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에 가신다면
속초는 아름다운 도시다. 설악과 동해가 숨겨놓은 진주 같은 도시다.
속초에 가신다면 무엇부터 볼 것인가? 달빛부터 보아야 한다. 달빛이 신선봉에서 화암사로 내려와, 영랑호와 바다를 비치는 그 부드럽고 광활한 누리를 보면서, 울산바위 아래 흰이슬 밟으며 밤 깊도록 거닐어보아야 한다. 월하(月下)에 경전 읽는 소리 들으면 마음이 탈속(脫俗)해지고, 월하에 시를 논하면 운치 표묘하여 속세를 떠나고, 월하에 미인을 보면 번뇌 한없이 높아진다고 한다. 신흥사 극락보전과 부도(浮屠)에 비치는 달빛은 탈속한 친구와 감상하기 알맞고, 기러기떼 허공을 나르는 송지호나 하얀 갈대 흩날리는 화진포 달빛은 시를 아는 친구와 감상하기 좋으며, 암벽 돌출한 영금정 일렁이는 푸른 파도는 연인과 함께 보아야 제격이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너무 밝아서 사람에게 답월(踏月)을 강요하거나, 끝내 잔 들어 마시게 하는 달빛만이 진정한 달빛이다. 이때 차 속에서 '에딛 삐아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샹송 '고엽'(枯葉)을 들어보라. 인생이 월광(月光)에 흩어지는 푸른 담배연기 같음을 알 수 있다.
천하제일 단풍 묻지 마라. 한계령(寒溪嶺) 단풍을 보아야 한다. 계류 굽이굽이 수정 같은 물결 위에 흩어지는 낙엽의 비 만산홍엽(滿山紅葉)인데, 안개는 조용히 수묵화 그리고 있다. 다정한 사람 손 잡고, 수억 년 한 점 티끌까지 씻은 정갈한 암벽에서 꽃처럼 떨어져 벽옥(碧玉)의 물에 떠가는 단풍잎을 보라. 선녀탕, 용소폭포, 주전골, 만경대에 가보면, 설악의 나무 하나하나가 화가임을 알게 된다. 단풍은 산을 화폭(畵幅) 인양 덮어, 사람이 파스텔화 속을 걷게 만든다. 나무마다 선호하는 색이 있다. 백양나무는 노란빛, 벛나무와 옻나무는 붉은빛, 굴참나무 신갈나무는 갈색 톤을 즐긴다. 은행나무 단풍은 오십 대 여인 미소처럼 은은하고, 벚나무 단풍은 밤 깊은 카페 여인 루주처럼 짙다.
어성전, 법수치리, 면옥치리, 현리를 아는가. 천하제일 물빛 거기 있다. 물이 청옥 인양 그리 깨끗할 수 없다. 옥류는 바위 곁에서 바이올린 현처럼 부드럽게 굽이치고, 폭포 만나면 은구슬처럼 깨어지고, 들판에서는 흰구름 비친 투명 거울이 된다. 크리스털 잔에 담고 싶은 것이 현리의 물빛이다. 노랑과 주홍빛 단풍이 비단무뉘 수놓은 얼음처럼 찬 물빛이 독한 술 인양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봄물은 시적이고, 가을물은 사색적이다. 산 가득 벚꽃 물에 뜨 흐르는 면옥치 물은, 이태백의 '산중 대작(山中對酌)' 시를 생각나게 한다. '두 사람이 술잔을 대하니, 산꽃이 피네. 한 잔 들게 한 잔 들게 또 한 잔 들게. 나는 취하여 잠을 자려하니 그대는 잠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이 나면 거문고 안고 오게.'
최상의 물빛 본 후라야 물소리 논할 수 있다. 선림원 폐허의 구름무늬 조각한 석등(石燈)과 삼층석탑 위로 초승달 뜬 밤, 이곳 물소리 들으러 오던 한 숙녀가 있었다. 아! 그러나 이제 물소리 가슴에 울리고, 남대천 뚜거리탕은 아직 따끈한데, 잔 건네던 그녀의 흰 손은 보이지 않는다.
