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對馬島 쓰시마)에 다녀와서
(2017년 6월 14∼15)
瓦也 정유순
오래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대마도(對馬島, 쓰시마)! 고교 동기모임에서 주선한 해외여행으로 첫 선택된 곳이 대마도이다. 젊어서는 각자의 삶이 팍팍하여 짬짬이 만나 서로 안부만 전하더니, 이제는 나이가 들면서 생활의 안정과 여유를 겨우 찾을 만하니까 몸이 팍팍해져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보자는 의견이 집약되어 이루어졌다. 부부동반으로 진행하였으나, 회원 중에는 개인 사정으로 본인 또는 배우자가 함께하지 못한 분이 있어 섭섭했다.
<대마도 역사 관광지도-네이버캡쳐>
1박2일로 떠나는 여행이라 새벽부터 바쁘다. 광명역에서 부산행 KTX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조반을 한 다음 여객선터미널에서 가이드를 만나 출국수속을 밟고 12시 15분에 출발하는 히타카츠[比田勝]행 배에 승선(乘船)한다. 배는 공기부상(空氣浮上) 쾌속선으로 1시간 20여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지루할 정도로 기다리다가 지문 찍고 얼굴사진 찍힌 다음에 입국장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부산항대교>
지금은 일본 땅이지만 오히려 일본 보다 대한민국이 더 가까운 곳이 대마도이다. 삼국시대 때에는 신라 땅이었고, 조선 세종원년(1418년)에 삼군도체찰사 이종무(三軍都體察使 李從茂, 1360∼1425)가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한 후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에 양속(兩屬)하여 양국(兩國)의 가교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또한 대마도의 역사서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1723년)에는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이다. 옛날에는 신라인들이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대마도 -부산 간 쾌속선>
<대마도 히타카츠[比田勝]항 부두>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농토가 전체면적의 4%에 불과하고 최근까지 화전(火田)경작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절대 부족한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나 중국연안지방의 가을 추수 무렵에 쳐들어와 노략질해 갔다. 이렇게 무리를 지어 쳐들어온 사람들을 우리는 왜구(倭寇)라고 한다. 왜구들이 가장 극심한 시기는 13∼16세기로 고려 중엽부터 조선 중기까지 해당된다. 고려와 조선의 조정에서도 이들의 횡포를 차단하기 위해 수차례 회유도 해보고 정벌도 했다.
<대마도 히타카츠[比田勝]항>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막부정권(幕府政權)에서 왕권정치(王權政治)로 복귀함은 물론 근대국가로 변모하면서 제국주의적 기치 아래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대마도를 영토화하고, 나가사키현[長崎縣]에 편입시켜 대마도 전체를 쓰시마시[對馬島市]로 만들었다. 시 아래 6개정(이즈하라[嚴原町], 미쯔시마[美津島町], 도요타마[豊玉町], 미네[峰町], 가미아가타[上縣町], 가미쯔시마[上對馬町])이 있고, 이즈하라에 쓰시마시청이 있으며, 배가 도착한 히타카츠는 가미아가타[上縣町]에 있다.
<산을 깍아 지은 집>
미리 준비된 버스에 올라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가이드는 역사와 지리적인 사항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해주는데 부족한 잠 때문인지 눈꺼풀만 내려앉아 창밖의 풍경은 전혀 보지 못했고, 만제키바시[万關橋]에 도착한다. 만제키바시는 아소만(灣)과 쓰시마해협을 연결하는 운하(運河) 위에 세워진 다리이다. 대마도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한 개의 섬이었는데, 훗날 식민지 경영과 대륙진출을 위해 이곳에 운하를 파서 섬을 남과 북으로 분리하였다.
