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향기 2부
폐교
1998년 9월 5일
며칠 사이에 미주는 영화사를 빠르게 정리했다. 기획 실장에게 말했더니 현체제를 자신에게 넘겨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미주가 아기를 가져 적어도 몇 년간은 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으로 해석했다. 미주가 그런 징후의 말을 몇 마디 흘러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잘된 일이었다. 열 명이나 되는 직원이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직업을 잃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었던 미주는 흔쾌히 기획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현재 진행 중인 영화 제작 관련 건까지 사무실에 가득 찬 영화자료와 서류 영상 카메라 지자재 비품 일체까지 그대로 넘겨주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미주는 쉽게 그러자고 했다. 미주가 애써 쌓은 영화사 이름과 유무형의 실적 같은 브랜드도 함께 기획 실장은 그 모든 비용을 뽑아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위로금과 3개월 정도의 월급을 주고 나면 어느 정도 여유 있는 돈이 나올 것이었다. 미주는 그냥 몸만 빠져 나오는 형태였다. 대표가 바뀌는 것일 뿐 직원들은 그 사무실에 그대로 일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평생동안 열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접었다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컸지만 미주에게 그런 일은 비교적 간단한 수순에 불과했다.
문제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국에 있는 남동생과 시댁 어른들 정란이를 비롯한 몇 명의 절친한 지우들. 그리고 생각만 해도 목 위로 단번에 물이 차 올라 눈에서 흘러내리게 만드는 승우라는 남자.........
미주는 일찍 일어나 오랜만에 화장대 앞으로 가서 얼굴을 손보았다. 아내와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은 승우는 실내에서부터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여행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룰루랄라였다. 승우는 여름 내내 방송국 사정상 휴가를 내지 못하다가 여름이 다 끝나가는 어제 나흘간의 휴가를 얻었다.
그들은 속초로 가기로 했다. 대포항에서 회도 먹고 그 근처 지역에 자리를 잡은 CDS 선배 집에서 묵기로 했다. 주철 선배인데 통계학과를 나와 잠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접고는 아내 경희 선배와 함께 강원도로 내려가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경희 선배가 도예학과 출신이었는데 이제는 주철 선배가 아내보다 도자기를 휠씬 잘 만드는 모양이었다.
몇 번 통화를 했었는데 아내도 인정하는 모양으로 주철 선배는 큰소리를 치면서 놀러 오면 자기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 주겠다고 했다. 작년에 폐교에 자리를 잡았는데 4차선 도로변이고 바다가 코앞이라 했다. 교사 일곱 칸에 운동장도 널찍하고 관사와 기숙사까지 있어서 서울 인간들이 한 며칠 놀다 가기엔 최상이라며 주철 선배 부부가 초대했었다.
덩치가 곰 같고 텁석부리 수염이 멋있는 호인 타입의 주철 선배와 경희 선배는 승우와 미주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마음먹고 편안하게 찾아가는 길이었다.
바로 오라구요?
네..네.........하조대를 넘으면 공항 휴게소가 나오고 그러면 다 찾은 거라구요?
30초 정도 차를 속초 쪽으로 몰면 4차선 도로에서 다리가 있는 샛길이 보이고 오른쪽 외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10초만 천천히 차를 몰면 학교가 나온다........맞아요?
네. 네.......그러지요 뭐 미주하고 상의해서 결정되는 대로 다시 전화드릴게요. 형수님 잘 계시고 태민이 태현이 잘 크죠? ........하하하 그러실 겁니다. 두 살 차이가 나는 사내 애들 둘은 탱크 두 대가 굴러 다니는 것 같죠. 알았습니다. 네, 곧 출발할 겁니다. 네, 곧 뵙겠습니다.
승우가 가방을 다 싸고 들뜬 마음으로 미리 사정과 분위기를 파악할 겸 주철 선배에게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뭐래?
응 한계령 쪽으로 넘어오는 것보다는 대관령 쪽이 빠를 거라고 하네. 대관령 넘을 때만 좀 지체되지 나머지 영동고속도로 구간은 거의 4차선으로 뚫려 있어서 휠씬 빠르다고.
그렇다면 강릉 쪽으로 가야겠네? 그럼 회는?
회도 선배 사는 쪽에 널렸대. 자기가 릴낚시로 직접 잡아 줄수도 있다나. 공 짜로 싸게 실컷 먹여 줄테니까 애꿎은 데 돈 뿌리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래. 준비해 놓겠다고.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을까?
전혀 안 그렇다는데? 미주 네가 결정해. 어느 쪽으로 가든 상관없어.
미주는 하루 종일 바다만 바라보며 승우와 조용히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첫날이든 마지막 날이든 상관없을 것 같았다. 아니, 사람 좋은 선배 부부와 있다 보면 더욱 평화로워져서 무슨 애기든 자연스럽게 꺼내기 쉬울 것도 같았다.
승우 씬?
나, 글쎄 다 좋대두.
차 뒷좌석에 릴 낚시대와 여행 가방 두 개를 밀어 넣으며 승우는 싱긋거렸다.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그랬다. 의견이 갈릴 소지가 있는 것은 언제나 미주에게 선택을 맡겼다.
미주와 같이 사는 것만으로 이미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이루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미주는 이제부터라도 그의 의견대로 해 주고 싶었다. 사소하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마음껏 누려온 결정권을 그에게 돌려 주고 싶었다.
이번엔 승우 씨가 결정해.
