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에서 36장까지의 의미분석 | ||
선민의 열조와의 언약 | ||
12~20장 아브라함과의 언약 | 21-26장 이삭의 언약 계승 | 27~36장 야곱의 언약 계승 |
12-14장 가나안 땅 언약 15-16장 자손 번창 언약 17-20장 열국 통치 언약 | 21-23장 언약 계승의 준비 24-26장 언약 계승의 실현 | 27-28장 야곱이 받은 복과 언약 29-36장 야곱의 복과 언약 성취 |
15장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자손을 번창하게 하시려고 후사가 될 자손을 주실 것을 언약하시고 그리고 그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는 앞서 땅 언약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 정복할 족속의 이름들로 약속의 땅 경계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15장 말씀은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내용을 공부하다가도 자주 되짚어야 하는 중요한 사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異常)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는 내용인데,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는 14장의 전쟁 사건으로 말미암아 아브람이 가지고 있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네 방패’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란 무엇일까요? ‘네 방패’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전쟁으로 인한 위험과 두려움에서 방어가 되어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시는 보호와 안위의 의미는 지금 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영원한 성질을 지닌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은,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하신 ‘나라에 대한 세 가지 약속’을 은혜로 반드시 지켜서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에게 상(賞)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에게,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그리하면 주시며 찾을 것이며 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오셨기 때문에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고 취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이 땅에 없기 때문이며 예수님이 인간이 구하는 전부이며 최고의 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임재에 의한 약속하심에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앙적인 대답을 합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2~3절).
늙어가는 아브람에게 가장 큰 상은 자녀인데 당시까지도 사래에게 자녀가 잉태되지 않다보니 포기하며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종들 가운데 하나를 양자 삼으려고 대답한 것입니다. 아브람으로서는 최선을 대안인지 몰라도 이는 하나님의 언약과 능력을 불신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을 겪으며 세상 안에서 살다보니 세상적인 경험이나 지식적인 말에 공감하며 믿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세상에 갇힌 인생들이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부르실 때 대부분 고난과 좌절과 빈궁한 가운데서 부르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가운데 인간의 지식과 힘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시고 구주되신 주님께 항복하며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
4절부터 7절까지는 여호와께서 아브람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될 것임을 언약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에셀을 양자 삼으려는 아브람에게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아브람과 사래를 통하여 후손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4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런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적당한 시기에 원하는 것들을 주시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은 성도에게 능력이요 생명이요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만약 아브람에게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녀를 주시면, 아브람이 자신의 힘으로 자녀를 낳았다 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셔서 낳았다 할까요? 나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자신의 힘으로 자손을 갖게 되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결코 내 힘이 아니었음을 고백하며 전능자께서 주셨다는 것으로 평생동안 믿고 살게 하시고자 ‘100세’, 생명력이 끊어진 때, 불가능한 때에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21장 이후의 성취사건). 그 결과는, 이삭이 성장할 무렵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을 듣고 행하는 모습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때에 아브람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온전히 믿었기에 두말없이 하나님의 명을 경외함으로 다음날 일찍이 이삭과 함께 그를 죽이는데 필요한 도구와 불을 가지고서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와 같은 믿음의 복을 주셔서 만민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으며 믿음의 기준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내용이 본문 15장 1절의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의 성취적 현장이요 더 나아가서 12장 2절과 3절 언약의 성취적 사건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가능성이 있을 때에 생기면 모든 인생들은 나의 힘으로 가졌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자신에게 영광을 들리며 자축합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습 하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아이를 생산한 부모들이 교회에 와서 감사헌금을 대부분 합니다. 감사의 조건은 ‘아이를 주셨음’입니다. 여기서 물어보겠습니다. 부모들이 진정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음을 믿고 감사를 한 것일까요? 아니면 입으로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만 사실은 내 힘으로 자녀를 낳아서 기뻐서 자랑하려다보니 장소가 교회인지라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다고 하며 감사헌금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들 부모의 자녀 키우는 모습들을 보면 대충 답이 나옵니다. 태어난 아이가 우리 부모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를 대리 교육하는 것처럼 하면 여호와께서 이 아이의 주인이고, 그러나 자녀를 내 맘과 뜻으로 양육하면 내가 내 힘으로 낳았으며 내가 주인이다는 증거가 됩니다. 인간은 눈어두워 여호와 하나님을 불신하는 존재입니다. 인생은 결코 여호와가 하셨다고 중심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설령 나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큰 경험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좀 지나다 보면 그것들이 나의 돈벌이와 이력서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나의 지식과 사상체계에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인본적 지식을 뛰어넘으면 가능합니다. 이것을 저는 〈신지식으로의 전환〉이라고 명명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나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분의 속성들이 내 안에 들어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면 됩니다. 말씀과 성령만이 해결하십니다. |
믿음이란, 나의 욕심과 욕망과 의지를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은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에게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든 모세든 누구든지 저들 스스로의 노력과 학벌과 정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말씀이 만듭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물’이라고 합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엘리에셀은 아니다고 말씀하시며 반드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게 하시며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5절)고 하시는데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6절).
