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키울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람의 진실된 사랑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를 바칠수 있습니다.
전태일의 삶은 사람이 태어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되게 사는 것인지 가르쳐 주었고, 죽음으로써 참사랑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었습니다.
전태일, 그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여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달픔으로 심한 가슴앓이를 할 정도였습니다.
전태일, 그는 한없이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어린나이에 여섯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구두닦이를 비롯해 신문팔이, 삼발이장사, 껌팔이, 우산장사, 뒤밀이 등등 평화시장의 재단사가 되기까지 숱한 밑바닥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스물 두 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어쩌면 단 하루도 쉬어보지 못하는 날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실히 일했건만 일당은 14시간 노동에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50원! 평화시장의 다락방에서 피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어린 여공들을 바라보며, 잘못된 사회현실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인간은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전태일, 그는 온 몸으로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을 다 바쳐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태일은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와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폐허가 된 것은 도시와 대지 뿐만이 아니었지요. 사람들의 마음도 갈갈이 찢기었고 삶의 터전도 잃었습니다. 지독한 가난과 피폐함 속에서 삶을 시작한 태일은 가난과 고통을 숙명처럼 안고 있었습니다.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난 태일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습니다. 이미 유아기에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겪었고 대구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 부모의 등에 업혀 사람들 속에서 부대껴야 했습니다.
곤궁하고 피폐한 삶이 어디 태일의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겠습니까 만은, 냉혹한 현실은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태일의 부모와 가족들에게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영원히 아물지 않는 저주처럼 달라붙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해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던 태일의 아버지는 염색을 맡긴 원단이 잘못되는 바람에 빚더미에 앉고 말았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직 몸뚱아리밖에 없는 빈민이 몸뚱이를 움직여 밥을 먹고 살아가기에는 그나마 엉덩이라도 부빌 수 있는 곳이 서울이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기술도 있어서 어떻게든 밥벌이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가난한 가족은 불안 속에서도 희미한 희망을 품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여섯 살짜리 어린 태일과 그보다 어린 동생 태삼, 순옥이를 업고 안고 하면서 낯선 땅, 서울역 앞에 내린 것입니다. 이때가 1954년, 전쟁이 휴전상태로 바뀌고 이 나라가 폐허로 변해 모든 것이 부족하고 막막하기만 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은 겨우 끝났지만, 먹고 살 걱정은 더욱 절박했습니다. 태일의 가족처럼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고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때라 태일의 아버지는 실업자로 하루 하루를 떠돌았습니다.
재봉 기술이 있었지만 취직하기가 어려웠고 평화시장이나 중부시장 등에서 그때그때 생기는 일거리를 해주고 몇 푼의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태일의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아 서울 거리를 헤매고 있을 때, 태일의 가족들은 서울역 앞 염천교 다리 밑에서 한댓잠을 자며 만리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동냥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그들 가족은 거지였고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는 바닥까지 추락한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내일의 희망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참담했고 허우적거릴수록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루 세끼 밥은 커녕 죽도 먹을 수 없는 삶을 살면서 죄 많은 인생을, 한 많은 세상을 탓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일의 가족과 같은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던 시대라 한 가족의 불행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불행은 추상이 아니고 구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비바람을 맞으며 한댓잠을 자고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는 분명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1960년 초에 태일은 남대문 국민학교에 편입하여 4학년이 되었습니다. 12살이 된 태일은 소년으로 성장했고, 집안의 어려움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던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겨우 2년 여의 행복을 끝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4.19 혁명 직전에 학생복을 단체로 주문받은 태일의 아버지는 여기 저기서 빚을 얻어 원단을 구입하고 제품을 만들어 납품을 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4.19 혁명이 일어나자 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중간에서 대금을 가지고 사라져버려 태일의 아버지는 빚더미에 앉게 된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전 재산-판잣집, 재봉틀, 가게 보증금 등으로 빚을 청산하고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다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장사하면서 알게된 원단 가게 주인과 친구들이 셋방을 얻어주어 노숙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낙담한 아버지는 술에 취해 난폭해지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이 될 정도로 충격을 받아서 한 순간에 평온했던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습니다. 어린 네 명의 자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은 술에 취해 세상을 원망하며 가족을 괴롭히고 어머니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생활이 곤란한 상태여서 당장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먹는 때보다 굶는 때가 많은 나날을 보내던 태일은 신문팔이를 시작합니다. 12살 소년 태일은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신문도 팔고 구두도 닦으면서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신문을 팔기 시작했으나 차츰 신문을 팔아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절박함이 태일이를 학교에 다닐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결국 4학년 초에 태일은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12살짜리 어린 태일은 10살짜리 동생 태삼을 데리고 동대문 시장에 나가 삼발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삼발이, 솔, 조리, 방빗자루, 적쇠 등을 위탁판매소에서 받아다 물건을 팔고 원금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밑천없이 시작할 수 있는 장사였습니다.
