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태자 1회 송우혜 소설가본 내용은 신동아에 연재(1998년 3월부터 1999년 2월까지)된 소설 내용을 발췌하여 수록한 것임 연재를 시작하며 이 소설은 멸망하는 약소국의 무력함과 슬픔을 그 한 몸에 모두 체현했다고 일컬어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삶과 그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들 한국은 붓의 나라이고 선비의 나라이며, 일본은 칼의 나라이며 무사의 나라라고 한다. 우리 민족이 겪었던 1910년의 국치(國恥)는 군사력을 곧 정의의 척도로 삼던 폭력의 시대에 붓과 선비의 문화가 당할 수밖에 없는 치욕이었을까. 『너의 적을 사랑하라. 너의 결점을 명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라는 경구에 따르자면, 일본은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웃이다. 연년세세 우리가 지니고 있는 허점과 약점을 그들처럼 다각도로 극명하게 증명해 보이는 자들이 또 어디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영친왕은 지난 시대의 대한제국 황실에만 있던 인물이 아니다. 잔인한 폭력의 위세 앞에서 휘청거리는 사람은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으며 또 내일도 나타날 것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탄식은 두렵게도 늘 진실이어서, 가까이 들여다보면 왕조시대의 군주제도가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 결코 낯설지 않다. 겉모습만 바꾼 채 지금, 여기, 우리 속에 있기 때문이다. 90년 전에 대한제국을 강탈해서 멸망시켰던 외세의 탐욕스럽고 잔인한 폭력 역시 지금, 여기, 우리 속에 현존하는 것이다. <송우혜>
어린아이는 아침해와 같다. 그 존재 자체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을 밝고 따뜻하게 한다. 어린아이가 등장하면 일시에 주위가 밝아지는 것은 언제 어디든 다르지 않다. 심지어 몰락해가고 있는 제국(帝國)의 낙조 속에서조차 그러하다. 여기, 아주 귀엽고 조그만 만 세살짜리 어린 남자아이가 있다. 붉고 둥근 거대한 기둥들이 도처에 늘어서 있어 낮에도 어둑신한 궁궐의 큰 전각들…. 그 웅장하고 침침한 건물들 사이로 그 아이가 즐겁게 뛰고 있다. 아이의 팔에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안겨 있다. 『야아옹 야옹 야옹』 고양이의 여린 울음 소리가 잦은데, 작은 어린아이의 맑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가 계속 공기를 흔들고 있다. 『하하하하! 하하!』 조그만 아이 앞에는 몸집이 아주 비대한 어른 하나가 뒤뚱뒤뚱 뛰고 있다.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어른이다. 그처럼 큰 어른이 이토록 작고 귀여운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이는 자꾸 뒤쫓아 뛴다. 조그만 아이는 황제의 아들, 어른은 몸집이 비대하여 주한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보다 「뚱보공(公)」이란 별명으로 더 유명한 황족이다. 이것은 뒷날 「멸망하는 나라의 무력함과 슬픔을 그 한 몸으로 모두 체현했다」고 일컬어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의 생애에서 세상에 알려진 것 중 가장 어린 모습으로, 미국의 젊은 외교관 출신으로 1900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고문관으로 근무했던 윌리엄 샌즈(William F. Sands)의 회고록에 담긴 풍경이다. 샌즈는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이 아버지의 친구」이며, 「그랜트 대통령 이래로 역대 대통령들(체스터 아서 대통령만은 예외였는데 그는 내 할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초대도 받지 못했다)은 내 할아버지의 집을 수시로 드나드는 격의 없는 손님들이었다」는 미국 명문가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직업 외교관 길에 들어서서 먼저 일본에 가서 주일 미국 공사관에 근무했고, 1897년에는 서울의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발령 받아 근무하던 도중 대한제국의 초빙을 받아 고문관으로 취임하여 4년간 근무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대할 때는 「산도(山島)」라는 한자 이름을 썼기에, 그런 이름이 기재된 대한제국 황제의 칙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샌즈의 회고록에 남아 있는 영친왕의 어린 시절 모습은 아주 귀엽고 밝다. 『…어느 날 내가 궁내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나는 궁 안의 정숙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무엄한 소음, 어지러운 발소리와 내시들의 꾸짖음에 아이들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뒤섞인 소리들을 들었다. 나는 궁 안에서 특별 취급을 받는 엄귀비의 아들인 아기 왕자의 짓이라고 짐작했다. 이윽고 황제의 삼촌인 뚱보공이 땀을 뻘뻘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느닷없이 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저 애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뒤이어 두 팔로 고양이를 안은 아이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한 떼의 내시들이 따라 들어왔다. 나는 고양이를 아주 싫어해서 고양이만 보면 질색을 하는 뚱보공의 약점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공사관의 만찬석상에서, 나는 커튼 뒤에 숨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움직임만 느낄 수 있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아기 왕자를 내보내고 그 어른을 진정시켰다』 샌즈는 『그 아기 왕자는 응석받이로 자라기는 했으나 쾌활한 성격에 건강했고 아주 귀여웠다』고 기술했다. 샌즈가 「황제의 삼촌인 뚱보공」이라고 부른 사람은 고종황제와 삼종형제(三從兄弟) 사이인 이재순(李載純)으로 정부의 여러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뚱뚱한 몸집에 재기 있고 유쾌한 성격을 지닌 신사로서 외국인들은 그의 쾌활한 성격과 굼뜬 동작 뒤에 숨은 뛰어난 지모를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샌즈가 높이 평가했던 황실의 유력인사였다. 그런 인물조차 어린 영친왕의 장난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영친왕이 어렸을 때 황실에서 얼마나 소중하게 떠받들여지고 있던 응석받이였는가를 알 수 있다. 대한제국 사람들이 소형 영사기를 생전 처음 보았을 때의 일화 역시 그걸 입증한다. 미국의 직업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였던 버튼 홈즈(E. Burton Holmes)는 1906년에 서울에 들어왔다. 