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편 6절: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시느냐? 진실. 그렇다면 어떤 진실을 원하시는지 우리가 알아야 한다. 진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원래는 진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인간이 타락된 이후에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고 타락된 인간중심에서 나온 진실이 하나 더 생겼다. 생명과를 따먹고 나온 진실이라야 참 진실인데 선악과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진실이 또 하나 있으니, 이 진실은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죽은 진실이다. 이 죽은 진실은 생명적인 것만 들어가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로마군인들의 진실이 예수님의 진실과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 진실의 성질이 하늘로부터 되어진 진실이 있고, 땅으로부터 되어진 진실이 있는데, 땅으로부터 되어진 진실은 땅에서만 필요하고, 하늘로부터 되어진 진실은 하늘나라까지 들어가는 진실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진실을 가져야 하겠느냐? 하늘에 속한 진실을 가져야 한다.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된 진실을 가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이 진실 하나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가짜 진실을 점령하고 들어가는 거다.
우리가 보면 순 토종 농산물이 있고, 외국에서 들어온 농산물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다 비슷하게 생겼다. 그래서 국산 농산물에 외국 농산물을 살짝 섞어놓으면 구별이 안 된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진실을 가져야 하는데, 거짓된 목사나 거짓된 교인들이 인간의 진실을 그 안에 살짝 살짝 끼워놓으면 사람들은 잘 모른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것을 찾는데 전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궁극적이고 영원히 가는 진실을 가져야 한다. 진실이라고 해서 다 같은 진실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에서 나오는 ‘진실’과, 안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은 말과 글자는 같은데 그 성질이 다르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진실은 천 년 만 년 가는 주님의 진실과 똑같은 것이라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진실을 참 진리진실로 알면 안 된다. 선악과 따먹고 나온 진실과, 생명과 따먹고 나온 진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타락된 인간의 진실이냐? 온 세상이 다 옳다고 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그것을 주장하는 게 타락된 진실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이런 주장성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전부가 임시성적인 세상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락된 진실이라고 한다. 예수 믿는 내가 이걸 알고 주님의 진리진실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성경을 깨닫는 거고, 예수를 바로 믿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축복 주옵소서. 내 소원 목적이 이러니 이걸 이뤄주십시오’ 하며 벌벌 떨고 눈알을 뒤집고 하는 게 기독교가 아니다. 복음이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것, 하늘나라, 신령성에 속한 것을 마다하고 세상과 세상 것을 주장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의 진실이다. 주님의 진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고 나온, 영생이 되는 말씀을 먹고 나온 그 정신에서 소원 목적을 가지거나 행동을 하는 거다. 이 진실은 성령님께서 함께 해서 나온 진실이다. 몸을 벌벌 떤다거나 몸에 진동이 오는 것을 성령으로 보지 말아라. 하늘나라의 고차원적인 진실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의 소원 목적이 항상 하늘나라의 것을 마음에 담고 있으면 이 사람은 늘 성령의 감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식의 감화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할 때는 성령님도, 주님도 같이 있는 거다.
진리로 된 진실은 선악과 따먹은 이방 세상사람에게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거지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선악과 따먹은 기준적인 정신을 가지고 성경을 써먹는 거다. 이건 거짓이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고 했으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들의 영은 죽어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영이 죽은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 양심대로 진실하게 한다고 해도 선악과 따먹고 나온 타락된 지식의 정신으로 되어있다. 따라서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진실을 알아주지 않는다. 왜냐? 선악과 따먹고 타락된 데서 나온 죽은 진실이기 때문이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살았다고 해도 이들이 하나님을 아느냐? 모른다. 가르쳐 줘도 믿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하나님을 싫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싫다고 하며 자기 양심대로 사는 게 바로 사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거다.
인간 자기가 이 세상에 제 마음대로 태어났느냐? 하나님의 지으심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자기를 지었느냐? 진리진실로 살라고 성경을 주었고, 그 다음에 우주만물을 지어서 그 가운데 살면서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진리진실의 사람이 되라고 나를 지은 거다. 성경에서 배워서 세상에서 써먹어라 그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바로 산다고 하며 그것이 진실한 거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 이들은 항상 하나님과 대립이 되는 거다. 하나님이 가지신 진리진실과, 인간 자기의 진실과 대립이 되면 자기에게 기쁨이 오겠느냐, 고통이 오겠느냐? 고통이 온다.