어린 형제는 "솔 사려! 조리, 방비, 적쇠요! 쓰레받기나 삼발이요!" ...... 긴긴 여름날을 이렇게 외치며 아침부터 씨레이션 박스에 솔, 조리 등을 담고 시내 여러 골목과 시장들을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까지 헤매었습니다. '그 길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자 병중에서 완쾌를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친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주린 배를 참으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힘겨운 나날은 어린 형제를 지치게 했고 부족한 수입으로 인해 원금에서 가족들이 먹을 국수를 사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물건값을 입금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어린 태일의 가슴은 불안과 초조함으로 찌들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을 행상으로 떠돌면서 발이 부르트고 목이 쉬도록 일했지만 태일에게 돌아온 것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집안 형편과 원금을 입금하지 못해 늘어난 빚이었습니다.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던 태일이 안정된 직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미싱 기술 덕분이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하루 일당이 50원에 불과한, 말할 수 없이 불평등하고 일방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습니다. 다방에서 차 한잔 값이 50원이었으니 하루 14시간을 힘겹게 일한 대가가 일반 사람들이 차 한잔 마시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태일이 이렇게 싼 임금을 감수하며 '시다'로 취직을 한 것은, 당장의 생계보다는 기술을 배워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려는 나름대로의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동안 떠돌이에 행상으로 전전하던 생활을 마치고 저임금이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택함으로써 태일의 삶이 또 한번 바뀌게 되었습니다.
태일의 나이 17살이 되던 1965년, 그는 평화시장의 삼일사에 취직합니다. 학생복 맞춤집인 이곳에 시다로 첫 발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미싱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던 태일은 일을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시다에서 미싱보조로 직급이 높아지고 월급도 3천원으로 대폭 올랐습니다. 하숙집과 공장을 오가며 오로지 기술을 배우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 볼 수 없었던 것이 이때의 태일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함께 모여서 살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습니다. 이제 흩어졌던 가족도 다시 모이고, 어머니도 행상을 해서 돈을 벌고 태일도 매달 적은 돈이지만 월급을 받아오게 되어 가난한 가정에도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삼일사에서 미싱보조로 미싱일을 배운 태일은 1966년 가을에 통일사에 미싱사로 전직을 합니다. 이제 태일은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시고 자신도 포기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태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짐으로써 한국노동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던 노동운동이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태일의 죽음으로 시작된 노동운동의 발달은 70년대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 쟁취와 민주노동운동의 발달에 있어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지식인들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민중의 삶과 투쟁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기폭제가 되었으며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피끓는 고통의 결과였지만 그 고통을 넘어 모든 노동자와 민중은 진정한 인간다운 삶과 민주주의를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1970년을 분기점으로 노동운동의 양상은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에 노동운동은 민족해방운동과 맞물려 민족주의적이면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 속에서는 전평으로 대표되는 좌익 노동운동이 대세를 이루다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산업화가 본격 시작된 1960년대부터 노동자와 노동운동은 단지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면서 군부독재의 지독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가 증언했던 것처럼, 평화시장의 상황은 결코 이곳만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국 노동자가 처한 보편적인 노동조건이며 생존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를 맞아 71년에 '국가비상상태'를 선포하고 72년에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를 선포하면서 공포정치로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자각하기 시작한 노동자의 투쟁은 더욱 가열차게 불타올라 70년는 가장 격렬하고 뜨거운 투쟁이 타올랐던 시기였습니다. 70년대에 약 2,500개가 넘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노동조합 등 대기업 민주노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 발생했습니다.
