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섬김
요 13:1-20 / 이동휘 목사
1. 삶에 주어진 시간이 딱 일주일 남았다고 한다면, 어떤 일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고자 하는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을 남기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일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 중 가룟 유다가 자신을 배신하여 팔려는 생각을 아시면서 그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겉으로 표현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배신을 두고 견딜 수없는 괴로움을 안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수차례에 걸쳐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유다는 자신의 배신을 끝까지 숨기고 뻔뻔하게 자신의 발을 예수께 내밀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일이 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차림은 종이 취하는 자세입니다. 스승이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낮고 천한 종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제자들, 인간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을 보이신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시므로 겸손의 극치,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낮추어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기는 복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겸손으로 인류의 구원을 이룩하셨습니다.
빌립보서2:5-8을 보겠습니다.
(빌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 즉 하나님이시었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십니다. 인간과 함께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표현이 바로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친히 그 겸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겸손을 기도와 신앙과 훈련의 목표물로 삼고 예수님의 삶을 통해 겸손을 배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끊임없이 훈련하신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40여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8:1-3을 보겠습니다.
(신8:1-3)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고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여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여 다시 한 번 겸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신명기8:11-18입니다.
(신8:11-18) (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리고 만약 겸손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가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지 겸손하면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8:4-10입니다.
(신8:4-10)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9)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겸손의 훈련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항상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배워 사랑으로 섬김는 삶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께서 보여주신 겸손은 십자가의 죽음, 곧 자아부정(自我否定self-denial)을 말합니다.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겸손은 이처럼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곧 자아의 죽음을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을 겸손하다고 말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었다는 확실한 증표는 겸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아가 죽지않은 겸손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자아가 완전히 죽을 때 그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끝까지 따라 가는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부정하고 사는 삶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 실로 그토록 교만하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에게 있어, 지난날의 자신의 모든 삶과 사랑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간 지니고 누리고 있던 세상적인 찬란한 ‘스펙’을 모두 다 배설물로 여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깨닫고 그간 지니고 살았던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예수님처럼 사는데 그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시는 은혜요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의 고백, 빌립보서3:3-12입니다.
(빌3:3-12)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이후에 그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영광과 승리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시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롬6:4)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옛 사람의 자기 교만과 바리새인의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 잠시 동안 자신에게 패배감과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인하여 얻은 자유와 평화는 그 고통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는 고백입니다.
(롬8:18)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러한 고백으로 사는 바울은 비록 제한된 육체 가운데 살지만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며, 성령을 좇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것은 과거에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이제 오직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산다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만유의 통치자가 되신다는 지식과, 그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인 우리 인생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니요, 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며, 거기서 겸손의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았습니다. 겸손의 생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셔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이 가장 낮은 골짜기를 찾아 채워지듯이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비어 있고 스스로 낮은데 처해 있는 피조물을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채워주십니다. 그러한 사람을 찾아 그의 영광과 그의 능력을 부어 그를 높이기도 하며 축복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큰 은혜를 갈급해 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일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는 일을 항상 즐겨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항상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생활을 통해 우리의 이웃에게 나타내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겸손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맙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그리스도의 정신과 행동이라야 말로 참된 겸손의 가치, 사랑으로 섬김의 가치를 깨우치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1)겸손한 사람에게는 시기와 질투란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섬김과 존경 받을 때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른 사람은 칭찬을 받고 자기는 오히려 멸시 천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평안하고자 하면 성도들이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비난과 말썽거리가 생기는 원인은 겸손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역사하고 있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는 것은 겸손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딤후3:1-2)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교만은 자신과 아울러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이 유대인들과 그 사회에 고통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결국 겸손의 주가 되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2)겸손한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가장 거룩한 자처럼 여겼으나 회개가 없는 가장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교만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지 않습니다.
(눅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18:12)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겸손한 사람은 이처럼 구원받은 죄인임을 자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극한 겸손은 일상적인 범죄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뇌리(腦裡)에서 떠날 수 없는 심각한 죄의식에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가 과거에 어떠한 죄인이었나를 보여 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죄의식에서 겸손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죄의식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성직자인 제레미 테일러는 “회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라고 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회개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는 존재가 아니라,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죄와 허물이 있다고 해도,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시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시51:16-17)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참회라는 사람을 멸시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사람을 더럽다고 하여 멀리 하지 않으시고 죄악을 도말하여 정결케 하시며 더욱 더 가까이 하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의 기쁨으로 유쾌해지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다윗 왕은 지은 죄를 두고 즉시 회개하므로 성령이 항상 그와 함께 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지은 죄를 지적받았을 때 회개하지 못하고 변명을 일삼고 그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서 성령을 거두시고 그를 버리셨습니다. 회개하면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죄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 하지 않기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졌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망하게 됩니다. 이 나라 민족과 지도자들이 엄청난 죄를 짓고도 멀쩡하다고 안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죄를 회개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총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죄로 망할 날이 반드시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회개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가져오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3)겸손한 가정이 수준 높은 가정입니다. 겸손한 교회가 수준 높은 교회입니다. 겸손한 사회가 수준 높은 사회입니다. 서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가 수준 높으며 깨끗하고 평안하여 살기 좋은 곳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사랑의 섬김은 서로를 가까이 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사랑의 섬기는 생활로써 영광과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4.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어 섬기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다시 빌립보서 2장을 보겠습니다.
(빌2:6-11)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겸손한 자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천국에 있어서 가장 귀한 자리는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매우 부유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간에 최고급이 아니면 그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귀공자 중의 귀공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안으로 그의 영혼은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달려 교외로 나갔습니다. 그가 말을 달리고 있는 길에 한 사람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 문둥병자는 온 몸이 문드러지고 있어 몸서리날 만큼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 까다로운 성미의 프랜시스였던고로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일그러지고 소름끼치는 이 문둥이를 보고는 무서워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 내재하는 그 무엇이 그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두 팔로 그 문둥병자를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가 그 문둥병자를 사랑으로 껴안는 순간, 문둥이는 예수의 모습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겸손하여 사랑으로 섬겼을 때 바로 예수님께서 그를 껴안으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할 때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괴로움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보다 더 가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어져 가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것이 오히려 이전보다 더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에게 가까운 사람만큼 인간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진리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모습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생활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그 분의 겸손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의 뿌리를 바로 이 겸손에 두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며 마침내 구원을 완성하게 되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사역이 예수님의 겸손으로 시작하여 겸손으로 마침을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겸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0:26)...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곧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하여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겸손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에게 충만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