그리고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신 이유와 장소를 말씀하시는데, 부르신 장소가 11장 후반부에서 말씀하셨던 ‘하란’이 아니라(11:31) 아브람이 하란으로 떠나기 전 부모와 헝제들이 살았었고 아브람이 태어나 거주했었던 ‘갈대아 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고 부르신 것은, 하란으로 이주했을 당시의 장성한 때가 아니라 이미 옛적에 우르에서 선택하셨고 다만 때가 되어 하란에서 부르신 것뿐이다는 것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8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명하셔서 언약의 증거를 보이시려는 섭리 내용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여호와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8절) 라고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확인에 의한 확신을 주시려고 당시의 계약하는 형식으로 계약을 하시고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 년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9절)고 명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시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습니다(10,11절). 계약을 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장소와 시기는 언제입니까? 교회입니까? 집입니까? 어릴 때입니까? 아니면 최근이십니까? 정답은 모두 ‘아니다’ 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시기와 장소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라고 하십니다. 시기와 장소가 ‘창세 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장소는 어디겠습니까?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또는 어떤 사건이나 계기로 또는 나의 의지로 교회 와서 믿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지엽적인 것입니다. 세상의 무언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늘 아버지와 그 나라에서 먼저 정해진 우리 성도들입니다. 제발 사람들에게 박수 좀 치지 맙시다. 전도했다고 잘했다고 박수치지 맙시다. 어느 한 지체가 좋은 목소리로 노래 잘했다고 박수치지 맙시다. 당사자를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의 박수치지 맙시다. 친다고 받으시고 치지 않는다고 받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으며 하나님은 영광 자체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약속을 보증하기 위하여 친히 계약을 맺는 모습을 9절 이후에 보여 주십니다. 이 계약법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행해지던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회에서 행해지던 계약 방법과는 뭔가 다른 부분이 본문에서 행해집니다. 원래 계약이라는 것은 쌍방간 서로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 그것을 인증과 약속을 증빙하는 형태로 행합니다.