동양의 신비를 찾아 극동까지 온 그는 일본을 두루 여행한 뒤 현해탄을 건너 대한제국을 찾았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들의 충고를 따라 영어회화를 할 줄 아는 한국인을 안내인으로 고용하여 데리고 다니면서 서울 안팎을 구경다니던 중, 하루는 교외에 나갔다가 예의 뚱보공 이재순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뚱보공의 별장에 초대 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은 뒤 보답으로 소형 영사기를 작동시켜 보여주었다가 황제에게도 보여드리고 싶으니 빌려 달라는 간청을 받는다. 그는 영사기를 사용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빌려주었는데, 그 영사기가 그의 손에 되돌아온 것은 이틀 뒤였다고 한다. 한밤중에 황제의 시종인 내시가 횃불과 호롱불을 켜 들고 호텔로 찾아와서는 자고 있는 그의 일행을 깨워서 황제가 하사한 선물 꾸러미를 영사기와 함께 건네주었는데, 선물 상자 안에는 고급 녹색 비단 여러 필과 부채 여섯 개, 그런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시종은 『황제의 가장 어린 아들이자 궁궐의 개구쟁이인 어린 왕자님이 잠자리에 들어서도 꼭 부둥켜안고 내놓지 않는 통에 늦게 돌려주게 되었다』면서 그래서 사과하는 뜻으로 선물을 보낸다고 전했다. 바로 다음 날, 예의 뚱보공으로부터 궁궐의 무희들 춤을 보러 오라는 초대가 왔다. 그런데 『올 때는 반드시 영사기를 가져 오라』는 당부가 곁들여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 통역은 『만약 영사기를 다시 궁궐로 가져가면 반드시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면서 걱정했다. 그러나 홈즈는 오히려 그 영사기를 정성껏 포장해서 기꺼이 어린 왕자에게 선사해 어린 왕자를 기쁘게 해주고, 그 보답으로 고급 녹색 비단과 두 개의 족자와 은제품들을 받고 황실 전속 무용단의 무용을 구경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는 것이다. 당시 여행차 서울에 들른 일반 외국인들이 궁궐에 초대받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일개 여행객이자 사진작가인 홈즈가 그렇게 쉽게 궁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 소형 영사기를 다시 보고 싶어한 어린 영친왕 때문이었을 터이니 그 응석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영친왕과 영사기의 관계는 기구하고도 애처롭다. 영친왕은 1897년에 태어났으니, 문제의 소형 영사기를 선사받은 1906년에는 아홉살 소년이었다. 그는 홈즈에게서 영사기를 선물받은 바로 다음 해인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됐고, 곧 일본제국이 추진하고 있던 한국침략정책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일본 유학이라는 명목 아래 인질이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영친왕은 홈즈의 소형 영사기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어린 영혼을 대번에 그토록 매혹시켰던 활동사진(活動寫眞:영화) 영사(映寫) 취미를 평생토록 지니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열살 짜리 어린 황태자를 그의 부모와 궁성에서 떼어내 산 설고 물 선 일본 땅에 인질로 끌어다 놓은 일본 황실에서는 아이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갖가지 선물을 주고는 했는데, 그 중에는 일본 왕이 준 활동사진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황실 관계자들 사이에는 영친왕의 평생 도락이었던 활동사진 취미가 자기네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선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의 선후로 보아서, 영친왕이 이미 활동사진기를 좋아하고 있음을 안 일본 왕이 아이가 좋아할 선물을 주느라고 활동사진기를 선사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과 맞다. 영친왕과 활동사진의 관계는 그뿐이 아니다. 인질이 되어 끌려간 지 4년째인 1911년 여름, 일본인들은 영친왕이 일본에서 지내는 모습을 활동사진기로 찍어서 고종에게 보냈다. 그 필름을 상영하는 것을 본 영친왕의 생모 엄비(嚴妃)는 열네살 소년인 영친왕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주먹밥을 먹고 있는 모습에 그만 극심한 충격을 받아 급체(急滯)를 일으켜서 이틀 뒤에 별세했다. 실로 애통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홈즈의 소형 영사기 사건에서 보듯, 어린 영친왕은 아무리 무리한 일이라도 일단 떼를 쓰고 들면 온 궁중이 그대로 받아들이던 대한제국 황실 최고의 응석받이였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해서 그런 위치에 있을 수 있었을까. 어떤 아이든 마찬가지다. 아이가 응석받이가 되는 데 필수적인, 그리고 유일한 요소는 힘 있는 부모, 또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의 과도한 사랑이다. 영친왕의 경우에는 우선 생모인 엄비(嚴妃)의 거의 동물적인 익애(溺愛)가 있었고, 또 영친왕 본인이 워낙 쾌활한 아이여서 부친인 고종도 아주 귀여워했다고 한다. 나이테는 나무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나이와 서 있던 방위와 뿌리 박고 있던 토양의 기름지고 척박함…. 천하 만상에도 역시 나무의 나이테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대한제국 황실의 경우, 「아주 심한 응석이 그대로 통하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하는 사실이 나이테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영친왕이란 어린아이 하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당시 황실의 내부 구도와 역학관계를 선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은 우리 겨레의 역사상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불과 13년 동안 사용되었던 극히 단명(短命)한 국호(國號)다. 그러나 그 의의는 특별하다. 우리 민족사상 왕(王)이 다스리는 나라인 「왕국(王國)」이 아니라 황제(皇帝)가 다스리는 나라임을 뜻하는 「제국(帝國)」이라는 국호를 쓴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시절은 매우 고단한 세월이었다. 우리 민족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질풍이 몰아치던 시대였다. 영국의 식민지 인도에서는 간디가 영국에 대한 불복종운동을 이끌어가고 있었으며, 미국이 하와이를 합병했고, 청나라에서는 교주만을 독일에 그리고 여순은 러시아에 또 광주만은 프랑스에 조차해 주었고 의화단 폭동이 일어났으며, 미국과 스페인이 전쟁을 벌였고, 아프리카에서는 보어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고,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알바니아를 점령했으며,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했고, 러시아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리스는 키프로스를 병합했다. 이런 시대에 단지 13년 동안 명맥을 유지했던 대한제국에서, 황실 최고의 실력자는 고종황제의 측실(側室)로서 흔히 「엄비(嚴妃)」 또는 「엄귀비(嚴貴妃)」로 불린 영친왕의 생모인 황귀비(皇貴妃) 엄씨였다. 