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나주(羅州)는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백제의 발라군이었으며 신라 경덕왕때 금산군으로 고쳤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았고 후에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로 개칭하였다. 고대 중국 백익(伯益)의 후예로 전하는 나주나씨(羅州羅氏)는 시조인 나부(羅富)가 중국 강서성 예장(豫章)으
로부터 동래 (東來)하여 고려조에서 상장군을 역임하고 나주에 정착한 것이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가 실전되어 부(富)의 후손으로 영동정에 오른 득규로부터 1세조로하여 세계를 이어왔으며, 특히
득규의 증손 수영(守永)의 아들 5 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문의 중흥을 크게 이루었다.
수영의 맏아들 위(位)는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호조전서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은거하여 금양처사로 불리워졌으며, 그의 아들 동길(東吉)이 증주목사로 나가 자손들이 용강과 성주 등지로 이거하면서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일족을 이루었다.
수영의 둘째 아들인 계(桂)는 고려에서 벼슬이 중서시랑에 이르렀고, 자손들이 주로 경기도에 집중세거하며 시랑공파(侍郞公派)를 이루었다. 그의 묘소가 한양성내에 있는 것으로 기록에 전하나 실전하여 1978년 후손들이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봉천산 남쪽에 6대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음력 10월 13일에 향사 하고 있다.
금양군 파조(派祖)인 석(碩)은 고려때 금양군에 봉해졌으며 학문이 뛰어났고, 나주로부터 김제로 이거하여 자손들이 김제파라고도 하였다.그의 묘소는 김제의 북조산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후손들이 1954년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종산(宗山)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5일 향사하고 있다.
네째 아들로 연안군파 (延安君派)를 이룬 세(世)는 연안군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판도판서에 이르렀고, 묘소가 실전되어 후손들이 1957년에 충남 서천군 마서면 옥산리 순제동에 설단하고 매년 음력 3월 17일에 향사하고 있다. 수영의 막내아들로 나주에 세거했던 원(源)은 직장공파(直長公派)의 파조가 되었고, 묘소는 공조전서를 지냈던 아들 진(璡)과 함께 나주 송현에 있으며 3월 3일에 향사하고 있다.
인물을 살펴보면 조선 세종때 이조판서 겸 세자시강원 찬선을 지낸 득강(得康)과 나성군에 봉해진 공언(公彦),
양천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던 흡(恰)이 유명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羅州羅氏)는 남한에 총 23,284 가구, 99,089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옥산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만수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용동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제주도 남제주군 일원
4>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나주나씨는 33,600가구 총 108,13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6>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나위(位) : 고려 때 호조전서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나주로 낙향했다. 나계(桂) : 중서시랑을 역임했다. 나석(碩) : 직장을 지냈다. 나중우(仲佑) : 지제고를 지냈다. 나진(璡) : 전서를 지냈다. 나신(紳) : 참판을 지냈다. 나득강(得康) : 조선 때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나공언(公彦) : 나성군에 봉해진 후, 전농시정을 지냈다. 나응허(應虛) : 판관을 지냈다. 나덕헌(德憲) : 통어사를 지냈다.[시호는 충렬(忠烈)] 나위소(緯素) : 경주부윤을 이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나천기(天紀) : 부호군을 지냈다. 나중소(仲昭) : 한말 독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