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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김씨(江陵金氏)
氏族의 연원
씨족(氏族)의 연원
시조는 김주원(金周元). 신라 원성왕 때 명주군왕(명주군왕)이 되었다. '을축보(을축보)'세록(世祿)편에 보면, 그는 계림김씨(계림김씨)의 후예인데 대보공 김알지(대보공 김알지)의 21세손으로 그가 명주군왕(명주군왕)이 됨으로써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가 되어 범신라김씨(범신라김씨)에서 분적(분적)했다고 하였다. 강릉(江陵)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연유도 명주(溟주)의 옛 이름이 강릉(江陵)이었던 데에 있다.
본관지 연혁
강릉(江陵)은 본래 예국(예국)이다. 한무제(한무제)가 사군(四郡)을 정할 때 임둔(臨屯)이라 불렀고 고구려조에 하서양(하서양)이라 하였으며 신라 경덕왕 때는 명주(溟주)라 일컬었다. 고려조 태조 19년에 동원경(동원경)이라 하였고 그 뒤 여러번 바뀌다가 원종 1년에 경흥도호부(경흥도호보)로, 충렬왕 34년에는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공양왕 1년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 조선조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며 세조조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1928ss 읍으로 승격, 1955년 시로 되었고, 강릉군(강릉군)은 옛 명주군(명주군)으로 돌아갔다.
주용 성씨로는 김(金)ㆍ유(劉)ㆍ문(文)ㆍ박(朴)ㆍ어(魚)ㆍ왕(王)ㆍ최(崔)ㆍ함(咸)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청풍파(淸風派)ㆍ안동파(安東派)ㆍ습독공파(習讀公派)ㆍ임경공파(臨鏡公派)ㆍ강릉노암공파(江陵魯岩公派)ㆍ유천파(楡川派)ㆍ양양공파(襄陽公派)ㆍ강릉모안파(江陵慕顔派)ㆍ강릉옥가파(江陵玉街派)ㆍ강릉옥계파(江陵玉溪派)ㆍ풍덕파(豊德派)ㆍ강릉송림파(江陵松林派)ㆍ강릉호명파(江陵虎鳴派)ㆍ초당파(草堂派)ㆍ학포파(鶴浦派)ㆍ강릉가평파(江陵柯坪派)ㆍ조항파(鳥項派)ㆍ신당파(信堂派)ㆍ모전파(茅田派)ㆍ김강덕원파(金江德原派)ㆍ원산파(元山派)ㆍ삼척파(三陟派)ㆍ횡성파(橫城派)ㆍ만호공파(萬戶公派)ㆍ지산군파(支山君派)ㆍ공청간파(公淸簡派)ㆍ상주파(尙州派)ㆍ송오공파(松塢公派)ㆍ모암공파(慕庵公派)ㆍ회와공파(晦窩公派)ㆍ문의파(文義派)ㆍ목천복귀형파(木川伏龜亨派)ㆍ파주능동파(坡州陵洞派)ㆍ백동파(栢洞派)ㆍ제주공파(濟州公派)ㆍ강릉선연파(江陵蟬淵派)ㆍ찬성공파(贊成公派)ㆍ월봉공파(月峰公派)ㆍ삼괴당공파(三愧堂公派)ㆍ장보공파(長甫公派)ㆍ여산파(礪山派)
씨족史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는 명주군(溟州郡 강릉(江陵)의 옛이름)왕(王) 김주원(金周元). 신라통일을 이룩한 태종대왕(太宗대왕)의 6세손으로 37대 선덕왕(宣德王)때 각간(角干)으로 시중(侍中 신라 최고 관직)겸 병부령(兵部令 군사 총책임자)을 지냈다. 신라 6만군을 통솔하는 총사령탑으로 그의 권한은 막강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그가 명주군왕(溟州郡王)이 되기까지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덕왕(宣德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죽자 군신회의에서 김주원(金周元)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했다. 그러나 그는 경주(慶州)왕실에서 북쪽 20리 밖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신회의가 열리는 날 때마침 내리는 폭우로 알천(알천 현 경주(慶州)부근의 하천)을 건너지 못했다. 이에 군신들이 “이는 천명(天命)이라”하여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니 이가 곧 원성왕(元聖王)이다. 그후 원성왕(元聖王)은 그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했으나 끝내 이를 사양하고 모향(母鄕)인 강릉(江陵)으로 은거했다 하다. 그러자 원성왕(元聖王)은 그의 겸손함에 더욱 감복, 명주군(溟洲郡 북빈경(北濱京))왕(王)으로 봉하고 명주(溟주(州))를 중심으로 한 익령(翼嶺(양양(襄陽))ㆍ삼척(三陟)ㆍ울진(蔚珍)ㆍ평해(平海)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했다.
