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7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 날을 맞는다. 인류의 스승이요, 진리의 등불이신 부처님. 사람들은 힘겨운 삶 속에서도 경건한 마음으로 등을 밝히며 무명의 세계에 빛을 보이신 부처님 탄신의 뜻을 기리고 있다.
또 한 번의 등을 밝히는 오늘, 우리는 등등상전(燈燈相傳)의 의미를 되새겨야 하겠다. 등이 등으로 전해지는 등등상전 속에는 세상을 좀 더 밝게 하겠다는, 예토를 정토로 바꿔보겠다는 변화 의지도 함축하고 있다. 그러려면 우선 자신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이웃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 상생을 위해 너와 내가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 걸음인 셈이다. 최근 사회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힐링(Healing)도 여기에 기반 해야 한다.
힐링이란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의미로, 마음의 상처나 각종 스트레스 등으로 손상된 감정과 마음을 치유함으로써 온전한 심신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온전한 심신상태란 온전한 인간 즉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불성’을 되찾으라는 의미의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세태 속에서 횡행하고 있는 ‘힐링’은 너무도 상업적이다. 작금의 힐링 열풍 이전에 한 때 '웰빙’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웰빙을 추구했지만 바람과는 달리 ‘참살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누가 더 좋은 걸 먹는지, 누가 더 좋은 산천을 유람하는지, 심지어 누가 더 좋은 옷을 입는지 등의 경쟁만 과열됐다.
결국 웰빙 의미는 퇴색되고 물질만능과 경쟁제일만 심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힐링'이 먼저 되어있지 않으면 '웰빙'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힐링 없는 웰빙은 사상누각’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힐링은 웰빙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기사의 헤드라인에 '힐링'이 넘쳐 날만큼 이젠 힐링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책 한권, 스포츠 용품 하나도 팔기 어려울 정도다. 힐링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상술에 넘어 간다면 그 끝은 자명하다. 힐링 또한 웰빙의 길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다.
자신을 치유한다고 하지만 정작 무엇을 치료해야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근본은 외면한 채 겉으로 보이는 것만 치유한다면서 또 다른 물질소유욕과 경쟁구도에 나서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치료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삼독(三毒)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존재의 실상’을 연기(緣起)로 설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은 관계 속에서 더불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체득하고 있지 못하기에 탐·진·치 삼독(三毒)의 삶을 살아왔다. 무아를 간과하고 ‘나’에 집착하며 탐욕심만 키웠다. 인간의 불행이 여기서 시작됐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이 병을 고치지 않고 무엇을 고친단 말인가. 연기의 실상을 알고 삼독을 치유해 가는 과정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보다 더 멋지고 좋은 힐링은 없다.
자신을 내려놓고, 비울 때 힐링은 시작된다. 인간 본연의 모습, 본래면목, 불성을 찾아야 진정한 힐링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나눠야 한다. 나와 내 이웃을 위한 등을 켜듯이,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을 상대와 나눠야 한다. 나누는 기쁨 속에 자신 또한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진정한 힐링은 부드러운 미소 하나에 담겨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는 그 마음 하나에 힐링의 의미가 다 담겨 있을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자비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등을 달며 부처님의 대자대비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 힐링의 시작과 끝 또한 자비임을 가슴 깊이 담아 보자. 그리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요, 날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