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 자료
2012.9.6
1. 종묘(宗廟)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셔 제사 지내는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드라마를 보면 대신들이 임금에게 종묘사직을 보존해 달라며 상소를 올리는 모습을
곧잘 보게된다.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이며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든 때에도 의식을 행하였다
종묘는 1395년 조선의 태조가 한양을 새나라의 도읍으로 정한 후에 지었다.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종묘를 그리고 서쪽에 사진단을 둔다는 유교예법에 따른 것이다. 지금 종묘는 임진
왜란으로 소실되어 1608년에 중건한 것으로 건립후 모시는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수차례
건물 규모를 늘려 현재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
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34위의 신위를 모셨다. 왕위에서 쫒겨
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이곳에 모시지 않고 대신 왕위에서 쫓져났다가 숙종 때 명예를
회복한 단종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셨다.
종묘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과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제사를 모시는 공간으로는
정전,영녕전,공신당,칠사당이 있다. 그리고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는 재궁,향대청,악공청,
전사청 등이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을
보존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본전과 영녕전은 평상시에는 개방이 되지 않는다. 정전과 영녕전 내부의 모습은 홍보관에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제례와 제례악을 재현하는 영상물을 홍보관에서 볼 수 있다.
종묘제례
조선시대의 종묘제례는 왕이 친히 행하는 가장 격식이 높고 큰 제사로서 밤중에 지냈으며,
왕을 비롯한 왕세자, 여러 제관, 문무백관 등이 참가하였다. 종묘제례는 정전에서는 네계절
첫달 정해진 날과 섣달그믐을 합쳐 1년에 다섯번, 영녕전에서는 봄,가을 정해진 날 두번을 봉
행하였다.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 낮시간에 봉행하고 있다. 종묘제례는 길사(吉事)여서
의례도 길례(吉禮)로 받들었다.
<제례순서> 종묘제례는 정성과 엄격한 격식을 갖춰 치러졌다. 제례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 나가 각자 맡
은 역할을 할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就位).다음으로 혼을 맞기 위해 향을 피우고 바닥의 관
지에 울창주(술)를 부어 혼백을 불러들여 신에게 흰색 모시를 바친다(晨관禮). 제사에 사용할
희생의 털과 피,약한 내장들을 올리고 기름바른 간 및 기장,피,쑥 등을 숯불화로에서 태운다
(薦俎禮). 신이 즐기도록 왕이 첫술잔을 올리고 두번째 잔과 세번째 잔은 왕세자와 영의정이
올린다(獻爵禮). 왕이 대표로 술과 고기를 먹음으로써 조상이 주는 복을 받는다(飮福受조禮),
제사에 올렸던 축문과 폐백을 모두 모아 예강에 가서 태우는 것으로 제사는 끝난다(望燎禮).
종묘제례악은 악기,노래,춤을 갖추고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행하는 음악이다. 종묘제례
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묘제례 때 줄을 지어 추는 춤을 일무(佾舞)라
하는데 조선은 제후국으로 6일무(36인이 춘다)였으나 고종이 황위에 오른 이후 8일무(64인)
를 추었다.
향대청(香大廳)일원
향대청은 향청과 집사청으로 구성된 건물이다. 향청은 제사 전날 왕이 종묘제례에 사용하기
위해 친히 내린 향.축문.폐백과 제사 예물을 보관하던 곳이고,집사청은 제사에 나갈 집사자들
이 대기하면서 재계를 하는 곳이다. 향대청 앞에는 행각이 길게 자리잡고 있고 두건물 사이에
남북으로 긴 뜰이 만들어져 있다. 향대청 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고 그 뒷쪽에 공민왕
신당이 있다. 망묘루(望廟樓)는 제례 때 임금이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제향 때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면서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재궁(齋宮)일원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한다. 마당 북쪽에 왕이 머무르는 어재실, 동쪽에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에 어목욕청
이 있고 담으로 둘러져 있다. 왕과 세자는 재궁 정문으로 들어와 머물면서 목욕재계하고 의관
을 정재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 서협문으로 나와서 정전과 영녕전의 동문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정전 신실의 수를 늘리기 위해 증축할 때마다 재궁은 동쪽으로 옮겨 다시 지
어졌다.
정전(正殿)일원
정전은 왕과 왕비의 승하후 궁궐에서 3년상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부묘) 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곳으로 남문은 신문
(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문이다. 동문은 제례 대 제관이 출입하고 서문은 악공,춤을 추는
일무원,종사원이 출입한다. 정전의 19칸의 신실(神室,감실(龕室)이라고도함)에는 태조를 비
롯한 왕과 왕비 49위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정전의 월대 아래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서쪽에는 칠사당(七祀堂)이 있다. 공신당은 역대
왕들의 공신들 83위를 모시고 있고 칠사당은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이 합쳐진 사당이다.