김주원(金周元)은 명주성(溟州城)을 쌓고 영동(嶺東)일대를 통치했으며 이에 따라 후손들은 강릉(江陵)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신라김씨(新羅金氏) 중 제일 처음 분적한 맏집이 되는 셈이다. 김주원(金周元)은 종기(宗基 원성왕(元聖王)조ㆍ시중(侍中)), 헌창(憲昌 헌덕왕(憲德王)조ㆍ시중(侍中)), 신(身 헌덕왕(憲德王)조ㆍ이찬(伊湌))등 3명의 아들을 두어 신라조에 번성을 누렸다. 이중 둘째인 헌창(憲昌)은 헌덕(憲德)왕때 공주(公州)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일시 전라(全羅)ㆍ충청도(忠淸道)지방을 점령했으나 실패로 자결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가 아버지 김주원(金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원한을 품고 국정에 반기를 들어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강릉김씨(江陵金氏)재종회의 주장은 다르다. 즉 당시 헌덕왕(憲德王)은 조카인 애장왕(哀莊王)과 동생 예명(禮明)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왕실에서는 피비린내나는 정권쟁탈전이 게속되었기 때문에 왕실을 바로잡고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겠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는 앞서 애장왕(哀莊王)대 시중(侍中)으로 있다가 외임으로 청주(淸州)도독(경남(慶南)지사), 웅천주(熊川州)도독(충청도(忠淸道)지사)등을 지냈는데 중앙의 시중(侍中)에 쫓겨난 데 대한 불만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왕권에 도전했던 김헌창(金憲昌)은 거사가 실패하자 자결했고 그의 아들 김범문(金梵文) 또한 북한산(北漢山)에서 재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맏이인 김종기(金宗基)의 손자 김양(金陽)은 서기 838년 희강(憲德王)왕 때 민애왕(閔哀王)인 김명(金明)이 희강왕(憲德王)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는 패륜을 범하자, 이에 분개, 청해진(靑海鎭 현 완도(莞島))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인 경주(慶州)를 공격, 민애왕(閔哀王)을 제거했다. 그리고 김우징(金祐徵)을 신무왕(神武王)으로 세우고 정권을 왕실로 돌려 국정을 바로 잡았다. 이후 김양(金陽)은 각간시중(角干侍中) 겸 병부령(兵部令)에 올랐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강릉김씨(江陵金氏)를 ‘출장입상(出將入相)’의 명문이라고 찬양했다.
현재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셋째인 김신(金身)의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헌덕왕(憲德王) 2년에 김칠초(金七貂 충혜왕(忠惠王)조ㆍ상장군(上將軍)ㆍ양관(兩館)대제학), 김광을(金光乙 공민왕(恭愍王)조ㆍ정승)등이 고려독(督)을 거쳐 이찬(伊湌)에 오르고 그 후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왕실 기강이 문란 하자 이를 거절하고 강릉(江陵)으로 퇴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후손들이 번성, 부정공파(副正公派)ㆍ옥가파(玉街派)ㆍ평의공파(評義公派)ㆍ상서공파(尙書公派)를 모체로 강릉김씨(江陵金氏)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 초기의 인물로는 대광 김순식(大匡 金順式), 태사삼중대광 김경(太師三重大匡 金景), 내사령 김예(內史令 金乂)등이 돋보인다.
김순식(金順式)은 고려 건국초 명주(溟州)장군으로 끝까지 고려군에 항거하다 왕건(王建)의 설득을 받고 그에게 협력, 후백제 정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벼슬이 대광(大匡)에 오르고 이들은 김수원(金守元)ㆍ김■ 와 함께 왕건(王建)으로부터 왕(王)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후손들은 5백 여년 가까이 왕(王)씨로 행세해 오다가 조선 개국 후 왕(王)씨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지공(輊公)이 원래 성인 김(金)씨로 귀성했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김주원(金周元)이 6세손 김식희(金式希) 고려개부의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태사 (高麗開府義三韓壁上功臣 三重大匡太師)로 경순왕과 같이 고려에 귀부후 명주(溟州)지부를 다스리면 후손이 세거해왔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고려 선(宣)ㆍ헌(獻)ㆍ숙(肅)ㆍ예(睿)ㆍ인(仁)ㆍ의종(毅宗) 등 6조에 걸쳐 <삼대팔시랑(三代八侍郞)평장사>를 배출, 융성기를 맞았다. 선종(宣宗)대의 명신 김상기(金上琦)와 그의 조카 김작여(金綽與)와 김우(金祐), 김상기(金上琦)의 아들 김인존(金仁存 태사(太師)문하시중)과 김고(金沽)형제, 김인존(金仁存)의 아들 영석(永錫)ㆍ영윤(永胤)ㆍ영관(永寬)등 3형제가 각각 시랑평장사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김인존(金仁存)은 고려조에 강릉김씨(江陵金氏)를 대표하는 문무 겸비의 명신이었다. 한때 판서북면병마사(判西北面兵馬使)로 거란군(契丹軍)을 압록강까지 격퇴시키는데 공훈을 세우기도 했다.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당대의 석학으로 중요한 국사를 논할 때마다 반드시 왕(王)이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 한다. 왕명으로 음양서적인 ‘해동비록(海東秘錄)’, ‘시정요책(時政要策)’등을 찬(撰)했다. 그의 아들 영석(永錫)또한 당대의 석학으로 송(宋)나라 및 신라의 의서를 국민들이 보기 쉽게 편찬한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남겼다. 이 밖의 고려조의 인물로는 충렬(忠烈)ㆍ충숙왕(忠肅王)때 각각 정승을 역임했던 김연(金淵)ㆍ김태현(金台鉉)부자, 공민왕(恭愍王)때 동북면(東北面 함경도(咸鏡道))병마부사로 쌍성(雙城) 총관부를 공격 원(元)의 지배아래 있던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운 명신 김원봉(金元鳳)ㆍ김양남(金揚南 두문동(杜門洞 72인(人))등이 있다.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조선(朝鮮)조에서 문과 급제자 1백14명과 영의정 1명을 냈다. 신라ㆍ고려 조에 비해서는 다소 기세가 꺾인 느낌이다. 조선 초기에는 김반(金伴 세종(世宗)조ㆍ대사성(大司成)), 김종(金悰 세조(世祖)조ㆍ대사성(大司成)), 김순명(金順命 선조(宣祖)조ㆍ양관(兩館)대제학), 김세행(김세행 현종(顯宗)조ㆍ대사간ㆍ대사헌)등 석학을 냈을 뿐이다. 김반(金伴)은 성균관(成均館)에 40여년 간 재직, 세종(世宗)때 수 차례나 대사성(大司成)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했던 조선 초의 석학이며, 김구(金鉤)ㆍ김말(金末)등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었으며 만년에 강서(江西)에 돌아가 곤궁하게 살다 죽었다.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은 조선 초기인 1445년 수양(首陽)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그의 패륜과에 통분, 끝까지 세조(世祖)에 저항하고 절의를 지켰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매운 절개와 고고한 지성,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정신적인 지주다.
