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118)息山 李萬敷(下)
李萬敷가 서울서 落南하여 尙州에 정착한 사실은 학맥상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退溪 李滉에 연원(淵源)을 둔 寒岡 鄭逑의 학통 중 한 가닥은 許穆을 통하여 근기지방으로 흘러들어가 기호지방의 남인학풍의 기초를 형성하였다. 이 학풍을 다시 영남지방으로 가지고 와서 순수 李滉 학통에 새로운 접목을 시도한 학자가 李萬敷였다.
李萬敷의 도통연원(道統淵源)은 두 갈래의 측면에서 언급된다.
李滉→鄭逑→許穆→李萬敷→李유→李承延→李敬儒로 이어지는 맥은 主理的 경향이 두드러지고, 李滉→洪可臣…→丁時翰→李萬敷→李瀷의 맥은 실학 쪽으로 나아갔다.
이밖에 그는 李滉→金誠一→張興孝로 내려오는 학통을 계승한 李玄逸과 心性 ․ 理氣 ․ 四端七情 등에 관해 폭넓은 토론을 거치는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학맥이 시사하듯 李萬敷는 특정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부단한 독서와 사색 그리고 실천을 통하여 체인(體認)된 것을 앞선 학자들의 주장과 비교 검토하여 일치 여부를 따져 진로를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다.
性理學에 관한 그의 기본입장은 李滉학설을 지지한 主理論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李滉학설을 무조건 수용․지지한 자세가 아니고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농가등 9류(九流)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주기설에 대해서도 편견 없이 고찰했다.
그가 만년에 그의 제자 星湖 李瀷과 주고받은 문답을 보면 그의 학문적 자세를 일면이나마 엿볼 수 있다.
「선생님 退溪 ․ 栗谷의 理氣說은 시비가 분분한데 정론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어느 것이 정론입니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서 여러 번 의심한 결과 믿어 확신한 바가 없지 않으나 치열한 당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어느 설이 정론이라고 단언하기 힘든다.」
理氣說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다소 애매모호한 감이 있으나 어느 性理學者에 못지않은 정연한 논리를 펴고 있다.
그의 학설은 理氣一元論으로「理는 곧 一이지만 氣를 만나서 氣質性이 된다. 氣質性은 그 發하는 데 따라 道心(양심)과 人心(속된 마음)으로 분별되고 四端과 七情으로 구분된다. 학자가 참으로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대상)에 이르러 처음부터 나누어있지 않음을 알아야 하고 처음에 나누어 있지 않은데 대하여 나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안 연후에야 一이 곧 二이며 二가 곧 一인 오묘한 이치를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李萬敷에 관한 석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朴賛善씨는 李萬敷의 理氣一元論적 견해를 지칭하여「李萬敷는 李滉의 理와 李珥의 氣의 장점을 함께 소화시킨 것 같다.」고 했다.
한편 李萬敷는 敬사상을 강조하여 이를 天道에 까지 적용시킨 점이 그의 독특한 철학논변이다.
「하늘의 道는 誠이니 誠은 敬하지 않음이 없고, 하늘의 道는 一이니 一을 주로 함은 곧 敬아님이 없느니라. 무릇 聖人은 天이다. 聖人의 학문은 敬을 주로 하였으니 天道에 敬이 없으면 이것은 聖人과 天道가 서로 같지 않음이 있게 된다.」
이 같은 李萬敷의 학문세계는 程朱이래 성리학의 본령이 된 天의 道인 誠(완전무결한 상태 즉 절대자)과 人의 道인 敬(誠의 달성을 위해 인간이 수련해야 하는 수련의 방법)으로 양극화되는 현상을 우려하여 심단논법으로 敬을 天道이 까지 적용시킨 이론체계를 수립하였다.
그에게 있어 天道와 人道의 양극화는 극렬한 理氣논쟁의 시발이며 당쟁의 근원으로 비쳤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원시유가의 인내천(人乃天)의 사상에 바탕을 두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天의 인격성을 주장함으로써 첨예화한 理氣논쟁의 완화및 조정 작업을 시도한 것이다.
