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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자료실 스크랩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 ~100 ) - 목록과 시
흐르는 물/정호순 추천 0 조회 662 14.07.23 17:1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동아일보 -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 ~ 100) - 목록과 시

 

 

 

제01편  서정주 - 푸르른 날

제02편  조  은 - 어느 새벽 처음으로

제03편  김남조 - 옛애인들

제04편  에릴리 디킨슨 - 새들은

제05편  김종삼 - 묵화(墨畵)

제06편  상희구 - 대구사과

제07편  황지우 - 거룩한 식사

제08편  문정희 - 얼어붙은 발

제09편  레미 드 구르몽 - 낙엽 

제10편  이상희 눈물 소리

제11편  나해철 - 실없이 가을을

제12편  김기택 - 수화

제13편  이정주 - 방을 보여주다

제14편 김영태 - 라벨과 나

제15편 송승환 - 네온사인

제16편 우영창 - 해피

제17편 김형영 - 노모

제18편 전동균 - 모기

제19편 전동균 - 여행자

제20편 에르난데스 - 그대가 없다면

제21편 이진명 - 모래밭에서

제22편 최영미 - 월동준비

제23편 김병호 - 세상 끝의 봄

제24편 김태형 - 기러기

제25편 포루그 파로흐자드 -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제26편 박경희 - 통박꽃

제27편 장석남 - 무쇠솥

제28편 김정환 - 지울 수 없는 노래

제29편 나희덕 - 소만(小滿) 

제30편 이용임 - 여름의 수반

제31편 신동옥 - 도감에 없는 벌레

제32편 유  하 - 겨우 존재하는 것들

제33편 성미정 -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제34편 이태주 - 풍경(風磬)

제35편 이창기 -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제36편 신용목 -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제37편 박상우 - 버티는 삶

제38편 이성복 - 귀에는 세상 것들이

제39편 성기완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제40편 이인철 - 순창고추장

제41편 박시하 - 옥수역

제42편 김희정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제43편 존  던 -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제44편 오규원 - 새와 나무

제45편 맹문재 -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제46편 김종철 - 재봉

제47편 정희성 -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제48편 김승희 -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제49편 최승자 - 시간이 사각사각

제50편 박재삼 - 사람이 사는 길 밑에

제51편 복효근 - 한 수 위

제52편 보들레르 - 어떤 희롱꾼

제53편 이근배 - 절필(絶筆)

제54편 홍일표 - 그림자 미술관

제55편 정세훈 - 차가운 사랑

제56편 노향림 - 해수찜

제57편 김민정 -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제58편 권혁웅 - 도봉근린공원

제59편 이수명 - 이빨들의 춤

제60편 진효임 - 치매걸린 어머니

제61편 정현종 - 견딜 수 없네

제62편 김경미 - 이러고 있는

제63편 김승일 - 멋진 사람

제64편 방민호 - 행복

제65편 박  준 - 눈썹 ―1987년

제66편 김소월 - 님의 노래

제67편 강영환 - 써레봉을 넘어서

제68편 권대웅 - 장독대가 있던 집

제69편 마종기 - 익숙지 않다

제70편 오세영 - 다랭이 논

제71편 김연희 - 러시앤캐시

제72편 송상욱 - 와온(臥溫)

제73편 한석호 - 수취인이 없다

제74편 유희경 - 심었다던 작약

제75편 최승호 - 봄밤

제76편 황동규 - 물소리

제77편 함민복 - 농약상회에서

제78편 메리 올리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제79편 황병승 - 앙상블

제80편 양선희 - 하염없이

제81편 윤후명 - 철새

제82편 이시영 - 지상의 방 한 칸

제83편 이학성 - 매의 눈

제84편 빈센트 밀레이 -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제85편 김창완 - 대본 읽기

제86편 박연준 - 뱀이 된 아버지

제87편 공광규 - 모과꽃잎 화문석

제88편 최문자 - 발의 고향

제89편 이  상 - 아침

제90편 김경후 - 지우개

제91편 김요아킴 - 나의 연봉

제92편 장대송 - 낡은 유모차와 할머니

제93편 김박은경 - 리미티드 에디션

제94편 신현림 - 나의 싸움

제95편 윤성근 - 꺼진 불

제96편 고트프리트 벤 - 한마디의 말

제97편 이원  - 사랑 또는 두 발

제98편 문동만 - 어떤 음계에서

제99편 남진우 - 폐선에 기대어

제100편 김현승 -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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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동아일보. 2012년 9월 12일)

 

--------------------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시집『푸르른 날』(미래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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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느 새벽 처음으로


조은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


불안하게 눈을 뜨던
여느 때와 달랐다
내 마음이 어둠 속에
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맡엔 종이와 펜
지난밤 먹으려다 잊은 맑은 미역국
어둠을 더듬느라
지문 남긴 안경과
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
개켜 놓은 옷
방전된 전화기


내 방으로
밀려온 그림자
창 밖 그림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밤새 눌려 있던
머리카락이 부풀고
까슬까슬하던 혀가 촉촉했다


흰 종이에다
떨며 썼다
어느 새벽 처음으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동아일보 2012년 9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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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옛 연인들


김남조

 


지난 세월 나에겐
시절을 달리하여 연인이 몇 사람 있었고
오늘 그들의 주소는
하늘나라인 이가 많다


기억들 빛바랬어도
그 각각 시퍼렇게 멍이 든
심각성 하나만은
하늘에 닿았고
오늘까지 살아 있으니
그들 저마다
어찌 나의 운명 아닐 것인가


그 시절 여자들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뜨개 털장갑을 선물했으나
나만이 그거나마 단 한 번 못했으니
오랫동안 그분들
손 시려웠을지 몰라


빌고 비오니
그저 영혼 따뜻하게들 계시고
후일 우리 만나거든


그 옛날 장마비처럼 그치지 않던
눈물 얘기도
부디 미소지으며
나누게 되기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동아일보 2012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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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들은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새들은 네 시-
그들의 여명에-
공간처럼 무수한
대낮처럼 무량한 음악을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가
소모한 그 힘을 셀 수가 없었다
마치 시냇물이 하나하나 모여
연못을 늘리듯이


그들의 목격자는 없었다
오직 수수한 근면으로 차려입고
아침을 뒤쫓아
오는 사람이 가끔 있을 뿐


그건 갈채를 위한 것이 아님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오직 신과 인간의
독자적인 엑스터시


여섯 시가 되면 홍수는 끝나고
옷을 입고 떠나는
소동은 없었으나
악대는 모두 가고 없다


태양은 동녘을 독점하고
대낮은 세상을 지배하고
찾아온 기적도
망각인 듯 이루어지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동아일보 2012년 9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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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묵화(墨畵)


―김종삼(1921∼1984)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동아일보 2012년 9월 21일)

 

묵화((墨畵)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1969년)
현대시 100년 -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편[8]
-시집『흰책』(믿음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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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구사과


상희구

 

 

인도라는 사과는
최고의 당도에다
씹히는 맛이 하박하박하고


홍옥이라는 사과는
때깔이 뿔꼬 달기는 하지마는
그 맛이 너무 쌔가랍고


국광은 나무로 치마 참나무겉치
열매가 딴딴하고 여문데
첫눈이 니릴 직전꺼정도 은은하게
?어 가민서 단맛을 돋꾼다


풋사과가 달기로는
그 중에 유와이가 젤로 낫고


고리땡은 오래 나아 둘수록
지푼 단맛이 있고


아사히는 물이 많은데 달지만
지푼 맛이 적고


B품으로 나온 오래된 낙과는
그 씹히는 맛이 허벅허벅하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동아일보. 2012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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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거룩한 식사

―황지우(1952∼ )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동아일보. 2012년 9월 26일)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면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곽재구의 달빛으로 읽은 시『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이가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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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음을 흘리며 베일을 걷어 올렸네
난해한 행복이 출렁이는 바다를 향해
풍덩! 몸을 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네
무사히 아름다운 혼례가 치러지고 있었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동아일보. 201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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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낙엽
―레미 드 구르몽(1859∼1915)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동아일보. 2012년 10월 03일)

 

 

낙엽


구르몽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 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라멩 흩어지며 낙병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날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김희보 편저『世界의 名詩』(종로서적,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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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눈물 소리


―이상희 (1960∼ )

 

 
오래 울어보자고
몰래 오르던 대여섯 살 적 지붕
새가 낮게 스치고
운동화 고무창이 타도록 뜨겁던
기와, 검은 비탈에
울음 가득한 작은 몸 눕히고
깍지 낀 두 손 배 위에 얹으면
눈 꼬리 홈 따라 미끄러지는
눈물 소리 들렸다


- 울보야, 또 우니?
아무도 놀리지 않던
눈물 전곡(全曲) 감상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동아일보. 2012년 10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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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실없이 가을을


―나해철(1956∼ )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뜨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1』(동아일보. 2012년 10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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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수화


―김기택(1957∼ )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오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여 두 청년의 논쟁을 따라갔다.
그들은 때로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논쟁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 봐 자주 움찔하였다.
고성이 오갈 때에는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조용히 좀 해달라고 소리칠까 봐
가끔은 눈치가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 안에 두 사람 말고는 딴 승객은 없는 듯 조용하기만 했고
이따금 손바닥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2』(동아일보. 2012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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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방을 보여주다


  ―이정주(1953∼)

 

 

