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고전독서-시카고플랜] 8. 리 소로 - 《월든》, 《시민의 불복종》
월든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라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생활비를 버는 법을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했다.
류시화 시인의 번역으로도 유명한, 제프 딕슨의 <우리 시대의 역설>이란 시의 일부이다. 이 시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기술의 진보와 자본주의의 진화가 결코 사람들에게 더 큰 행복과 만족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명이 가져다 준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그만큼의 모순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역설. 이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도 아니다. 한창 자본주의가 성숙하고 있던 20세기 초반에도 이런 문제에 대해 골몰했던 청년이 있었다.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을 졸업한 청년은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한적한 숲으로 들어가 통나무집을 하나 짓는다.
사람들은 그가 시도한 자연친화적 삶에 미쳤다는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소로는 개의치 않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자연의 방식을 실천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닌 자연의 일부로서 살고 싶었던 청년은, 2년 2개월 동안 숲속의 호숫가에 지은 조그마한 통나무집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 갔다. 간혹 급하게 현금이 필요할 때면 측량이나 목수일 등을 하며 돈을 마련했다. 생계를 위해 1년에 한두 달 가량만 일하며, 그 외의 남는 시간은 충분히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청년은, 이런 자유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사하고 싶었고, 이내 호숫가에서의 하루하루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다.
내가 숲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생에서 꼭 알아야 할 일을 과연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다. 강인하고 엄격한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 버리고 싶었다.
매사추세츠 콩코드 인근 월든 호숫가에서의 자연친화적 삶을 적어내려간 《월든》은, 자연 생태에 관한 치밀한 기록을 넘어 자연과 순환하는 사유의 조각들을 주도면밀하게 배치하고 있는 작품이다. 《월든》은 자본의 가치가 지배하는 일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경제 (economy)'라고 제목을 지은 첫 장부터가 유의미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경제란 집을 뜻하는 'oikos'와 관리를 뜻하는 'nomia'의 결합을 충실히 반영한다. 그가 말하는 경제는 단순히 가계에 대한 성찰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의식주 개념과 쓸모를 근원부터 다시 생각해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제는 자연주의의 대표적 저서로 알려진 《월든》이지만, 출간 당시에는 대중들에게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장일로의 산업 사회에서는 소로의 신념이 다소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소로는 당대의 국가주의나 노예제와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으면서 명예로운 가난을 지향했다. 비인간적 자본 축적과 증식을 추구하는 반생태적 자본주의를 향해 건넨 비판이기도 했으며 대안이기도 했다.
시민의 불복종
소모가 월든 호숫가를 떠나 다시 세상으로 나온 것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노예제와 정의롭지 못한 법제도 때문이었다. 소로는 부조리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유와 정의를 숭상한다는 미국이 노예제도는 긍정하고 부당한 멕시코 전쟁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주민세를 납부하지 않는 식의 저항은, 힘없는 한 지식인이 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당성이라 믿었다. 그는 주민세 납부를 거부하고 있는 동안에도 정부의 방침과 기조가 견지한 부당성을 알리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 일환으로 탄생한 저작이 바로 《시민의 불복종》이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고 간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단체에는 양심이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양심적인 사람들이 모인 단체는 양심을 가진 단체이다. 법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정의로운 인간으로 만든 적은 없다. 오히려 법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조차도 매일매일 불의의 하수인이 되고 있다.
소로의 주장에 대해 법수호자 혹은 체제수호자들은 법적 안정성을 명분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정의롭지 못한 법이 실제로 존재할지라도 그 법이 사회 체제를 유지시킨다면 필요악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법의 권위는 그래서 절대적이고 한 국가의 국민인 이상 법을 수호하고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소로는 부조리한 정부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일축한다.
나는 이 미국 정부 또는 그 대리인인 주 정부를 일 년에 딱 한 번 세금징수원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직접 대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정부를 대면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그때 정부는 ‘나를 인정하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때 당신이 정부에 대해 만족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표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가장 효과적이며 또 현재의 조건에서 가장 불가피한 방식은 바로 정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이 나라의 법에 순종할 구실을 찾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언제라도 기꺼이 그 법을 따를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의심할 정도로 말이다. 그리하여 해마다 세금 징수원이 찾아올 무렵이면 나는 그에 순응할 구실을 찾기 위해 연방 정부와 주 정부가 취한 각종 조치와 그들이 처한 입장, 그리고 국민의 기본정신을 살펴보는 것이다.
정부는 헌법에 명시된 자유와 정의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노예제를 주장하고, 나아가 멕시코 전쟁을 주도함으로써 이미 숭고한 선의 이념을 잃어버렸다. 또한 양심 있는 지식인들이 이러한 부정의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창구조차 만들어 놓지 않았다. 이에 소로는 자신의 양심과 선의 이념을 지키기 위해 정부에 대한 저항 방법을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들은 법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 규범과 가치 체계 등을 정립시킨다. 그리고 법은 개인들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약속이고 그 국가에 소속된 개인은 이 헌법을 준수할 의무를 지게 된다. 소로의 '시민불복종' 개념은 전체 법질서의 정당성은 긍정하면서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개별법령이나 정책을 부정하는 소극적 저항이다. 이는 대영제국의 침탈에 항거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과 미국 흑인의 인권을 위해 싸웠던 마틴 루터 킹에게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