3세에 이미 시(詩)에 능했고 5세때 ‘중용(中庸)’, ‘대학(大學)’을 통달, 신동(神童)으로 이름났다. 이런 천재적재능이 온 세상에 알려지자 세종(世宗)대왕은 승정원(承政院)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해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이에 박이창(朴以昌)은 “동자지학 백학무어청송지말(童子之學 白鶴舞於靑松之末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라는 글귀로 그 댓구(대구(對句)를 재촉했다. 이에 김시습(金時習)은 서슴지 않고 “성왕지덕 황룡우벽해지중(聖王之德 黃龍于碧海之中 성주의 덕을 비유하건데 황룡이 벽해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도다)”로 화답했다. 이때 시습(時習)의 나이 겨우 다섯 살로 비범한 문재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世宗)은 크게 경탄, 장차 요직에 등용할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을 하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신동-김오세(神童金五歲)’라 불렀다. 후일 그가 은거하던 설악산(雪嶽山)의 암자도 이런 연유로 ‘오세암(五歲庵)’이라 명명되었다. 5~15세까지 성균관(成均館)대사성 김반(金伴)과 개국이래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 불리었던 윤상(尹祥)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춘추(春秋)’‘예서(禮書)’‘제자백가(諸子百家)’ 등을 배웠다. 그후 나이 스물 한 살 때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던 시습(時習)은 수양(首陽)대군이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통분, 공부하던 책을 모두 불태워 버리고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역리(逆理)의 시대>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청환우우환청 천도유연황세정 예아변시환훼아 도명각자위구명(乍晴還雨雨還晴 天道猶然況世情 譽我便是還毁我 逃名却自爲求名 잠깐 개는가 하면 곧 비가 내리고 다시개네, 하늘도 이 같거니 세상 인심이야 어이하랴, 나를 기리는가 하면 돌아서서 헐뜯네, 이를 숨기고 사는 것이 명예를 찾음일세)……” 시습(時習)은 그의 유시(遺詩)처럼 갰다 곧 비내리는 변덕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에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영원한 야인으로 살았다. 경주(慶州) 금오산(金鰲山)에 은거. 자조적인 자화상을 그려놓고 ‘진흙구덩이에 얼굴을 쳐박아야 마땅한 놈’이라고 자학하면서……광기와 독설로 울분을 삭았다. 이 같은 김시습(金時習)의 奇行을 함석헌(咸錫憲)씨는 그의 저서 ‘성서적(聖書的) 입장(立場)에서 본 한국역사(韓國歷史)’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습(時習)이 21세의 청년으로 삼각산(三角山)중에서 독서하고 있더니 변보(變報)를 듣고 통곡한 후 책을 불사르고 발광하여 승려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명산(名山), 사찰 등에서 보내며 시대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 산사(山寺)에서 승배(僧輩)들과 무료(無聊)를 풀기도 했으며 취한 몸으로 하수구에 절벅거리기도 했다. 그렇듯 그는 일개의 광승(狂僧)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단순한 광인(狂人)이상의 것이 있었다. 항상 비분강개하여 지축을 끼고 냇가에 앉아서 글을 지어 물에 띄어 보내고는 울기도 했고 농부의 목상(木像)을 만들어 안상(案上)에 벌려 놓고 종일 들여다보다가 통곡하기도 했다 또 곡식을 심어 그것이 자란즉 하루아침에 낫을 휘둘러 베어버리고 방성대곡했으며 관리의 비행을 보고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하고 부르짖으며 호곡(呼哭)하기를 마지아니하였다는 것을 들으면 그의 가슴속을 가히 헤어릴 수 가 있다. 그의 미침은 의(義)로써 미친 것이었다. 그 가슴의 아픔이 너무 도를 지났기 때문에 미침이요 정상인으로 살기에는 그 사회가 너무 부끄러워서 미친 것이다. 어떤 때 세조(世祖)가 법회(法會)를 모으매 그도 뽑히었더니 새벽에 문득 거처(去處)를 모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찾게 하니 길가 변소에 짐짓 빠져 얼굴의 반만을 겨우 내놓고 있었다. 그 세상을 부끄러워함이 이러하였다. 그는 실로 세조(世祖)와 그의 사업에 향하여 유령과 같이 음울한 냉소를 보내는 자다.” 이렇듯 시습(時習)은 숱한 기행(奇行)과 일화를 남겼다. 성종(成宗)2년 그의 나이 37세 되던 해 봄,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금오산(金鰲山)을 떠나 서울로 왔다. 2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을 두고 방황하던 그가 서울에 와 보니 젊어서 친했던 서거정(徐居正)은 예문과 대제학을 지내고 있었고 정창손(鄭昌孫)은 영의정, 김수온(金守溫)은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활약하고 있었다. 이중 정창손(鄭昌孫)은 성삼문(成三問)등이 단종(端宗)복위를 도모할 당시 사위 김찬(金瓚)과 함께 이 사실을 세조(世祖)에게 고해 바쳐 사육신(死六臣)사건의 참화를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세조(世祖)대부터 영의정에 올라 영화를 누려 왔다. 이 때문에 시습(時習)은 그에 대해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어느날 정창손(鄭昌孫)이 초헌을 타고 입궐하는 것을 보고 ‘야! 정(鄭)가 도둑놈아 아직도 살아있느냐!’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자 정찬손(鄭昌孫)은 시습(時習)의 기개에 눌려 못 들은체 하고 그냥 지나쳤다 한다. 일국의 영상을 감히 ‘도둑놈’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닥칠 화가 두려워 이때부터 누구도 시습(時習)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당대의 문장이었던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만이 의리를 지켰을 뿐이다. 성종(成宗)13년 48세 되던 해, 조정에서 ‘윤씨(尹氏) 폐비문제’를 둘러싸고 암투를 벌이자 이를 보다 못해 다시 괴나리 봇짐을 꾸렸다. 다시 시작된 유랑과 방황의 생활 10년. 마침내 성종(成宗)24년 2월 충청도(忠淸道)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숨을 거두니 이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행한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의 세계를 문학에서 찾았다. 금오산(金鰲山)에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할 당시 국문학 사상 불의 명작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매월당집(梅月堂集)’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유교적 성리를 근거로 하여 불교사상의 중핵적인 율벌을 체득함으로써 유ㆍ불혼합일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국적 규격과 구조주의로부터 의연히 독립된 이방인이었다. 충렬(忠烈)과 의협심으로 끝까지 의(義)를 저버리지 않고 매운 절개를 지켰던 김시습(金時習). 그 ‘서릿발 같은 야인정신(野人精神)이 강릉김씨(江陵金氏)의 문중혼’이라고 후손 김후경(金厚卿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실장)는 말한다.