  낮잠 속으로 영감이 들어왔다. 영감은 아래턱으로 허술한 틀니를 자
꾸 깨물었다. 노파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이불을 개켰다. 아, 괜찮아.
잠시 구경만 하고 갈 거야. 나는 손빗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골랐다. 책
이 많네. 공부하는 양반이우. 나는 아무 말 않고 서 있었다. 책들을 버
려야지. 불태워 버려야지. 내 얼굴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싱크대에 그
릇들이 넘쳐나 있었다. 혼자 자취하는 모양이네. 우리 딸도 혼자 살아
요. 그러나 걔는 짐이 이렇게 많지 않아. 짐들도 버려야지. 모두 갖다
버려야지. 나는 양손을 비비며 서 있었다. 햇볕도 잘 들고 혼자 살기
딱 알맞네. 노파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가 닫았다. 아, 그럼. 도시가스
들어오고 방도 따뜻하대요. 영감은 신발을 꿰며 소리쳤다. 노파는 내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며 말했다. 왜 나갈려고 그러시오? 나는 한참
눈을 껌벅거렸다. 그리고 손날로 허공을 찌르며 말했다. 먼 데로 가
려고 합니다. 먼 데로? 노파의 눈이 내 손끝을 따라왔다. 노파도 같
이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갑자기 현관이 멀어지고 나도 뒤로 엄청
물러나 있었다. 노파는 화장실 앞에서 갑자기 아득해진 공간을 쳐다
보고 서 있었다. 멀리 현관 밖에서 영감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3』(동아일보. 2012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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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라벨과 나


―김영태(1936∼2007)

 


내 키는 1미터 62센티인데
모리스 라벨의 키는 1미터 52센티 단신(短身)이었다고 합니다
라벨은 가재수염을 길렀습니다
접시, 호리병, 기묘한 찻잔을 수집하기
화장실 한구석 붙박이
나무장 안에 빽빽이 들어찬
향수(香水) 진열 취미도
나와 비슷합니다
손때 묻은 작은 소지품들이 (누에 문양 포켓수건이나 열쇠고리까지)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냄새, 빛깔도 (그가 작곡한 ‘거울’ 속에 비친 사물들)
저 혼자만인 둘레에
지금도 남아 있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4』(동아일보. 2012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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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네온사인


―송승환 (1971∼)

 


저무는 태양이 차례로 회전문 통과한 사람들 그림자를 붉은
담장에 드리운다 갓 돋아난 초록 이파리 검게 물들어간다 곧장
침대로 가기 꺼려하는 여인은 포도주의 밤을 오랫동안 마신다
공장 폐수를 따라 하얗고 둥근 달은 강으로 흐른다 언제나 우리
들은 그 가늘고 긴 새벽의 유리관 전극 속으로 사라진 불의
문자(文字) 아래로 걸어간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5』(동아일보. 2012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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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해피


―우영창 (1956∼ )

 

 

해피가 짖는다
왜 네 이름이 해피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한쪽 귀가 짜부라져 해피인지
다리 하나가 절뚝거려 해피인지
해피인 채로 내게 건너와
너는 나의 해피가 되었다


지금도 네 이름이 해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끔은 무섭도록 네가 보고 싶다
우리에겐 깊은 공감이 있었다
세상은 그걸 몰랐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나이가 지났다
네 순한 눈동자가 닫힐 때
나는 어디 있었던가
나는 안다
나는 그 순간
너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어둠 속에서
내 눈동자 물기 가득
앞발을 들고
네가 지금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6』(동아일보. 2012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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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모(老母)


―전연옥 (1961∼ )

 

 

스타킹은 문갑 위에 있다
거 봐라 내 뭐랬니


이게 출근이냐 전쟁이지
내일 모레면 너도 이제 서른인데
다닐 때 안경 벗지 말고
또릿또릿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참내, 구둣솔은 네가 들고 있잖니
전철 안에서 또 졸지 말고
건널목에서도 좌우 잘 살피고 다녀라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 이러지
아, 잘 살피고 다녀야
네 맘에 드는 남자가 눈에 띄지
에미 잔소리 때문에
네 귀에 딱지가 앉았어도 할 수 없다
그러게 너는 어쩌자고 연애도 못 하냐
눈이 없냐 코가 째보냐
막둥이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쉽겠다만
그래, 잘 보고 잘 다녀오너라
하이고 내 팔자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7』(동아일보. 2012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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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모기


―김형영 (1944∼ )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8』(동아일보. 2012년 10월 24일)

 

모기

 

김형영

 

 

 

모기들은 날면서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온몸으로 소리를 친다
여름밤 내내
저기,
위험한 짐승들 사이에서


모기들은 끝없이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살기 위해 소리를 친다
어둠을 헤매며
더러는 맞아 죽고
더러는 피하면서


모기들은 죽으면서도 소리를 친다
죽음은 곧 사는 길인 듯이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
모기들은 모기 소리로 소리를 친다
영원히 같은
모기 소리로……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문학과지성사. 1979 )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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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행자


―전동균(1962∼)

 

 

일찍이 그는 게으른 거지였다
한 잔의 술과 따뜻한 잠자리를 위하여
도둑질을 일삼았다


아프리카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왕으로 법을 구하는 탁발승으로
몸을 바꾸어 태어나기도 하였다
하늘의 별을 보고
땅과 사람의 운명을 점친 적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눈먼 떠돌이 악사가 되어
온 땅이 바다고 사막인 이 세상을
홀로 지나가고 있으니


그가 지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름을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저 허공의 구름들처럼
말 없는 것들, 쓸쓸하게 잠든 것들을 열애할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9』(동아일보. 2012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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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대가 없다면


―미겔 에르난데스(1910∼1942)

 

 

그대의 눈이 없다면 내 눈은
외로운 두 개의 개미집일 따름입니다.
그대의 손이 없다면 내 손은
고약한 가시다발일 뿐입니다.


달콤한 종소리로 나를 가득 채우는
그대의 붉은 입술이 없다면
내 입술도 없습니다.
그대가 없다면 내 마음은
엉겅퀴 우거지고 회향 잎마저 시들어가는 고난의 길입니다.


그대 음성이 들리지 않으면 내 귀는 어찌 될까요?
그대라는 별이 없다면 나는 어디를 향해 떠돌까요?
그대의 대꾸 없어 내 목소리는 자꾸 약해집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그대 냄새 좇아
희미한 그대 흔적을 더듬어봅니다.
사랑은 그대에게서 시작돼
나에게서 끝납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0』(동아일보. 2012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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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모래밭에서


―이진명 (1955∼ )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1』(동아일보. 2012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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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월동준비


―최영미 (1961∼ )

 


그림자를 만들지 못하는 도시의 불빛.
바람에 날리는 쓰레기.
인간이 지겨우면서 그리운 밤.


애인을 잡지 못한 늙은 처녀들이
미장원에 앉아 머리를 태운다
지독한 약품냄새를 맡으며
점화되지 못한 욕망.


올해도 그냥 지나가는구나
내 머리에 손댄 남자는 없었어.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안개처럼 번지는 수다……
겨울을 견딜 스타일을 완성하고
거울을 본다.


머리를 자르는 것도
하나의 혁명이던 때가 있었다.
생머리가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표식이던,
단순한 시대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2』(동아일보. 2012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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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상 끝의 봄


―김병호 (1971∼ )

 

 

수도원 뒤뜰에서
견습 수녀가 비질을 한다


목련나무 한 그루
툭, 툭, 시시한 농담을 던진다


꽃잎은 금세 멍이 들고
수녀는 떨어진 얼굴을 지운다


샛길 하나 없이
봄이 진다


이편에서 살아보기도 전에
늙어버린, 꽃이 다 그늘인 시절


밤새 혼자 싼 보따리처럼
깡마른 가지에 목련이 얹혀 있다


여직 기다리는 게 있냐고
물어보는 햇살


담장 밖의 희미한 기척들이
물큰물큰 돋는, 세상 끝의 오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3』(동아일보. 2012년 11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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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기러기


―김태형 (1970∼ )

 

 

이제 막 도착한 듯 한시름 놓아 날고 있는 기러기떼를 올려다봅니다
한 해에만도 일만 킬로미터쯤 날아간다지요 아마
그들이 날아온 그 뒤쪽이 아득합니다


살아갈 힘을 다해 우랄 산맥을 두고 온 그쪽 하늘은
그러니까 내겐 헤아릴 수 없는 거리입니다
그 옛날 어느 밀교승은 소식 전해줄 기러기마저 없다고 눈물 흘렸지요
한껏 흐드러진 꽃을 핑계로 다 익은 술을 핑계로
소식 전하던 마음도 이제 때를 놓쳤으니
멀찍이 새들을 올려다보며 늦가을 평원을 지납니다
이제 갓 뽑은 흙 묻은 무를 한쪽 베어물어
매운맛이 사라지는 동안
그래도 입안에서부터 한동안 잊었던 것들이 말이 되어 나오려 합니다
도무지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것까지도
잠시 올려다본 하늘에 스미어 있습니다 기러기가 날아갑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4』(동아일보. 2012년 1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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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포루그 파로흐자드(1935∼1967)

 