특히 78년 원풍모방과 79년 YH 무역 노조의 투쟁은 노동운동이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80년,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군부쿠데타 이후, 노동운동은 다시 가혹한 탄압 속에서 잠시 활동이 멎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83년부터 시작된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화 투쟁, 대규모 노동조합의 결성, 대학과 연계한 현장 투쟁 등 다양한 방법과 발전된 운동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도약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적인 내용에 머무르지 않고, 미국을 겨냥한 반제국주의, 반독재, 반자본의 성격을 확실하게 띄었으며 노동자의 계급적 각성을 통해 노동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후 불붙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전 산업의 모든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일치 단결하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의 단결된 힘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에는 전태일 열사의 죽음이 있습니다. 한 노동자의 죽음으로 노동운동이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를 이어 산화한 수 많은 노동 열사와 민주 열사의 명목을 빌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때까지 노동자의 전진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노동열사 … 20년 동안 98명 '노동운동 불꽃'으로 산화
□ 박정희 정권 시기 ( ∼ 70년∼ 79년까지 총3명 사망)
- 70년 : 1명 - 71년 1명 - 79년 : 1명
1) 전태일(1970년) 70. 11. 13. 오후 1시 30분경 평화시장 앞길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면서 분신 결행, 밤10시경 성모병원에서 불꽃으로 산화
2) 김진수(1971년) 70. 12. 한영섬유 노동조합을 결성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시정을 촉구했으나 71. 3. 18. 노조를 파괴하려는 구사대에게 피습당함, 5. 17. 운명
3) 김경숙 (1979년) 78. 3. YH노조 대의원 선출, 79. 8. 9. 신민당사 점거농성, 8. 11. 새벽 2시 2천여명의 경찰 신민당사 난입, 강제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운명.
□ 전두환 정권 시기( 80년∼ 87년가지 총18명 사망)
- 80년 : 1명 - 84년 : 1명 - 85년 1명 - 86년 3명 - 87년 12명
4) 김종태(1980년) 80. 6. 9. 17시 50분경 이대앞에서 "노동3권 보장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광주학살 의분을 호소하는 전단을 배포하고 분신
5) 박종만(1984년) 84년 11월 노조 사무장의 부당 해고에 맞서 단식 농성에 돌입. 11월 30일 해고철회 요구를 위해 전무를 찾아갔으나 오히려 해고하겠다고 위협하자 이 소식을 들은 박종만 동지는 동료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사무실에서 밖으로 뛰어나오며 "노동조합 탄압말라, 사무장을 복직시켜라, 부당한 대우를 개선하라."고 외치며 분신. 오후 8시 30분경 운명
6) 홍기일(1985년) 8월 15일 전남도청앞 금남로에서 '8. 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유인물과 부모님과 형에게 보내는 유서를 뿌리면서 "광주시민이여! 침묵에서 깨어나라!",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에 결사적으로 나서자",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 자살을 기도. 22일 임종
7) 박영진(1986년) 동일제강 민주노조 건설에 핵심적 역할을 해낸 그는 신흥정밀에 입사하여 부당노동 행위 및 임금착취에 대한 항의중 해고 철회 투쟁을 벌이다가 경찰과 회사측의 폭압에 맞서 "근로기준법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며 분신 운명
8) 변형진(1986년) 4월 30일 삼환택시의 부당해고에 맞서 오후 2시 30분경 회사앞에서 분신,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 5월 1일 운명
9) 신호수(1986년) 6월 11일 인천시 남구 도화가스에서 근무 중 서울 서부서 형사들에 연행후 행방불명. 6월 19일 전남 여천군 대미산 동굴에서 변사체로 발견
10) 이순덕(1987년) 86년 6월 28일 충청지역 교육민주화 실천 결의대회에 참가하는 등 충청지역 교육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끝내 파면. 87년 1월 3일 학교 계단에서 쓰러져 5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
11) 표정두(1987년) 86년 호남대 자퇴후 야학교사로 활동, 87년 2월 하남공단 신흥 금속에 입사, 3월 6일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내각제 개헌반대", "장기집권 음모분쇄", "광주사태 책임지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분신. 3월 8일 운명
12) 황보영국(1987년) 79년 성지공고 중퇴, 울산 현대중공업, 부산 삼화고무, 태화고무 근무. 87년 5월 17일 부산 상고앞에서 "독재타도",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호헌책동 저지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를 외치면서 분신. 5월 25일 운명