혹 부모와 자식의 지식이 대립이 되는 게 있다. 이유야 어떻든 서로가 대립이 되면 고통이 온다. 이럴 때 아이고 어른이고, 늙고 젊고 간에 모두가 생명과 먹은 진리진실을 판단할 수 있는 지식을 가져야 만이 대립 없이 살 수 있는 거다. 이것이 안 된 채로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더라도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늘 대립이 된 채로 사는 거다. 우리는 이런 사람과는 싸울 필요가 없다. 왜냐? 이들은 죽은 지식을 가지고 자꾸 대립을 하는 거니까 진리진실을 가진 사람이 이런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는 거다.
세상사람들이 왜 자꾸 예수 믿는 사람과 대립을 일으키는 거냐? 진리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망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항상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하는 것을 선악과 따먹은 지식을 가지고 판단을 한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은 판단하는 지식도 사람들의 양심에 따라 제각기 다르다. 그러니 어느 기준에 맞추느냐?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과, 이방 종교인과는 양심에서 판단되는 지식 자체가 다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옳다고 판단을 내리는 지식과, 믿는 사람이 옳다고 판단을 내리는 지식이 서로 다른데, 믿는 사람은 신령천국에까지 옳은 것으로 인정이 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옳다. 진실하다’ 라고 하는데, 안 믿는 사람은 이런 것은 전혀 모른 채 세상만을 염두에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며 ’진실하다. 진실하지 않다‘ 라고 한다. 그러니 어느 지식의 수준이 높으냐? 이제 높고 낮은 것을 질적으로 느낄 수 있겠느냐? 지식의 기준을 알 수 있겠느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중심’이란 진리 따르는 마음을 말한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영생하는 하늘의 지식과, 영원히 멸망되는 땅의 지식이 있는데, 믿는 우리는 땅의 지식을 기준 삼아서 살면 안 된다. 땅의 지식은 믿는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자타의 구원에 풀어먹고 써먹는 지식이다. 우리의 원 지식은 생명과 먹은 지식이니 이 지식을 기준으로 해서 일반지식은 써먹는 지식이다. 일반지식은 믿는 일이 잘 되도록 써먹는 지식, 활용적 지식이다.
하나님의 진리진실과, 세상의 일반적 진실은 그 근원부터 다르다. 선악과 따먹은 진실의 터는 땅에 속하고, 생명과 따먹은 진실의 터는 하늘에 속한 거다. 계:에 보면 생명수 강물 가에 생명나무가 심겨져서 이 생명나무가 그 물을 먹고 달마다 과실을 맺히는데, 생명수 물을 먹고 열린 과일이 구정물 맛이 나겠느냐, 생수 맛이 나겠느냐? 생수 맛이 난다. 그러나 세상지식을 먹고 나온 열매는 구정물 맛이 난다. 세상사람들은 이걸 모른다. 감도 못 잡고,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성경은 이걸 가르쳐 주고 있다.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인지, 선악과를 먹고 나온 지식인지 이걸 구별하고 분별할 수 있게 해 주고, 또한 사람 속의 지식이 진리지식인지. 비진리 세상적인 지식인지 알게 해 주고, 또한 영생하는 지식인지, 사망적인 지식인지 가르쳐 준다.
그러니 예수 믿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이런 걸 바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았느냐? 그렇다면 자기가 안 바른 지식으로 살아가야 하고, 언행심사 또한 진실 쪽으로 되어나갈 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의 사람으로 되는 거다. 이런 사람에게 성령님이 같이 하는 거고,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 거다. 그런데 이게 영 안 믿어지느냐? 매 주일마다 성경을 배우는데 이게 영 감이 안 잡히느냐?
