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119)鄭萬陽·葵陽 형제
鄭萬陽 ‧ 葵陽형제는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숭상되고 있는 圃隱 鄭夢周의 후손이며 또 鄭夢周의 고향이기도 한 永川땅에서 태어나 문운을 일으킨 대유들이었다.
본관이 烏川인 鄭萬陽은 현종 5년(1664) 安東군 임하면 川前리에 있는 외가에서, 葵陽은 3년 뒤 지금의 永川시 大田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형 萬陽은 천성이 중후하고 자세가 단정하며 행동이 조용한 가운데 침착하므로 주위사람들에게 덕기(德器)가 크다는 평을 들었다.
동생 葵陽은 모습이 청수하여 마치 물에 뜬 부용 같았으며 천성이 영민하고 총명이 뛰어났다고 그의 연보는 적고 있다.
鄭萬陽은 10세, 葵陽은 7세 때부터 글자를 익히고 2년 뒤 종조부 鄭時衍에게 수학함으로써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갔다.
이들 형제의 세계(世系)를 통하여 내려오는 家學 또한 만만치 않다.
이들의 6대조 鄭允良은 李滉의 문도였으며, 5대조 鄭世雅는 임란당시 훌륭한 의병장이었으며, 증조부 鄭好仁은 張顯光과 孫處訥을 동시에 사사한 명유로 대과급제하여 진주목사를 지냈고, 조부 鄭時行은 무공랑(務功郞)이며, 부 鄭碩冑는 진사였다.
대대로 글이 끊이지 않은 혈통을 이어받은 萬陽 ‧ 葵陽은 타고난 총명을 바탕으로 날마다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복을 정제하고 공부에 전념하니 배움의 속도가 매우 빨랐다.
鄭葵陽이 11세 때 서울서 주부 벼슬에 있는 재종조부에게 올린 편지 내용을 보면 재능의 출중함을 가늠해 볼 수 있다.
「……今國家多憂/ 願叔祖 南伐倭寇 北擊匈奴/ 作萬古忠臣也」(……지금 이 나라는 근심이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할아버지께서는 남의 왜적을 무찌르시고 북쪽의 오랑캐를 격퇴하여 만고의 충신이 되시옵소서.)
이 형제들은 배움을 시작한지 불과 수년 만에 사서삼경(四書三經)등 제 경전과 웬만한 역사책을 섭렵 20세를 전후하여 문명이 쟁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과거에 응하면 좋은 성적으로 합격할 수 있었으나 시험 삼아 진사시험에 응하여 합격한 이후부터는 두 번 다시 세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학업과 인격수양에 진력하였다.
鄭萬陽이 27세 때 부친상과 뒤이어 조모상을 당했다.
이들 형제는 한 번 걸리면 살아날 가망이 어려운 천연두를 앓으면서고 치상 등 상주로서의 예의를 극진히 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난 이들의 지극한 효성은 노경에 이르러서도 시들지 않아 부모들의 손때 묻은 물건만 보아도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특히 이들 형제가 보여준 우애는 역사에 길이 남을 귀감이다.
五經의 하나인 詩經에 塤箎相和란 말이 있다.
塤과 箎는 고대 악기 이름으로 형이 흙으로 된 塤을 불어 창(唱)하면 아우는 대나무로 된 호(箎)를 불어 화(和)한다.
이 말은 형제의 우애가 아주 돈독할 때 곧잘 비유되고 있다.
鄭萬陽 ‧ 葵陽 형제의 우애는 너무 두터워서 항상 침식을 같이하며 공동으로 수많은 책을 저술하는 한편 남에게 보내는 서신도 연명으로 할 정도였다.
鄭萬陽은 호를 塤叟로, 鄭葵陽은 호를 箎叟로 지은 뒤 그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橫溪의 절경을 대상으로 塤箎新舊圖를 그리는 한편 그들이 지은 시에 곡을 붙여 책으로 편찬하니 이것이 塤箎錄이다.
우애의 정신을 자손만대에 까지 전승시키기 위해 그들 형제는「우리 집안의 형제는 몇10대를 내려가도 친형제자매와 다름없이 지내야 한다. 이 뜻을 잇기 위해 자녀들의 이름은 반드시 훈(塤)과 호(箎)의 획이나 변을 따서 지어야 한다.」고 후손들에게 명령했다.