13) 김현욱(1987년) 85년 진흥요업 근무. 87년 6월 민주화 대투쟁 적극 참여. 8월 1일 사랑방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14) 이대용(1987년) 77년 인천 석남동소재 선학알미늄 입사. 86년 동양튜브에서 임금인상 30%쟁취 투쟁. 87년 8월 1일 산마루교회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여하던 중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15) 박용선(1987년) 85년 한국릴레이 근무. 백마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참여하던중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운명
16) 유인식(1987년) 87년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 대표자회의 성원, 6월 대투쟁 적극 참여. 8월 1일 샘터교회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 체육부장으로 참여.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고 운명
17) 이석규(1987년) 84년 대우조선 입사, 선각소조립부 근무. 8월 22일 임금인상과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김우중 회장과 면담을 요구하며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동료들과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중 오후 2시 40분경 폭력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대우병원으로 옮겼으나 오후 3시30분경 운명
18) 이석구(1987년) 80년 조흥택시 입사. 87년 8월 31일 노동조합 재결성, 위원장에 선출. 9월 2일 오후 8시경 회사측의 노조 탄압중지 요구에 대해 사장의 성의있는 답변이 없자 이에 격분하여 신나를 끼얹고 분신, 9월 19일 운명
19) 김수배(1987년) 86년 고려화학 입사, 살란트 기술부 근무. 87년 노동조합 사무장. 10월 16일 12시 40분경 노조탄압에 맞서 자재 창고 앞에서 분신
20) 김성애(1987년) 86년 9월 12일 진흥요업에서 작업 중 화공약품에 의식을 잃고 반신불수. 87년 11월 3일 산재 중앙병원에서 산재없는 세상을 염원하며 투신, 운명
21) 박응수(1987년) 82년 6월 투라가구에 입사. 87년 12월 5일 대전역 광장에서 경찰과 대치중 "후보단일화 하라"고 절규하며 분신 산화
□ 노태우 정권 시기(88년∼92년까지 총46명 사망)
- 88년 : 12명 - 89년 : 12명 - 90년 : 8명 - 92년 : 5명
22) 이대건(1988년) 81년 마산 우성택시 입사. 88년 1월 6일 파업농성 19일째에 협상이 결렬되자 단체 협상 위반에 항의하며 회사 앞에서 분신. 1월 8일 운명
23) 정경식(1988년) 84년 대우중공업 창원공장에 입사. 87년 노조지부장 선거운동에 참여. 87년 6월 8일 실종. 88년 창원 불모산에서 유골로 발견. 민주노조 건설과정에서 타살로 추정
24) 김장수(1988년) 87년 인천 경기교통 노조 조합장 활동중 해고. 88년 3월 1일 회사내의 부당해고에 맞서 단식농성중 분신. 88년 3월 9일 운명
25) 오범근(1988년) 73년 후지카 대원전기 입사. 76년 프레스공으로 작업중 4손가락이 잘리는 산재를 당함. 당시 4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을 뿐이며 이후 수위로 근무. 88년 3월 10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파업농성 과정중 구사대에 의한 타살로 추정
26) 최윤범(1988년) 88년 고려 피혁 노조위원장 선출. 88년 4월 24일 해고 징계에 맞서 작업거부중 철야 농성. 88년 4월 25일 관리자들과 몸싸움중 분신. 88년 4월 30일 운명
27) 장용훈(1988년) 87년 전남 순천 현대교통 택시운수회사 입사. 88년 회사측의 부당노동행위와 노동행위와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여 분신. 88년 5월 30일 운명
28) 문용섭(1988년) 86년 서울 광무택시 입사. 88년 6월 9일 회사비리 폭로 과정에서 구사대의 폭행으로 운명
29) 문송면(1988년) 87년 야간공고 진학을 위해 영등포 협성계공(주)에 입사. 88년 2월 8일 휴직계 제출. 3월 14일 수은중독 진단받음. 4월 7일 노동부 서울 남부지방사무소에 산재 요양신청서 제출. 노동부, 산재요양신청서 처리 지연. 6월 29일 여의도 성모병원직업병과로 전원함. 점차 약화. 88년 7월 2일 운명. 당시 나이 만 15세
30) 성완희(1988년) 86년 태백시 강원 탄광에 입사. 87년 파업시 노동자 대표로 선출되어 파업을 승리로 이끔. 88년 2월 경비직으로 부당전직 당했다가 투쟁으로 원직복귀. 88년 6월 동료해고자 복직을 위해 시위에 돌입. 88년 6월 29일 노조사무실에서 5명이 단식농성중 어용노조 대의원등의 각목 습격에 맞서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 7월 8일 운명
31) 송철순(1988년) 87년 1월 세창물산 입사. 88년 6월 노조 창립과 함께 사무장으로 선출. 88년 7월 15일 파업기금마련 연대집회 준비로 현수막 설치중 추락. 운명
32) 이문철(1988년) 86년 대원여객 입사. 88년 10월 부당하게 해고 당함. 88년 11월 1일 부당해고와 연장근로 수당 미지급에 항의투쟁중 분신. 11월 6일 운명
33) 배중손(1988년) 구미 금성사 근무. 87년 8월 회사측의 휴업조치 이후 어용노조의 민주화와 임금 인상 파업농성에 앞장서 투쟁.
이후 강제출장 명목의 납치. 정신병원 입원. 88년 5월 복직. 88년 11월 14일 운명. 회사의 고도의 노무관리로 인한 사망으로 추정
34) 최완용(1989년) 83년 인천에서 공장생활. 87년 산업재활원 방문, 환자들을 위로하면서 고통당하고 있는 재해자들과 삶을 같이함.
