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상수훈
세상의 빛
본문/마태5: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에 이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에 대해 말씀한 것으로,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새한 차이가 있습니다. 존 스토트는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소금의 기능은 주로 소극적이다. 그것은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이다. 빛의 기능은 주로 적극적이다. 그것은 어두움을 밝힌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세속적인 사회에 이중적인 영향력 즉 그것의 부패를 막는 소극적인 영향력과 어두움 속으로 빛을 비추는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요구하신다. 왜냐하면 악이 퍼지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과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이 퍼지도록 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소금은 삶을 통해서, 빛은 전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빛의 의미를 확대해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라기 보다는 그렇게도 해석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명시되어 있듯이 주님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복음 전도가 아니라. 분명히 “착한 행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6절을 다룰 때 자세히 설명해 드리기로 하고, 지금부터 본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서에 따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세상의 빛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13절 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너희”가 강조됩니다. “너희”즉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인도 세상의 빛이 아닙니다. 어둠입니다. 오직 참 제자 즉 기독교인들만 세상의 빛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롬2:17-20절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나 아닙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닙니다. 신약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빛은 이제 유대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세상의 참 빛입니다.
본래 빛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사42:6,49:6, 요8:12,요일1:5)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빛의 아들들이 됩니다. 즉 빛이 됩니다.(엡5:8)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찰스 피니는 더 자세히 정리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 요한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도 자신이 직접, 그리고 그 후에는 자신의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은 그의 모든 성도들을 통해서 세상에 빛을 비추고 계신다.]
여러분이 아니면 세상은 암흑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러분이 세상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신자들과 타종교인들에게는 여러분이 비추는 빛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므로 책임감을 가지고 꼭 빛을 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많은 이들이 세상의 소금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세상의 빛이 되라!”는 명령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일찍이 피니의 말같이 본문의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지 않고 잇음을 주의하라.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이 빛이다. 라고 말씀 하신다 라고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명령법이 아니라. 직설법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팔복의 사람만 세상의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점은 바울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서2:15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그러므로 세상의 빛이 되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즉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가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영향력이 우리의 성품에 달려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더 밝은 빛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2)산위에 잇는 동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포현 “산 위의 동네”라는 말씀의 어떤 듯이 내포되어 잇는지 언 듯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뒤에 산 위에 있는 동네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찌 보면 수수께기와 같은 말입니다. 이 말씀 해석한 분이 있는데 케더린 쿨만이라는 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동네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에 주목해 주십시오. 나는 동네가 아니며 여러분도 동네가 아닙니다. 동네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동네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정말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동네가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누구든지 압니다. 그러므로 이 동네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교회는 비추이는 빛이어야 하며 이 더움의 세상에서 그 온전하고도 장엄한 위광 가운데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교회는 저 산위에 저 빛나는 등대이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나의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으며,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이때 매우 희미하게 밖에 빛을 발하고 있지 않는 하나님의 동네 때문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가장 높은 산 위에서 빛을 발하며 장엄한 위광 안에서 빛을 발하는 대신에 그리고 이 세상에 도전하는 대신, 이 세상이 교회에 도전하는 시대가 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하고 저는 기도드립니다.]
그럴듯한 해석일 뿐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형편을 생각할 때 깊은 공감을 가져다 주고 있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좋은 교훈은 주는 것이기니 하나 이것은 바른 해석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구절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산위에 잇는 동네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의미는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습니다. 때문에 태양 속에서 빛나는 것이 감추어지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 놓은 등불이 흰 건물들을 밝게 비추어 더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절대 감출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노출성에 주목하신 것입니다.
무심코 읽으면 “산위에 잇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은 세상이 교회의 역할을 방해하거나 막을 수 없다는 주장처럼 들립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의미가 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가진 자는 이를 숨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이중적 비유로 밝히셨으니 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이라 함은 그의 그리스도적 품격과 생활을 아울러 의미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거룩함은 하늘에 있는 해처럼 나타나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가진 덕성도 자연적으로 표시될 것입니다. 산위에 세운 도시가 은혜될수 없는 것처럼 진실 된 그리스도인의 진지하고 성스러운 하나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해석한 로이드 존스의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산위에 잇는 동네처럼 되어야 합니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숨겨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대조는 아주 자명하고 완벽할 정도로 명료합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숨겨질 수가 없으며 세상의 주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역할을 다하는 사람은 눈에 뜨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문맥이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 구절을 직설법이 아니라. 명령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 주님이 “너희는 산위의 동네처럼 되어야만 하고 환하게 빛나는 등불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한 분의 글이 있습니다. 권연경 교수의 해석을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 위의 동네라는 그림은 빛이 되라는 권면 속에 뜬금속에 끼어든 불청객이 아니다. 이 이미지는 사실 제자들을 빛이 비교하시는 주님의 의도에 대한 매우 절묘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런 큰 도시가 산 혹은 언덕 위에 건설되어 있다. 이를 감출 수 있을까? 물론 어불성설입니다. 다라서 예수께서 그려내는 이 인상적인 그림의 핵심은 당연히 숨기우지 못함 곧 노출이다. 산 위에 건설된 도시는 당연히 숨겨질 수 없다. 이것이 제자를 빛이 비유하는 주님의 의도이다. 곧 드러남이다.
