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오는 날 갓바위에 가다
아침의 대기는 물기에 푹 젖어 있다. 냄새로도, 피부로도, 눈으로까지 봄이 느껴진다. 집을 나서면서 우산을 챙겼다.
갓바위 오르는 길은 몹시 가파르다. 몇 번 마음을 냈으나 꽃샘 추위가 만만하지 않아서 여러 번이나 미루었다. 봄비에 얹혀 날씨가 많이 풀렸다. 약간 축축한 날씨였으나 갓바위를 다녀오기로 마음 먹었다. 지하철과 버스로 하양에 가서, 갓바위 가는 버스를 탔다. 갓바위 가는 버스의 차창 너머로 골짜기는 비안개에 묻혀 흐릿하고, 창유리에는 빗물이 맺혀 방울방울 굴러 내린다. 박사리도 지나갔고, 굴불사를 오르는 길이 갈리는 곳도 지나, 골짜기로 접어든다.
골짜기의 초입부터 길의 옆에는 음식점, 팬션, 무당집도 있고, 절 이름의 안내판들, 그리고 촌가들이 줄을 이어서 서 있다. 사하촌이겠지만 음식점이 너무 많아서 집사람과 나는 손님이 있겠어 라며, 쓸데없는 걱정까지 나누었다. 버스는 승용차 주차장도 지나, 갓바위 오르는 산길이 시작하는 곳에 내려주었다. 올려다보니 숲 속으로 난 길은 멀지 않은 곳인데도 안개에 묻혀 사라진다. 뒤편의 선본사도 비안개에 묻혀 절 지붕만이 흐릿하게 보인다. 비오는 날의 산곡을 그린 동양화 한 폭 같다.
갓바위 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어느 절이든, 절에 이르는 길은 숲의 나무들에 덮여 우리를 자연으로 데려다 주는 통로가 된다. 이 길의 양쪽에는 장식용 석조 석등이 줄지어 서 있다. 너무 많아 헬 수도 없다. 부처님을 뵈오러 가는 길에 왜 이런 화려한 인공물을 설치해 두었을까. 불교가 세속의 물욕에 오염된 탓이리라.
돌 계단을 오르는 곳부터는 너무 가파르니 몇 걸음을 올라도 숨이 찬다. 쉬엄쉬엄 걷다가 숨이 차면 길게 숨을 들이키고 잠시잠시 쉬었다. 산사를 오르는 길은 마음을 하나로 다잡기 위한 수양의 방편으로, 일부러 함들게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이 힘든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아서 절마당까지 차가 닿도록 길을 닦아 놓았다. 시내의 관음사 큰 스님께서는 예전에는 공양미를 머리에 인 할머니가 갓바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랐다고 했다. 그것이 부처님에게 바치는 정성이라 믿었기라고 말씀 하셨다. 삶이 힘들었던 아래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에게 보여줄 수 있은 것이래야 몸으로 감내하는 신심 밖에는 없었지 않은가.
불교에서는 여러 부처님이 계신다. 대중들과 가장 친숙한 부처님은 약사불과 미륵불이다. 약사불은 현세의 고통을 없애주는 부처님이시다. 세상살이가 고달픈 민초들이 하소하기에 딱 좋은 부처님이시다. 미륵불은 조금 다르다. 이 세상에 오셔서 고통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개개인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기보다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부처님이시다. 갓바위 부처님은 오늘에 약사불로 호적등본이 되어 있다. 이 부처님의 원적이 약사불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3-40년 전만 해도 마을사람들이 미륵불로 불렀다고 하였다. 두 부처님 모두 대중의 고통을 들어주기는 해도 역할분담이 조금 다르다.
촌로의 말대로라면 조선 후기 내지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사회의 제도 때문에 힘들었으므로 미륵불 신앙이 더 성행하였으리라. 조선 후기에는 개혁사상이 퍼지면서 애기 장수나 진인이 나타나서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이 유행했다. 불교에서는 그 일을 하시는 부처님이 바로 미륵불이 아니신가.