89년 계양구 소재 흥업사에서 손가락 4개가 짤리는 산업재해를 당함. 89년 4월 9일 부평 철마산에서 산재없는 세상을 열망하며 분신
35) 김윤기(1989년) 83년 국민대 입학. 86년 5월 5.3 인천 투쟁에 참가하여 구속되어 1년형 선고. 88년 7월 덕진양행 입사.
88년 11월 노조 결성, 위원장으로 선출. 89년 4월 23일 민주 노조 사수과정에서 회사측과의 협상결렬 항의, 분신
36) 김종수(1989년) 88년 7월 (주)서광 구로공장에 입사. 89년 1월 쟁의부장 임명. 89년 4월 18일 노동운동 탄압분쇄, 임금인상 완전쟁취, 서광 구로지구의 독자적 운영 쟁취등을 내걸고 파업 시작. 5월 4일 회사측의 탄압에 맞서 "무노동 무임금 철폐", "민주노조 사수", "동지들을 탄압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 운명
37) 이상남(1989년) 84년 현대 엔진 공업에 입사, 상기철구 공장 기능직 사원 근무. 87년 9월 12일 현대중공업 구사대 차량에 깔려 중상. 89년 5월 16일 612일간의 사투 끝에 운명
38) 조정식(1989년) 82년 서울대 입학. 84년 7월 제적, 범아산업에 취직. 86년 인천 진도에 입사하여 노동운동 시작함. 87년 11월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 3년형 선고. 89년 영전기계에 취업. 89년 5월 24일 공장에서 산재로 운명
39) 이상모(1989년) 86년 광주 직업훈련원 수료. 대우조선 입사. 89년 5월 29일 대우조선 제3기숙사 7동 옥상에서 "대동단결 대동투쟁 원직복직, 임금인상 확실하게 쟁취하자."를 주장하며 분신, 투신
40) 박진석(1989년) 84년 인천 직업훈련원 수료, 대우조선 입사. 88년 진주 방송통신고등학교 입학. 89년 5월 29일 구사대 가입을 강요하자. "노동자와 노동자간의 싸움을 유발시키지 말라"며 항의, 분신, 투신
41) 이종대(1989년) 88년 기아산업 노조 대의원 당선. 89년 1월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배재정씨 해고시 복직운동을 벌임. 89년 3월 25일 복직, 임금인상 쟁취를 위해 투쟁, 노조 민주화를 위해 헌신. 89년 7월 3일 노조 사무실에서 부당해고에 항의하여 분신. 89년 7월 8일 운명
42) 최성조(1989년) 89년 남성 흥진 노동자로 무노동 무임금 분쇄 결의대회 참가로 불구속. 89년 8월 2일 파업도중 구사대 폭력으로 구타당하여 실신(2차례 뇌수술) 89년 8월 5일 운명
43) 강현중(1989년) 87년 경동산업 입사. 88년 5월 디딤돌이라는 친목회를 구성하여 회장으로 활동. 89년 경동 노조 민주화 투쟁 파업에 참여. 89년 9월 회사의 부당징계조치에 항의농성. 89년 9월 4일 노무이사와의 담판이 결렬되자, 노무이사에게 신나를 끼얹고 함께 분신한 뒤 불붙은 몸으로 조합원들에게 "경동의 동료들은 싸워 이깁니다. 노동자는 승리합니다." 라고 절규. 89년 9월 9일 운명
44) 김종하(1989년) 85년 인천 경동산업 입사. 89년 4월 임금인상 대책위원으로 활동. 89년 5월 디딤돌 친목회에서 적극적 활동.