일단 산 위에 있는 도시가 드러남의 차원을 강조하는 그림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빛에 관한 말씀의 의미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일견 산위의 도시 라는 이미지는 빛에 관한 말씀과 무관한 듯 보인다. 하지만 일단 드러남 이라는 주제에 생각이 미치면 빛과 산위의 도시라는 두 그림 사이의 유사성이 금방 드러난다. 산위에 건설된 도시는 사람들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면서 본연의 의도를 완수하는 것처럼 빛 역시 사람들에게 노출되었을 때라야 그 기능을 발휘할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제자들은 빛이다. 곧 마치 빛이 드러남을 통해 제 역할을 감당하는 것처럼, 주님의 제자들 역시 드러남을 통해 제자들 본연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이런 노출이 가능할까요?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빛을 비출 수 있는 방법 입니다.(16절) 그것이 곧 세상의 빛이 되는 삶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는 있어도 없는 듯 숨겨져 있으면 안됩니다. 착한 행실을 통해 주목 받고 드러나 보여야 합니다.
공동번역
갈5:6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통해 뚜렷하게 드러나는 가시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입니다.
3)등경위의 등불
마5:15절,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 말씀은 14절 후반절의 반복으로 봐야 합니다. 즉 산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어질 수 없다는 말씀을 통해 보여준 노출의 중요성을 등불이라는 소재로 다시 강조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이 구절에 나오는 말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그릇 입니다. 약8.25 리터를 담을 수 있는 용기 있습니다. 또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대부분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가옥 구조상 방에 등경이 하나씩 설치 되어 있습니다. 등경은 빛을 멀리 비취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말은 반대로 빛을 비취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히,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빛은 감추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비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것을 권연경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등경위의 등불, 빛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두 번째로 소개하는 그림은 등불에 관한 것이다. 등불은 빛을 내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훨씬 더 가까이 선다... 하지만 등불에 관한 말씀에 전달하는 의미는 앞서 산위에 잇는 도시가 전달하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많일 등불을 켠다는 그 등불은 등경위에 놓는다. 그래야 집안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 아래와 등경 위 라는 산뜻한 대조에서 눈치챌수 있는 것처럼 여기서 예수께서 염두에 두고 있는 핵심은 숨김과 노출 사이의 단순한 대조다. 등경 위의 등불이라는 정지화면을 클로즈업하면 사실상 산위의 도시와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사실도 쉽게 관찰해 볼수 있다. 등불은 등경 곧 높은 산위처럼 집안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 곳에 올리는 것이 상식이다. 여기서도 역시 주님의 말씀은 드러남에 모아진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빛에 비유되는 이유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곧 드러나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빛이 드러나지 않으면 빛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면 제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주님의 명령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세상의 어둠을 밝히라는 말씀으로 읽히기 쉽지만 이 구절에서 주님의 일차적 강조는 사람들 앞에 놓인다. 우리의 빛을 말아래 숨기지 말고 사람들 앞에 비치게 곧 사람들에게 노출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16절의 말씀 역시 제자들들 빛과 같아서 산위의 도시처럼 혹은 등경 위의 등불처럼 사람들 앞에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늘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것은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지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자체가 빛입니다. 우리 안에는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이것을 볼 수 없습니다. 때문에 마치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듯이 우리의 빛을 안에 감추고 있지 말고 착한 행실을 통해 밖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불신자들이 하나님게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점점 어두워져 가는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4)착한 행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리델 보스)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등불을 켜 그것을 말 아래 감추어 놓지 않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등경위에 놓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빛을 비추지 않는 사람이 세상의 빛이라고는 감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산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일 수 없듯이, 사람이 등불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집 안 모든 사람들을 비추게 하듯이 반드시 빛을 비우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비춰야 할 빛은 무엇입니까? 바울 서신에 보면 그것을 해답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엡5:8-9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벧전2:11-12절에도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 증거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고 하신 후 16절에서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착한 행실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빛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스갓 맥나이트는 그것을 이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어둠에 영향을 미치는 빛이란 이미지가 하나님을 열방에 전하는 이스라엘과 연결되어 있다. 이 두 본문은 같다. 세상의 빛은 단순히 각자의 상황에서 발휘되는 윤리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비유가 아니라. 이방인 선교를 뜻하는 표현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나 본문에는 분명히 세상의 빛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주장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세상의 빛이 복음 전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주장합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에서 너희는 라고 강조합니다. 주님은 세상이 어두운 상태에 있다고 하실뿐 아닙니다. 주님은 기독교인 이외에는 아무도 도움이 되는 충고나 지식이나 교훈을 줄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신앙이 제공하는 빛을 떠나서는 이 세상에는 빛이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바구어 말하면 기독교인이 철학은 조금도 모르더라도 기독교인이 아닌 최대의 위인이나 전문가보다 삶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해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참으로 좋은 표현으로 해석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본문을 통하여 빛이 진리가 아니라. 선행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16절)
찰스 피니는 빛을 비추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선행들로 이루어진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비추는 것인가? 다름 다닌 너희 선행이 다른 사람들의 악행과 대조되도록 끊임없이 나타냄으로써 가능하다. 빛이란 교리를 들음으로가 아니라 착한 행실을 보고서이다. 만일 당신이 그 착한 행실을 보게 되면 반드시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그들이 그 착한 행실들을 보게 되면 반드시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착한 행실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데 제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문장입니다. 문맥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에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빛은 분명히 착한 행실이라고 합니다.