<만제키바시[万關橋]>
<만제키바시[万關橋] 동쪽 메고시마[女護島]>
다시 버스를 타고 쓰시마의 중심도시 이즈하라[嚴原町]로 이동한다. 정해진 숙소에 짐을 풀고 처음 찾아간 곳은 하치만구[八幡宮]신사에 간다. 일본은 워낙 신이 많은 나라인지라 특별할 것은 없지만, 이곳은 병사와 어부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사라고 한다. 신궁 좌측 앞에 있는 말 청동상은 이곳에 올 때, 마상(馬像) 앞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표시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궐에 있는 하마비(下馬碑)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치만구[八幡宮]신사 입구>
<하치만구[八幡宮]신사>
<하치만구[八幡宮]신사 마상>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덕혜옹주(德惠翁主)의 결혼기념비가 있는 가네이시성터[金石城跡]로 간다. 덕혜옹주는 제36대 대마도주(對馬島主)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1931년에 갓 20세의 나이에 일제의 강요에 의한 정략결혼을 한다. 덕혜옹주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고종(1852∼1919, 재위 1863∼1907)과 소주방 나인 출신인 복령당(福寧堂) 양씨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 덕수궁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나이 회갑을 맞이하던 해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덕혜옹주-네이버캡쳐>
당시 실의에 빠진 고종에게는 큰 위안이 되었지만, 덕혜옹주의 출생시기가 이미 국권이 침탈당한 후이기 때문에 역사의 격랑은 망국의 옹주에게 만만치 않은 운명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옹주의 굴곡진 생애에 대해서는 일단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고, 가네이시성터에 세워진 결혼기념비의 내용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심경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덕혜옹주 결혼사진-네이버캡쳐>
비문에는 세로로 “이왕가종가백작 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家伯爵 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쓰여 있다. 이 비문중 이왕가(李王家)는 1910년 한일병탄(倂呑)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일개 가문으로 격하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제2차 대전 후 옹주의 정신분열증으로 두 사람이 이혼했고, 기념비는 철거되었다가 2001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이 비의 발문 말미에는 “兩國民(양국민)의 진정한 和解(화해)와 永遠(영원)한 平和(평화)를 希望(희망)한다”로 되어 있음에도 ‘조선왕국’을 ‘이왕가’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옹주는 1962년 1월에 귀국하여 1989년 돌아가실 때까지 창덕궁 낙선재에 계셨다. 남양주 홍유릉(洪裕陵)에는 덕혜옹주의 산소가 있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
뒤틀린 심사를 안고 슈젠지[修善寺]로 간다. 슈젠지에는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애국지사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년 12월 5일∼1906년 11월 17일)선생이 1906년에 불모로 잡혀와 사망한 곳으로 선생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한 면암(勉庵)선생은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當百錢) 발행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 당했다.
<면암 최익현선생-네이버캡쳐>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목을 자를 지언 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하였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 당하였다. 국운이 기울자 충남 청양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겨 의병활동으로 나라를 지키려 했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전북 순창에서 패하여 이곳으로 유배되었다.
<슈젠지[修善寺]>
<슈젠지[修善寺]의 애기무덤>
이후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그해 병을 얻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묘는 본래 1907년에 논산시 노성면의 국도변에 마련했었으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의 명령으로 1910년에 오지인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선생 순국비>
해방 70년이 넘도록 친일청산을 제대로 못하는 후학들에게 면암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 하실 것 같아 선생을 대하기가 참으로 면구스럽다. 선생의 순국비(殉國碑)도 왜인(倭人)들의 납골지역 비좁은 공간에 외롭게 서있다. “적이 주는 음식도 거절”하신 분이 얼마나 답답해하실까?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있는 면암선생의 고택에 모덕사(慕德祠)라는 사당을 마련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양력4월13일에는 청양군 주관으로, 음력9월16일에는 모덕회 주관으로 춘·추 추모제를 지낸다.
<모덕사-네이버캡쳐>
아침에 눈을 뜨니 동창이 환하게 밝아온다. 새벽에 아내와 둘이서 숙소를 빠져나와 스미즈산성터[淸水山城跡]로 산책길에 나선다. 성터로 가는 길목에는 ‘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通信使之碑)’가 서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40년)부터 1811년(순조11년) 사이에 12회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선린우호를 위한 국가외교의 사절이며 문화사절 이기도 했다. 통신사는 정사(正使)를 비롯한 500여명의 행렬은 장엄하기도 했지만, 지나는 고을마다 조선의 문화를 전달하는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조선국통신사 비>
마을 골목을 따라 올라간 스미즈산성터에서는 이즈하라 항이 훤히 보인다. 산성은 이치노마루(제1성), 니노마루(제2성), 산노마루(제3성)로 이루어 졌는데, 산성 정상부에서 이리아케야마[有名山, 558m]로 가는 길도 있으나 시간상 갈 수 없는 시간이라 뒤돌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에는 나비 한 마리가 붉은 꽃을 아침부터 희롱한다.