세상사람들의 양심보다 더 정확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진실이다. 이게 제일 정확하다. 죽은 지식에서 나온 것은 질적으로 진실 된 것은 하나도 없다. 영이 죽은 데서 나온 지식은 영원히 가는 진실은 하나도 없다. 왜 그러냐? 그 지식의 수준이 바람을 타는 세상지식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질이 그렇다.
예를 들어서 나에게 돈을 빌린 사람이‘ 며칟날 꼭 돈을 갚겠다. 그 날 안 갚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라고 자기 양심으로 다짐을 하면서 진심으로 말을 할지라도 이 진심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고, 환경에 속하는 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계획을 틀어버리면 자기가 진심으로 한 약속은 틀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상대가 움직이는 것에 목적을 두고 말을 하면 그것을 듣고 판단하는 내 입장에서 ‘저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하는구나’ 하고 들어 넘겨야 한다. 그런 말을 절대시해서 나중에 ‘왜 그 날 약속을 안 지켰느냐?’ 라고 한다면 이건 자기 꾀에 자기가 속은 거다.
그런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 이유를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느냐, 다른 것에 이유를 붙이느냐? 다른 것에 이유를 붙인다. ‘나는 진짜로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도 받을 돈이 있어서 그걸 받아서 너에게 갚으려고 했는데 그 돈을 받지 못해서 나도 너에게 갚지 못했다’ 라고 한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환경에 속해 있고, 일에 속해 있고, 세상에 속해있는 진실에 속지 말아라. 그런 것으로 약속을 하지 말아라. 우리는 다만 매일 매일, 하루 하루 진실 되게 살면 되는 거다. 아무리 미래적인 약속을 할지라도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늘 밤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아니냐? 하나님께 속한 것을 네가 왜 건드리느냐?
일기예보가 하도 틀리니까 기상청에서 몇 억짜리 슈퍼컴퓨터를 샀다고 하는데, 그러면 몇 억짜리 컴퓨터가 날씨예상을 하면 구름이 가다가 그 몇 억짜리 컴퓨터의 예상을 들어주느라고 자기가 가려도 하던 길을 바꿔서 컴퓨터가 말한 대로 움직여 주느냐? 지금도 여전히 자주 틀리지 않느냐? 그러니 어떻게 보면 자기 몸에 이상증이 오는 것으로 일기예보를 맞히는 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이방인들은 제사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 여기에는 안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이 지식의 대립이 된다. 왜 대립을 일으키느냐? 옳다고 하는 지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제사 대신 추도식을 하는데, 이 추도식이 귀신에게 하는 제사인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인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거냐? 제삿날에 예수님 이름으로 예배를 올리면 그 자리에 마귀와 예수님이 같이 참석을 하는 거냐? 또는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서 같이 참석을 하는 거냐? 하나님도 불러놓고, 죽은 사람도 불러놓고 제사를 하면 하나님도 오고 마귀도 올 게 아니겠느냐? 그러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냐?
예수를 안 믿으면서 우상도 안 섬기는 사람보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더 어리석다. 우상을 섬기되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은 더 악하다. 예수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를 안 믿으면서 세상공부도 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혼자 열심히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배운 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해쳐가면서 산다. 이렇게 되면 배운 것이 도리어 사람을 더 악하게 만든 거다.
구약성경에 보면 북조 이스라엘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워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하더니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남자들은 다 죽고 여자들만 남으니 이방남자들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되어서 그 후손들이 혼혈족이 돼버렸다. 이게 뭐냐? 왜 혼혈족이 됐느냐?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 때문이지만, 이걸 정신 사상적으로 보면 단과 벧엘이 우상을 섬기니 우상을 섬기는 더 강한 이방사상이 이스라엘 안에 침범해 들어와서 이스라엘이 이것에 정복이 되니 그 사상과 결합이 되어서 순수한 이스라엘이 이방화 돼버린 거다.
우리교회는 영원 궁극적인 신앙지식을 가지고 이런 걸 구별 분별해야 한다. 구별 분별을 안 하면 우리교회도 이방화 돼버린다. 교회가 이방화 되면 굳이 그런 교회에 모일 필요가 없는 거다. 교회가 이방화 되어서 ‘할렐루야’ 하다가 벼락불을 맞는 거나, 이방 속에 들어가서 살다가 세상과 같이 벼락불을 맞는 거나 똑같은 거다.