나는 우리나라의 절터는 원래 우리의 토속신앙터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다. 백팔사 절 답사기를 쓰면서도 그쪽으로 많은 관심을 쏟았다. 나는 갓바위도 우리의 토속신앙터라고 믿는다. 갓바위 부처님이 계시는 곳의 주소지는 팔공산 관봉이다. 갓바위 부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관봉 이전에 우리말로 ‘갓’이라 하지 않았을까. 갓봉이 갓바위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관봉으로 창씨개명을 하기 전의 이름이 갓봉이라면 의미는 분명해진다. 갓바위 부처님이 터 잡은 곳이 원래 남근석 신앙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앞으로 굴불사 답사기를 쓸 때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리나라 지형의 특징으로 산이 많다, 이다. 아무리 너른 평야이더라도 산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산은 우리와 가장 친숙한 곳이며, 동시에 우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우리의 선조이신 천신이 하강한 곳이다. 최남선은 우리의 고대문화 특징의 하나로 ‘돌은 산의 표상이다.’라고 했다. 바위신앙은 곧 산악신앙이다. 우리의 고대문화의 상징으로 선돌을 말한다. 선돌은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산의 상징이다. 이 선들이 바로 남근석이다. 남근석 신앙은 으레 여성성기(여근, 일반적으로 굴을 여성 성기의 상징으로 본다.)와 짝을 이룬다. 그런 전설이 우리나라 곳곳에 널려 있다.
‘갓’이란 말의 어원은 여성을 나타내는 말이다.(한국문화상징 사전-동아출판사) 남근석 위에 갓을 씌운다는 것은 남성의 위에 여성이 올라간다는 뜻이 된다. 남녀의 성행위에 여성상위 체위를 감투(갈거리, 라고 함)라고 하는 것도 같은 유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갓바위 부처님이 이곳에 거처를 정하여 좌정하시기 전에는 어떤 신앙지였는지 대강 짐작이 된다. 모신신앙이 성기신앙으로 이행하면서 성결합이란 음양의 조합을 나타낸 것이리라.
이제 요약해보면 원래는 토속신앙터였는데. 세월이 바뀌면서 토속신은 찬밥 신세로 전락하고, 외래신인 부처님이 안 방을 차지하여 주인행세를 하였다. 이곳을 찾아왔던 아래 마을의 민초들은 부처님이 더 영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옛 선조때부터 내려오던 토속신들을 버리지 않고 의식의 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더라도 내가 갓바위 부처님을 뵈오러 가는 것은 토속신이 아닌 약사여래 부처님이시다. 갓바위 부처님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하니 무슨 소원을 빌어볼까. 나도, 집사람도, 그리고 내 아이들도 아닌, 손자, 손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비오는 날인데도 오르는 사람이 우리 부부만이 아니다. 띄엄띄엄 이기는 해도 끊이지 않고, 모두들 우리보다 앞서서 올라갔다. 하기야 우리 부부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가족 같았다. 계단 길의 옆 난간을 잡고, 태산마냥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갓바위 바로 아래의 절집에 닿았다. 예전에는 이곳에 들리면 절에서 소금으로 절인 김치와 밥을 주어서 산길에 허기져 맛있게 먹었던 일이 생각난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점심밥을 공양하는 절집은 없다. 우리는 이즈음에 절집을 찾아갈 때마다 준비해간 샌드위치로 점심을 떼웠다. 나무 아래의 바위에 앉거나. 절집의 뒤안으로 돌아가서 축담에 앉아서 먹었다. 산 위에 오니 비가 제법 소리까지 내면서 온다. 비를 피해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없다. 갓바위 부처님이나 뵈옵자 싶어서 계단을 걸어 부처님이 계신 곳까지 갔다. 우산을 받쳐 들었지만 바지와, 윗옷까지도 빗물에 젖는다. 부처님 앞의 기도하는 자리는 비를 피하는 자리가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예배처도 빗물로 흥건하였다.
갓바위 부처님의 앞에도, 옆에도, 오르는 길의 모퉁이도 물건을 파는 상점이다. 양초며, 엿이며, 공양의 의미가 담긴 것이라서 속세의 상점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부처님 앞까지 가로막고 있는 것은 속세의 상점보다 더 속되다는 생각이다.
올려다 본 부처님은 비안개에 둘러싸여 형상이 허릿하다. 비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마 얼굴이 밝지는 않으리라 싶다. 앞으로는 힘에 부쳐 다시 오를 일도 없겠지만, 다시는 갓바위 부처님을 찾고 싶지 않다.
내려오는 길은 계단에 빗물이 흘러 내려 조심하느라 더 힘들었다. 옷도 빗물에 젖어 무겁다. 다리도 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