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22장15~22절
제목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세 가지 비유(두 아들 비유,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 책망 받은 종교 지도자들은 논쟁을 통해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려 합니다.
먼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예수님께 세금에 대해 질문합니다.
1.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세금에 관한 질문(15~17절)
1)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15절)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 예수님을 잡아야 하나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므로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습니다.
여기 바리새인들만 언급한 것은 막 12:13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을 가리키는 '저희'와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거의가 바리새인들이었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예수님께 대한 올무를 놓는 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대표로 쓴 것입니다.
말의 올무에 걸리게(파기듀소신) - `올무에 걸리게 하다'는 말은 본래 사냥에 사용되는 말로서 한 대상에 대해 주도면밀하게 함정이나 덫을 설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야를 죽이기 위해 모든 종교적인 지식과 현실적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덫을 놓는 생생한 표현입니다.
2)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16절)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헤롯당원들과 함께 가도록 했습니다.
사실 그 양자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견해로 잦은 충돌을 일으켰던 사이였으나 예수님에 관한 문제만은 일찍부터 협력하여 일을 꾸몄었습니다(막 3:6).
평행구인 눅 20:20은 헤롯당원들을 동행시킨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로마의 총독의 손으로 예수님을 처지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연로(年老)한 바리새인들은 연소(年少)한 제자들을 보내어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접근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고, 새로운 얼굴들을 내세워 진실한 구도자의 모습으로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힐렐(Hillel) 학파와 샴마이(Shammai)학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즉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온갖 최고의 칭찬을 시작합니다.
그 첫째가 '선생님이여'(디다스칼레)입니다.
이것은 랍비와 같은 의미인데, 진리와 권위를 갖춘 가르치는 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이 와서 '네가 무슨 권세로'라고 했던 말투와는 전혀 달리,
예수를 칭찬하고 추켜세우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둘째는, '당신은 참되시며'(알레데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리새인들이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이었으나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이 듣도록 한 말일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표현같이 그들로서는 파격적인 높임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참되신 선생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라고 하여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니, 또한 그것을 참되게 가르치는 자는 어렵고,
미묘한 문제라 할지라도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로,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렇게 참되게 가르치고 행하는데 있어서 예수는 백성들의 여론과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고 관원들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평가하시는 방식인데, 그처럼 사람이 가진 권세나 사람들의 평판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열렬한 지지자로서 진정으로 해답을 앙망하는 자세로 가장한 것입니다. 이는 비록 겉에 꿀을 바르고 속에는 독을 넣은 인사말이지만 이것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가장 공정한 평가를 바리새인 스스로가 내린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이런 과분한(?) 칭찬에 걸맞게 어떤 껄끄러운 문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고 시원한 해답을 두려움 없이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로마당국의 정책에 대항하는 견해를 공식적으로 답할 것이고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헤롯당원들이 증인이 되어 그들이 로마 총독에게 고소(告訴)하면 되는 것입니다.
3)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17절)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 예수님 당시 유대 지방의 납세 문제는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분봉왕 헤롯은 종교적으로는 유대인이었으므로 그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종교적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방은 아켈라오가 폐위되고 황제의 직속령으로 재편성되어 황제가 임명하는 총독이 다스리게 되자 유대 백성들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직접 세금을 바치는 격이 되었습니다.
한편 이때 가이사는 A.D. 12-37년에 로마를 통치한 티베리우스 황제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정부는 매 14년마다 한 번씩 그 각 지방에서 바쳐야 하는 세금의 총량을 결정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습니다(눅 2:1).
이스라엘에서는 바벧론 유수때부터 이방 지배자들에게 조공(朝貢)을 바치는 일이 문제된 적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인구 조사를 즈음하여 갈릴리 사람 유다(행 5:37)가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이방 왕들에게 세금을 바쳐 그를 인정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반란은 진압되었어도 가이사에 대한 납세의 적법성(適法性) 문제는
계속 신학적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선민이 예루살렘성전이 있는 유대 땅의 소출(所出)에서 일조를 성전에 바치면서 그 동일한 소출에서 떼어 이방인 왕의 통치아래 있다는 표로 세를 바치는 것을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꺼림직하게 여겼습니다.