그렇기 때문에 엄비의 아들인 어린 영친왕의 심한 응석이 그대로 온 궁중에 통했던 것이다. 영친왕을 알려면 먼저 엄귀비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미천한 궁녀에서 국모로 엄귀비는 근세에 드물게 보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 생애의 기구함이 조선조 말에 「희대의 여걸」로 불린 고종의 정실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에 버금간다. 엄귀비는 만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입궁한 일개 미천한 궁녀 출신으로, 문벌이나 지위의 도움이 전혀 없이 순전히 자신의 책략과 수완과 기민한 행동력의 힘으로 일국의 국모 위치에 버금가는 자리에까지 올라 온 뒤 나라 정사를 두 손 안에서 주물렀다. 그런 점에서, 여흥 민씨란 쟁쟁한 문벌의 배경과 왕비라는 지존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던 명성황후의 경우보다 오히려 더 극적이다. 평생을 그렇듯 특별한 여인들의 지아비로 지냈던 것 또한 고종이 누린 생애의 특이함이라 할까. 엄귀비는 영월 엄씨로, 엄진삼(嚴鎭三)이란 사람의 장녀였다. 엄비의 친정은 서울 서소문 안에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출세한 뒤인 대한제국 시절에 고인(故人)인 생부 엄진삼에게 「찬정(贊政)」 벼슬이 추증되었을 뿐 생전에는 아무 벼슬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궁녀들의 본댁이 대개 그렇듯 한미한 중인 집안이었던 듯하다. 철종 5년 갑인년(1854년)에 태어난 그녀는 만 5세때인 철종 10년 기미년(1859년)에 「아기 내인(內人)」으로 입궁했다(내인은 흔히 「나인」이라고도 발음하는데, 전문가의 고증에 따르면 「내인」이 바른 발음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라서는 「엄비가 여덟살에 입궁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울 청량리에 있는 그녀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에 서 있는 거대한 묘비에 출생 시기와 입궁 시기가 「철종 5년 갑인년」과 「기미년」으로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으니 「여덟살 설」은 부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종의 정실인 명성황후와 측실인 엄귀비의 인연은 남다르다. 조선왕조 시절, 명성황후 민씨가 왕비로 내전에 건재해 있을 때 엄귀비는 일개 상궁(尙宮)으로서 측근에서 직접 민비(閔妃)를 모시는 시위상궁(侍衛尙宮)이었다. 사가(私家)로 치자면 주인과 몸종 사이처럼 가까운 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중전 민씨가 일본인 폭도들에게 시해 당하기 꼭 십년 전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았다. 이 때부터 너무도 극적인 엄상궁의 인생 역정이 펼쳐진다. 『오오!』 『아니, 엄상궁이!』 어느 날, 왕의 침전에서 나오는 엄상궁의 치마를 본 궁녀들의 입에서 절로 나직한 탄식이 새어나왔다. 참을 수 없는 선망과 질투로 낯빛들이 일그러졌다. 둘러 입은 치마였던 것이다…. 왕과 처음으로 잠자리를 함께 하여 성적인 교섭을 가진 궁녀, 이른바 처음으로 「승은(承恩)」한 궁녀는 침실에서 나올 때 치마를 둘러 입는다. 그것은 대궐의 오랜 관례로, 자신이 승은했음을 궐 안에 공표하는 수단이었다. 승은, 그것은 궁궐 안 모든 궁녀들이 밤낮으로 그리는 꿈이고 소망이다. 궁녀로서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승은하면 그것만으로도 당장 사람값이 올라가서 즉시 특별 상궁으로 대우받게 됨은 물론, 운 좋게 잉태하여 왕자나 옹주라도 낳게 되면 곧 왕실 가족의 일원이 되어 평생토록 부귀영화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여러 여건으로 보아 엄상궁이 승은했다는 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고, 그만큼 엄상궁의 인물됨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주위에서는 엄상궁이 얼마나 비상한 책략과 야심을 지닌 머리 좋은 사람인가를 이때 비로소 알아차렸다. 처음 승은했을 때, 객관적으로 보아 엄상궁에게는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왕의 색정을 도발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었다. 아니, 나이로나 용모로나 처지로나 모두 승은하기에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그녀는 이미 만 32세나 된 나이 지긋한 여인이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사람들의 수명이 짧고 조혼(早婚)하던 시절이라서 이르게 결혼한 여인은 손주를 볼 정도의 노년이었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얼굴이나 몸매까지 추하다 할 만큼 못생겼다. 그녀의 못생긴 용모에 관해서는 여러 기록에 기술된 증언들이 있고, 또 그녀가 뒷날 대한제국의 황귀비 시절에 호사스럽게 성장을 하고 찍은 사진이 현재 남아 있어, 찬란한 황실 대례복의 호화로움으로도 감추지 못한 못생김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그러니 일개 내전 상궁 시절의 추함은 묻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왕을 모시는 대전(大殿)에 소속된 상궁이 아니라, 왕비를 모시는 내전(內殿)의 시위상궁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주인인 민비를 제치고 왕을 시침(侍寢)할 기회를 잡기란 하늘에 별을 따기보다 어렵다고 해야 할 터였다. 더구나 당시 민비는 그 눈 밖에 나면 목숨이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무한대의 권력 그 자체인 막중한 권세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상궁은 그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 왕의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 승은하는 그 엄청난 거사를 보기 좋게 해치운 것이다. 자신의 평생을 건 도박의 첫판에서 멋지게 승리한 것이다. 『지난 밤에 내전의 엄상궁이 승은했다!』 그 놀라운 소문은 쏜 화살처럼 빠르게 민비에게 전해졌다. 경악한 민비는 즉시 엄상궁을 잡아들여 계하에 꿇렸다. 『방자하고 참람한 계집 같으니! 네, 감히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민비는 파랗게 질린 낯으로 질타했다. 『오냐! 주인을 배반한 아랫것이 어떤 보답을 받아야 하는지, 내 이제 네게 똑똑히 보여주리라!』 민비는 표독스럽게 이를 악물었다. 상대가 다른 전각에 소속된 젊고 예쁜 궁녀라 해도 견딜 수 없는 판인데, 늘 옆에 두고 수족으로 부리는 나이 먹고 못생긴 자신의 시위상궁에게 왕과의 잠자리를 빼앗긴 것이다. 도저히 그대로 견딜 수가 없었다. 민비의 성격으로 보아, 자신의 몫을 빼앗겼다는 분함보다는 그것이 더럽혀졌다는 수모감과 치욕스러움이 더 컸을 것이다. 『형틀을 차려라!』 왕실의 법도로는 승은했음을 이유로 궁녀에게 손을 대서는 절대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고문하는 도구들을 날라오게 했다. 엄상궁을 당장 쳐 죽여서 온 왕궁 안에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다. 민비는 무슨 일이든 한다면 하는 모질고 강한 성격이다. 