 
나의 작은 밤 안에, 아
바람은 나뭇잎들과 밀회를 즐기네
나의 작은 밤 안에
적막한 두려움이 있어
들어 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이방인처럼 이 행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의 절망에 중독되어 간다
들어보라
어둠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지금 이 순간, 이 밤 안에
무엇인가 지나간다
그것은 고요에 이르지 못하는 붉은 달
끊임없이 추락의 공포에 떨며 지붕에 걸쳐 있다
조문객 행렬처럼 몰려드는 구름은
폭우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한순간
그 다음엔 무
밤은 창 너머에서 소멸하고
대지는 또다시 숨을 멈추었다
이 창 너머 낯선 누군가가
그대와 나를 향하고 있다
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르른 이여
불타는 기억처럼 그대의 손을
내 손에 얹어 달라
그대를 사랑하는 이 손에
생의 열기로 가득한 그대 입술을
사랑에 번민하는 내 입술의 애무에 맡겨 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5』(동아일보. 2012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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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통박꽃


―박경희 (1974∼ )


 
박 중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박은
바가지로도 쓸 수 없고
죽도 뜰 수 없는
통박!
쪽박도 면박도
통박에 비하면 깨진 박 축에도 못 끼는데


마흔이 다 된 게
밥물도 맞출 줄 모르느냐고
고두밥도 모자라 쌀이 씹힌다고
국수는 오래 삶아야 속까지 익지
예산 국수 공장에서 금방 뽑아 왔느냐고
시금치나물은 살짝 익혀야지
흐물흐물해서 어디 씹히기나 하겠느냐고
소금은 순금으로 만들어
그리 귀해서 간이 싱겁느냐고
두릅은 나무둥치를 잘라서 했느냐고


씹으면 그나마 남은 이 다 부러지겠다고
금니 박아줄 수 있느냐고
그깟 글 나부랭이 써서
어느 세월에 똥구멍에 볕 들 날 있겠느냐고


고향 집에서 돌아오다 바라본
참말로 환장하게 환한 꽃!
박꽃!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6』(동아일보. 2012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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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무쇠 솥


―장석남 (1965∼ )

 

 

양평 길 주방기구종합백화점
수만 종류 그릇의 다정한 반짝임과 축제들 속에서
무쇠 솥을 사 몰고 왔다
-꽃처럼 무거웠다
솔로 썩썩 닦아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다
푸푸푸푸 밥물이 끓어
밥 냄새가 피어오르고 잦아든다
그사이
먼 조상들이 줄줄이 방문할 것만 같다


별러서 무쇠 솥 장만을 하니
고구려의 어느 빗돌 위에 나앉는 별에 간 듯
큰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솥에 닭도 잡아 끓이리
쑥도 뜯어 끓이리
푸푸푸푸, 그대들을 부르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7』(동아일보. 2012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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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지울 수 없는 노래
―4·19혁명 21주년 기념시


김정환 (1954∼ )

 


불현듯, 미친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8』(동아일보. 2012년 11월 16일)

 

지울 수 없는 노래
―4·19 21주년 기념시

 

김정환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82)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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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소만(小滿)


―나희덕 (1966∼ )

 

 

이만하면 세상을 채울 만하다 싶은
꼭 그런 때가 초록에게는 있다


조금 빈 것도 같게
조금 넘을 것도 같게


초록이 찰랑찰랑 차오르고 나면
내 마음의 그늘도
꼭 이만하게는 드리워지는 때


초록의 물비늘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때
소만(小滿) 지나
넘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듯
이제 무성해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나무는 그늘로만 이야기하고
그 어둔 말 아래 맥문동이 보랏빛 꽃을 피우고


소만(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
초록이 물비린내 풍기며 중얼거리는 소리
누가 내 발등을 덮어다오
이 부끄러운 발등을 좀 덮어다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29』(동아일보. 2012년 1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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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름의 수반


―이용임 (1976∼ )


 

서성이는 육체
나리우는 육체
맴도는 육체


묽어지는 육체
붉어지는 육체
환하게 사라지는 육체


입김으로 흩어지는 육체
한 점으로 떠 있는 육체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육체
 

바람을 가둔 육체
거울이 되는 육체
눈 위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는 육체
그림자에 빠져 익사하는 육체


꽃잎을 얹은 육체
푸른 얼굴의 육체
가둔 향기에 빙빙 돌면서
말라가는 육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0』(동아일보. 2012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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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도감에 없는 벌레


―신동옥 (1977∼ )

 


옛 애인에게 받은 속옷을 셔츠를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바지를 입고 나선다
옛 애인에게 받은 안개를 바람을 입고 옛 애인에게 받은 황사를 입고 나선다


변절기(變節期), 잿빛 웃음으로 낱장의 표정을 여미다
살갗을 떠나는 각질에 지는 꽃잎 하나씩을 짝짓다가


―우리 언제 다시 천둥과 우레 눈보라 속에서 다시 만날까
―이 소란이 끝나고 누울 때 누가 승자인지 드러나겠지


그 많았던 오해와 모략과 끝끝내의 말들
오래 귀담아 들을수록 거짓은 내밀해서 점점 달콤해져만 가는 것인데


중독자여, 나는 1초의 삶을 위해 24시간 죽는가
깨지 않아도 좋을 오랜 꿈속에 갇힌 번데기처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동아일보. 2012년 1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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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겨우 존재하는 것들


―유하 (1963∼ )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가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는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2』(동아일보. 2012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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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성미정(1967∼ )

 


  닥터 박 왜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거요 내 지금 비록 네 발 달
린 짐승이 되어 침대 위를 기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산부인과의 분만실
이오 그런데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니 날보고 지금 똥을 낳으라는 말
이오 똥 아닌 것을 낳으라는 말이오 닥터 박 어쨌든 난 지금 당신 명령
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어디 한번 죽을 힘을 다해 항문 끝에 힘
을 주겠소


  닥터 박 이곳은 화장실이 아닌 건 분명한데 난 지금 도저한 핏기가 묻
은 희고 말랑한 똥을 낳은 것 같소 이 똥을 품에 안으며 난 이 희한한 똥
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하고 있소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희고 말랑할 것 같음도…닥터 박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당신의 조치는 매우 적절하였던 것 같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동아일보. 2012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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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풍경(風磬)


―이태수 (1947∼ )

 


바람은 풍경을 흔들어 댑니다
풍경 소리는 하늘 아래 퍼져 나갑니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나는
그 속마음의 그윽한 적막을 알 리 없습니다 


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흔듭니다
흔들릴수록 자꾸만 어두워져 버립니다


어둡고 아플수록 풍경은
맑고 밝은 소리를 길어 나릅니다


비워도 비워 내도 채워지는 나는
아픔과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어두워질수록 명징하게 울리는 풍경은
아마도 모든 걸 다 비워 내서 그런가 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4』(동아일보. 2012년 1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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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이창기 (1959∼ )

 

 

한 사나흘 깊은 몸살을 앓다
며칠 참았던 담배를 사러
뒷마당에 쓰러져 있던 자전거를
겨우 일으켜 세운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을 넣는데
웬 여인이 불쑥 나타나
양조간장 한 병을 사오란다
깻잎장아찌를 담가야 한다고


잘 있거라
처녀애들 젖가슴처럼
탱탱한 바퀴에 가뿐한 몸을 싣고
나는 재빠르게 모퉁이를 돌아선다


근데
이미 오래전에 한 사내를 소화시킨 듯한
저 여인은 누구인가
저 여인이 기억하는,
혹은 잊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5』(동아일보. 2012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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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신용목 (1974∼ )

 

 

저녁이 하늘을 기울여, 거품 바다
그득 한 잔이다.


속에서부터, 모든 말은 붉다. 불길 몸으로 휘는 파도의


혀.

 

돌아와 한 주전자 수돗물을 받았다.
이 위로, 몇 척의 배가
지나갔을까.


불에 올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6』(동아일보. 2012년 1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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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버티는 삶


―박상우 (1963∼ )

 


사막과
황무지와
무인도로 이루어진
나의 세계


갈증을 견디기 위해서는
한 잔의 물만,
허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먹이만
있으면 되고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간은 본디 섬이라고
믿으면 되느니,


그런 삶도
그럭저럭 버틸 만하다
햇빛이 닿지 않는 심해(深海)에 빠져
염통과 뇌가 터질 듯 말 듯해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7』(동아일보. 2012년 1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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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귀에는 세상 것들이


―이성복(1952∼ )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못 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방울새 소리 나는 더 못 듣겠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8』(동아일보. 2012년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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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아요


―성기완(1967∼ )

 


그리고매우멀어바다같다던
당신이떠난그곳이어딘지
알수없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남겨놓으신흔적들
파도에씻긴조가비같은것들
함께바다에여행갔을때당신이
무릎접고고개숙이고줍던
그시간이


매우멀어바다같아요


당신이나를버린이유
알수없어걷고또걷던새벽에얻은
몽유의버릇
주머니에가득한물음표
아이가쏟아놓은퍼즐조각처럼
그이유가망망(茫茫)해서대해(大海)같아요


언젠가부터긴긴잠을자고있어요
당신이어디사는지알지도못하는
그냥내가한참미워밤바다같아요
그리고너무멀어
오늘이


망망(茫茫)큰바다같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9』(동아일보. 2012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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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순창고추장


―이인철(1961∼ )

 


이슬을 닦고 장독뚜껑 열면
곰삭고 있는

하나


저렇게 붉으면
저렇게 뜨거우면
사랑처럼 단내가 풍풍 나는구나
강천산 단풍보다 더 싱싱한 색이 돋는구나


섬진강 한 굽이의 샘물 냄새
물씬
물씬
솟구쳐 오르고
양푼에 곰삭은 해 한 수저 떠넣고
붉은 밥을 비비면
칼칼한 입맛
고추씨 같은 별빛과
왕대나무숲 붐비는 바람소리
담 넘어 우리를 부르는 어머니의 가는 손
들린다