이 유명은 누대를 거쳐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유림사회에서 兩叟선생으로 통하는 이들은 거유 李玄逸을 사사함으로써 退溪學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며 丁時翰 ‧ 尹증 같은 명유들과 학문적 토론을 거듭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밖에 당대의 명사 李滿敷 ‧ 李栽 ‧ 李衡祥 ‧柳斗寅등과도 폭넓은 교류를 쌓았다.
따라서 이들 형제들도 退溪學을 신봉한 철저한 主理論者였다.
理가 있는 연후에 氣가 생긴다는 신념을 지닌 鄭萬陽은 利器논쟁으로 학계 및 사상계가 분열되어 정치 일선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는 당쟁의 피해를 안타까워했다.
「선비들이 진정한 학문에는 뜻이 없고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탐하여 붕당적인 차원에서 학문을 논하고 고집하니 어찌 당쟁이 생기지 않으랴?」고 한 그는 四端인 仁義禮智 이외도 信을 강조했다.
「학리에 얽매여 仁義禮智만 강조하고 信이 없으면 모든 일이 문란해질 뿐 아니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은 때문에 시샘과 의심이 강하여 붕당의 소지가 더욱 높다.
따라서 정치의 지도이념이기도 한 유학만이라도 사심 없는 입장에서 연구 검토되어 정론이 세워진다면 당쟁을 없앨 수 있지 않을 까?」하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시비가 분분한 명리의 세계를 떠나 심산계곡 橫溪에 은거하여 효와 우애의 모범을 보이며 학문을 연마하는 한편 틈이 나면 자연과 유유자적하는 이들 형제의 생애는 선비의 이상향 바로 그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永川군 화북면 횡계의 풍경은 외부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절정이다.
이곳을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이런 곳에 이런 절정이 있었구나.」하는 탄성이 절로 일 정도로 횡계의 산수는 수려하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명유가 있고 산수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우니 배움을 원하는 유생과 관리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鄭萬陽형제는 초학자들에게 먼저 뜻을 세우게 하고 분담하여 먼저 小學과 家禮를 가르치고 四書三經을 숙지시킨 다음에 史傳을 읽히고 程朱學등 성리학을 배우게 하였다.
이들의 문하생은 1백 70여명 鄭重器 ‧ 鄭幹 ‧ 趙顯命등 명유 36명이 배출되었다.
이들은 만년에 학덕 높은 처사로 천거되어 벼슬이 주어졌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고 더욱 진리탐구의 집념을 불태웠다.
그들이 공동으로 남긴 저술의 분량을 보면 평소 기울인 학문적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理氣輯說 ‧ 困知錄 ‧ 家禮차疑 ‧ 심경질의 ‧ 補遺 ‧ 外國誌 ‧ 계몽해의 ‧ 상지록 ‧ 의례편고 등 30여 분야의 1백 70여권이다.
이중 전란 등에 의하여 상당 책이 유실되고 후손들이 지금까지 확인한 서책은 1백 41권이며 이중 軍政 ‧ 田政 ‧ 貢擧는 실학사상을 담은 서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평생 고고한 선비정신에 살면서 학문을 갈고 닦고 후학을 정성껏 지도한 鄭萬陽이 64세의 일기를 마치면서 후손들에게 남긴 유언을 보면 한층 더 고결한 안품이 엿보인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청빈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은 토지가 아니라 忠孝恭儉 4자이다. 진실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공손하고, 근검절약으로 덕을 쌓으면 절로 부를 이룩하리라.」
한편 이들 형제의 끝동생인 鄭夢陽은 연령차가 많아 두 형을 사사하여 큰 선비가 되었으나 형들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두 형이 세사에 무심했기 때문에 어려운 집안 살림을 혼자 꾸려나간 숨은 공로자였다.
이들의 후손은 손이 귀하여 鄭萬陽파 20여호 鄭葵陽파 1백여호 鄭夢陽파 20여호 뿐이다.
鄭萬陽의 10대 종손 鄭克씨(41)는 울산공대 강사로, 鄭葵陽의 11대 종손 鄭喆檢씨는 고령군 농촌지도소에 재직하고 있다.
* 참고문헌 = 鄭萬陽 ‧ 葵陽의 묘갈명 ‧ 行狀.
* 도움말 = 鄭喜永씨(56) <呂源淵 기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