.
- 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수고와 땀의 열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씨앗이 튼실해야 하고 땅도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알맞은 기후가 필수입니다.
그러나 기후는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힘을 다하고 그 다음은 하느님의 몫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씨앗의 비유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졌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땅이 중요합니다.
좋은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좋은 씨앗이 아니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씨앗과 좋은 땅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알맞은 기후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니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삼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좋은 땅이 아니라면 땅을 일구고 거름을 하여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는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또한 좋은 씨앗을 구하려면 그만한 경륜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후를 맞추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달려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환경을 얼마나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좋은 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우리의 수고와 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후 열매는 하느님께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씨앗인 말씀이 있어도 무관심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좋은 밭인 마음이 있어도 전해주는 말씀이 없으면 또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마음을 열어주시면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교부 푀멘)
그리고 말씀은 귀로만 들을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겨들어야만 참된 이익을 거둘 것입니다.
더더구나 말씀대로 실천하게 되면 그 말씀의 능력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이러저러한 일에 접하게 되고 서운함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길바닥, 돌 밭,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것도 있지만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반드시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일은 적잖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결실은 내 생각대로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고와 땀으로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길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신앙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마태 13,18).
그런데 비유의 표현만 보면,
씨 뿌리는 사람이 길에 씨를 뿌린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렇게 생각하면 씨를 뿌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비유의 의도를 생각하면,
씨 뿌리는 사람은 좋은 땅에 씨를 뿌렸는데
그 땅이 나중에 길이 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에게는 옛날 이스라엘의 실제 농사법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중요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각자 자신의 신앙생활 상태를 반성해 보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처음부터 ‘길’인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실 때,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창세 1,26-27).
죄를 지으라고 만드신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땅’이었는데 ‘길’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났을 때 걸려 넘어지는 사람입니다(마태 13,21).
그런데 처음부터 돌밭인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땅에서 돌밭으로 변한 사람만 있을 뿐입니다.
누구든지 세례를 받을 때에는,
어떤 환난이나 박해를 받아도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닥치면,
어떤 이는 순교자가 되고 어떤 이는 배교자가 됩니다.
누가 순교자가 될지, 누가 배교자가 될지는 처음에는 모릅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리 심한 박해를 받아도 배교하지 않을 사람이다.”라고 자기 스스로 큰소리치면 안 됩니다.
그런 자만심은 위험합니다.
항상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면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마태 26,31) 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습니다(마태 26,33-35).
그러나 유다는 배반했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달아나버렸습니다(마르 14,50).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숨이 막혀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마태 13,22).
(여기서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을 하나로 합해서 생각하면,
‘재물의 유혹’은 세상 걱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숨이 막힌다는 것은,
세상 걱정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생활도 못할 정도로...
그런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가시덤불 속에 뿌린 것은 아닙니다.
원래는 좋은 땅이었는데, 나중에 가시덤불이 자란 것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신앙인이었는데, 자기 안에 가시덤불 같은 걱정이 자라는 것을 방치한 것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걱정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걱정거리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걱정만 하고 있다면 숨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걱정에서 해방되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34)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좋은 땅에서 길, 돌밭, 가시덤불로 변했다고 해도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회개하고 노력하면 다시 좋은 땅으로 복구될 수 있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길’로 변한 채 끝나버렸지만,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다른 사도들은 모두 예수님께 되돌아왔고,
좋은 땅으로 복구되었습니다.
(박해 때 배교했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나중에 회개하고 다시 돌아온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끝내시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희망과 인내 속에 커가는 하느님 나라>
예수님께서는 서기 27년경부터 활약하셨는데
초기에는 인기가 높았으나 30년경 말기에는 인기가 떨어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는 고작 열두 제자와 몇몇 부인들만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간 듯 보이는 상황에서 아마도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핵심은 씨 뿌리는 것 자체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는 씨 뿌리는 농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나 마지막에는 큰 기쁨을 안겨 줍니다(13,8).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기대와 희망을 두며 살아가는 하느님 나라는
거듭된 실패에도 성장해가며 어떤 경우에도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씨 뿌리는 사람은 결과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씨가 어디에 뿌려지듯 성장해가고 최선을 다하여 결실을 내는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실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은 결실도 그것을 내는 이에게는 넉넉한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을 보여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반사하는 거울이요 씨앗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고통의 바다에서 살아가지만
주님 때문에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는 가진 것이 없고 배우지 못해서, 때로는 정의의 편에 선다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기도 하고,
거대한 자본의 힘이나 부당한 권력 행사 앞에 불의하게 짓밟히는 억울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모두가 협력하여 가꾸어나가야 할, 인간의 마음속에 던져진 한 톨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수 날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이 작은 씨앗을 잘 가꿔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배척과 소외, 차별과 불의에 맞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랑과 정의의 나라를 회복시키려고 투신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 차별받는 이들 곁으로 다가가
진정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랑과 정의를 위해 투신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정의를 부르짖고 정의롭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부당한 탄압과 고통을 더 심하게 겪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당장 어려움, 문제, 대결, 심지어 죽음의 위협에 맞서게 됩니다.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로운 행동과 말, 사소해 보이는 작은 배려와 사랑의 몸짓이 별 볼일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며 끝까지 이런 실천을 이어갈 때
희망이요 사랑이신 그분께서는 그 작은 씨앗을 통해서도 넉넉한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보잘것없는 사랑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이루시고 우리 삶을 변화시켜주시며 바로잡아주시는 주님의 권능을 믿고
인내하며 그분께 나아가야겠습니다.