12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이 언약의 땅에서 살게 되기 까지의 과정을 밝혀 주시고, 이를 확증하시려고 제물에 불로 응답하시며 주실 땅의 범위를 언약하시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하시는데 뭔가 특이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계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재워 놓으시고 환상 중에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치르시는 것입니다(12절,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아브람의 조건이나 의중 따위는 필요가 없습니다. 큰 흑암과 두려움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으로 하여금 깊은 잠이 들게 하시고 환상 중에 일방적이며 절대적인 계약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직접 일하심을 가리키는 단어 하나는 ‘깊은 잠’입니다. 이를 원어로는 ‘타르떼마(תרדמה)’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라담(רדם)’의 수동형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스스로 잠을 청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요소에 의해서, 즉 본문에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잠이 들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또한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할 때도 사용된 단어입니다(창2:21).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는 상태에 들어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계약은, 현대의 종이에 먹지를 대고 쌍방간 위반시 배액을 배상한다는 조건적 계약과 달리, 동물의 배를 중앙에 갈라서 피를 흘리게 함으로 계약을 맺는 방식입니다(10절). 이 피는 곧 죽음입니다. 단순히 배액이 아닙니다. 죽음으로 계약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이 계약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계약은, 장차 오셔서 우리의 죄 값으로 피를 흘리시며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장차 보내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지고서 우리와 계약을 한 것입니다. 즉 이 계약은 하나님께서 ‘죽음’ 곧 장차 보내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계약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계약은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이와 같은 계약을 일방적으로 행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하신 나라 세우심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집에서 함께 한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든지 사래의 여종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오직 약속대로 사래의 배를 빌려서 후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모형으로 동물의 피로써 계약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피만이 효력이 있고 나머지 어떤 것도 효력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예수입니다】
사래를 통해서 자녀를 주시고, 주변에 아무리 강대한 나라(애굽 등)가 방해를 한다 해도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반드시 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것을 더욱 확증하시고자 창세기 15장 18~21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실 땅에 대한 동서남북 경계까지 약속해 주십니다. 족속의 이름은 결국 땅의 경계인데 이는 곧, 땅의 경계에 속한 땅만을 주신다는 의미이며 경계를 벗어난 땅들은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땅의 경계는 ‘눈’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으신 시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약 중에 또 하나의 약속을 하시는데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3~
14절)라고 하십니다.
본문을 정리하면 첫 번째,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후손을 주시며 그리고 그 후손들이 이방으로 내려가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후손들을 괴롭힌 이방 나라를 징벌하시고 그 후에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그 나라에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애굽기 전반부에서 성취되는 사건들입니다(출1:11/3:21/12:36~41).
연이어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15,16절) 여호와께서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하기까지를 기다리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사백 년 동안 이방에 종살이를 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여러 모든 족속의 대표격인 족속입니다.
그리고 계약을 완료하십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17절) 여기서 ‘타는 횃불’이라는 것은 불붙은 횃불로서 계약의 인장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고기 사이로 지났다’는 것은 계약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재우시고 홀로 독자적, 일방적, 절대적인 계약으로 그 계약을 끝마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잘못된 해석 하나를 지적한다면 바로 인과응보의 개념을 성경 해석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인류 역사를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섭리하여 가시지 아니하십니다. 여호와는 인류 역사를 스스로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작정하여 놓으신 경륜대로 섭리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 모든 만사를 작정하여 놓으시고 그 작정하신 것을 아브람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대로 이루셔서 그의 자손으로 하여금 언약의 땅을 업으로 삼도록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8절에서 21절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그의 자손으로 주실 땅의 범위를 언약하여 주시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과의 계약을 마치시고 당시의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던 족속들의 명단을 본문에 열거하십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열조의 조상 아브람에게 위의 5절과 7절에서 약속하신, ‘하늘의 뭇별’과 같은 많은 자손들이 들어갈 ‘땅’에 대한 경계를 분명하게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의 후손들로 이방에서 사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하신 후 정해진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성취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백성들로 믿게 하시고 이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김을 받으시고자 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땅 정복에 대한 언약의 증거를(18절) 보여주시고자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게”(17절) 하십니다. 그리고 18절 이후부터 마지막 21절까지 족속의 이름을 자세하게 열거해 주십니다. 이로써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자손이 언약의 땅을 업으로 삼게 될 것에 대한 확증을 두 가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리하면, 그 첫째는 아브람의 자손들에게 장래에 있을 일들에 대한 내용이고, 둘째는 횃불이 제물 사이로 지나가는 현장 사건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들어가게 될 땅의 경계와 범위를 언약하여 주십니다. 이 언약은 후일에 다윗 왕국 이후 솔로몬 왕 시대와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성취됩니다(왕상4:21.왕하14:25).