중기 이후엔 명종(明宗)~숙종(肅宗)대에 8명의 판서(선팔판(先八判)),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또 8명의 판서(후팔판(後八判))를 배출,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선팔판(先八判)은 김첨경(金添慶 형(刑)ㆍ예(禮)ㆍ이판(吏判)), 김홍주(金弘柱 병판(兵判)),김득원(金得元 병판(兵判)), 김홍권(金弘權 이판(吏判)), 김시환(金始煥 예(禮)ㆍ이판(吏判)) 김시현(金始鉉 이판(吏判)), 김시혁(金始■ 이판(吏判)), 김시경(金時烱 병판(兵判)) 후팔판(後八判)은 김상익(金尙翼 예판(禮判)), 김상성(金尙星 예(禮)ㆍ호(戶)ㆍ이판(吏判)), 김상중(金尙重 형(刑)ㆍ공판(工判)), 김상집(金尙集 형(刑)ㆍ공(工)ㆍ호(戶)ㆍ병판(兵判)), 김상철(金尙喆 육판(육판)ㆍ영의정), 김노진(金魯鎭 예(禮)ㆍ형(刑)ㆍ이판(吏判)), 김화진(金華鎭 예(禮)ㆍ형(刑)ㆍ호(戶)ㆍ공판(工判)), 김계락(金啓洛 공(工)ㆍ형(刑)ㆍ예판(禮判))을 이르는데 이 시기에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절정을 이루었다. 현재 서울의 팔판동(八判洞)은 당시 강릉김씨(江陵金氏)의 판서들이 집단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전해진다. 이중 유일하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은 김상철(金尙喆)이다. 학덕이 뛰어나 영조(英祖)의 신임을 받았고 우의정 때 우리나라의 문물, 제도를 망라한 문헌의 필요성을 느껴 왕에게 건의, 영조(英祖) 46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케 함으로써 뒷날 역사 연구에 많은 편의를 주었다. 이듬해 명사(明史)에 실린 ‘강감합찬(綱鑑合簒)에’ 조선왕실의 계보가 잘못 적혀 있다는 대관(臺官)의 상소가 있자 자진해서 변무사(辨誣使)로 북경(北京)에 가 그 책의 개인소장을 금지시켰다는 청제(淸帝)의 약속을 받고 귀국, ‘신묘중관록(辛卯重光錄)’을 편집ㆍ간행하기도 했다. 김상규(金尙奎 숙종(肅宗)조ㆍ대제학), 김상건(金尙建 영조(英祖)조ㆍ대사간), 김상지(金尙志 영조(英祖)조ㆍ대사성(大司成)), 김상구(金尙耈 정조(正祖)조ㆍ대사간), 강릉(江陵)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된 유현(儒賢) 김윤신(金潤身)ㆍ김 담(金 譚)ㆍ김 설(金說)등도 조선조의 명현들이다. 일제의 암흑기에 강릉김씨(江陵金氏)는 의병장 감헌경(金■卿)과 독립운동가 김영호(金永浩)를 배출했다. 감헌경(金■卿)은 을미(乙未)사변 이후 삼척(三陟)지방의 창의군(倡義軍)으로 의병대장 민용호(閔龍鎬)와 함께 죽서루(竹西樓)에서 일본관군(日本官軍)을 격파, 잠시 삼척(三陟)군수서리를 지내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일제(日帝) 암흑기에는 의병장(義兵將) 김연상(金演常)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로 김학구(金學九) 김진숙(金振淑) 김진선(金振璇) 김린경(金麟卿) 김연순(金演淳) 김진우(金振宇) 등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를 배출했다. 김영호(金永浩)는 3ㆍ1운동 후 상해(上海) 임시정부 요원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5년의 옥고를 치렀다. 만주(滿洲)사변 후에 중한(中韓)의 용군청사령관으로 일본군(日本軍)과 싸우다 상해(上海)에서 체포되어 우리나라로 압송 도중 선상에서 자결했다. ‘날개’로 문명을 날린 이상(李箱 김해경(金海卿))은 강릉김씨(江陵金氏)가 낳은 풍자문학의 백미(白眉)였다.