엄상궁의 목숨이 거센 바람 앞에 놓인 작은 촛불이 되었는데, 고종의 귀에 그 소식이 날아갔다. 고종은 황급히 민비를 찾아 간청했다. 『중전! 죽이지 마시오! 참으시오! 내 다시는 엄상궁을 돌아보지 않으리다. 엄상궁이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겠소. 약속하겠소! 제발 왕가의 복을 위해서라도 참으시오. 더 이상 곁에 두고 싶지 않으면, 죽이지 말고 그냥 궐 밖으로 내치시오. 다시는 엄상궁이 궐 안에 얼씬도 못하게 하면 되지 않소』 고종이 그처럼 사정사정하자, 민비는 엄상궁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궁 밖으로 내쫓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했다. 내전 상궁으로 자신을 오래 모신 공로를 생각하고 당시 12세였던 병약한 왕세자를 위해서도 덕을 쌓느라 참았는지 모른다. 그런 처리가 민비로서는 실로 크게 참은 것이었다는 방증이 있으니, 뒤이어 있었던 장 상궁 사건이다. 엄상궁 사건에서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이내 민비 몰래 또 궁녀를 건드렸다. 상대는 철종(哲宗)의 후궁인 숙의(淑儀) 범씨(范氏)의 궁(宮)에서 일하는 장씨(張氏) 성의 상궁이었다. 범숙의는 금릉위 박영효(朴泳孝)와 결혼한 영혜옹주의 생모인 바, 영혜옹주는 철종의 유일한 핏줄이다. 그러니만치 당시 왕가 안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위치와 비중을 지니고 있는 분이었다. 궁은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밖의 순화방(順化坊) 사재감동(司宰監洞)에 있었는데, 범숙의는 선왕(先王)의 후궁이라 고종에게는 서모뻘인 윗전(殿)이다. 왕실 법도로는 아무리 왕이라 해도 윗전의 궁녀는 건드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법도까지 어긴 것으로 보아 고종도 무던히 여색을 밝힌 듯하다. 아무튼 고종 자신이 감히 윗전으로 가서 장 상궁과 동침하지는 못했을 테고 사람을 시켜 대전으로 불러들여 시침하게 했을 것이다. 승은한 장 상궁이 수태하자, 범숙의 궁에서는 민비의 진노가 두려워서 장 상궁이 몸을 풀 때까지 감쪽같이 비밀을 지켰다. 일단 왕의 자식을 낳은 뒤라면 무사할 걸로 알았던 모양인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장 상궁이 승은하여 왕자를 낳은 사실을 알게 된 민비는, 장 상궁을 내전으로 끌어 오게 하여 잔혹한 고문을 가했고 범숙의 궁에서 아기와 함께 내쫓아 사가(私家)로 나가게 조치했다. 당시 장 상궁은 불에 달군 쇠꼬치로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쑤시는 참혹한 고문까지 당했고, 그 상처가 끝내 아물지 않아 십여 년을 계속 앓다가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 비운의 장 상궁이 낳은 아들이 1887년에 태어난 의친왕(義親王)으로 그 역시 평생을 기구하고 서럽게 보냈다.
불행한 여인 민비 민비가 고종이 손을 댄 여인들에게 그토록 잔혹하게 군 것은 본래 타고난 매운 성품 탓도 있으려니와, 고종과 가례(嘉禮:왕의 혼인 예식)를 올려 궁에 들어온 뒤 오랫동안 독수공방했던 시절의 한과 분노도 작용했을 것이다. 1852년생인 고종은 만 11세인 1863년 12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만 14세가 된 1866년 봄에 외가인 여흥(驪興) 민씨(閔氏) 가문의 15세 규수를 왕비로 맞았다. 이 한 살 연상의 중전(中殿)이 곧 민비(閔妃)다. 민비는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외롭고 가난하게 자랐으나 워낙 명민하고 영리하여 사태 판단이 빠르고 대담했다. 호리호리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눈이 샛별처럼 빛났고 사람을 뜻대로 다루는 기량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다고 한다. 『마마, 그 계집 행실이 너무도 고약하오이다』 『그렇사오이다. 내전이 비어 있던 가례 전이라면 또 몰라도, 이제는 마마께오서 궐 안에 이렇듯 어엿하게 좌정하고 계시언마는…』 민비의 입궐 이후, 그녀를 모신 내전 지밀상궁들이 연일 쑥덕이며 입초사에 올리는 여인은 이씨 성을 가진 궁녀였다. 「인물이 훤칠하고 살결이 씻어놓은 배추줄기 같이 흰 미인」이었다는데, 민비가 왕비로서 궁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여색(女色)에 눈뜬 어린 왕이 몹시 총애하고 있던 왕의 첫사랑이었다. 왕은 그 궁녀에게 푹 빠져 있어 정식으로 왕비로 간택되어 맞아들인 민비는 돌아보지 않고 계속 독수공방하도록 방치했다. 법도의 지엄함보다 개인적인 애정에 더 민감했던 고종의 성품이 드러난다. 왕과 가례를 올려 일국의 국모인 왕비가 되어 입궁하던 때야 자신의 앞에 이처럼 견디기 어려운 외롭고 괴로운 세월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그러나 15세의 신부인 민비는 아랫것들의 불평에 장단을 맞추기에는 너무나 명민했고 인내심도 대단했다. 『듣기 싫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 의연한 얼굴로 준절하게 나무랐다. 하지만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 나빠졌다. 계속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궁녀 이씨는 왕비가 입궁한 지 두 해만인 1868년에 왕자를 낳았다. 미인인 생모를 닮아 타고난 귀골로 인물이 너무나 준수해서 『그 왕자가 들어오면 해와 달이 함께 뜬 듯 방 안이 환해진다』는 말이 날 정도로 잘 생긴 아기였다. 『오, 정말 뛰어난 아기로구먼!』 가뜩이나 손이 귀하던 왕실에 그처럼 잘난 왕손이 태어나자, 왕실 최고 어른인 조대비는 물론 시부모인 대원군 내외까지 모두들 몹시 귀여워하고 아꼈다. 그 아기가 고종이 16세의 나이에 본 첫아들로 나중에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진다. 『위태롭다…』 민비는 혼인한 이래 계속 독수공방으로 지내는 것도 서러운 데다가 서자이긴 하지만 그토록 잘난 맏왕자가 태어나자 극심한 초조함과 불안을 가눌 수 없었다. 아무리 왕비라 해도 왕위를 이을 세자를 낳지 못하는 한 날개 없는 새와 같은 신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위태롭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성품이 특출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태연하고 의연하게 『춘추좌전(春秋左傳)』과 같은 중국의 춘추시대를 다룬 역사서적을 탐독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시앗에게 지아비를 빼앗긴 독수공방의 한 맺힌 어린 신부가 다른 책도 아닌 약육강식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시대의 혼란기를 다룬 전 30권짜리의 방대한 역사서적인 『춘추좌전』을 읽고 있었다는 건 확실히 놀랍고도 비상한 이야기다. 뒷날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 한 나라의 권력과 정사를 두 손아귀에 틀어쥐고 좌지우지하던 그 엄청난 기량의 바탕을 짐작하게 한다. 거대한 고독을 맛본 자만이 이 세상 삶의 거대한 크기를 깨닫는다고 한다. 민비는 이 시기에 맛본 왕비의 고독을 통하여 조선이라는 나라의 크기를 남김없이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춘추좌전』을 읽으면서 은인자중 때를 기다렸다고 해도, 어쨌든 민비 역시 한 사람의 여인인 것 또한 사실, 당시 항간에는 민비가 궁녀에게 쏠려 있는 왕의 마음을 홀려내려고 암여우의 생식기를 구해서 차고 지낸다는 소문이 널리 돌았다. 