영녕전(永寧殿)일원
세종21년에 정종의 신위를 정전에 모시며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자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위
를 다른 곳으로 모시기 위해 새로 지은 별묘이다. 영녕전은 신위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
에서 조묘라고도 한다. 정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좀 친근감이 있게 지어졌다. 이중으로 된 월
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곳에 문을 두었다. 현재 영녕전에는 가운데 4개의 방을
양쪽 옆에 딸린 방들보다 높게 꾸미고, 각 방에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탁조, 환조와 왕비
들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서쪽 5번째 방부터 16번째 방까지 각각 정종과 왕비, 문종과
왕비, 단종과 왕비, 덕종과 왕비, 예종과 왕비, 인종과 왕비, 명종과 왕비, 원종과 왕비, 경종과
왕비, 진종과 왕비, 장조와 왕비, 의민황태자(영친왕)와 태자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중앙 본실인 4감실과 서협실과 동협실을 합쳐 모두 34위의 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전사청(典祀廳)일원
전사청은 제례를 치를 때 음식을 마련하는 곳으로 평소에는 제사에 사용하는 집기들을 보관
하였다. 네모난 마당 둘레에 'ㅁ'자 모양의 건물이 있고 마당에는 음식을 준비하던 돌절구들
이 남아 있다. 정전 동문 옆의 수복방(守僕房)은 종묘를 지키는 관원들이 사용하엿고 그 앞에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전사청 동쪽에 우물인 제정(祭井)이 있다.
2. 창경궁(昌慶宮)
![](http://i1.daumcdn.net/thumb/R618x0/U03/encyclop/4E3F9F1C01666D0085)
창경궁은 조선9대 임금인 성종이 1483년(1484년완공) 창덕궁 동쪽에 세운 궁궐이다. 창덕궁과
경계없이 사용하였고 두 궁궐을 합쳐 동궐(東闕)이라 칭하였다. 세종시 상왕 태종을 위해 수강궁
을 세웠는데 성종은 창덕궁이 좁아 세명의 대비를 위한 공간으로 수강궁을 확장하여 창경궁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궁(離宮)으로서 활용빈도가 높아졌다.
다른 궁궐이 모두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으로 건물을 배치한데 비해 창경궁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지형을 고려하고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
의를 추구하였기에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궁궐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다른 궁궐과 같이 불에 탔다가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이 때 재건된
명정전(明政殿)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전 건물이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일제의 훼손에 의해 그 존엄성이 깡그리 없어지고 1907년부터
창경궁 안 건물 대부분이 헐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일반에 공개하였고 1911년에는 이름마
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종묘와 연결된 부분에 도로를 개설하여 맥을 끊었다.
1983년부터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의 궁궐모습을 되살리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홍화문(弘化門)일원
창경궁의 중심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보물 제384호)도 동쪽에 세워졌다.
1484년(성종15)에 창건, 임란으로 소실된 후 1616년(광해8)에 재건되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
로 좌우에 한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다. 홍화문을 통과하면 명당수인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500년도 더 된 옥천교(玉川橋)가 놓여 있다. 옥천교 다리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전전(明政殿)일원
명정전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으로 즉위식,신하들의 하례,과거시험,궁중연회 등의 공식적인 행사
를 치루었던 정전(正殿)이다. 1484년(성종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
해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며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은 단층의 단아한 규모이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
다. 앞쪽 마당 조정(朝庭)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고 중앙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
의 격식을 갖추었다. 명정문(보물 제385호)과 행각이 조정을 둘러싸고 있다. 명정전은 국보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정전(文政殿)일원
문정전은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 건물이다.
정전인 명정전과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런 특이한 배치구조는 다른 궁궐에서 찾아보기 힘든다.
편전이지만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 강점기에
헐렸다가 1986년에 문정문,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다.
숭문당(崇文堂)과 涵仁亭)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
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을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경사진 면을 교묘히 이용하여 뒤에
는 낮은 주초석을 사용하고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워 누(樓)처럼 되었다. 영조의 친필 현판이
남아 있다. 함인정은 건물 사방이 벽체없이 시원하게 개방된 모습인데 '동궐도'에는 지금과 달리
3면이 막혀 있다.
경춘전(景春殿)과 환경전(歡慶殿)
경춘전과 환경전은 통명전,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진다.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
은 대비의 침전이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했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
으로 보아, 대비뿐만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 하다.
이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
전 내부에 '誕生殿'이라고 친히 현판을 걸기도 했다.
통명전(通明殿)과 양화당(養和堂)
내전 가장 깊숙한 곳에 남향으로 위치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내전의 으뜸 전각이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넙
적한 박석을 깔았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엿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
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무르기도 했다.
지금의 통명전과 양화당은 1834년에 재건한 것이다. 통명전은 보물 제8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에는 주로 후궁들이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향인 영춘헌
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이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
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다.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
리해 태항아리에 넣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신전에 봉안
했다. 성종 태실이 창경궁에 있는 이유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
하기 위해 옮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춘당지(春塘池)일원
춘당지는 현재 두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이다. 면적이 넓은 앞쪽 큰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다.
이 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려 논을 가는 시범을 임으로서 풍년을 기원하였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놀이를 하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 섬은 1986년에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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