역대 주요 인물
▲신라조
김주원(金周元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종기(金宗基 시중(侍中))
김헌창(金憲昌 장안국왕(長安國王))
김 신(金 身 시중(侍中))
김정여(金貞茹 시중(侍中))
김 양(金 陽 각간시중(角干侍中))
김장여(金璋如 상대등(上大等))
김 흔(金昕 시중대장군(侍中大將軍))
▲고려조
김순식(金順式 대광(大匡))
김식희(金式希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
김 경(金 景 태사참중대광(太師參重大匡))
김 예(金 乂 내사령(內史令))
김 양(金 陽 병부상서(兵部尙書))
김상기(金尙琦 시랑평장사(侍郞平章事))
김국모(사도(司徒))
김인존(金仁存 태사시중사(太師侍中事))
김 고(金 沽 안사공(安司空))
김영석(金永錫 태위(太尉))
김영윤(金永胤 평장사(平章事))
김영관(金永寬 평장사(平章事))
김사혁(金斯革 지문하사(知門下事))
김승로(金承露 지인주사(知仁州事))
김백(김백 사복정(司僕正))
김원봉(金元鳳 호부상서(戶部尙書)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
김하적(金河赤 공민왕조 공신)
▲조선조
김 반(金 伴 대사성(大司成))
김덕숭(金德崇 군수(郡守))
김득례(金得禮 참의(參議))
김자흠(金子欽 직호(直護))
김자현(金子鉉 현감(縣監))
김 기(金 琦 집의(執義))
김시습(金時習 생육신(生六臣))
김숙(김 숙 부사(府使))
김중형(金仲衡 군수(郡守))
김계형(金季衡 헌납(獻納))
김언화(金彦華 지평(持平))
김 종(金 悰 대사성(大司成))
김백형(金伯衡 군수(郡守))
김의형(金義亨 부사(府使))
김진석(金晋錫 부사(府使))
김윤신(金潤身 목사(牧使))
김 대(金 臺 헌납(獻納))
김몽권(金夢權 정자(正字))
김세훈(金世勳 첨정(僉正))
김경의(金敬義 공신(功臣))
김광진(金光軫 호참(戶參))
김 설(金 說 학자(學者))
김충렬(金忠烈 목사(牧使))
김충준(金忠俊 예좌(禮佐))
김충정(金忠貞 사예(司藝))
김사섬(사예(司藝))
김첨경(金添慶 예판(禮判))
김 행(金 行 승지(承旨))
김익경(金益慶 좌랑(佐郞))
김순명(金順命 관찰사(觀察使))
김자한(金自漢 정랑(正郞))
김몽호(金夢虎 공의(工議))
김상적(金尙績 군수(郡守))
김경후(金慶厚 형정(刑正))
김기종(金起宗 호판(戶判))
김양성(金養誠 첨정(僉正))
김경제(金慶除 판관(判官))
김지류(金之流 좌랑(佐郞))
김지진(金志鎭 사예(司藝))
김 우(군수(郡守))
김세행(金世行 양사(兩司))
김 속(金 涑 사정(寺正))
김일기(金一夔 목사(牧使))
김시징(金時徵 장령(掌令))
김이현(金以鉉 예좌(禮佐))
김홍정(金弘楨 승지(承旨))
김귀서(金龜瑞 사예(司藝))
김시환(金始煥 예판(禮判))
김상규(金尙奎 대사성(大司成))
김시혁(판돈령(判敦寧)
김시형(金始炯 병판(兵判))
김시엽(金時燁 지평(持平))
김상성(金尙星 이판(吏判)
김상익(金尙翼 판서(判書))
김시위(승지(承旨))
김상중(金尙重 형판(刑判))
김상적(金尙迪 형참(刑參))
김상구(대사간(大司諫))
김상철(金尙喆 영의정(領議政))
김성우(金聖佑 정언(正言))
김경지(金敬之)
김상집(金尙集 병판(兵判))
김노진(金魯鎭 이판(吏判))
김화진(金華鎭 이판(吏判))
김시영(金始瑛 판윤(判尹))
김계락(金啓洛 예판(禮判))
김우진(金宇鎭 정조조(正祖朝)·이의(吏議))
김정룡(金廷龍 호좌(戶佐))
김연희(金演禧 이의(吏議))
김하림(金夏林 내사시정(內資寺正))
김윤(金 贇 양양부사(襄陽府使))
김현(金 賢 제천현감(堤川縣監))
김윤귀(金允貴 양구현령(陽口縣令))
김용수(金龍壽 지통주사(知通州事))
김정(金精 저평현감(抵平縣監))
김보(金寶 봉화현감(奉化縣監))
김지(감곡현령)
김백훈(金伯塤 이조참의(吏曹參議))
김종(金鍾 공조판서(工曹判書))
김유생(金有生 제용감정(濟用監正))
김숙호(면천군수(沔川郡守))
김천익(金天益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종혁(金從革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덕숭(金德崇 한산군수(韓山郡守)·효자(孝子) )
김계사(金季思 현감(縣監))
김자남(金自南 직장(直長))
김보손(金寶孫 판사(判事))
김상전(金尙全 예조참의(禮曹參議))
김효겸(金孝兼 판서(判書))
김원간(金元侃 낭장(郎將))
[등과(登科)·음사인명(蔭仕人名)]
▲고려조
김인존(金仁存 선종조)
김서정(김서정(金瑞廷) 인종조)
▲조선조
김자갱(판중(判中))
김득례(金得禮 사간(司諫))
김자현(金子鉉 현감(縣監))
김자흠(金子欽 정언(正言))
김기(金琦 집의(執義))
김숙(金淑 통정(通政))
김중형(金仲衡 한림(翰林))
김상(金湘 참의(參議))
김계형(金季衡 헌납(獻納))
김언화(金彦華 한림(翰林))
김종(金悰 해백(海伯))
김백형(金伯衡 군수(郡守))
김의형(金義亨 부사(府使))
김윤신(金潤身 사인(舍人))
김대(金臺 헌납(獻納))
김몽권(金夢權 정자(正字))
김효간(金孝侃 대성(大成))
김세훈(金世勳 첨정(僉正))
김광철(金光轍 참판(參判))
김광식(金光軾 호판(戶判))
김충렬(金忠烈 목사(牧使))
김충준(金忠俊 예좌(禮佐))
김충정(金忠貞 사예(司藝))
김사섬(사예(司藝))
김첨경(金添慶 예판(禮判))
김팔원(金八元 전적(典籍))
김행(金行 사정(寺正))
김익경(金益慶 좌랑(佐郞))
김순명(金順命 감사(監司))
김선여(金善餘 한림(翰林))
김자한(金自漢 정랑(正郞))
김몽호(金夢虎 찬성(贊成))
김상적(金尙績 판교(判校))
김광백(金光白 군수(郡守))
김경후(金慶厚 형정(刑正))
김기종(金起宗 호판(戶判))
김의성(金義性 봉례(奉禮))
김경여(金慶餘 판관(判官))
김지연(金之沇 좌랑(佐郞))
김지안(金志顔 첨정(僉正))
김 우(군수(郡守))
김세행(金世行 정언(正言))
김시중(金始重 현감(縣監))
김 속(金 涑 사정(寺正))
김일기(金一夔 사간(司諫))
김시휘(金始徽 장령(掌令))
김이현(金以鉉 예판(禮判))
김세록(金世祿)
김홍정(金弘楨 승지(承旨))
김귀서(金龜瑞 사예(司藝))
김시환(金始煥 판돈(判敦))
김상규(金尙奎 대성(大成))
김태경(김태경 병좌(兵佐))
김시형(金始炯 병판(兵判))
김시엽(金時燁 지평(持平))
김상성(金尙星 이판(吏判)
김상익(金尙翼 판서(判書))
김징경(金徵慶 병좌(兵佐))
김응경(金應慶 병좌(兵佐))
김시제(金始悌 승지(承旨))
김상중(金尙重 형판(刑判))
김상적(金尙迪 형참(刑參))
김 언(찰방(察訪))
김상구(대간(大諫))
김상철(金尙喆 영정(領政))
김성우(金聖佑 정언(正言))
김세연(金世璉 찰방(察訪))
김경지(金敬之)