‘땅 정복’에 관한 내용들은 민수기부터 다윗왕 시대까지 전개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확인하고 16장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계속되는 교훈이며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땅 정복은 요단강 오른편에 있는 땅인데, 요단강을 건너기 전 광야를 돌아서 올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모압 땅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정복한 땅들은 모세가 두 지파 반에게 먼저 배분을 마칩니다(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모압 평지’는 모세가 이미 정복한 땅입니다.
아셀 | 납달리 | 요 단 강 | 므낫세.반 | ✢땅 분배가 주는 교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만 주어진다. ❚더 받을 수도 없다. ❚어떤 이유로 타인의 토지가 내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돌려주어야 한다. ❚결국에는 주신 것만 내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낸다고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는 마음이 믿음이다. ❚나의 소유 분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신다. ❚주어진 은사대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순종 하는 것이 주님 기쁘신 신앙이다. | |||
스불론 | 잇사갈 | ||||||
갓 | |||||||
므낫세.반 | |||||||
에브라임 | 르우벤 | ||||||
단 | 베냐민 | ||||||
♣단지파는 후에 납달리 동북쪽으로 옮김 | 유 다 | 유 다 | 사 해 | ♣시므온은 후에 유다에 예속됨 | |||
시므온 | |||||||
위의 그림은 여호수아가 분배한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위치와 경계입니다. 이 땅들은 모세가 요단강 동편 땅을 정복했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가서 서편 땅 일부를 정복하고서 죽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는 죽기 전, 요단 서편 땅 전부를 정복하지는 못했으나 전체의 땅을 각 지파별로 분배합니다.
전체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말은 정복되지 아니한 땅에는 이방 민족들이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인하여 여호수아는 아직 정복되지 아니한 땅까지 분배했을까요?
한 마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무슨 믿음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하신대로 지금까지 함께 하셔서 약속의 땅을 정복하게 해주셨으므로 남은 땅도 반드시 언약대로 정복하게 하실 것이다는 믿음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과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리고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 백성들 앞에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는 마지막 고백을 하고서 죽습니다. 정복되지 아니한 땅 분배와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의 내용입니다. 즉 이것은, 애굽에서부터 지금 그 순간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언약대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장 여호수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믿고 의지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일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과 땅을 쟁취하는 내용입니다만 전체적인 내용상의 흐름은,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에게 시험하시는 내용입니다. 사사기에서는 약속하신 ‘그 땅’을 모두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땅은 어떻게 정복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까요?
사무엘상부터 이스라엘의 왕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왕은 약속된 유다 지파가 아닌 베냐민 지파의 사울입니다. 그는 키가 장대하고 힘이 쎈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땅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사울 다음 왕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으로 세우신 자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5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땅 대부분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당시 전쟁에 능한 왕이었습니다. 전쟁을 하기만 하면 승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땅 범위 외에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확인할 수 있는가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그릇대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신 그릇은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발 그릇을 키우자는 등 희망고문 좀 하지 맙시다. 그릇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잉태하실 때부터 작정하셨습니다.
땅 정복에서 주시는 교훈은 ‘욕심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욕심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내 것은 없습니다. 욕심부리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징계를 주십니다. 왜냐구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뜻대로 주십니다. 그 주어진 대로 감사하며 이끄시는 대로 가는 것이 순종이며 천국 생활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피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 생각이 들면 이미 욕심이 내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내 힘이라 생각되면 교만이 차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하신대로 우리의 분량만큼 주실 것만 주시고 필요에 따라 주시며 주셔서 할 일을 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사와 은혜를 주심으로 하게 하셔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주의 뜻을 믿는 성도가 복있는 사람이요 만사형통 입니다】 갈라디아서2장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몸도 나의 지식도 나의 능력도 나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입니다. 주께서 주의 것을 마음대로 사용하십니다. 노아 때 심판으로 보이셨고 바사의 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은 고통만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시는 것은 평안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매일매일 우리의 육체를 죽이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우리 영혼은 날마다 살아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