뜨거웠던 시절에
은어떼처럼 되돌아오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0』(동아일보. 2012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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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옥수(玉水)역


―박시하 (1972∼ )

 


사랑해,
공중 역사 아래 공중에게 고백을 하려다 만다
군고구마 통에 때늦은 불 지피는 할머니가
내가 버린 고백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이 허망한 봄날


겨울을 견딘 묵은 사과들이
소쿠리에 담겨 서로 껴안고 있다
또 다른 출발을 꿈꾸는 걸까?
아직 붉다


역사가 흔들릴 때
문득 두고 온 사랑이 생각났다
푸른 강물 위
새로 도착하는 생(生)과
변함없이 떠나고 있는 생(生)들이 일렁인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1』(동아일보. 2012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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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김희정(1967∼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
그림자를 버렸단다
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
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
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
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
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
그 순간만은 아빠라는 이름이 훈장이 되고
슈퍼맨의 망토가 된단다
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
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
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
네가 태어났던 날이야
그날을 끝으로
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
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
네가 학교에 입학하고
책가방이 무거워져 갈 때
오랜 세월 자리를 잡아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그 자존심
잘 마시지 못한 소주 꾸역꾸역 삼키며
세상 밖으로 토해냈단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놀려도
남자의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해도
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
배알이 없다는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너희들의 아빠니까, 괜찮아
아빠니까 말이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2』(동아일보. 2012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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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존 던(1572∼1631)

 

  세상 어느 누구도 외따로운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흘러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질 것이며, 모래벌이 씻겨도 마찬가지, 그대나 그대 친구들의
땅을 앗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손상시킬지니,
나는 인류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알
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종이나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3』(동아일보. 2012년 1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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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새와 나무


― 오규원(1941∼2007)

 

 

어제 내린 눈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 위에 쌓여 있습니다
눈은 그래도 여전히 희고 부드럽고


개나리 울타리 근처에서 찍히는
새의 발자국에는 깊이가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의 새들은 그러나 발자국만
오늘 위에 있고 몸은
어제 위의 눈에서 거닐고 있습니다
작은 돌들은 아직도 여기에
있었다거나 있다거나 하지 않고
나무들은 모두 눈을 뚫고 서서
잎 하나 없는 가지를 가지의 허공과
허공의 가지 사이에 집어넣고 있습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4』(동아일보. 2012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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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맹문재(1963∼ )

 


대학교수의 손이 왜 이래?


악수를 하는 사람들은
나뭇등걸처럼 갈라진 나의 손등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놀리기도 한다
나는 정답 같은 당당함을 가지려고 하면서도
그때마다 움츠러든다


내가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
위생적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닮고 싶은 손이 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노동자와 흰 손의 사나이]에 나오는 사나이는
당국의 눈치보다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육 년이나 쇠고랑을 찼고
마침내 교수형을 선택했다
나도 빈 요구르트병 같은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출석 확인을 하듯 일기를 쓰고
연서를 하고
때로는 집회에 나가지만
흰 손의 사나이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최소한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5』(동아일보. 2012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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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재봉


―김종철 (1947∼ )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 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에는
집집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마을의 하늘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마른 가지의 난동(暖冬)의 빨간 열매가 수실로 뜨이는
눈 나린 이 겨울날
나무들은 신의 아내들이 짠 은빛의 털옷을 입고
저마다 깊은 내부의 겨울바다로 한없이 잦아들고
아내가 뜨는 바늘귀의 고요한 가봉(假縫),
털실을 잣는 아내의 손은
천사에게 주문받은 아이들의 전 생애의 옷을 짜고 있다
설레는 신의 겨울,
그 길고 먼 복도를 지내나와
사시사철 눈 오는 겨울의 은은한 베틀소리가 들리는
아내의 나라,
아내가 소요하는 회잉(懷孕)의 고요 안에
아직 풀지 않은 올의 하늘을 안고
눈부신 장미의 아이들이 노래하고 있다
아직 우리가 눈뜨지 않고 지내며
어머니의 나라에서 누워 듣던 우레가
지금 새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있다
눈이 와서 나무들마저 의식(儀式)의 옷을 입고
축복받는 날
아이들이 지껄이는 미래의 낱말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직조(織造)의 방에 누워
내 동상(凍傷)의 귀는 영원한 꿈의 재단,
이 겨울날 조요로운 아내의 재봉 일을 엿듣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6』(동아일보. 2012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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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1945∼ )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1』(동아일보. 2012년 12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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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1952∼)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8』(동아일보. 2013년 01월 02일)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 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미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김승희 시산문집『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마음산책,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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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시간이 사각사각


―최승자(1952∼)

 

 

한 아름다운 결정체로서의
시간들이 있습니다
사각사각 아름다운 설탕의 시간들
사각사각 아름다운 눈(雪)의 시간들
한 불안한 결정체로서의
시간들도 있습니다
사각사각 바스러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무너지는 시간들
사각사각 시간이 지나갑니다
시간의 마술사는 깃발을 휘두르지 않습니다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아하 사실은
(통시성의 하늘 아래서
공시성인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시간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입니다)
시간이 사각사각
시간이 아삭아삭
시간이 바삭바삭
아하 기실은
사회가 휙,
역사가 휙,
문명이 휙,
시간의 마술사가 사각사각 지나갑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49』 (동아일보. 2013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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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사람이 사는 길 밑에


―박재삼(1933∼1997)

 


겨울 바다를 가며
물결이 출렁이고
배가 흔들리는 것에만
어찌 정신을 다 쏟으랴.
그 출렁임이
그 흔들림이
거세어서만이
천 길 바다 밑에서는
산호가 찬란하게
피어나고 있는 일이라!
사람이 살아가는 그 어려운 길도
아득한 출렁임 흔들림 밑에
그것을 받쳐주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래가 마땅히 있는 일이라!
……다 그런 일이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0』 (동아일보. 2013년 01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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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 수 위


―복효근 (1962∼)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면 자꼬 만지지 마씨요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펜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허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보이는 돈이
천원짜리 구지폐 넉 장이다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이씨요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기지: 옷감, 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1』 (동아일보. 2013년 0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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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어떤 희롱꾼
 

  ―보들레르 (1821∼1867)

 


  수많은 사륜마차들이 지나간 눈과 진흙의 혼돈, 장난감 등속과 봉봉과
자의 번쩍임, 탐욕과  절망의 범벅, 가장 강한 고독자의 뇌리조차 혼란케
하는 대도시의 이 모든 공공연한 광란……새해가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혼잡과 뒤죽박죽의 한가운데를 채찍으로 무장한 무뢰한에 시달리
며 분주히 뛰어가고 있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당나귀가 막 보도
의 모퉁이를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갑을 끼고 잔인할 정도로 넥타이를
꽉 매고 꼭 맞는 옷 속에 감금당한 듯, 요란하게 차려입은 멀쩡하게
잘생긴 한 신사가 이 보잘것없는 짐승 앞에 정중히 몸을 굽히는 것
이었다. 그리고 모자를 벗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행복하고
복된 새해를 기원하나이다!” 그러고는 거만스럽게 누구신지 알 수
없는 동료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기쁨에 그들이 동의해
줄 것을 간청하기라도 하듯.


  당나귀는 이 익살꾼을 보지 않은 채 그의 의무가 그를 부르는 곳을
향해 열심히 달리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 사치스러운 천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
혔다. 이 천치야말로 그 자신 속에 프랑스의 모든 에스프리를 축소해 가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2』(동아일보. 2013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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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절필(絶筆)


―이근배 (1940∼)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3』(동아일보. 2013년 0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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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그림자 미술관


―홍일표(1958∼)

 


먼 기억처럼 바삭 마른 그림자
살살 긁어보면 피가 배어 나오기도 하는


아직 고양이 울음소리가 가느다란 잎맥으로 남아 있는
200년 전 그림 속으로 들어간 나비와 고양이가
그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저것은 어제 본 나비, 어제 본 고양이
일렁이는 그림자의 뿌리는 땅속까지 뻗어 있다
그림자가 출렁,
물고기 한 마리 뛰어오르듯
검은 허공을 열고 나오는 한 쌍의 나비
수 세기를 오가며 새까매진 어둠의 뒤편에 붙어
그림 속 봄을 매만지는 사이
손발이 다 녹아 날아가고
고양이가 펄쩍 뛰어오르는 순간 꽃잎 위의 나비가 200년 뒤로 얼른 숨는다
허공에 박힌 고양이의 몸이 빠지지 않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4』(동아일보. 2013년 0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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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차가운 사랑


―정세훈(1955∼)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뜨겁게 달굽니다 


어미 곰이 애지중지 침을 발라 기르던
새끼를 데리고 산딸기가 있는 먼 숲에 왔습니다
어린 새끼 산딸기를 따먹느라 어미를 잊었습니다
그 틈을 타 어미 곰
몰래 새끼 곁을 떠납니다
어미가 떠난 곳에
새끼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놓였습니다
버려야 할 때 버리는 것이
안아야 할 때 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는 그 길이
새끼 앞에 먼 숲이 되어 있습니다
탯줄을 끊어 자궁 밖 세상으로 내놓던
걸음마를 배울 때 잡은 손을 놓아주던
차가운 사랑이
먼 숲을 울창하게 만듭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5』(동아일보. 2013년 0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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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해수찜


노향림 (1942∼)

 

 

이따금 바다 갈매기들이 하얗게 똥을 떨어뜨린다.