김시영(金始瑛 판서(判書))
김화진(金華鎭 이판(吏判))
김상집(金尙集 병판(兵判))
김노진(金魯鎭 이판(吏判))
김우진(金宇鎭 참판(參判))
김정룡(金廷龍 호정(戶正))
김계락(金啓洛 판서(判書))
김계온(金啓溫 참판(參判))
김계하(金啓河 참판(參判))
김계렴(金啓濂 참판(參判))
김계연(金啓淵)
김학초(金學初 이참(吏參))
김병주(金秉周 장령(掌令))
김병억(金秉億 이참(吏參))
김연희(金演禧 참판(參判))
김연수(金演壽) 이의(吏議))
김응하(金應夏 교리(郊理))
김진용(金振龍 승지(承旨))
김학모(金學模) 지평(持平))
김진성(金振聲 정언(正言))
김용기(金龍騎 부정(副正))
[음사인명(蔭仕人名)]
김수봉(金壽峰 세종(世宗)·호조참의(戶曹參議))
김석견(金石堅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찰방(察訪))
김서(金恕 목사(牧使))
김서통(金瑞通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김귀성(金貴誠 형조판서(刑曹判書))
김귀성(金貴誠 직제학(直提學))
김철동(金哲仝 판사(判事))
김대(전리판서(典理判書))
김봉원(金奉元 충청병마사(忠淸兵馬使))
김봉광(金奉光 부사(府使))
김봉증(金奉曾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언경(金彦庚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경인(金敬仁 만호(萬戶))
김광언(金光彦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김한일(함경병마절도사(咸鏡兵馬節度使))
김수견(金壽堅 양양부사(襄陽府使))
김한영(金漢榮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김광국(金光國 제천군수(堤川郡守))
김덕정(金德定 수차부위사직(修撰副尉司直))
김효손(金孝孫 목사(牧使))
김계손(金繼孫 함경감사(咸鏡監司))
김수례(金守禮 천안군수(天安郡守))
김혼(金渾 사재감정(司宰監正))
김수(金琇 방어사(防禦使))
김희정(金希汀 우승지(右承旨))
김설(金說 훈도(訓導)·강릉향현사배향(江陵鄕賢祠配享))
김담(金潭 효자(孝子)·강릉향현사배향(江陵鄕賢祠配享))
김양(金讓 장악원직장(掌樂院直長))
김인(金認 황산도(黃山道) 찰방(察訪))
김의(金誼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
김수(金璲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김계은(金繼銀 고성군수(高城郡守))
김창수(金昌壽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승운(金繩雲 율봉도 찰방(栗峰道 察訪))
김훤(金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억량(金億亮 덕천군수(德川郡守))
김웅(金熊 목천군수(木川郡守))
김창(목사(牧使))
김기(金麒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자낙(金自洛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의성(金義聲 사직(司直)으로 전공(戰功)을 세워 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김갑(金甲 고양군수(高陽郡守))
김봉세(金奉世 예빈시정(禮賓寺正))
김훤(金瑄 개천군수(价川郡守))
김이흥(金以興 병마우후(兵馬虞候))
김수(한성판윤(漢城判尹))
김범(金範 부사(府使))
김응추(金應秋 군자감정(軍資監正))
김덕원(金德元 율봉도 찰방(栗峰道 察訪))
김득용(金得龍 직장(直長)으로 임란(壬亂)시 왕자호종(王子扈從))
김성일(金成日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김인복(金仁福 장예원사평(掌隸院司評))
김득건(金得健 군자감정(軍資監正))
김광국(金光國 장악원정(掌樂院正))
김응일(金應日 율봉찰방(栗峰察訪))
김성적(金成績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
김전(金銓 공조참의(工曹參議))
김학성(金鶴成 승지(承旨))
김여탁(金汝鐸 장악원정(掌樂院正))
김국남(金國南 판사(判事))
김형보(金亨寶 형조참의(刑曹參議))
김환(지평(持平))
김경우(金慶遇 선략장군(宣略將軍))
김력(호조참의(戶曹參議))
김우엄(金友淹 태안군수(泰安郡守))·부정(副正)
김경서(金經瑞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원립(金元立 예조참의(禮曹參議))
김기영(형조참의(刑曹參議))
김협(金鋏 장예원 판결사(掌隸院 判決事))
김와룡(金臥龍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홍운(金弘運 양무(楊武功臣)·방어사(防禦使))
김대해(金大海 좌승지(左承旨))
김회종(金會宗 신천군수(信川郡守))
김진종(金晋宗 호조좌랑(戶曹佐郞))
김정길(金貞吉 장악원정(掌樂院正))
김신강(金信剛 부호군(副護軍))
김시각(金是珏 율봉찰방(栗峰察訪))
김만상(金萬相 지평(持平)·효자(孝子))
김집(金鏶 무신란부사원종공신(戊申亂扶社原從功臣)·僉使)
김성립(金成立 사복시정(司僕寺正))
김득의(金得毅 마전군수(麻田郡守))
김득헌(金得憲 기장군수(機長郡守))
김계철(金啓哲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정진(金定鎭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김병혁(金秉赫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윤남(金胤男 장악원정(掌樂院正))
김성일(金成日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김최승(사복시정(司僕寺正))
김상호(金相浩 제용감정(濟用監正))
김만규(金萬圭 사복시정(司僕寺正))
김명길(金鳴吉 섬진찰방(蟾津察訪))
김섭(金涉 성현찰방(省峴察訪))
김남귀(金南龜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김덕칠(金德七 절충장군행호군(折衝將軍行護軍))
김일탁(金一鐸 부사(府使))
김기(金琦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상우(金尙遇 장성부사(長城府使)·선공부정(繕工副正))
김시좌(金時佐 첨절제사(僉節制使))
김진(金鎭 상호군(上護軍))
김시희(金時熺 양주목사(楊州牧使)·돈령도정(敦寧都正))