하지만 그건 여인의 마음일 뿐 아니라, 여성인 자신으로서는 왕을 사로잡아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만이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에 권력 쟁취 수단으로 그토록 노심초사했을 수도 있다. 『그, 정말이냐! 과연 내가 잉태한 것이 사실이라더냐!』 『그렇사옵니다. 마마! 기뻐하시옵소서!』 내의원의 진맥 결과가 나온 날, 민비의 처소인 내전 전체가 기쁨으로 가득했다. 끝내 민비가 왕을 자기 곁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왕의 아기를 잉태한 것이다. 필히 아들, 아들이어야 하는데…. 민비는 갖은 치성을 다 드리면서 해산할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1871년 11월, 민비가 몸을 풀었다. 그 간절한 치성들이 헛되지 않아, 그토록 원하고 기다리던 아들이었다. 『원자(元子) 아기씨옵니다! 중전마마! 원자 아기씨를 생산하시었삽나이다』 아기 출산을 도운 의녀와 보모상궁들이 기쁨에 넘쳐서 소리 높이 부르짖었다. 원자란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기 전 상태인 왕의 맏아들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민비의 나이 만 20세때였으니 왕비가 된 지 5년만의 경사였다. 『오오!』 아들을 낳은 것이 스스로 감격스러워 민비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것은 산모인 민비 만의 기쁨이 아니었다. 온 왕실 가족들과 조정 상하는 물론 왕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감축하오! 실로 나라의 홍복이오!』 조선조 중기의 효종(孝宗) 이후부터 왕실에 아들이 아주 귀해져서, 정실인 왕비가 아들은커녕 공주 한 명도 낳지 못한 경우가 흔했다. 이상하게 왕비 중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들이 많았던 것이다. 숙종(肅宗), 경종(景宗), 영조(英祖), 정조(正祖), 헌종(憲宗), 철종(哲宗)의 왕비들이 모두 왕자를 낳지 못했다. 그처럼 손이 귀한 왕실 내력 때문에, 중전의 몸에서 당당하게 왕자가 태어남을 보기는 실로 오랜만의 대경사였다. 그러나 그 큰 기쁨의 길이가 너무 짧았다. 아기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서 궁궐 여기저기서 궁인들이 불길한 낯빛으로 낮게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뭣이라!』 『그 무슨 해괴한 변고인고』 『쉬이…』 놀랍게도 민비의 첫아들은 대변을 보지 못하는 괴이한 신체구조를 지니고 태어난 치명적인 장애아였다. 젖을 먹어도 배변(排便)이 전혀 안 되는 바람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조그만 배가 통통 부어오르면서 온몸이 뜨거운 물에 불린 듯 부풀어갔다. 변고는 이내 온 궁중에 알려졌고, 크나큰 기쁨이 침통한 근심으로 바뀌었다. 『어찌 해야 이 아기를 살릴 수 있을꼬. 어찌하면 좋을꼬!』 민비는 가엾은 아기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며 애를 태웠다. 『이건 아주 귀한 물건이오. 죽은 사람도 되살려낼 만하다 하오』 태어난 지 사흘 되던 날, 소문을 들은 대원군은 비장의 산삼을 보내 아기의 병을 치료하게 했다. 그러나 그 용하다는 산삼도 소용없었다. 산삼 끓인 물을 먹인 지 이틀 뒤, 끝내 민비의 첫아들은 절명했다. 태어난 지 불과 닷새만의 요절이었다. 민비가 생애 전반부에 겪은 좌절 중 가장 참혹한 사건이었다. 『가엾고도 가엾다. 이 귀한 목숨이 어찌 이리 안타깝게 태어났는고』 민비는 조그만 아기의 시체를 안고 울고 또 울었다. 궁녀 이씨가 낳은 서장자(庶長子)인 왕자의 그 타고난 준수함 때문에 왕비가 낳은 왕자의 궁상과 못남과 박복함이 상대적으로 더욱 처참하도록 두드러졌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원망이 골수에 맺혀서인가. 완화군은 결국 12세가 된 1880년에 석연치 않게 사망했는데, 민비가 사람을 시켜서 독살한 것이라는 소문이 궁 안의 전설로 궁인들 사이에 전해내렸다. 어쨌든 민비가 『춘추좌전』을 읽으면서 보낸 인고의 세월은 불과 7년으로 막을 내렸다. 1873년은 고종이 등극한 지 10년이 되고 그녀가 첫아들을 낳았다가 잃은 지 불과 2년이 지난 때다. 왕비가 된 지 7년만인 그 해에 22세의 젊은 민비는, 오랫 동안 포석하고 준비해온 치밀한 책략과 타고난 수완으로 남편인 고종과 신하들 간의 역학관계를 교묘하게 조종하여 하늘을 찌를 듯 기세등등한 권력을 누리던 대원군을 일순에 권좌에서 밀쳐내고 자신이 조선왕국 제일의 실력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호탕하고 담대하고 치밀하여 「희대의 영웅」으로 성망이 높던 대원군을 상대로 감히 단칼에 베어내듯 권좌에서 밀어내버릴 책모를 꾸민다는 것은 보통의 배짱과 수완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엄청난 거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비는 그걸 계획했고 실행하여 성취했다. 놀랍게도 불과 7년간의 궁궐생활을 통해서 권력의 속성과 그 운영의 묘를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히 깨친 것이다. 그 뒤 대원군은 갖가지 방법으로 권토중래를 꾀했지만, 끝내 며느리 민비를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하고 남은 평생 실의의 세월을 보냈다. 민비가 대원군을 그처럼 잔혹하게 실각시키려고 작심했던 배경에는 자신의 첫아들이 대원군이 보낸 산삼을 먹은 뒤 죽었다는 데 대한 원한도 극렬하게 작용했다고 한다. 아기가 죽은 뒤, 민비는 『시아버지가 원자를 죽이려고 고의로 산삼을 보냈다』고 줄곧 원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대원군이 몹시 억울한 부분이다. 왕실의 안정과 권위를 위해서도 정실인 왕비가 낳은 적자(嫡子)인 왕자가 있음이 소중한데, 대원군이 왕의 생부로서 모처럼만에 왕실에 태어난 적통의 원자, 그것도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된 어린아기를 죽이고자 할 이치가 없다. 또 아기의 신체구조가 대변을 보지 못하는 이상, 산삼이 아니라 천상(天上)의 영약(靈藥)을 구해다 먹였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결국 자기 탓으로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처럼 해괴한 장애아를 낳았던 수치와 고통을 남에게 전가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원망할 대상을 찾던 민비의 이상심리에, 애가 타서 귀한 산삼을 보냈던 대원군이 억울하게 걸려든 셈이다. 『아기는 또 낳을 수 있다. 보라! 내 반드시 다시 아들을 낳아 보이리라!』 첫아들을 잃은 민비는 대원군을 밀쳐낼 책략을 꾸미는 한편으로 이를 악물었다. 『왕권을 중심으로 만물이 돌아가는 이 세상, 몸소 왕세자를 낳지 못하면 뉘 내 손에 천하를 얹어 준다 해도 한낱 한여름 풀잎 위의 이슬 아닌가』 민비는 아기 낳는 방도를 찾아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그 막강하던 시아버지 대원군을 밀어내고 국정을 움켜쥐려는 열화와 같은 기염과 득의의 기세를 타서인가. 민비는 그 해에 몹시 기다리던 둘째 아기 임신에 성공했다. 강렬한 권력지향 성격의 민비로서는, 밖으로는 왕인 남편과 온 나라의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고 안으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을 기다리던 그 때가 아마도 민비의 전 생애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뒤 해가 바뀌어 1874년, 내전에 다시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고 온 궁중이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명랑한 구리 방울 소리와 함께 낭보가 전해졌다. 