그 똥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

상체를 내놓은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모여 찜질을 한다.

유황 성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만든 해수탕

질기고 비루한 일상을 벗어버리겠다고

바닥에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려 부항을 뜨거나

약쑥 냄새 자욱한 평상에 무릎관절 꺾고 앉아 있다.

만삭처럼 부른 배들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뜨거운 열기 속에 얼굴들이 복숭앗빛으로 불콰하다.

더운 수증기에도 잘 젖지 않는 젖가슴들

한때 아기들에게 젖을 물렸을 자루처럼 늘어진 가슴 끝에

시든 꽃꼭지 같은 유두를 매달고 있다.

유난히 하복부가 나온 젊은 아낙이 통성명을 한다.

아따, 언니는 임신 팔 개월째여? 배만 징허게 나와부렀소.

삼십 대로 보이는 아낙이 저승꽃 핀 얼굴의

팔십이 넘어 보이는 늙은 아낙에게 말을 건다.

폐경기를 다 넘긴 여자들이 다시 회임했다고 깔깔댄다.

싸 온 도시락들을 나눠 먹으며 아따, 언니는 벌써 두 양푼째네.

요렇코럼 만수위 된 뱃속에 뭘 또 심고 싶소,

소나무 장작불 땐 해수탕에 와서 배 따땃하면 됐제.

그녀들은 유황 성분이 온몸에 녹아들었는지

불이 이는 홍조를 띠며 자매들처럼 앉아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6』(동아일보. 2013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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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김민정(1976∼)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 달 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오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 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 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한 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호(號) 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비로소 나는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순간을 시 쓴답시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7』(동아일보. 2013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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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도봉근린공원


―권혁웅(1967∼)

 


얼굴을 선캡과 마스크로 무장한 채
구십 도 각도로 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아낙들을 보면
인생이 무장강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동계적응훈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한 지 몇 년인데, 지갑은 집에 두고 왔는데,
우물쭈물하는 사이 윽박지르듯 지나쳐 간다
철봉 옆에는 허공을 걷는 사내들과
앉아서 제 몸을 들어 올리는 사내들이 있다 몇 갑자
내공을 들쳐 메고 무협지 밖으로 걸어 나온 자들이다
애먼 나무둥치에 몸을 비비는 저편 부부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을 닮았다
영역표시를 해놓는 거다
신문지 위에 소주와 순대를 진설한 노인은
지금 막 주지육림에 들었다
개울물이 포석정처럼 노인을 중심으로 돈다
약수터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는 예쁘고
헤픈 처녀 같아서 뭇입이 지나간 참이다
나도 머뭇거리며 손잡이 쪽에 얼굴을 가져간다
제일 많이 혀를 탄 곳이다 방금 나는
웬 노파와 입을 맞췄다
맨발 지압로에는 볼일 급한 애완견이 먼저 지나갔고
음이온 산책로에는 보행기를 끄는 고목이 서 있으니
놀랍도다, 이 저녁의 평화는 왜 이리 분주한 것이며
요즘의 태평성대는 왜 이리 쓸쓸한 것이냐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8』(동아일보. 2013년 0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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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이빨들의 춤


  ―이수명(1965∼)

 


  집에 돌아오면 늘 이가 빠졌다. 그는 빠진 이빨들을 화장실 물컵에
넣어 두고는 거울을 보며 텅 빈 입으로 웃었다. 아침이면 그것들을 하
나씩 차례로 끼고 외출을 했다.


  어느 날인가 몹시 피곤하여 돌아온 날 밤 그는 화장실에서 이상한 소
리가 들려 잠을 깼다. 일어나 가보니 이빨들이 컵에서 나와 똑딱거리며
몸을 부딪쳐 가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참 재미있겠구나. 나도 끼워줘.”
그의 말에 이빨 하나가 대답했다. “어서 들어와.” 그는 춤을 추었다.
그러자 이빨들이 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가방 가득 물건을 팔러 다녔다. 언제나 열심히 일했지만 그의 물
건을 사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가방은 아침이나 저녁이나 무거웠다.


  그가 죽었을 때 그의 가방과 가방 속에 있던 물건들은 이리저리 흩어
졌지만 화장실에 있던 이빨들은 그와 함께 묻혔다. 그는 밤마다 이빨들
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59』(동아일보. 2013년 0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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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0』(동아일보. 2013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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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견딜 수 없네


―정현종(1939∼)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가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1』(동아일보. 2013년 02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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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이러고 있는


  ―김경미(1959∼)

 


  비가 자운영꽃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젖은 머리칼이 뜨거운 이마를
알아보게 한 날이다 지나가던 유치원 꼬마가 엄마한테 지금 이러고 있
을 때가 아냐 엄마, 그런다 염소처럼 풀쩍 놀라서 나는 늘 이러고 있
는데 이게 아닌데 하는 밤마다 흰 소금염전처럼 잠이 오지 않는데 날
마다 무릎에서 딱딱 겁에 질린 이빨 부딪는 소리가 나는데 낙엽이 그
리움을 알아보게 한 날이다 가슴이 못질을 알아본 날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생에 처음 청보라색 자운영을 알아보았는데


  내일은 정녕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2』(동아일보. 2013년 02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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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멋진 사람


  ―김승일 (1987∼)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었어. 짱깨가 철가방에서 너를 꺼냈지. 너는

그렇게 태어난 거야. 고모가 자주 하는 얘기. 나는 그 얘기를 너무 좋아

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나만 그렇게 태어났지? 이것은 오래된 바람.

 

내가 배달된 해에, 할아버지가 둘 다 죽었다. 집안에 큰 인물이 태어나

면 초상이 난다지. 이것 역시 내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 나는 얼

마나 유명해질까? 기대가 된다. 그러나

 

손금이 평범해서 나는 울었지. 그래도 손금이 평범하다고 우는 애는 나

밖에 없을 거야. 있으면 어떡해? 조금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실컷 울

었더니 손금이 변했어.

 

지하철 선로로 뛰어들었다. 나는 평범함보다는 평평함이 좋아. 모르는

사람들이 나한테 화를 냈다. 괜찮아요. 열차가 오려면 십 분 남았어. 나

는 이목을 끄는 사람. 나중에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리기 싫었어요. 어

쨌든

 

할아버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혹독한 현실. 하지만 사명감은

갖지 않을래. 사명감이 없는 애는 나밖에 없을 테니까. 있으면 어떡해?

있으면 좋지. 짱깨가 내 앞을 지나갔다. 폭주족처럼. 이목을 끌며 멋있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3』(동아일보. 2013년 02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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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행복


―방민호 (1965∼)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4』(동아일보. 2013년 02월 08일)
―시집『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실천문학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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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눈썹 ―1987년


―박준(1983∼)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飯店)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5』(동아일보. 2013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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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님의 노래


―김소월(1902∼1934)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


긴 날을 문 밖에서 서서 들어도
그리운 우리 님의 고운 노래는
해지고 저물도록 귀에 들려요
밤들고 잠들도록 귀에 들려요


고이도 흔들리는 노랫가락에
내 잠은 그만이나 깊이 들어요
고적한 잠자리에 홀로 누워도
내 잠은 포스근히 깊이 들어요


그러나 자다 깨면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려요
들으면 듣는 대로 님의 노래는
하나도 남김없이 잊고 말아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6』(동아일보. 2013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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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써레봉을 넘어서


―강영환(1938∼)

 

 

그대 흥미 없는 생에 무너지고 싶다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 훨훨 날아가고 싶다면

남도 지리산 동녘 써레봉으로 가서

세상을 가르는 칼등을 걸어 보라

눈이 상봉을 향하여 갈증을 풀 때 산등은

눈부신 쪽으로 몸을 끌어가려 하느니

왼쪽은 가물가물 햇살 벼랑이고

오른쪽은 푸르고 깊은 수해 빛이다

그곳에는 영원에 쉽게 닿는 길이 숨어 있다

한번 무너지면 돌아올 수 없는 길 위에서

몸은 스스로 균형을 잡고 가지만

눈에 넣고 가는 상봉이 앞서서

지친 영혼을 손잡고 길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몸 스스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그때 써레봉 가듯 이승을 걸어라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7』(동아일보. 2013년 02월 18일)
―시집『불일폭포 가는 길』(책펴냄열린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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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1962∼)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8』(동아일보. 2013년 0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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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익숙지 않다


―마종기(1939∼ )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69』(동아일보. 2013년 0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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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다랭이 논


―오세영(1942∼)

 

 

깊은 바다나 옅은 강이나
자고로 물고기는 투망으로 잡았다.
저인망, 안강망, 정치망, 유자망, 채낚기, 통발을 던지고,
끌고, 쳐서 잡는 저
싱싱한 해산물의 펄떡임이여,
어찌 이뿐이겠는가.
나는 새,
기는 짐승 역시 혹은 그물을 치고 혹은
덫이나 올무를 놓아 포획하지 않던가.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은
공중이나 지상이나 물속이나
인연의 끈을 비비고, 꼬고, 묶고, 엮어 만든
매듭에 한번 얽히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나니
아하, 저 농부,
봄 되어 날 풀리자
논두렁, 밭두렁 손질이 부산하다.
비록 땅에서 소출하는 작물이라 하나
그 역시 뭍에서 사는 생물일시 분명할지니
어찌 투망치지 않고서 거두어 낼 수 있으랴.
봄에 던져
가을에 걷어 올릴 논둑의 저 성긴
저인망 그물이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0』(동아일보. 2013년 0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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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러시앤캐시