설경(雪景)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알려면 속초로 가라. 눈이 하지에 녹는다고 설악(雪嶽)이요, 바위가 눈처럼 희다해서 설악이다. 산 아래 단풍이 한창일 때, 산 위는 은백의 봉우리가 청자빛 하늘을 이고 있다. 눈 덮인 봉우리들이 청자빛 하늘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은 설악만이 간직한 비경이다. 백설은 기암절벽 노송과 고사목(枯死木)과 청댓잎을 더욱 격조 있게 만든다. 진경산수(眞景山水)란 이런 것이다. 청화백자 은은한 맛을 코발트블루 하늘빛과 백설의 단색 대비 속에서 처음 깨닫게 된다.
설악의 인적 없는 설원(雪原)은 어디인가? 용대리 산림욕장 계류의 푸른 결빙 위에 찍힌 육각 보석 같은 눈의 결정을 보라. 낙엽교목 숲 설화(雪花)의 궁전에 안개가 무시로 지나갈 때, 미답(未踏)의 설야(雪野)에 눈바람 멀리 흩어짐 보라. 녹차 한잔 마시며 호반(湖畔) 눈 내리는 풍경 보기엔, 영랑호가 제일이다. 지붕까지 쌓인 눈에 집이 반쯤 묻히고, 푸른 사철나무 울타리 붉은 열매 맺힌 모습, 영랑호의 서정이다. 찻집 유리창 밖 눈 덮인 매화가지 너머로 신선봉, 미시령, 황철봉, 대청봉 보랏빛 연봉 사이에서 가장 장관인 것은 하늘로 치솟은 토왕성 빙폭(氷瀑)이고, 낮엔 아껴두었다가 달 아래 볼 곳은 기암(奇巖) 울산바위 설경이다.
안개는 잊힌 시간 떠오르는 하얀 커튼인가. 그리운 '아야진' 커피숍 창가로 가보라. 안개가 선박의 마스트 가리고, 허공을 가리고, 먼바다의 희미한 등불 가리고, 추억을 가린다. 낯선 이국 홀로 헤매는 정취 일으킨다. 한 치 앞 분간하기 힘든 해무(海霧)에 덮인 미시령 고개, 산허리에 하얀 안개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한계령, 늦가을 홍시 달린 감나무에 비치는 장산리 공항 안갯속 푸른 써치라이트, 수산에서 시작되는 여운포 밤바다 드라이브 길에서 보는 오징어잡이 푸른 어화(漁火)가 끝없이 신비로운 것은, 속초에 수시로 안개 짙은 밤이 있기 때문이다.
신(神)이 살던 정원의 폐허련가. 꽃은 처처(處處)에 숨어서 피어있다. 향냄새 젖은 낙산사 홍련암 뜰의 붉은 해당화, 필레약수의 자줏빛 금낭화, 비룡폭포 오르는 난간 절벽의 푸른 금강초롱, 미시령 눈밭의 보랏빛 얼레지꽃, 영하의 대청봉 하얀 에델바이스, 알프스 3번 파브릭 코스 전동차 범퍼 위로 덮이던 분홍 코스모스, 그 밖에 푸른 용담꽃, 하얀 구절초, 노란 삼지구엽초, 매발톱꽃 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생하고 있는 용아능선의 천상화원을 보라. 송이 향기만 말하지 말라. 야생 꽃향기가 송이보다 향기롭다. 향수(香水)도 오히려 부끄럽다. 속초는 꽃도 여승 인양 기품 있는 향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속초는 실낙원(失樂園)이다. 푸른 파도 한없이 밀려오는 피안(彼岸)의 땅이다. 천상의 모습을 지상에 재현한 신의 작품이다. 그대가 만약 속초에 가신다면, 아름다움의 극치에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쏠베지송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떠나오면 눈앞에 신기루 같이 떠오르는 신의 정원을 볼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