김상덕(金尙德 운산만호(雲山萬戶))
김시걸(金始傑 호조참판(戶曹參判))
김세호(金世浩 호조참의(戶曹參議))
김정주(金鼎周 집의(執義))
김원일(金元一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김선덕(金善德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천호(金天鎬 지평(持平))
김성옥(金成玉 사복시정(司僕寺正))
김백겸(金白兼 장악원정(掌樂院正))
김준석(金俊碩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김종익(金宗益 공조참의(工曹參議))
김종협(金宗協 순천영장(順天營將))
김도혁(金道爀 서산군수(瑞山郡守))
김동진(金東鎭 경연참찬(經筵參贊))
김홍권(金弘權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조선조 급제자 정록]
반(伴 정종(定宗)1·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자갱(태종(太宗)14·식년시(式年試)·을과삼(乙科三))
득례(得禮 세종(世宗)11·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흠(欽 세종(世宗)11·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자현(子鉉 세종(世宗)29·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기(琦 세종29(정묘, 1447) 친시(親試)·정과(丁科))
숙(淑 단종(端宗)2·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중형(仲衡 세조(世祖)3·별시(別試)·정과(丁科))
상(湘 세조(世祖)·별시(別試)·정과(丁科))
언신(彦辛 세조(世祖)12·고성춘시(高城春試)·삼등(三等))
계형(季衡 세조(世祖)12·고성춘시(高城春試)·삼등(三等))
종(悰 세조(世祖)14·춘장(春場)· 병과(丙科))
백형(伯衡 예종(睿宗)1·추장(秋場)·을과(乙科))
제(濟 예종(睿宗)1·추장(秋場) 병과(丙科))
의형(義亨 성종(成宗)1·별시(別試)·갑과(甲科))
진석(晉錫 성종(成宗)3·춘장(春場))·병과(丙科))
윤신(潤身) 성종(成宗)7·별시(別試)·병과(丙科))
대(臺 성종(成宗)8 춘장(春場)·병과(丙科))
몽권(夢權) 성종(成宗)·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효간(孝侃) 성종(成宗)·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세훈(世勳) 연산(燕山)2·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광철(光轍) 중종(中宗)8·별시(別試)·병과(丙科))
광진(光軫) 중종(中宗)21·별시(別試)·을과(乙科))
충렬(忠烈) 중종(中宗)26·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충준(忠俊) 중종(中宗)29·별시(別試)·병과(丙科))
충정(忠貞) 중종(中宗)30·별시(別試)·병과(丙科))
사섬(명종(明宗)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첨경(添慶) 명종(明宗)4·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행(行 명종(明宗)21· 별시(別試)·병과(丙科))
익경(益慶 선조(宣祖)10·별시(別試)·병과(丙科))
순명(順命 선조(宣祖)21·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선여(善餘 선조(宣祖)23·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자한(自漢 선조(宣祖)39·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몽호(夢虎 광해(光海)1·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상적(尙績 광해(光海)1·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광백(光白 광해(光海)4·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후(慶厚 광해(光海)7·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기종(起宗 광해(光海)10·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양성(養誠 인조(仁祖)5·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경여(慶餘 인조(仁祖)11· 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지연(之沇 효종(孝宗)·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지안(志顔 효종(孝宗)·별시(別試)·병과(丙科))
우(효종(孝宗)·춘장(春場)·병과(丙科))
세행(世行 현종(顯宗)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진한(振漢 현종(顯宗)4·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시중(始重 현종(顯宗)·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속(涑 현종(顯宗)·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일기(一夔 숙종(肅宗)3·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시징(始徵 숙종(肅宗)4·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세록(세록 숙종(肅宗)5·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이현(以鉉 숙종(肅宗)5·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홍정(弘楨 숙종(肅宗)7·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태경(泰慶 숙종(肅宗)16·정시(庭試)·병과(丙科))
귀서(龜瑞 숙종(肅宗)21·별시(別試)·병과(丙科))
시환(始煥 숙종(肅宗)26·춘장(春場)·을과(乙科))