89년 8월 디딤돌 친목회 임원에 대한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여 농성투쟁중 분신. 89년 9월 15일 운명
45) 이재호(1989년) 88년 협신사 입사. 89년 10월 29일 회사의 상상을 불허하는 폭력과 반인륜적 행위에 맞서 노조 재건을 위해 활동하던중 피살
46) 배주영(1990년) 85년 경북대 졸업.봉화여고 부임. 87년 11월 안동교협 창립, 부회장에 피선, 활동중 청송지역 산골마다 찾아다니며 조직작업. 88년 12월 청송 영양교협 창립. 총무부장 역임. 89년 해임후 진보에서 자취하며 전교조 활동을 계속함. 90년 2월 19일 연탄가스 중독으로 운명. 91년 유고집 '그 숨결 남아 아직 청송같이 푸르른데' 출간
47) 강민호(1990년) 85년 한신대 입학. 86년 건국대 애학투 사건으로 구속, 집행유예로 석방. 87년 구로구청 부정개표 사건으로 2년 선고. 90년 대붕전선 입사. 90년 4월 4일 야간작업중 기계에 휘말려 운명
48) 이영일(1990년) 89년 (주) 통일 입사. 90년 5월 3일 회사측과 경찰의 지속적인 탄압에 분노, 항의하며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분신, 투신
49) 최태욱(1990년) 90년 5월 9일 해고. 5월 14일 원직 복직. 5월 30일 재차 해고. 7월 8일 청도 천주교 성당에서 분신. 7월 14일 투병중 운명
50) 최동(1990년) 80년 성균관대 입학. 84년 부천에서 노동운동 투신. 89년 인노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구속. 90년 8월 7일 한양대에서 분신
51) 박성호(1990년) 89년 안산 금강공업 (주)에 입사. 90년 8월 10일 노조 결성시 노조부위원장으로 선출. 90년 8월 30일 회사측의 경영부실을 이유로 무기한 휴업공고에 맞서 농성중 경찰의 폭압적 진압에 의해 전신 70%의 화상. 9월 11일 운명
52) 원태조(1990년) 89년 안산 금강공업에 입사. 90년 8월 10일 노조 결성시 후생복지부장으로 추대. 90년 9월 18일 운명
53) 김봉환(1991년) 77년 원진레이온 입사. 90년 퇴사후 1차 쓰러져 말을 더듬기 시작. 90년 11월 사당의원에서 이황화탄소 중독의증 및 고열압으로 진단받음. 노동부와 회사측 요양 신청 거부. 91년 1월 5일 노동부로부터 요양신청서 접수 통보 받음. 91년 1월 5일 운명
54) 신용길(1991년) 89년 7월 전교조 부산지부 결성식에서 축시를 낭송해다는 이유로 구덕고에서 파면. 89년 8월 출근 투쟁을 하던 중 경찰에 연행.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발병한 위궤양으로 병보석. 90년 1월 전교조 부산지부 교과위원장. 91년 3월 9일 동아대 부속병원에서 위암으로 운명
55) 박창수(1991년) 90년 7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당선. 91년 2월 제3자 개입금지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 서울구치소 수감.
91년 5월 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 5월 6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56) 윤용하(1991년) 89년 성남피혁 근무, 민주화운동 직장 청년연합 회원으로 활동. 91년 5월 10일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전남대에서 분신. 5월 12일 운명
57) 이진희(1991년) 91년 6월 8일 인천 삼미기공에서 임금인상 보고대회 도중 노동조합측의 타결안에 분노하여 분신. 6월 15일 한강성심병원에서 운명
58) 석광수(1991년) 86년 인천 공성교통에 입사. 91년 6월 14일 회사측의 성실한 교섭 자세를 촉구하기 위한 치량시위 도중 경찰의 폭력적인 조합원 연행에 항의 6월 15일 분신. 24일 운명
59) 유재관(1991년) 90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회원으로 활동, 남부 노동반 반장, '인사연' 제8차 정기총회 준비위원. 91년 6월 27일 공권력의 '인사연' 사무실 침탈소식을 듣고 급히 나오다가 3층에서 실족 사망
60) 김처칠(1991년) 90년 합동물산 노동조합장 당선. 91년 조합장 재선. 91년 8월 22일 조합원들이 축구를 하다 한강에 공을 빠뜨리자 동지가 공을 건지겠다고 들어갔으나 탈진 실종. 행주대교 근처에서 시신 인양
61) 권미경(1991년) 90년 (주)대봉에서 미싱공으로 근무. 91년 12월 6일 어용노조의 협조 속에서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과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노동통제강화에 맞서 공장 옥상에서 투신자살
62) 임희진(1992년) 89년 신암중 부임, 전교조 분회결성 주도 해임. 90년 강남강동 지회 교육선전부 활동. 92년 암으로 운명
63) 박복실(1992년) 81년 태창 메리야스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민주노조 활동을 전개. 87년 전주 노동자의 집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
90년 전북노련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으나, 91년 6월 위암수술을 받게 되었고 8개월간의 투병생활을 하다가 92년 3월 운명
64) 오원석(1992년) 지병인 간암으로 8년간 투병생활을 하면서 교육민주화운동에 앞장섬. 90년 전교조 경북지부, 인천지부로부터 참교육상 수상. 90년 9월 지병인 간암으로 운명. 92년 4월 18일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에 참교육비 세워짐
65) 윤재영(1992년) 전대협 결성 주도, 89년 수배중 대전 샛길 청년회 창립주도, 92년 10월 10일 노동운동을 하던중 천식으로 인해 운명.