―김연희(1981∼)

 

 

시로 쓰기에 적합한 소재가 아닐지 모른다

시가 안 될지도 모른다

시를 써야 하는데

시가 아닌 글을 쓰게 되더라도

이건 꼭 써야겠다 싶어서

러시앤캐시는 나쁘다

신용등급 9, 10등급도 대출을 해준다고

전화번호 끝번호를 ‘친구친구’로 해놓고

지하철 안에 지면 광고를 하고 있다

너무 나쁘다

왜 그 사람들이 돈을 빌릴까

집에 누가 많이 아픈가

사업을 너무 크게 벌였나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나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캐시로 러시하게 된 사람들

러시 러시 러시 러시

캐시 캐시 캐시 캐시

러시 러시 러시 러시

캐시 캐시 캐시 캐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1』(동아일보. 2013년 0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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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와온(臥溫)


―송상욱(1939∼)

 

 

마을 뒷산이 누워 계신 와불(臥佛)같다

품 안의 젖내음 나는

짐승들 누운 산이 따스하다

빈 속 쓸어내는 저녁답, 이맘때면 으레 그러듯

동네 삽살개 한 마리가 나룻배 닿는 갯가로 내려가

저만치서 뻘밭을 나오는 아낙들을 마중한다

바다 건너 화포 마을 포구에는 닻을 내린 어부들이

막사발 부딪는 소리, 뱃전에 끼륵이는 갈매기들 소리

귓전에 아련히 들려오다 파도에 쓸린다

해 저물어 누울

바다의 잠 자리 와온(臥溫)

속옷 갈아입는 듯

맨살 드러낸 뻘밭에 바닷물이 든다

갯펄에서 조개를 잡던 아낙들이

갯가로 나온 갯바구니 속, 바지랭이들이

뻘물 짜뜰름에 숨결 보챈다

밤이 되면 포구에 든 바다는

밤새 깊은 고뇌에 찬 듯 쏴아 쏴아

한숨을 내쉰다. 그러다

아침이면 고기잽이 배들 제 등에 둥둥 싣고 떠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2』(동아일보. 2013년 03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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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수취인이 없다


―한석호(1958∼)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 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입동(立冬)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사라져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3』(동아일보. 2013년 03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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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심었다던 작약


  ―유희경 (1980∼)

 


  네가 심었다던

 

  작약이 밤을 타고 굼실거리며 피어나, 그게 언제 피는 꽃인지도 모르
면서 이제 여름이라 생각하고, 네게 마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그게 아니면, 화분에다 심었는지 그 화분이 어떻게 허연빛을 떨어뜨리
는지 아는 것도 없으면서 네가 심은 작약이 어둠을 끌고 와 발아래서
머리 쪽으로 다시 코로 숨으로 번지며 입에서 피어나고, 둥근 것들은
왜 그리 환한지 그게 아니면 지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가르쳐주
지도 않으면서, 봄은 이렇게 지나고 다시 여름이구나 몸을 벽에 붙여보
는 것이다 그러니 작약이라니 나는 그게 어떻게 생긴 꽃인지도 모르고
나도 아니고 너는 더구나 아닌 그 식물의 이름이 둥그렇게 떠올라 나는
네가 심었다는 그것이 몹시 궁금하고 또 그런 작약이 마냥 지겨운 건
무슨 까닭인지 심고 두 손을 소리 내어 털었을 네가, 그 꽃이, 심었다던
작약이 징그럽게 피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4』(동아일보. 2013년 03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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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봄밤


―최승호(1954∼)

 

 

창호지로 엷은 꽃향기 스며들고
그리움의 푸른 늑대가 산봉우리를 넘어간다.
늘 보던 그 달이 지겨운데
오늘은 동산에 분홍색 달이 떴으면.
바다 두루미가 달을 물고 날아 왔으면.
할 일 없는 봄밤에
마음은 멀리 멀리 천리(千里) 밖 허공을 날고
의지할 데가 없어 다시 마을을 기웃거린다.
어느 집 핼쓱한 병자가
육신이 나른한 꽃향기에 취해
아픔도 없이 조용히 죽어가나 보다.
아름다운 용모의 귀신들이
우두커니 꽃나무 그늘에 서서
저승에도 못 가는 찬기운의 한숨을 쉬고
인간축에도 못 끼는 서러운 낯짝으로
누가 좀 따뜻이 나를 대해줬으면 하고
은근히 기다리는 봄밤
때에 절은 묵은 솜뭉치처럼
짓눌린 혼(魂)들을 꾸겨 담은 채
저승열차는 내 두개골 속을 지난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5』(동아일보. 2013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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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물소리 / 황동규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6)


물소리


―황동규(1938∼)

 

 

버스 타고 가다 방파제만 바다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조그만 어촌에서 슬쩍 내렸다.

바다로 나가는 길은 대개 싱겁게 시작되지만

추억이 어수선했던가,

길머리를 찾기 위해 잠시 두리번댔다.

삼십 년쯤 됐을까, 무작정 바닷가를 거닐다 만난 술집

튕겨진 문 틈서리에 새들이 둥지를 튼

낡은 해신당 아래 있었다.

저쯤이었나?

나무판자에 유리도 없이 뚫어논 사각(四角) 창에

섬 하나 떠 있고

섬 뒤로 짧고 분명했던 수평선과 식힌 소주

생선 맨살과 주모의 낮은 말소리

그리고 아 물소리가 좋았다.

바다의 감각이 몸부림치며 바위에 몸을 던져

몸부림을 터는,

터는 듯 다시 몸을 던지는 소리.

다른 아무것도 안에 들이지 않고

저물던 바다의 실루엣,

원근 따로 없이 모두 한가지로 저물었다.

바로 이쯤이었지?

술집 사라지고 해신당 걷히고

나무 쪼가리 하나 보이지 않는 바위 사이로

물소리만 철썩이고 있었다.

머뭇거리자 부근 어디에 사는 물샌가

보이지는 않지만 꽤 똑똑한 소리로 끼룩댔다.

더는 없어.

‘더 물소리’는 없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6』(동아일보. 2013년 0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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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농약상회에서


―함민복(1962∼ )

 


치마 아욱
마니따 고추
장한 열무
제초대첩 제초제
부메랑 살충제
아리랑 쥐약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
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
반성해보다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앙증맞을 집, 인공의 날개, 꼬막 밥그릇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 하늘에서의 사랑
무엇보다도 풀, 새, 물고기들에게도 겸손해질 수 있겠지
계산대 앞에서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7』(동아일보. 2013년 03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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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메리 올리버(1935∼)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8』(동아일보. 2013년 0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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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앙상블


―황병승(1970∼)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79』(동아일보. 2013년 03월 18일)

 

앙상블


황병승(1970∼)

 

골방의 늙은이들은 우물쭈물하지

죽음이 마치 올가미라도 되는 양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울음을 터뜨리는 아가들

인생이 마치 가시밭길이라도 되는 양
 
알약을 나눠먹고 밤거리를 배회하는 소녀들

환각이 마치 지도라도 되는 양
 
편지를 받아든 군인들은 소총을 갈겨대지

이별이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양

 

술에 취해 뒹굴며 자해하는 노숙자들

육체가 마치 실패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각별하고 깊은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침묵이 마치 그 해답이라도 되는 양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

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월간『현대시』(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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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뜻하고 명쾌하게 읽힌다. 과연 황병승은 재기 넘치는 시인!

   각 연이 두 행씩인데, 늙은이와 죽음, 아가와 가시밭길, 배회하는 소녀들과 환각, 노숙자와 실패, 깊은 감정과 침묵 등등으로 위 행과 아래 행이 앙상블을 이룬다. 위 행 시구들은 실제 삶의 면모들이고 아래 행 시구들은 시인의 혜안으로 꿰뚫어 본 그 이면이다. 참, 이러고들 산다. 실상 그렇지 않아? 아닌가?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이별 앞에서 상욕을 하고, 좀체 감정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사연 넘치는 인생이여! 시인은 울적한 풍경들을 ‘쇼트컷’으로 전개하는데, 그 시각과 필치가 예리한 만큼이나 어딘지 조롱기가 느껴진다. (시인, 당신은 이렇게 인생을 잘 아는군요. 그래서 ‘쿨하게’ 사시나요?) 그 조롱기는 문장을 둥글게 매듭지으며 후렴구처럼 되풀이돼 음악성을 높이는 ‘되는 양’이란 시어에서도 오는 것 같다.

   ‘놀람 속에서 바라보는 시인들/순간이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양’, 이 구절을 얻고 시인은 보석이라도 되는 양 미소 지었으리.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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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병승, 황인숙 두 시인에게

 

  두 사람의 황 시인들이 잘못 보고 지나친 맞춤법 하나 정정. 사실 이 말은 둘뿐만 아니라 많은 시인들이 잘못을 범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발표할 때의 잘못인데, 2연 1행에 '내딛으며'라는 정서법의 오류를 '내디디며'로 바로잡습니다.