<시미즈산성터>
<시미즈산성터 가는 숲길>
<이즈하라 항>
<이리아케야마[有名山]>
<꽃과 나비의 유희>
조반을 마치고 에보시다케전망대[烏帽子岳展望所]로 이동한다. 이 전망대는 아소만 북쪽(섬)연안에 있으며, 360°를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로 아소만에 떠있는 섬들이 마치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연상시킨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으나, 규모나 생김새는 하롱베이와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호수 같은 바다와 리아스식 해안에 인접하여 떠있는 섬들은 아름답게 보인다. 날씨가 좋으면 북북동쪽으로 부산의 산들도 보인다고 하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에보시다케 전망대 표지>
<아소만의 섬들>
에보시다케전망대에서 걸어서 와타즈마[和多都美]신사로 내려온다. 와타즈마신사는 아소만[浅茅湾] 입구에 있는 해궁이다. 천신인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와 해신인 도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를 신으로 모신다. 우미사치야마사치[海幸山幸]의 신화로 유명한 도요타마정[豊玉町]의 유래가 되었으며 바다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바다에서 신사의 본전(本殿)까지 다섯 개의 도리이[鳥居]가 이어져 있으며, 밀물이 들 때는 2m나 바닷물에 잠기는 도리이도 있다. 본전 옆에 있는 소나무는 허리에 금줄을 두르고 뿌리를 땅 위로 드러내어 신사를 호위하듯 휘감는다.
<와타즈마 신사-네이버캡쳐>
<도리이[烏居]>
<소나무 뿌리>
쓰시마의 북단 동쪽에 위치한 미우다[三宇田]해변에서 온천욕을 하고 해수욕장으로 내려간다. 욕탕에는 수건도 없고 비누도 물비누만 있다. 수건을 사용하려면 100엔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수건을 쌓아놓고 여유 있게 사용하는 우리와 겉은 비슷해도 속은 완전 딴판이다. 미우다해변은 일본의 100대 해변으로 선정되기도 한 아름다운 해변이다. 주변에 캠핑장이 마련되어 있어 여름 내내 이용이 가능하다. 맑은 바닷물은 바다 속이 아니라 내 마음 속까지 훤히 보이는 것 같다. 돌아 나오는데 해변 가장자리에 있는 화석이 된 나무 등걸이 해변을 지키는 것 같다.
<미우다 해변>
<미우다 해변의 맑은 물>
<미우다 해변의 나무화석>
이번 여행의 마지막코스인 한국전망대로 간다. 한국전망대는 쓰시마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7년에 한국의 건축가와 재료로 지은 유일한 한국형 건물로 서울 파고다공원의 팔각정과 비슷하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날씨가 맑으면 부산과 거제도가 보인다고 하는데, 멀리 해무가 끼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쓰시마에서 일본까지는 147㎞인 반면 한국까지는 49.5㎞이다.
<한국전망대-네이버캡쳐>
전망대 우측 언덕에는 ‘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가 우뚝 서서 부산을 바라본다. 1703년(숙종29년) 부산항을 출발한 108명의 조선 역관 일행은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모두 참변을 당한다.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1991년 한일건립위원회가 한국전망대 옆에 세웠다고 한다.
<조선국역관사순난지비>
짧은 1박2일 동안 대마도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대충 둘러본 것은 무엇을 보고 알았다는 것 보다 그냥 한번 왔다는 단순한 의미 밖에 없다.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간간이 보이는 우리의 역사적 흔적들이 있어 그래도 와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3일 후인 1948년 8월 18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본에 대하여 “대마도는 우리의 땅이므로 속히 반환하라”고 요구한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가네이시성터[金石城跡]>
1418년 대마도 정벌 이후 180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에 까지 대마도가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고 하며, 1830년 일본이 만든 조선국 지도에도 조선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주장한 것 같다. 아마 일본이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훨씬 연원이 깊고 자료도 풍부해 보인다. 그러나 대마도를 찾아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의식이 문제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이며 우리의 미래다. 역사가 없는 민족은 영혼도 없고 장래가 없다.
<덕혜옹주결혼기념비 앞>
첫댓글 이제 국내산을 벗어났군요,
주위 몇 나라 돌면 에베레스트로 가겠지요,ㅎㅎ
우리집도 보니, 그런던데, 히말라야, 거기가
로망적인가봐요, 세 번인가, 네번을 가고도 또 갈
꿈을 가지고 있으니, 정대장님도 그러실걸? ㅎㅎ
사모님도같이 다니셨나보네요,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관리를 잘 해주시보다,ㅎ
저는 그렇게 높은 산이 아니라
길이 좋아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관리를 잘 하는 게 아니라
자연관리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