66) 최성근(1992년) 88년 부산 평교사협의회 참가로 교육운동 시작. 90년 전교조 부산지부 사립지회 동래 지구장. 91년 전교조 대의원 사립지회 서구지구 대의원. 92년 12월 13일 지병인 간암으로 운명
67) 이광웅(1992년) 82년 군산제일고 국어교사로 재직중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 5년동안 옥중생활. 87년 군산 서흥중에 복직. 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 92년 12월 22일 지병인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운명
□ 김영삼 정권 시기 (93년∼97년까지 총26명 사망)
- 93년 11명 - 94년 5명 - 95년 : 4명 - 96년 : 5명 - 97년 : 1명
68) 정운갑(1993년) 88년 삼미특수강 입사. 90년 노조4대 대의원으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열심히 활동. 92년 임금동결 거부, 인원감축 반대 파업 투쟁시 암말기 진단을 받고도 자신의 몸을 돌볼 시간도 없이 투쟁. 93년 1월 25일 병상에서 운명
69) 채희돈(1993년) 89년 인천 남일금속 노동조합 대의원으로 활동. 92년 12월부터 남일금속 회사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 93년 2월 20일 새벽 6시경 과로가 겹쳐 뇌경색증으로 운명
70) 정영상(1993년) 89년 전교조 결성으로 복수여중에서 해임, 전교조 안동지회 부지회장. 90년 단양지회로 전출하여 활동. 93년 4월 14일 현장 방문을 마치고 늦게 귀가하여 자던 중 새벽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운명
71) 정영부(1993년) 89년 진주 대동기계공고 해직, 전교조 초대 진주지회장, 서부경남국민연합준비위원장 역임, 진주신문 창간논설위원. 90년 제1회 전교조 참교사상 수상. 93년 5월 13일 지병으로 운명
72) 조경천(1993년) 81년 한양합판 입사. 88년 5월 한양합판 노동조합 설립에 중추적 역할 담당. 91년 7월 노동조합 회계감사로 일하던 중 해고. 92년 7월 인천지방법원에서 해고무효 판정으로 승소. 93년 4월 고법에서도 승소했으나 희사측 복직 묵살. 5월 19일 심장마비로 운명
73) 고정자(1993년) 78년 원진레이온 입사후 처리 정련과에서 15년간 근무. 91년 직업병 증세 발견. 93년 5월 21일 직업병으로 운명
74) 박미경(1993년) 89년 대구 삼인중학교 영어강사로 근무. 91년 2월 부당해고. 93년 2월 전교조 대구지부 학생부장으로 활동.
93년 6월 26일 약2개월 동안 암으로 투병하다 운명
75) 서영호(1993년) 86년 현대자동차 입사. 91년 3대 집행부 정책연구부장, 교양지 "단결과 전진" 편집위원. 92년 1월 21일 경찰침투 대비 바리케이트 설치중 차량사고로 해성병원 입원. 의식불명인 상태로 520여일을 투병하다 끝내 93년 7월 1일 운명
76) 김주리(1993년) 82년 이화여대 정외과 입학. 89년 우진상사, 진영물상입사. 92년 해고자들과 함께 '미모사' 설립. 93년 7월 미모사에서 작업중 화재로 인하여 화상. 8월 8일 화상 후유증으로 운명
77) 임혜란(1993년) 88년 고려대를 중퇴하고 노동운동에 투신. 91년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문화공간 제공 및 기독교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설립된 인천노동 선교문화원 창립에 참여. 92년 9월 백혈병으로 입원, 투병생활. 93년 9월 9일 신촌세브란스에서 운명
78) 최웅(1993년) 87년 경동산업 입사. 89년 경동산업 해고, 인해협에서 간사로 활동. 90년 인천민중교육연구소 실무간사로 근무.
92년 인천민중연합 노동자위원회 활동. 93년 인천민중연합 부설 '우리' 노동상담실 노사부장으로 근무. 93년 10월 26일 신혼여행 중 사고로 운명
79) 김성윤(1994년) 80년 상호운수주식회사 입사. 86. 12.∼92. 12.까지 상호운수노동조합 선거관리위원장과 고문역임. 94년 1월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자결.