『중전마마께서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셨나이다!』 그렇게 낳은 민비의 두번째 아들이 곧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純宗)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두번째 왕자 역시 건강이 좋지 않고 생김새도 시원찮았다. 그뿐 아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여인과 성교도 할 수 없고 아기도 갖게 할 수 없는 타고난 성 불구자였다. 그러나 민비는 자기 배 아파 자신이 낳은 아들인 이상 아무리 아기가 못나고 신통찮아도 상관 없었다. 그 아이가 명이 길어 죽지 않고 자라서 어른이 되고 왕이 될 수만 있으면, 그리하여 자신이 왕의 어머니가 될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갖은 책략을 써서 만 한 살의 병약한 어린아기가 왕세자로 책봉되도록 만들었고, 그 아들을 끔찍이 사랑했다. 『오오! 우리 아기! 우리 세자야!』 민비는 아직 귀도 제대로 열리지 않은 작고 연약한 아기에게 다짐했다. 『안심하거라!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어미가 세자를 지켜낼 게야! 네가 이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님이 되게 할 게야!』 자식이 어미를 닮고, 종은 주인을 닮는다던가. 후일 엄상궁이 발휘했던 책략과 수완은 그가 모시던 민비를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민비가 지녔던 집요함과 대담함을 오히려 능가하는 면모까지 드러내기도 했다.
『오호, 너는 정녕 모과 같구나』 다섯살짜리 아기 내인으로 1859년에 입궁한 엄상궁은, 궁궐살이에 관한 한 1863년에 왕이 된 고종과 1866년에 왕비가 돼 궁에 들어온 민비보다 여러 해 선배였다. 더욱이 엄상궁은 내전(內殿)에 소속되어 왕비를 측근에서 모시는 지밀상궁이었기에, 민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지냈다. 스승이 보여주는 모범이 워낙 뛰어나서인가, 제자의 실력도 날이 갈수록 늘었다. 그리하여 민비의 아들인 병약한 왕세자가 열두살이던 1886년, 조선조 오백년 사상 가장 무서운 권력을 지닌 왕비이자 자신의 직속 상전인 민비 몰래 뚱뚱하고 못생긴 삼십대 여인인 엄상궁이 드디어 국왕의 이부자리 속에 알몸으로 누울 수 있었던 것이다. 『호오, 너는…』 고종은 정녕 모과 같구나, 라는 말을 입 속으로 삼켰다. 뜻밖에도 엄상궁과의 잠자리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흐뭇한 웃음이 절로 흘렀다. 울툭불툭 과일 중 가장 못 생긴 과일인 모과가 그 향기만큼은 아무에게도 지지 않게 강렬한데, 용모가 추한 엄상궁과의 잠자리가 바로 그랬다. 어둠 속에서 자리에 드니 못생긴 얼굴은 보이지도 않고 그저 삼십대 뚱뚱한 여인의 부드럽고 풍만한 육체만 큰 보료처럼 그득하게 편안한데 어떻게 익혔는지 방중술도 남달라 무릉도원경에 든 듯 오관이 아찔아찔하도록 쾌락이 강렬했다. 엄상궁이 고종과 잠자리를 함께 한 곳은 왕이 거처하는 대전에서였다. 민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버티고 있는 내전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민비의 눈을 피해서 내전의 궁인인 엄상궁이 고종의 눈에 들고 그 이부자리 속에도 들도록까지 누군가 후환을 꺼리지 않고 엄상궁을 성심으로 도와준 궁인(宮人)들이 있을 터였다. 그건 개연성이 충분한 추정이다. 본래 그녀가 만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입궁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왕궁의 궁녀들 속에 중요한 인맥이 있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뒷날 을미사변으로 중전 민씨가 일본인 폭도들에게 시해된 뒤 엄상궁이 급급하게 재입궁하는 과정이나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조선왕조 수립 이래 미증유의 대사건에서 주역으로 크게 활약하게 되는 그녀의 인생 역정을 고찰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본래 왕궁의 궁녀가 되려면 이미 궁녀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알아야 가능했다. 대개 궁녀의 친척이나 친지 집안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알음알음 연줄로 입궁하여 훈련을 받아 한 사람의 궁녀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입궁할 때에 장래 대궐 안의 어느 처소에서 일하게 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처소에 따라 훈련기간이 각기 달라서 입궁해야 하는 나이도 달랐다. 소속될 처소의 격이 높을수록 어린 나이에 입궁해야 했다. 가장 격이 높은 지밀(至密)에서 일할 내인은 4,5세 적에 입궁시키고, 침방(針房)과 수방(繡房)은 6,7세부터, 그밖에 세수간(洗手間)과 생과방(生果房)과 소주방(燒廚房)과 세답방(洗踏房)과 복이처(僕伊處)와 퇴선간(退膳間) 같은 곳에서 일하는 내인이 될 아이들은 12,3세 되는 여자애들 중에서 선발하여 입궁시킨 후 궁중의 법도와 용어와 일과 관습을 가르쳤다. 아주 어린 나이에 입궁한 아이들을 「아기 내인」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지밀 소속의 아기 내인들에게는 글씨 쓰기와 한글과 소학(小學)과 열녀전이며 규범과 내훈 같은 초보적인 학문까지 가르쳤다. 지밀은 궁궐 안에서 가장 깊은 곳 즉 왕과 왕비나 대비 등의 거처를 말하고, 침방은 왕복(王服)과 금침을 비롯하여 왕족들이 입을 각종 옷을 만드는 곳이며, 수방은 궁중 의복이나 장식물에 수를 놓는 곳이고, 세수간은 세수물과 목욕물을 대령하고 왕비의 궁내 나들이에 따라 모시는 일과 전각의 청소를 담당하고, 생과방에서는 간식을 담당하며, 소주방에서는 조석 수라 및 대소 연회와 잔치 음식을 마련하고, 세답방에서는 의복의 빨래와 뒷손질을 하며, 복이처에서는 지밀 침실에 불 때기와 등불 점화를 담당하고, 퇴선간은 지밀의 중간부엌 역할을 하는 곳이다. 결국 왕과 왕비에게서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하는 것이 곧 각 처소의 격을 결정했던 것이다. 「아기 내인」들은 18,9세를 전후하여 일종의 성인식인 관례(冠禮)를 치르면서 머리를 얹어 정식으로 「내인」이 된다. 관례를 올리기 전에는, 처소의 격이 높은 지밀·침방·수방의 세 처소 아기 내인들만 머리를 특별히 생머리(사양머리)로 빗고, 나머지 다른 처소의 아기 내인들은 그냥 땋아내려야 했다. 그래서 생머리를 빗은 아기 내인들은 「생각시」라 불리고, 그밖의 아기 내인들은 「각시」라고 불렸다. 같은 궁 안에서 매일 입는 치마조차 입는 방식이 서로 달랐다. 생각시들은 외로(左) 입고, 다른 처소의 아기 내인들은 바로(右) 입어야 했다. 격이 높다는 생각시들 중에서도 특히 지밀 소속의 생각시들은 「왕과 왕비가 직접 부리시는 이들」이라 해서, 다른 처소의 궁인들은 나이 많고 품계로도 상관인 상궁들까지도 감히 반말을 못하고 「허우」체를 썼다고 한다. 지밀 소속 궁인들은, 말하자면 궁인 사회에서는 가장 신분이 높은 귀족층이었던 것이다. 엄상궁의 경우, 만 5세에 입궁한 것을 보나 또 뒷날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의 지밀상궁이었음으로 미루어, 애초에 지밀에 소속될 아기 내인으로 입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궁녀로서의 출발은 아주 고급스러웠던 셈이다. 