  (옮겨 적는 이가 바르게 정정하면 좋았을 걸)

  기본형이 '내디디다'입니다. 줄임말  '내딛다'를 쓴다면 '내딛고', '내딛지' 같은 경우에 한합니다. '내딛며'는 쓸 수 없지요.

  또한 어미 '~며'가 연결될 때에는 '내딛으며'라는 이상한 줄임말을 쓸 수 없습니다. 줄지 않은 그대로 '내디디며'로 써야 합니다.

  그건 마치 '가지고'의 준말 '갖고'가 허용되는 것을 이용하여, '가지고'라고 써야 할 것을 엉뚱하게 '갖이고'라 쓰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줄임말은 말(발음)의 경제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음절 수가 똑같은 줄임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_강인한


 

<다음 카페 푸른시의 방>

http://cafe.daum.net/poemory/H5qF/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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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하염없이


―양선희(1960∼)

 

 

누가 반쯤 가린 세상을 보려고 나는

창을 닦기도 하고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와 계간지를

정기구독해서 숙독하기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경청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소주를 나눠 마시며

역사와 광기를 얘기하기도 하고

담배연기로 혀끝에 감기는

하루를 곁눈질해 보기도 하고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곳으로

총알택시를 타고

휙, 휙, 휙, 휘익

풍경들을 스쳐 보내고 가보기도 하고

처진 걸음으로 돌아와 다시 내 몫의 죄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다가

짓무른 다리에 약을 바르며 나는

누가 어디론가 보내 버린 이곳의 절반 이상이

내용증명으로 배달되어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0』(동아일보. 2013년 0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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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철새


―윤후명 (1946∼)

 

 

철새들 乙乙乙 날아간다

乙乙乙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乙乙乙

고개를 들라고 날개를 친다

모름이 곧 앎이니

날아갈 뿐이니

삶이 곧 낢이니

날개를 친다

너는 어느 땅에 붙박혀 있는가

묻는 상형문자 乙乙乙

음역하여 내 삶에 숨을 불어넣는다

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을…의

소리글자 날개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1』(동아일보. 2013년 03월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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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지상의 방 한 칸


  ―이시영(1949∼)

 

 

  신림 7동, 난곡 아랫마을에 산 적이 있지. 대림동에서 내려 트럭을 타고 갔던가, 변전소 같은 버스를 타고 갔던가. 먼지 자욱한 길가에 루핑을 이고 엎드린 한 칸 방. 누나와 조카 둘과 나의 보금자리였지. 여름밤이면 집 앞 실개천으로 웃마을 돈사의 돼지똥들이 향기롭게 떠가는 것을 보며 수제비를 먹었지. 찌는 듯한 더위에 못 이겨 야산에 오르면 시골처럼 캄캄하던 동네. 개천 건너 그 동물병원 같은 보건소는 잘 있는지 몰라. 눈이 커다란 간호원에게 매일 아침 붉은 엉덩이를 내리고 스트렙토마이신을 한 대씩 맞고 다녔지. 학교가 너무 멀어 오전 수업을 늘 빼먹어야 했던 집. 아니 결핵을 앓던 나를 따스히 보살펴 주던 집. 겨울이면 루핑이 심하게 울어 조카의 어린 몸을 난로처럼 안고 자던 방. 아니 봄을 기다리던 누님과 나의 지상의 좁은 방 한 칸.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2』(동아일보. 2013년 03월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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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매의 눈


  ―이학성 (1961∼)

 

 

  언제부턴가 내 눈에 매가 들어와 있다 그것은 내 눈동자 속에서 사납게 이글거린다 하는 수 없이 난 매의 눈으로 세상을 쏘아본다 그러니 다들 내 눈을 피한다 그럴수록 내 눈은 세상 구석구석을 매섭게 찌른다 차갑고 날카로운 매의 눈, 난 그런 눈 따위 바란 적 없다 눈곱만큼도 누구에게 해 끼치고 싶지 않았다 매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들어왔다 누군가는 그 사나운 매를 꺼내 어서 날려 보내라고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걸 꺼내 날려 보낼 수 있었다면 매가 눈으로 들어오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겠는가 매는 무엇 때문에 내게 들어왔는가 난 언제까지 매의 눈으로 세상을 떠돌아야 하는가 매의 눈으로 세상을 지켜보는 건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언젠가 매는 허공으로 고요히 물러나겠지 난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3』(동아일보. 2013년 03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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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활짝 편 손으로 사랑을


―빈센트 밀레이(1892∼1950)

 

 

활짝 편 손에 담긴 사랑, 그것밖에 없습니다.

 

보석 장식도 없고, 숨기지도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사랑.

 

누군가 모자 가득 앵초 꽃을 담아 당신에게

 

불쑥 내밀듯이,

 

아니면 치마 가득 사과를 담아 주듯이

 

나는 당신에게 그런 사랑을 드립니다.

 

아이처럼 외치면서

 

“내가 무얼 갖고 있나 좀 보세요!

 

이게 다 당신 거예요!”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4』(동아일보. 2013년 03월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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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대본 읽기


―김창완 (1954∼)

 

 

햇살 뿌연 회의실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임금을 읽고

빨간 추리닝을 입고 대감을 읽는다

백정은 운동화를 신었고

며느리는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있다

대사가 없는 노복은 문자를 보내고 있고

조연출은 읽는 사람들을 눈동자로 좇아다닌다

공주는 계속 연필만 돌리고 있고

성질 급한 감독님은 지문을 읽다

배우들 대사도 따라 읽는다 더 큰 소리로

중전이 읽으면 대궐이 된다

할아범이 읽으면 초가집이 되고

의원이 읽으면 약방이 되고

포졸이 고함치면 포도청이 된다

바람이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르고

말이 달리고 화살이 날아가고

영감이 죽고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바로 거기도 바로 그때도 바로 그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5』(동아일보. 2013년 04월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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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1980∼)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6』(동아일보. 2013년 04월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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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모과꽃잎 화문석


―공광규(1960∼)

 


대밭 그림자가 비질하는

깨끗한 마당에

바람이 연분홍 모과꽃잎 화문석을 짜고 있다

가는귀먹은 친구 홀어머니가 쑥차를 내오는데

손톱에 다정이 쑥물 들어

마음도 화문석이다

당산나무 가지를 두드려대는 딱따구리 소리와

꾀꼬리 휘파람 소리가

화문석 위에서 놀고 있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7』(동아일보. 2013년 04월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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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발의 고향


―최문자 (1943∼)

 

 

내가 나라는 때가 있었죠

이렇게 무거운 발도

그때는 맨발이었죠

오그린 발톱이 없었죠

그때는

이파리 다 따 버리고

맨발로 걸었죠

그때는

죽은 돌을 보고 짖어 대는

헐벗은 개 한 마리가 아니었죠

누구 대신 불쑥 죽어 보면서

정말 살아 있었죠

그때는

그때는

세우는 곳에 서지 않고

맨발로

내가 나를 세웠죠

그때는

내 이야기가 자라서

정말 내가 되었죠

불온했던 꽃 한철

그때는

맨발에도 별이 떴죠

그 별을 무쇠처럼 사랑했죠

날이 갈수록

내가 나를 들 수 없는

무거운 발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별똥별이죠

발도 고향에 가고 싶죠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8』(동아일보. 2013년 04월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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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아침


  ―이상(1910∼1937)

 


  캄캄한 공기(空氣)를 마시면 폐(肺)에 해(害)롭다. 폐벽(肺壁)에 끌음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내가기도 하고 실어들여오기도 하고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肺)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에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習慣)이 도로 와 있다. 다만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憔悴)한 결론(結論) 위에 아침햇살이 자세(仔細)히 적힌다. 영원(永遠)히 그 코 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89』(동아일보. 2013년 0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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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지우개


―김경후 (1971∼ )

 

 

1

자정의 책상엔
지우개 또는 얼룩진 종이
지우고 지우고 또 지운다


한때 사람들은 빵 조각으로 글씨를 지웠지
빵이 아니라 망각을 달라

 

2

지우개, 외딴 성당의 고해소
그것에겐 흙바닥에 떨어진 미사보
끊어진 장미 묵주 냄새가 난다
어둡게 피 흘리는 기억들
내 혀에서 떨어져 가루로 흩어져라


모든 기억을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지웠다는 기억
입속에서 잿빛 성체가 부서져 떨어진다

 

3

핏자국을 핥는 혓바닥, 지우개
흉터들의 감옥이자 숙성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이제 지우개가
나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0』(동아일보. 2013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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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나의 연봉


―김요아킴(1969∼)

 

 

세상의 모든 가치는 몸이다
월요일 새벽 출근을 서두르는
신문 가판대로 비싼 몸을 보았다
FA 시장에 나온 거물급의 한 타자
프로가 뭔지를 보여 주는 값을
1면으로 채웠다
땀으로 퇴적된 실력은 범접조차 힘든
연봉으로 관중들을 불러 모으고
아쉽게 어제 경기를 비긴 나는
얼핏 내 몸값을 더듬어 보았다
한국인 평균보다 모자라는 키에
약간 넘쳐나는 몸무게
어린 시절 동네 야구에서 틔운 싹을
석삼년 사회인 팀에서 꽃 피우는
나의 연봉은 마이너스
유니폼을 맞추고 글러브를 사고
꼬박꼬박 회비를 부으며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기울이는 술잔의 수
덤으로 일요일을 차압당한
마누라의 잔소리와 딸들의 원성
나의 통장에 찍히는 몸값은 확실한 마이너스
여전히 세상의 가치는 몸이 지배하지만
센터를 가르는 시원한 안타와
역동적으로 아슬하게 아웃시킬 송구를 꿈꾸며
다음 경기가 또 설레어지는 나에겐
사실 연봉이란 말은 사치일 뿐이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1』(동아일보. 2013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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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낡은 유모차와 할머니


  장대송


 

  이 골목의 아침은 자기 말만 늘어놓고 슬그머니 사라진 흔적들이 나뒹굽니다. 고되고 고된 것들이 뱉어낸 구겨진 말들, 조합해보려고도 했지요. 구겨진 담뱃갑, 카드 영수증, 무가지 뭉치, 대리운전 광고물, 정말이지 지나가고 싶지 않은, 사라지기도 뭐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 어디 감당이나 하겠는지요.