과격분자들인 열심당은 그 일을 수치(羞恥)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헤롯당은 헤롯가문을 재흥시켜 헤롯 대왕의 호시절로 돌이키려고 로마 제국에 협력하면서 납세도 적극 권장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님은 궁지에 빠졌습니다.
납세를 찬성하면 열심당과 바리새인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외면을 당하여 그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가 될 수 없고,
납세를 반대하면 헤롯 당원과 사두개인들, 로마 총독과 헤롯 왕으로부터 정치범으로 몰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 예수가 로마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서 살려는 그들에게도 그 문제는 큰 고민이었습니다. 여하튼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은 하나님의 도에 참된 예수님의 견해 중에서 율법에 열심인 자신들과 일치되리라고 예상한 점을 이용한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예수님을 옭아매기에 충분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 제국이 강요하는 세금은 토지세와 소득세와 인두세가 있었습니다.
여기의 '세'(켄소스)는 인두세로서, 로마 정부는 자기들의 통치를 받은 속
주에서 남자는 14세 이상부터, 그리고 여자는 12세 이상부터 65세에 해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하였습니다.
한편 라틴어의 Census라는 말은 바로 이 인두세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 로마 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18~22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1)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8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예수님은 그들의 정중하고 호의적이며, 간절한 물음 속에 있는 살의와 사악함을 보셨습니다.
이에 대해 마가는 '외식함', 누가는 '간계'라고 표현했습니다(막12:15;눅 20:23).
그들의 입으로 말한 바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예수님은 당신을 시험코자 하는 그들의 중심을 다 아셨고 그것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함정과 덫을 바로 아셨던 것입니다.
2)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19절)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이 세금은 로마 황제가 발행하는 은화로 바쳐야 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화폐는 왕권의 상징으로 어떤 왕이 왕위에 오르면 즉시 자기 자신의 화폐를 발행했습니다.
왕위를 노리는 자까지도 자기의 왕직의 실재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했습니다(W.Barclay).
이것이 데나리온인데, 당시 가장 널리 유통되던 화폐였고, 거기에는 재임 중인 황제의 이름과 칭호가 찍혀 있어서 황제의 재산임을 나타냈습니다.
그 가치는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로마 군인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세금은 매년 일인당 한 데나리온을 내야 했습니다.
3)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20절)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 이 데나리온 주화의 한 면에는
황제의 신성을 표시하는 월계관을 쓰고 있는 황제 티베리우스의 두상과
'존엄한 신의 존엄한 아들 티베리우스가이사'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다른 면에는 '지극히 높은 사제'(Pontifex Maximus, 폰티펙스막시무스)라는 라틴어 글과 신들의 평화를 나타내는 홀과 감람나무 가지를 각각 왼손과 오른손에 쥐고서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황제의 어머니의 그림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이방인의 우상숭배적인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큰 혐오감을 일으켰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정부는 이 화폐를 쓰게 함으로 자기들이 지배하는 권세를 피지배민들로 하여금 피부로 느끼게 하고 각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랍비들은 큰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대한 약속은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이 새겨진 화폐가 세계에 통용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습니다(Beasley-Murray).
초기의 헤롯가에는 유대인의 종교관 때문에 이러한 형상 새기는 일을 피했으나 분봉왕 빌립이 이것을 유대 주화에 도입했습니다.
그 뒤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이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Robertson).
4)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1절)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가이사'(카이사르)는 최초의 로마 황제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 B.C. 100-44)의 성(姓)이었으나 나중에는 '황제'의 공
식 직함 명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너무 당연하고 무해(無害)하게 보여서 바리새인들은 거침없이 대답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제자들과 헤롯 당원들이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질문자의 입에서 대답을 이끌어내셨습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의 입에서 나온 같은 말로 대답하십니다.