왕실의 관례로는, 아기 내인이 관례(冠禮)를 치러서 정식 내인이 되면 가장 말단인 종9품직에 임명되고, 거기서 시작하여 궁녀들 품계로는 가장 높은 정5품의 상궁(尙宮)까지 올라가자면 대략 15년 가까이 걸린다. 그러나 아무리 나이 어린 내인이라도 「왕의 손이 닿으면」, 이른바 승은(承恩)하면 즉각 상궁으로 올라갔다니, 궁녀들에게 「승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본래 왕은 궁중의 법도에 따라 여러 처첩을 거느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왕궁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라서, 사가(私家)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가의 법도 역시 상대적이었다. 왕가(王家)에서도 남편보다 성깔과 권력이 더 센 부인한테는 기존 법도가 통하지 않았다. 대원군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이른바 「친정(親政)」에 들어간 이래 그간 어언 13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고종은 날이 갈수록 민비의 영향력 아래 깊숙이 잠겨들고 있었다. 그것은 고종이 국가를 통치하는 일에서 민비의 날카롭고 빠른 판단력과 능란한 수완과 정치력에 점점 더 절실하게 의지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 결과 민비는 거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하는 강자가 되었다. 국가 통치력을 두고 그렇게 형성된 이상한 역학관계는 두 사람의 규방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이제는 왕비로서 왕이 다른 여자를 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무엄한 선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일에서 민비의 정치력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든 고종은 민비의 그런 횡포를 순순히 참았다. 대원군이 섭정의 위치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면서 조선 팔도를 통치하던 시절, 청소년이던 고종이 통치 책임은 없는 젊은 왕으로서 왕비는 내팽개쳐둔 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총애하는 궁녀의 여색이나 즐기고 있던 때에는 언감생심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풍경이었다. 결국 사람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에게는 약해지게 마련인 것이다. 바로 고종과 민비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그런 역학관계 때문이었다. 아기 내인으로 입궁하여 장장 27년에 걸쳤던 엄상궁의 오랜 궁궐살이는, 그녀가 「드디어 승은하여 활짝 열린 부귀영화의 큰 문 앞에 섰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박살나고 말았다. 『마마! 부디 옥체를 보중하오소서!』 엄상궁은 왕이 있는 대전을 향해 절하고 눈물을 뿌리며 비탄에 젖어 넘어질 듯 고꾸라질 듯 휘휘하게 궁궐 문을 걸어나갔다. 돌아보면 자신의 삶에서 궁궐은 삶과 꿈 그 자체이며 또 그 이상의 모든 것이었다. 콩과 보리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던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궁궐 밥에 뼈가 굵고 궁궐 반찬에 살이 올랐고, 궁궐 안 물정을 통해 철이 들어 어른이 되고 궁녀로서는 최고위인 정5품 상궁 지위에 올랐으며 드디어 지존무쌍의 왕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영광까지 누린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만사가 타고 남은 재가 되었다. 독수리처럼 날카롭고 사납고 드센 왕비 때문에 이제는 궁 안에서 출세하거나 왕의 얼굴을 바라보기는커녕 궁궐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허망하다, 참으로 허망하다…』 그녀는 탄식하고 탄식했다.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 「못생긴 용모」라는 그 타고 난 업, 그 지기 힘든 짐, 그 넘기 힘든 장애물, 그것을 혼신의 힘을 다한 노력과 술책으로 극복하면서 오로지 승은하기 위해 추진했던 숨막히는 책략과 노고와 긴장…. 그 모든 것이 이제 와서 돌아보니 한갖 몽롱한 백일몽이요 헛된 물거품이었다. 궁 밖으로 쫓겨난 엄상궁은 일단은 궁궐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는 아주 끝난 것으로 각오하고 포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뒷날 국가의 변란이 무성하여 울창한 뽕나무밭이 망망한 푸른 바다가 되는 극심한 운수의 변환으로 그녀가 다시 대명천지 밝은 낮에 당당하게 재입궁하여 끝내 존귀한 신분이 되어 서울에 와 있던 외국인들 사이에서까지 「그 유명한 엄귀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지만, 민비에 의해 쫓겨나서 궐 밖 생활을 하던 십년간의 삶에 대한 뒷소문이 아주 좋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궁에서 쫓겨나던 당시로서는 지존무쌍의 국왕조차도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가공할 권력자인 민비에게 자력으로 대결할 수단이 전혀 없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돌아온 엄상궁 대한제국 시절인 1902년 11월 초에 서울 주재 이탈리아 영사로 부임하여 8개월 동안 근무했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남긴 서울 시절의 회고록 『꼬레아 꼬레아니』에 들어 있는 엄비에 관한 기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이미 40살을 넘긴 나이 든 여인이며 못생겼다는 점을 미리 말해 두는 편이 낫겠다. 한국 여인에게 40살을 넘긴 나이는 여자로서는 꽤 많은 나이였다』 로제티가 측근의 한국인들을 통해서 듣고 기록해 둔 엄비에 관한 소문 중에서 그녀가 궁궐 밖에서 살던 시절에 관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젊었을 때의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 중국 상인의 첩으로 들어갔고, 그의 아기를 낳았다. 그 무렵 한국인들의 지속적인 주의를 끌었고 왕실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사람과의 사이에서 다시 다른 아기를 낳았다)이 그녀를 죽은 왕후의 궁녀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뛰어난 지혜와 비범한 정신력 그리고 강인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새로운 환경에서 곧 왕비의 호감 뿐 아니라 왕의 주의까지 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극도의 질투심에 사로잡힌 민비는 왕은 적지 않은 첩을 둘 수 있도록 규정한 법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관용적 규정에 따르고 있는 그의 남편(국왕)을 결코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 법령의 목적은 국왕의 주의를 왕비로부터 다른 여자들에게로 돌리는 데 있었다. 