80) 김상옥(1994년) 86년 구로 동일기업 노조설립 투쟁으로 구속. 88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편집위원. 90년 민족민주운동연구소 노동분과 국제분과 연구원. 92년 한국민주노동자연합 홍보부장. 94년 2월 19일 위암으로 운명
81) 최성묵(1994년) 86년 평택 시외버스인 서울여객입사. 노조대의원으로 활동. 90년 성보여객입사, 노조대의원, 노사위원, 상집위원 활동. 94년 3월 11일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와 조합원 탄압에 항거. 분신. 운명
82) 김낙성(1994년) 91년 한국통신노조 개혁모임에 참가. 92년 4월 서울지방본부 대의원 피선. 92년 7월 서울지역 노민추 결성.
93년 11월 전국 노민추 결성. 93년 12월 복지후퇴 및 직선제사수 투쟁위원회 구성. 94년 4월 17일 백혈병으로 운명
83) 임종호(1994년) 89년 금성사 창원대로 가두투쟁으로 1차 구속. 91년 1년 6개월의 실형만기로 석방. 92년 총액임금제 분쇄를 위한 굴뚝논성을 벌이다 2차 구속, 쟁의조정법과 업무방해로 실형 10월, 재판도중 법정 모독죄로 3년 실형 선고. 94년 9월 18일 진주교도소에서 운명
84) 양봉수(1995년) 90년 현대 자동차 입사. 92년 2월 성과분배투쟁 관련으로 해고. 93년 1월 원직 복직. 95년 2월 의장2부 마르샤 투입관련 회사측의 합의사항 불이행에 맞서 라인정지건으로 두 번째 해고. 95년 5월 12일 공동소위원연합 2기 출범식 참석을 위해 정문 진입시 경비들의 폭력적인 저지에 항거하며 본관정문 앞에서 분신. 95년 6월 13일 대구 동산병원에서 31일간 사투 끝에 운명
85) 박삼훈(1995년) 82년 대우조선 입사. 95년 6월 21일 사측의 살벌한 노동통제와 노무관리, 부당한 탄압에 맞서 분신후 투신, 운명
86) 서전근(1995년) 철도 민주화를 위해 95년 9월 4일 분신후 운명
87) 조수원(1995년) 86년 대우정밀공업에 병역특례로 입사. 91년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과 해고. 93년 마포 민주당사에서 38일간의 단식투쟁. 95년 12월 15일 민주당 서울시 지부에서 목을 매 자결.
88) 김시자(1996년) 84년 한전부속병원 입사. 89년 3월 전력노조 한일병원 지부위원장 피선. 93년 3월 위원장 재선. 96년 1월 13일 어용노조의 부당한 징계에 맞서 분신, 운명
89) 김왕찬(1996년) 91년 한국통신 제주고산 전화국 노조지부장으로 활동. 94년 본사직할 본부 위원장 피선, 서울로 이전함에 따라 독신으로 노동조합 활동. 96년 3월 23일 운명
90) 유구영(1996년) 88년 영등포 기계공단 노동조합 사무국장. 93년 서울지역 노동조합 협의회 정책실장. 95년 민주노동정책 기획실 정책부국장. 96년 5월 2일 새벽 동지들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간암으로 운명
91) 오용철(1996년) 88년 5월 서울 개봉전화국 발령, 어용노조 퇴진을 위한 "전민현"건설. 91년까지 어용퇴진, 위원장 직선제 관철을 위해 전국적인 '노민추'활동. 91년 '체신부 부당간섭 저지투쟁위원회' 결성. 95년 민주노조 활동으로 서울구치소구속 수감. 96년 6월 18일 고려대 구로병원에서 운명
92) 박문곤(1996년) 96년 11월 10일 전국교사대회 및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전복사고로 운명
93) 홍장길(1997년) 73년 연회교통(현 국민캡) 입사. 92년 노조 상임위원 재임. 94년 노조 고문으로 선임 활동. 97년 국민캡 휴게실에서 사측의 부당행위에 맞서 음독자결. 운명
□ 김대중 정권 시기 (총 5 명)
- 98년 : 2명 - 99년 : 3명
94) 최명아(199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86년부터 인천에서 현장활동을 하며 89-95년까지 인노협 교육부장, 조직부장으로 활동. 95년 민주노총 조직1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98년 2월 정리해고 반대투쟁중 과로로 운명
95) 최대림(1998년) 85년 대우조선에 입사하여 13년간 근속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98년 2월 13일 정리해고, 근로자 파견법 입법화에 반대하면서 건조중이던 배위에서 분신 투신운명하심.
96) 김종배(1999년) 공공연맹 교육실장 교통사고로 운명
97) 정성범(1999년) 전노협 활동, 지병으로 운명
98) 배동복(1999년) 영창악기노조 풍물패 활동 임단투기간 철야농성을 마치고 귀가도중 교통사고로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