상규(尙奎 숙종(肅宗)31·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시정(始 숙종(肅宗)34·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시형(始炯 숙종(肅宗)43·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시엽(始燁 숙종(肅宗)43·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징경(徵慶 영조(英祖)1·정시(庭試)·병과(丙科))
응경(應慶 영조(英祖)2·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시위(영조(英祖)6·정시(庭試)·병과(丙科))
상중(尙重 영조(英祖)8·정시(庭試)·병과(丙科))
상적(尙迪 영조(英祖)9·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언(영조(英祖)9·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상구(영조(英祖)10·정시(庭試)·갑과(甲科))
상철(尙喆 영조(英祖)12·정시(庭試)·을과(乙科)
성우(聖佑 영조(英祖)15·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세련(世璉 영조(英祖)17·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경지(敬之 영조(英祖)29·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상집(尙集 영조(英祖)31·정시(庭試)·을과(乙科))
화진(華鎭 영조(英祖)31·정시(庭試)·을과(乙科))
시영(始煐 영조(英祖)32·정시(庭試)·병과(丙科))
노진(魯鎭 영조(英祖)33·정시(庭試)·병과(丙科))
노진(魯鎭 영조(英祖)42·중시(重試)·병과(丙科))
우진(宇鎭 영조(英祖)48·정시(庭試)·병과(丙科))
정룡(廷龍 정조(正祖)2·정시(庭試)·병과(丙科))
계락(啓洛 정조(正祖)7·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계하(啓河 정조(正祖)22·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계온(啓溫 정조(正祖)22·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계렴(啓濂 정조(正祖)24·별시(別試)·병과(丙科))
계연(啓淵 순조(純祖)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종호(宗虎 순조(純祖)14·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학민(學敏 순조(純祖)25·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낙두(洛斗 순조(純祖)3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병주(秉周 헌종(憲宗)9·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응하(應夏 헌종(憲宗)9·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학초(學初 헌종(憲宗)14·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진호(晉浩 철종(哲宗)6·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계문(啓汶 철종(哲宗)11·별시(別試)·병과(丙科))
연수(演壽 고종(高宗)7·별시(別試)·병과(丙科))
진성(振聲 고종(高宗)18·별시(別試)·병과(丙科))
진용(振龍 고종(高宗)19·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병억(秉億 고종(高宗)22·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남재(南載 고종(高宗)26·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연희(演禧 고종(高宗)28·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용기(龍騎 고종(高宗)29·별시(別試)·을과(乙科))
윤기(潤起 고종(高宗)30 영의과(永義科)·갑과(甲科))
학모(學模 고종(高宗)3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남제(南齊 고종(高宗)31·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벌열(閥閱)]
●상신(相臣)
: 김상철(金尙哲 영조조 영의정(領議政))
●공신(功臣)
: 김근언(金謹言 중종조 중종반정(中宗反正) 정국공신(靖國功臣))
김경의(金敬義 중종조 중종반정(中宗反正) 2등공신(2等功臣))
김기종(金起宗 인조조 이괄난토평(李适亂討平) 2등공신(二等功臣))
●문형(文衡)
: 김순명(金順命 선조조) 김상철(金尙喆 영조조)
●호당(湖當)
: 김시습(金時習) 김선여(金善餘 선조조)
●청백리(淸白吏)
: 김시습(金時習 단종조) 김행(金行 선조조) 김순명(金順命 선조조) 김상철(金尙喆 영조조)
●명륜(明倫)
: (열녀(烈女)) 김씨(金氏 조호수(趙鎬洙)의 처(妻)·고종조 정려(旌閭)·증정부인(贈貞夫人)) 김씨(金氏 함인선(咸仁善)의 처(妻)·제역(除役)
●문집(文集)
: 서정록(西征錄 김기종(金起宗)) 강화부지(江華府誌 김노진(金魯鎭))
금오신화(金鰲新話 김시습(金時習)) 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金時習))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김시습(金時習)) 동포휘언(東圃彙言 김시습(金時習)) 죽하집(竹下集 김시화(金時和)) 동파문답(東坡問答 김시화(金時和)) 지산집(芝山集 김팔원(金八元)) 지봉문집(芝峯文集 김몽호(金夢虎))
세계도
行列字(항렬자)
▣ 人口數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江陵金氏(강릉김씨)는
1985年에는 摠 35,816家口 150,577名,
2000年에는 摠 52,050家口 165,963名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출처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출처] 강릉김씨(江陵金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