마5: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처럼 예수님은 명확하게 빛을 “착한 행실”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믿게 하라가 아니라.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빛은 복음 전파가 아니라. 착한 행실을 뜻함이 분명합니다.
이제 말씀을 종결하자면 많은 이들이 전도를 열심히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고에 비해서 열매가 적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빛을 발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즉 착한 행실을 보여주지 않고 말로만 전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에 감화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성경은 신자의 삶입니다. 즉 구원받은 신자들의 빛이라고 할수 잇는 착한 행실인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썬다싱의 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회개하게 한 것은 당신의 설교가 아니오 당신 자신입니다. 인도인인 당신은 정신과 태도에 있어서 완전히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당신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하여 산 증거입니다.]라고 합니다.
이땅에 우리는 마28:20절에 명령하신 지상 명령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선다싱의 글을 받고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정도는 못살더라도 유사한 결과를 낳게 위해 무엇보다도 마4:17절과 같이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리고 마8장에 나오는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본문의 말씀처럼 빛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착한 행실을 이웃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팔복의 사람이 된후 착한 행실을 통해서 빛을 비추면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페트리샤 킹의 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빛을 발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함 쿡은 이 세상에 수많은 부채와 폭력, 부정이 많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이 충분하게 많지 않은 것이 문제다. 그는 어떻게 그의 교회가 매일 이웃들을 만나고 선을 행했는지 설명했다. 잔디를 깎고 창문을 닦아주고, 개와 함께 산책을 해주고, 의사와의 약속 시간을 맞추기 위해 차를 몰아주고 쇼핑도 해줬다. 그들은 이웃이 무엇을 원하고 잇는지를 먼저 파악하고 그들을 만났다. 그결과 이웃들의 영적인 기후도가 드라마처럼 바뀌었다. 모두가 행복해하고, 친해졌으며, 몇몇은 그리스도께 나왔다. 선행은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선한 일을 이해 기름부음을 사용한다면, 도시의 영적 기후를 변화시킬수 있을 것이다.
선 앞에 두려움과 패역함은 그 힘과 영향력을 잃는다. 예수님은 선한 일로 악함과 싸우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선한 일은 강력한 힘이다...
지금의 세대를 위한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특별한 영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돌아보지 않고 이웃의 삶에 무관심하다. 당신의 영향력을 미칠수 있는 범위에 속한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상상하라. 잔인한 말 대신 상냥한 언어를 사용하라. 부도덕한 말 대신 순수한 말을 사용하고, 폭력 대신 온유함을 보여주며, 탐욕과 우월감 대신 관용을 보여줘라. 선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이다.]
세기의 성자 성 프렌시스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가자 라고 전도는 안하고 하루 종일 남의 밭일을 도와주고, 논일을 도와주고 청소도 도와주고 짐도 옮겨주는 등 종일 일만하다가 돌아오면서 아 오늘 전도 잘했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엽니다. 어려운 전도를 쉽게 만듭니다. 말로 하는 전도가 통하지 않는 사람도 선행전도는 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를 맺을수 있는 최고의 전도가 선행전도하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선행전도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초인종을 누르고 발로 문을 못닫게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얼굴이 두껍지 않아도 할수 있다는 큰 장점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고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 많은 영혼들이 복음에 반응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여러분을 세상의 빛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