데나리온의 화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면, 그 주화는 가이사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가지고 다니던 데나리온 주화는 로마 황제의 주화였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입으로 그 주화가 황제의 소유임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한편 랍비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화폐 주조(鑄造)의 권리가 한 나라의 통치자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통치 권력의 증거가 되어 있었고,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불법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다면 로마에 세금을 바칠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준수하고 합당한 요구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첫 대답은 문자적으로는 반민족적이고 친로마적인 입장이었으나 뒷 말씀과 연결될 때는 참으로 기이하고 심오한 도(道)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성전세와 헌물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당시 하던 관례대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화가 황제의 소유이므로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소유에서 제외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만물에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받으실만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고 있는가?
예수님은 상황의 본질을 정확히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하나님께 합법적인가를 물은 그들이, 실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하나님께 전혀 바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로 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던 것입니다(23:23).
그들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로 바친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들은 가이사의 것도 가이사에게 돌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멸망당하고 맙니다.
결국 주후70년,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세 반세겔까지 로마정부의 강요로 로마에 있는 쥬피터 카피돌리누스에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에 그 영역과 경계를 정하신 말씀이십니다.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을 찾아 하나님께로 돌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영역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생명과 권세가 나타나 있어서,
복음을 믿는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통치권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의 것이 최초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짐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을 제외한 당신의 것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받으시는 것에 비하면 가이사가 주고 받는 것은 얼마나 시시한가?
교회는 하나님께 받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질서이고,
시민 생활은 가이사에게 받고 가이사에게 바치는 질서입니다.
어느 요구도 다른 요구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가이사가 자기의 것만을 요구할 때는 그에게 시민으로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해서 바울은 롬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시민생활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이사가 하나님의 것까지 요구했을 때는 육체를 줄지언정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가이사에게 바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 더 포괄적이고 우월하기 때문입니다.
바치라(아포도테)는 17절의 ' 바치다'(두나이)와는 다릅니다.
이것은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똑 같은 동사가 21:41에서 농부가 제때에 주인에게 소출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D.A. Carson은 가이사가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준 것이 없기 때문에 '돌려주다'(pay back), 혹은 '지불하다'란 의미보다 그냥 '주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가이사가 눈에 보이게 준 것은 없어도 그의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권
세를 위임 받아서 하는 일이어서 거기에 해당하는 존경과 두려움과 세를 마땅히 바쳐야 하기 때문에(롬 13:1-7) 어떤 대가를 '지불하다'는 의미로는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5)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22절)
놀랍게 여겨 -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런류의 해답이 나오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습니다.
그 대답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협공을 피하면서 도리어 그들의 부패한 심장을 찌른 것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것'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압도당하여, 즉 '놀랍게 여겨' 놀라고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전해들은 그들의 선생들은 눅 23:2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왜곡하여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선동(agitation)했다고 고소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은 이면에 숨어 있는 불순한 의도를 아십니다(15~18절).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속내를 숨긴 채, 예수님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시고 사람의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 분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은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의 뜻만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들의 간교한 계략에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2)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심으로써 세금 납부를 인정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심으로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정부의 권력과 법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욱 법과 질서를 잘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의 일과 삶을 통해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하지 않을까요?
3) 예수님은 함정에 빠트리려는 난처한 질문에 탁월한 지혜로 대답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계략을 실패로 만드셨습니다(22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위에 계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4) 세상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손을 잡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합니다.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는 종교 집단 바리새인들과 로마의 통치를 지지하는 정치 집단 헤롯 당원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손을 맞잡고 협력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얼마든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서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친구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와 손잡고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야고보서 4장 4절).
기도
공동체-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솔선하며 살게 하소서. 열방-중국에서는 정부에 등록된 교회라도 지역 당국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면, 법적 권리가 침해당하거나 지도자들이 체포된다.
지역 정부가 교회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정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