온갖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씨뿌리는 사람 - 절망은 없다>
마태복음 13장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들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이어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 그물의 비유로 끝맺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생애를 상기시키는 비유들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은 그대로 예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하여 제목은 ‘씨뿌리는 사람’으로 했고, 부제로는 ‘절망은 없다.’로 정했습니다.
저 역시 미사 주례 하든 않든 1년 365일 매일 새벽마다
씨뿌리는 사람처럼 잘 쓰든 못 쓰든 개의치 않고 강론을 씁니다.
씨뿌리는 사람을 제목으로 정하니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프랑스의 장 지오노의 소설이 생각납니다.
묵묵히 나무를 심어 황무지를 울창한 숲으로 만든 사람에 대한 감동적인 실화의 작은 분량의 소설입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잔잔한 감동과 위로를 줍니다.
비상한 결과나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그 누구도, 환경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과정에 충실하는 모습은
말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믿음을 닮았습니다.
이런 삶이 진정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일희일비, 경거망동하지 않고 우보천리 한결같이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모습입니다.
살다보면 늘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맑은 날이 있으면 흐린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고 폭풍우치는 날도 있습니다.
동요하지 않고 시야를 넓게 하며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삶은 리듬입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등 리듬따라 흐르는 삶입니다.
그러니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고 한결같이 그 삶의 자리에 충실한 것이 제일입니다.
바로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정주의 삶을 사는 우리 분도수도자의 삶이 그러합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시의 첫째 연이 이를 잘 표현합니다.
-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삶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말씀의 씨든 선행의 씨든, 씨를 뿌리다 보면
길가에 뿌려질 수도 있고, 돌밭에 뿌려질 수도 있고, 가시덤불 속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에 개의치 않고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다 보면
마침내 좋은 땅에 떨어져 백배, 예순배, 서른배의 열매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도 이와 일치합니다.
하느님이 농부이고 농사의 80%는 하느님이 지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환경이나 결과에 개의함이 없이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태도입니다.
평범한 듯 하나 비범한 삶이요,
이미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이 배어있는
진선미(眞善美)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삶에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요, 우리 삶의 자리 지금 여기가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할 자리는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예례미야의 성소 체험이 감동적입니다.
주님과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을 나눕니다.
하느님 ; “모태에서 너를 빋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예레미야 ;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 ; “‘저는 아이입니다.’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예레미야 같은 비상한 성소만 아니라
우리 역시 나름대로 다 고유의 성소를 지닙니다.
예레미야만 아니라 우리도 이미 하느님이 모태에 빚기 전에 우리를 알아 성별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세례성사가 이를 입증하며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의 성소를 확인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예레 1,8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씨를 뿌리는 것은 땅에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생명의 씨앗이 열매를 맺으려면
햇볕과 비, 그리고 땅의 재질, 농부의 인내 등 많은 요소가 함께 작용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당신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농사는 그 작물의 종류, 기후, 토지 등에 따라 그 짓는 방법이 차이가 납니다.
하느님의 농사법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땅을 차별하여 고르지 않고 어디든지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더 좋은 땅만을 골라 효과적으로 씨앗을 뿌리면 좋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마음에 씨앗을 뿌려 모두를 당신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미리 제외해 버리는 것은
사랑이신 당신의 본질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농사법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인내와 기다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애는 늘 기다리는 것입니다.
씨 뿌린 이가 그것이 빨리 자라도록 절대로 강제하지 않듯이,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이 나에게 다가오기를 바라고,
오해했던 것이 풀리기를 기다리고,
나의 변화된 모습을 알아봐 주기를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먼저 잘라 내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가 된 열매는 기쁜 마음으로 거두시지만,
돌밭에 떨어져 열매 맺지 못한 씨앗은 누구보다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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