  담뱃갑을 굳이 구겨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을 슬쩍 감으면 이 허접한 곳은 그대가 살던 곳, 이미 사라진 길을 낡은 유모차를 끄는 할머니가 지나가곤 합니다. 어떤 예쁜 당나귀가 타고 다녔는지 할머니는 가만히 밀고 와서는 전봇대 표시판에 끼인, 배수구에 반쯤 걸린, 불법 주차된 차의 윈도 블러시에 걸어놓은 허접한 것들을 수거해가곤 합니다.


  일용할 양식. 할머니의 낡은 유모차에 실린 미치도록 가벼운 것들은 정말이지 일용할 양식이겠지요. 골목은 다시 좁음과 넓음, 허허벌판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린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귀걸이를 한 여자와 다크 서클이 얼굴 전체로 흘러내리는 남자가 서로 바라보듯 허허롭기만 한데요. 저승 같기도 하고 이승 같기도 하고 산처럼 멈춰 있기도 한 이 뒤숭숭한 골목을 어떻게 지나가야 잘 지나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당치도 않은 이 한평생.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2』(동아일보. 2013년 0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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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리미티드 에디션

 

―김박은경(1965∼ )

 

 

  통화 중인 명품 실리콘이다 출렁거리는 마놀로 블라닉이다 빛나는 샤넬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임계까지 보톡스다 거꾸로 달려가는 여우다 춤추는 노란 머리 레게 스타일이다 피어싱한 입술의 코카콜라다 속성 발효 중인 근육 속으로 팡팡 터지는 힘줄들이다 권총과 해골의 타투다 금발의 늑대 본좌다 동물적 본능의 타이밍이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야릇하게 흔들리는 길고 흰 꼬리, 손가락을 들어 프리덤을 우주로 날려주는 웨스트사이드 힙합 센스다 하나 둘 하나 잽싸게 구르는 지구다 변종의 히어로, 발톱과 발성의 발정이다 무국적의 혼종이다 오, 마이 허니 러버 그렇고 그렇지 백미처럼 흰 토끼새끼다 토끼똥처럼 발사하는 붉은 눈알들이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신상 해골들이다 얽히고설킨 꼬리들이다 놀라 떨어뜨리는 신형 폰이다 나뒹굴어 쪼개지는 세계적인 사과 반쪽이다 베어 물기도 전에 닳고 닳은 에디션, 여우와 늑대가 만나 토끼를 낳다니 평화로운 비둘기 가족이라니 다 함께 붉은 발을 들어 중얼중얼, 구구(求求)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3』(동아일보. 2013년 0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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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나의 싸움


―신현림(1961∼ )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4』(동아일보. 2013년 0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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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꺼진 불


―윤성근(1960∼2011)

 


죽음에 대해서도 농담을 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타고 쿨하게 가고 싶다.
의연하게 인격을 지키고 통증을 다스리고
칭찬받는 환자이고 싶다. 난처한 물음도 안 던지고
회진이 늦어도 불평하지 않고
초연하고 싶고, 물러나 있고 싶고,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
누가 한 세기를 더 살다 가는가.
누가 예술 작품을 위해 순교하는가.
저 건강한 세상에 장애를 느끼는 이가 한둘이든가.
불 보듯이 꺼진 불을 만져서 재차 확인하듯이
그런데 왜 그것이 나는 이렇게 어려운가.
그것이 나는 왜 안 되는가. 왜 안 좋아졌다고
삐치고, 차도가 있다는 그 말을 듣기 원하는가.
아내의 표정을 훔쳐보고
문병객의 눈길로 바로 치어다보기 어려워하는가.
왜 이런 걸 적어 새로운 무덤을 또 짓는가.
마음의 거처? 슬픔의 집적소?
왜 쿨하지 못하고 왜 농담도 못 받아넘기는지.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5』(동아일보. 2013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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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한마디의 말


―고트프리트 벤(1886∼1956)

 

 

한마디의 말, 한 편의 글―. 부호로부터 올라오는
삶의 인식, 의미의 돌출,
태양은 뜨고, 대기는 침묵하네.
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에 몰리듯 굴러가네.
한마디의 말―. 한 개의 빛남, 한 번의 비상, 한 개의 불,
불꽃 한 번 튕기고, 흐르는 한 번의 별빛―.
다시 어둠이 오네, 이 세상과 내 둘레의
텅 빈 공간에 무섭게 내리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6』(동아일보. 2013년 04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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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랑 또는 두 발


―이원 (1968∼)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의 몸 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 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7』(동아일보. 2013년 0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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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어떤 음계에서

 
―문동만 (1969∼ )

 

 

자주 자는 집은 컨테이너이거나 달세를 주는 여관방,
자주 먹는 밥은 함바집의 백반이었던 그가
삼십년 객짓밥으로 얻은 만년 셋방에 곰팡이꽃을 피워놓고
밥상을 차려 기다렸다
늘 막막했던 그가 용돈까지 쥐어준다
‘아무려면 혼자 사는 내가 낫지’가 그의 잠언
창을 열면 집 밖도 실내인 작은 집
소소한 몇 개의 반찬 냄새는 이 집을 벗어나지 못한다
빗방울은 허공에 걸린 거미줄을 튕긴다
이십오년 된 창고형 상가를 털어 칸칸이
허술한 담을 쌓고 그것을 아파트라 부르는 곳에
그가 살고 있다 그는 살 수 있었다
그가 만든 수많은 집들의 바깥에서만
빗방울을 견디는 거미줄, 오로지 가볍고 질긴 장력으로
살았던 탁음이 깊은 말라깽이 사내의 집
복도엔 그만그만한 사람들의 생이 얽힌 물발자국
발바닥으로 부르는 노동가, 따라 부르기 버거워
어떤 음계에서 나는 미끄러지고 만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8』(동아일보. 2013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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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폐선에 기대어


―남진우(1960∼)

 

 

이른 아침 눈뜨면
머리맡에 배 한 척 밀려와 출렁이고 있네
찢긴돛폭사이말간햇살들바삭거리며부서져내리고있네


그 배 문가에 기대어 놓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한없이 걸어가
하루 종일 이 일 저 일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오면
어디론가 가고 없는 배


잠들기 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종이를 접어 배를 만드네
한 척 두 척 내 손을 떠난 배는
내 방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떠나가고
험한 물살에 시달리다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버리고


다시 누워서 눈을 감으면
이 밤도 저 멀리서 흔들리며 다가오는 배가 보이네
물살에 실려 그 배는 이리저리 떠돌다
잠에서 깰 무렵이면 어느덧 내 머리맡에 와 있네


배를 얻고 잃기를 되풀이하며
매일 낮 매일 밤 나 세상을 떠돌았네
닿을 길 없는 부두를 찾아 덧없이 헤매 다녔네


어느덧 늙고 지친 내가 눈을 뜨면
어김없이 머리맡에 와 나를 굽어보고 있는 낡은 배 한 척
부서진 뱃전에 머리 기대고
나 다시 떠나야 할 하루의 먼 길을 헤아려보네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99』(동아일보. 2013년 05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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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사랑의 동전(銅錢) 한 푼


―김현승(1913∼1975)

 

 

사랑의 동전 한 푼
위대(偉大)한 나라에 바칠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기쁘게 쓰일 곳은 별로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그대 아름다운 가슴을 꾸밀 수는 없어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바다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 될지라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맑은 눈물로 눈물로 씻어
내 마음의 빈 그릇에 담아
당신 앞에 드리리니……


사랑의 동전 한 푼
내 눈물의 곳집 안에 넣을 때,
이 세상의 모든 황금(黃金)보다도
사랑의 동전 한 푼
더욱 풍성히 풍성하게 쓰이리니…….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100』(동아일보. 2013년 05월 06일)

 

 

 

 

한국 현대시 100주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100 (목록과 시)

http://cafe.daum.net/sihanull/DRy/36052

 

 

한국인이 애송하는 사랑시 (1 ~ 50) - 목록과 시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6512

 

 

현대시 100년 한국인의 애송童詩 (1 ~ 50) - 목록과 시

http://blog.daum.net/threehornmountain/13747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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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7.24 07:47

    첫댓글 덕분에 풍성한 아침을 열었습니다
    시 속에 머물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 14.07.25 00:06

    한 편 한 편 읽어보시면 그 중 또 마음에 닿은 시 한 편이
    있겠지요.

  • 14.07.24 12:21

    귀한 시를 풍성하게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14.07.25 00:07

    인터넷 시대, 시가 풍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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