결국 왕비는 왕과 궁녀 엄씨의 관계를 알아차렸고, 뒤이어 격렬한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 이 불쌍한 소녀는 도망치는 길밖에는 살길이 없다고 판단했다. 왕은 왕비의 질투에 인내심을 갖고 대했다. 그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신을 매료시켰던 엄씨에 대한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엄씨 역시 왕과 똑같이 행동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남자를 새로 만나 셋째 아들을 낳았다. 엄씨는 그의 셋째 아들이 왕의 아들 못지 않게 잘 자라기를 원했지만 너무나도 빨리 죽고 말았다. 왕비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하자, 엄씨는 다시 궁녀로 들어갔다』 로제티의 이야기는 보다시피 별로 정확하지 않다. 우선 엄상궁이 처음 입궁한 시기가 전적으로 틀렸다. 따라서 그녀가 세 남자에게서 아들 셋을 낳았다는 말 역시 그대로 믿기 힘들다. 왕실의 법도에 너무 무지해서, 4,5세의 아기 때 입궁한 생각시 출신 궁녀가 아니면 왕이나 왕비를 모시는 지밀상궁이 될 수 없다거나 또 「승은한 궁녀」를 아내로 맞으면 국법에 의해 처벌된다는 것도 제대로 모르는 자가 재미 삼아 사실과 허구를 뒤섞어서 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로제티는 이런 이야기들을 「권위 있는 학자인 양모씨」에게서 듣고 기록한다고 써놓았는 바, 어쨌든 당시 한국인들 사이에서 멋대로 떠돌고 있던 엄비에 관한 소문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한다는 측면에서의 가치는 탁월하다. 당시 엄비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인식이 별로 좋지 않았고 그녀를 꽤나 천박한 여인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 하나만은 아주 확실하게 확인해주기 때문이다. 엄상궁을 궐 밖으로 내쫓은 뒤 10년 동안, 왕궁 안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우선 왕실의 호칭에 큰 변화가 있었다. 조선 조정은 갑오년(1894) 음력 12월 17일자로 「홍범(洪範) 14조」를 반포하면서 대개혁을 국내외에 천명할 때, 왕실에 대한 모든 존칭을 한 항렬씩 상향해서 쓰도록 결정하여 관보를 통해 공표하고 즉각 실시했다. 『주상 전하(主上 殿下)는 대군주 폐하(大君主 陛下)로, 왕대비 전하(王大妃 殿下)는 왕태후 폐하(王太后 陛下)로, 왕비 전하(王妃 殿下)는 왕후 폐하(王后 陛下)로, 왕세자 저하(王世子 邸下)는 왕태자 전하(王太子 殿下)로, 왕세자빈 저하(王世子嬪 邸下)는 왕태자비 전하(王太子妃 殿下)로 개칭한다』 따라서 그날부터 조대비(趙大妃)는 「왕태후 폐하(=태후 폐하)」로, 고종은 「대군주 폐하」로, 왕비 민씨는 「왕후 폐하」로, 세자(뒷날의 순종)는 「왕태자 전하(=태자 전하)」로, 세자빈(순종의 첫번째 정실) 민씨는 「왕태자비 전하(=태자비 전하)」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호칭들은 동양의 제왕가 가족의 호칭으로서는 비정상적인, 일종의 구차한 편법이었다. 군주제도의 호칭에서, 왕(王)보다 한 항렬 위는 황제(皇帝) 곧 천자(天子)다. 그래서 호칭 뒤에 붙이는 존칭도 왕에게는 「전하」지만, 황제에게는 「폐하」를 받쳐 올린다. 또한 클 「태(太)」자와 천자의 아내를 뜻하는 황후 「후(后)」자는 천자의 가족임을 나타나는 문자로, 「황(皇)」자에 붙는 글자이다. 그러나 조선왕실에서는 이미 「후」자의 쓰임새에 예외를 하나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으니, 왕비(王妃) 대비(大妃) 왕대비(王大妃) 대왕대비(大王大妃) 등 생전에 「비(妃)」자를 썼던 분들이 돌아가시면, 시호(諡號)를 지을 때 고인에 대한 특별예우로 「비(妃)」보다 한 항렬 상위급 어휘인 「후(后)」자를 고인에게 올려서 「왕후」라는 특수존칭을 붙인 시호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호(諡號)에서만 쓰인 특수어법이었다. 갑오년 당시 조선 조정은 조선과 청나라 사이를 갈라놓고자 하는 일본의 거친 압력에 의해 왕실의 호칭 전부를 「왕」보다 한 단계 위로 상향 조정하면서도, 감히 천자를 뜻하는 「황(皇)」자를 곧바로 쓰지 못했다. 「왕」을 황제로 개칭하는 대신 「대군주」로 쓰기로 하고, 나머지 왕족들에게는 종전에 쓰던 「왕」자에다가 황가(皇家)에서 쓰는 「태」자나 「후」자를 붙여 억지 조립한 절름발이 호칭을 새로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당시 복마전처럼 긴박하게 돌아가던 국제 정세 속에서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천명하는 방편이었다. 이런 식의 조선 왕실 호칭은 「1894년 음력 12월17일부터 1897년 양력 10월12일에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어 선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를 때까지」 약 2년 10개월 동안 한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엄상궁이 궁에서 내쫓긴 지 10년 만인 을미년(1895년) 음력 8월20일에는 경천동지할 참극이 조선 왕궁에서 벌어졌다.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서울 주재 일본공사 마우라 고로(三浦梧樓)의 흉계로 일본인 폭도들이 왕궁에 뛰어들어 칼을 휘둘러 민후를 시해한 만고에 통절한 흉변이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갈 것은, 당시 중전 민씨의 공식 칭호는 위에서 보듯 「왕비(王妃)」가 아니라 「왕후(王后)」였다. 현재 을미사변을 두고 정평 있는 역사책들에조차 흔히 「민비(閔妃) 암살사건」이라고 쓰여 있는데, 마땅히 「민후(閔后) 암살사건」으로 불러야 한다. 을미사변은 민후(閔后)의 운명 못지 않게 전직 상궁 엄씨의 삶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민후가 원통하고 처참하게 시해된 지 불과 닷새만에 고종이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구한말의 대학자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다 당시의 일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씨를 불러 대궐에 맞아들였다. 민후(閔后)가 살아 있을 때 상감은 두려워서 감히 곁눈질도 못하다가 십년 전 우연히 잠자리를 같이 했다. 민후가 알고 크게 노하여 엄상궁을 죽이려 들자 상감이 간절하게 빌어서 죽음을 면하게 하고 궁 밖으로 내보냈다. 이때 이르러 부름을 받고 입궁하니 그 참변으로 민후가 돌아가신 지 겨우 닷새밖에 안된 때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상감에게 심간(心肝)이 없다」면서 한스럽게 여겼다. 엄씨의 생김은 민후와 비슷하고 권모(權謀)와 재략(才略) 또한 같았다. 이미 입궁함에 상감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정사(政事)에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으니 그 침침함이 민후 때와 똑같았다』 당시 서울 사람들이 을미사변으로 민후가 그렇듯 참혹하게 시해된 지 불과 닷새만에 고종이 엄상궁을 궁 안으로 불러들인 것을 보고, 『상감에게 심간이 없다』면서 한스럽게 여겼다는 그 「심간」은 「깊이 감추어 둔 마음」 곧 「진심(眞心)」이나 「단심(丹心)」을 말한다. 미증유의 국가적 참변과 치욕으로 고통받고 또 왕의 도덕성에도 실망한 백성들의 무력한 탄식이 백년 뒤에 되돌아보아도 아프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