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南學脈(120)淸臺 權相一
店村에서 북쪽으로 醴泉가는 국도를 따라 4km쯤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2km정도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聞慶군 산북면 서정리에 닿는다. 이곳에는 近嵒書院이 있어서 洪彦忠 李德馨 金弘敏 洪汝河 李구 李滿敷 權相一 등 칠현(七賢)을 제향하고 있다. 모두 경북 북부 유림의 큰 인물들이다. 이들중 淸臺 權相一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숙종 ‧ 영조대에 걸쳐 이학(理學)의 규명에 투철했던 성리학자이다.
그는 李滉의 학문을 좇았으나 李滉이 수정하기 전의 사칠설(四七說)을 수용, 이(理)와 기(氣)를 완전히 분리했다. 그리하여 이(理)는 본연의 성(性)이되고 기(氣)는 기질(氣質)의 성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영남 주리파(主理派)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理)에 치우친 만큼 그의 생활도 이(理)의 원리를 좇는 엄격함을 고수했다. 글을 읽을 때도 외는 것 보다는 내용을 이해하는데 힘썼으며 문장에도 이승(理勝)에 역점을 두었다. 과거제도에 대해서도 심술을 괴롭힌다하여 회의적이었다. 서당에 있을 때는 경서만을 일관되게 강론했을 뿐이다.
權相一은 자가 台仲이며 본관은 安東이다. 숙종 5년(1679)에 서정리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숙종 36년(1759. 1710??)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이조참의를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뜻을「爲己의 학문」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퍽 영민하여 때때로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주로 조부 權이칭에게 글을 배웠다. 그의 조부는 사후 이조찬판을 제수받은 인물이다.
아홉 살 때 조부는 그에게「明」자 운을 주어 글을 시험한 적이 있다. 운이 떨어지자 그는 대뜸「長天古月萬里明」(긴 하늘 옛 달이 만리에 밝네.)이라는 시구를 지어냈다. 조부는 다시「窓」자운을 들었다.
이번에도 대뜸「寂寂高齋半開窓」(적적한 높은 집에 창문이 반쯤 열려있네.)로 대꾸했다. 놀라운 재주였다. 이때 조부는 그의 재주를 탄식하며 그 후로는 글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영리하면 제대로 수(壽)를 못한다고 염려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의 재주와 학문에 대한 열의는 대단했다. 그는 소년시절에 이미 학문에 뜻을 세웠으며 옛사람의 독서와 수신하는 훈계(訓戒)를 모아「學知錄」이라는 책을 엮어 그걸 보며 심신을 닦기에 힘쓸 정도였다.
31세 때(1710) 그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길에 나섰다.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 등을 거쳐 영조 3년(1727)에 萬頃현감이 되었다.
그가 부임한 후 난리(戊申亂)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적의 세력의 허와 실을 탐방하는 한편 성곽을 수리하고 병사들을 훈련하여 이에 대치할 정도로 노련한 대응태세를 보였다. 또한 굶주린 백성을 구호하면서 유학에 힘썼다. 당시 상부에서는 그의 이러한 치적을 두고「讀書治民政成學進」이라 평가하기도 했다.
영조 27년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을 때 그는 상소를 올려 자신의 뜻을 밝혔다. 이 상소에서 바른 명분과 수령의 인사문제, 교육제도 및 과거의 폐단과 黨論의 화(禍), 그리고 초심(招心)을 깨우치는 요지 등을 진술했으나 왕의 비답이 없자 직책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 후 넉 달 뒤 입시(入侍)했을 때 영조 임금은 그의 상소의 절실함을 말하고 그 뜻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 후 홍문관이 계청하여 그는 경연(經筵)에 참석했다.
그 후 군자감정(軍資監正), 蔚山부사를 역임하고 영조 14년(1738)에 사직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후 쭉 고향에 머물면서 강론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는 특히 이곳 농천대의 산수를 사랑하여 청대(淸臺)라는 호를 짓고 그 곁에 서옥(書屋)을 지어 강론하는 장소로 잡았다. 그 후 몇 차례 정부에서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혹 마지못해 나가는 일이 있어도 오래 머물지 않고 금방 내려와 버리곤 했다.
영조 32년(1756)에는 춘추관(春秋館) 수찬(修撰)으로 실록편찬에 힘썼다. 영조 임금은 그 공을 기려 친히 어필(御筆) 16자를 하사하기도 했다. 나이 80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 이듬해 1760년 81세로 타계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初學指南」「觀書錄」「近思錄集解」「昭代備考」「家範」「歷代史抄」등이 있다. 이밖에 그의 학문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전해와 그의 학문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가 승지로 있을 때 임금은「우리나라의 문묘에 배향한 제현들의 학문과 언행이 어떠한가?」하고 물은 적이 있다. 이때 그는「金寒暄堂, 鄭일두는 참화를 입은 뒤에 문적(文籍)이 산실되었고, 趙靜庵, 李晦齋의 행적은 알겠으나 저술이 적습니다. 李退溪는 가히 동방의 理學을 집대성한 현인이며 그 문도가 심히 많습니다.」라고 했다.
또 한 번은 그에게「心鑑」을 읽은 적이 있는가를 물었다. 權相一은「心鑑은 ‘自省編’과 같사오니 담연하고 고요하면 돈연히 한 점의 먼지도 없을 것이오. 불란불리(不亂不離)한 가운데 갈등되는 마음이 발견될 것이오며 심체(心體)는 밝은 거울과 조용한 물과 같아서 한 점의 티끌과 파랑이 없으면 혈기가 순환하여 어지럽지 않을 것이오니 자연히 잠잘 때 자고 깰 때 깰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들 일화로 미루어 보면 그가 추구한 세계는「담연하고 고요한」마음의 세계이면서「밝은 거울과 조용한 물과 같은」마음의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그가 李滉의 문인으로서의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후손은 대략 25가구 정도이며 향리인 聞慶군 산북면 서정리에 7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에는 그의 9대 종손인 權七湧씨(58)가 종가를 지키고 있다.
* 참고문헌 =「嶺南人物考」「내고장 전통 가꾸기(문경군편)」
<李夏鎬 기자>
첫댓글 淸臺선생!
공부잘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