오늘날 교회의 정신 사상이 얼마나 세상에 감염이 되어 있느냐? 이방정신 사상으로 얼마나 감염이 됐느냐? 우리는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속은 얼마나 감염이 됐느냐? 우리 부모들은 얼마나 감염이 됐느냐? 감염이 됐으면 된 것만큼 그 정신 사상 언행심사가 자식에게 내려간다. 그러면 자식이 그걸 또 이어받는다. 이렇게 되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느냐? 교회는 ‘얼마나 재미가 있느냐?’가 아니라 교회에 오면 사람이 정화가 되어야 한다.
믿는 사람이 이미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모르면 인간 자기는 스스로 옳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멸망을 당하고 만다. 기준을 모르니 그렇다. 그러나 진리진실, 하나님의 기준적 진실을 바로 알면 사람들마다 제각각 진실이라고 주장을 할 때 그 진실이 어디에 속한 것인지 판단을 할 수 있다. 오늘날 각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제각기 진실이라고 한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그 진실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기준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걸 원하신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먼저 진리지식의 사람으로 바꿔져야 한다. 그래야 만이 진실의 사람이 된다. 지식이 바꿔지지 않으면 진실의 사람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상 기존적 지식으로 되어있으면 아무리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진실의 사람이 안 된다. 이것은 일반적 세상지식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것이니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줄 런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알아주지 않는다.
진리지식에서 나온 진실을 가지고 있는 교인은 안 믿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일반적인 세상지식으로 사는 사람들과는 대화가 안 되는 거다. 대화를 할 적마다 지식 면에 대립이 돼버린다. 어떻게 대립이 되느냐? 안 믿는 사람들의 진실은 행동을 가지고 자꾸 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진실은 먼저 속사람이다. 사람의 정신 사상이 세상으로 틀어져 있으면 아무리 행동을 바르게 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진실치 못한 사람이라고 판정이 나버린다.
무를 보면 겉은 멀쩡한데, 겉에서 보면 하자가 없어 보이는데 칼로 잘라보면 속에 심이 들어있거나 바람이 든 것이 있다. 이런 건 맛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바람이 든 사람은 아무리 진실하다고 해도 그건 세상적인 진실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 진실은 아니다. 세상 일반지식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말씀 진리지식의 기준으로 바꿔진 사람이 진실 된 사람이다. 그러니까 진실 된 사람은 무엇부터 바꿔져 있느냐? 지식부터 바꿔져 있다. 지식부터 안 바꿔진 상태에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해도 주님은 ‘난 너를 모르겠다’ 라고 하신다. ‘아, 죽도록 충성했는데요’ 라고 하는데도 ‘난 너를 모르겠다’ 라고 하시면 얼마나 억울하겠느냐?
그리고 지식이 바꿔지지 않은 진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뭘 했다고 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자기 기분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만 얼굴색이 달라진다. 반드시 이렇게 되게 되어있다. 그러나 지식이 바로 바꿔진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만 했으면 다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어떻게 보던 상관이 없다. 옆에서 아무리 자기 얼굴을 깎아내리고 쑤셔대도 하등의 상관이 없다. 왜냐? 남을 깎아내리는 일은 그들이 할 일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바로만 하면 된다고 하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남이 옆에서 자꾸 쑤실수록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 앞에 더욱 더 바로 해 나가게 된다.
성경에 예수님을 안 따르면서 예수님 이름으로 병 고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자들은 그런 식으로 해도 어찌 되었건 주님의 이름이 나가게 되는 거지만 자신들은 세상정신이 바꿔지지 않은 채 그대로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유은사니 불 받았네’ 하며 아무리 방방 떠도 자기 자신을 진리지식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전부가 거짓이다. 거짓에 속하는 것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진리진실로 바꿔진 것은 전부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것과 같다 그 말이다. 그러니 모든 면에서 지식부터 바꿔야 한다. 보이는 면을 기준 삼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늘 뿌리를 박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