실학의 거두 李瀷이 금강산에서 李萬敷를 만나보고는 그의 높은 덕행, 깊은 학문, 고결한 인격을 탄복하여「선비로서 완전무결하고 우리 학문에 정통한 사람」(處士之完名/ 吾學之宗匠)이라 평했다.
또 李瀷은 李萬敷를 늦게 만남을 한하여「가을물 맑은 정신 옥에 티끌을 씻었으니/ 나만큼 선생을 아는 이 없도다./ 심의는 옛 선기옥형대로 지었으나/ 학덕 높은 이를 괜히 지하에 감추었구나.」(秋水精神玉灑塵/ 知公如我亦無人/ 深衣盡制璣衡古/ 地下空潜席上珍)라고 했다.
「과거를 보는 것은 욕심을 따라가는 것이며 욕심이 생기면 본심이 흐려지니 경계해야 한다.」를 평소 지론으로 삼았던 李萬敷는 평생 동안 제경전의 오묘한 이치를 밝히고 원시 유가의 六禮(禮 ․ 樂 ․ 射 ․ 御 ․ 書 ․ 數)를 강조하고 성명의 책력 등 우주의 법칙 그리고 천지의 운세까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가 남긴 저서도 많다.
시산문집 20책 ․ 四書강목 4권 ․ 志書 6권 ․ 道東編 9권 ․ 易統 3권 ․ 大衆編覽 1권 ․ 魚餘論 1권 ․ 萬東祠議(미간행)를 남겼다.
道東編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명한 유학자들의 理氣說에 관한 것을 정리 수록한 것으로 유학사의 귀중한 자료이다.
李萬敷는 학문 못지않게 산수를 즐겨 전국의 명산대천을 모두 영행하여 地行錄을 엮었다.
지행록 속에는 동해 물속에 자리 잡은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에 관한 기록도 있다.
만년의 그에게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세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가르쳤다.
후학자들은 그가 69세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고결한 학덕과 인품을 기리는 뜻에서 徵士??의 칭호를 바쳤다.
李萬敷가 임종 때 남긴 시를 보면 대 문장가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나의 창을 지켜주는 저 달/ 등잔불 꺼진 때 맑게 비춰주누나./ 그대 만약 달을 만나거든/ 그 달빛 내 마음인양 아소서.」(此月常來守我窓/ 有時淸影廢油江/ 若逢月往諸公案/ 知我心如此月光)
그의 문인으로는 盧啓元 ․ 李瀷 ‧ 金경환 ‧ 崔수인 ‧ 吳상원 ‧ 洪상조 ‧ 趙天經 ‧ 趙복경 ‧ 趙인경 ‧ 黃익재 등 당대의 명사들이다.
특히 息山문집은 분량도 많거니와 落南한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도저히 간행할 비용이 없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尙州유림이 총동원하여 식산문집 20책을 발간했다는 것은 평소 그의 학문적 명망을 짐작할 수 있다.
李萬敷의 생존당시부터 전해오는 유적은 天雲齋뿐인데 이것마저 폐허상태로 방치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천운재는 李萬敷가 서울서 낙남하여 최초로 자리 잡은 상주읍 외답리에 세운 건물로 그는 여기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담장은 무너지고 지붕에선 비가 새고 마루는 꺼져가고 창문은 망가진 천운재가 李萬敷의 重修記와 李衡祥 ‧ 李瀷의 賛記는 물론 그 밖의 많은 동학의 글로 메워져있어 뜻있는 사람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고결한 선비의 숨결과 체취가 서려있는 이 고택이 후손의 미력과 당국의 무관심 속에서 끝내 자취마저 없어진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값진 유적지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李萬敷의 혈손은 대대로 맥만 이어온 탓인지 전국적으로 30여호 밖에 되지 않으며 10대 종손 庸德씨(37)가 쌍용시멘트 문경공장에 근무하고 있다.
* 참고문헌 = 李萬敷의 行狀 ‧ 묘갈명 ‧ 逸事狀.
* 도움말 = 柳龍佑씨(61 ‧ 경안서실운영) <呂源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