별일이네. 글쎄. 난 미주 너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어디고 무조건 좋다니까.
아무튼 핸들 잡은 사람이 승우 씨니까 승우 씨 맘대로 가. 하긴........... 주철 선배 어떻게 사나 궁금하긴 하다. 그 선배 학교 다닐 때부터 말술이었는데 경희 선배 엄청 속썩었겠지?
주위에 횟감이 널려 있어도 술 마실 사람이 없어 못 마신다고 하던데?
그려면..........먼저 그 집에 들를까?
그래. 후후후. 됐다.
승우는 침을 삼켰다.
어이구 그 생각하니까 자기 눈이 다 번쩍거린다.
그걸 말이라고 해. 바다 냄새 물씬 풍기는 싱싱한 회가 날 부르잖아. 그것도 무진장이면서 공짜라는 게.........흐흐흐!
아저씨 그러다가 서울 돌아올 때는 대머리 돼 있을랑가 몰라. 조심하셔.
문어!
그래. 문어만 잔뜩 먹으면 그렇게 될지도 몰라.
쾌청한 날씨처럼 승우와 미주는 연신 킬킬거렸다. 한강변을 끼고 대로를 타다가 하일 인터체인지에서 꺾어 서울 톨게이트를 향해 달렸다. 주말이라면 꼼짝없이 서행운전을 해야겠지만 다행히 평일이라 길은 쉽게 뚫렸다.
승우의 마음 박자를 맞춰 주는지 라디오에선 경쾌한 Surfing USA 가 흘러 나왔다. 비치 보이스가 가서 신나게 놀라고! 너희들 바다를 맘껏 즐겨 봐! 하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하하하.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야. 이 노래 널 위해 틀어 준댔어. 김호진 선배 PD인데 미주 너도 한번 봤지? 잠자리뿔 안경을 낀 날렵한 체구를 가진 사람말이야.
응 기억 나. 바다로 가는 여감독을 위해서 첫 음악을 이걸로 띄우기로 했거든 내가 이 타이밍 맞추기 위해 얼마나 머릴 굴렸는지 알아?
정말이야 괜히 꿰어 맞추는 거 아냐?
야아, 너 그렇게 나랑 살아도 모르겠냐? 지금 김선배랑 전화 연결시켜 줄까?
아 됐네요. 근데, 방송 그렇게 사적으로 써도 되는 거야. 고발하면 문책감이다.너 심의에도 걸리고
오! 이 놀라움! 너 한테서 처음 듣는 꽉 막힌 소리다. 비치보이스 노래는 여름 명곡이야. 여름에 걔들 노래로 기분 방방 띄워 주겠다는데 누가 딴지를 거니? 청취자들이 가장 좋아할 만한 곡을 틀어 주는 건 기본이지. 단지 의미를 우표 붙이듯 붙이는 것일뿐 절대로 권한 남용이 아냐.
흐으........ 응! 못 믿겠다. 승우 씨가 사랑을 얻기 위해 자기 프로를 얼마나 전용했는가 사람들이 알면 까무라칠걸?
이거 왜 이래? 나도 한 사람의 청취자로 사연을 보내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당당히 뽑힌 거라구. 그리고 내가 쓴 내용들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모르지? 내 주소를 가르쳐 달라는 엽서가 하루에 스무 통씩은 왔었다.
정말? 그래 방송국 캐비닛 박스 안에 따로 모아 뒀으니까 얼마든지 증거품을 보여 줄 수 있어.
그걸 왜 모아 두니? 뭐 하러? 너 호........혹시?
흐흐흐.......어떻게 알았을까, 그 엽서와 편지들 중에는 열정적이고 달콤한 내용도 많더라고 사람은 훗날을 대비하는 유비무환 정신이 있어야 하잖아. 만약 자기가 날 걷어찬다면 난 당장 그 박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거야.
달려가선?
그야 뭐 마구 전화를 거는 거지. 절 만나고 싶어하신 누구누구 씨 맞나요. 네 저........전 결국 버림받았답니다. 흑흑흑. 넷? 괜찮다고요? 당신이 절 구원해 주시겠다고요? 고맙습니다. 그럼, 어디서 만날까요, 하는 거지 뭐.
소설을 써요. 소설을! 언제 가서 그 박스 통째로 확 불질러 버릴 거야. 그럼 금고털이범 데리고 가야 할걸. 문은 잠겼고 비밀 번호는 나만 알고 있으니까.
자꾸 그러면 방송국 전체를 폭파시킬 거다. 내가 다이너마이트 구할 정도의 역량이 있는 거 알지? 충무로에 몇 방만 전화를 때리면 자기 방송국 날릴 정도의 양의 다이너마이트는 곧바로 배달돼.
이.....이크! 그걸 몰랐군. 어이구 몰랐습니다. 형님! 서울로 돌아가는 즉시 그 박스를 당장 처치해 버리겠습니다. 제발 제 일자리만 건드리지 말아 주십시오 형님!
됐어.
봐주는 거지?
하지만 미주의 표정은 마른 빵처럼 굳어 있었다. 라디오 음악 프로 앞으로 날아오는 엽서는 1년 정도 모아둔다. 나중에 예쁜 그림과 사연, 시가 담긴 엽서전도 따로 열 정도니까. 승우가 농담으로 그런 애길 한다는 걸 미주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현 듯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아팠다. 이 남자는 나 없이 어떻게 하나, 겨우 나이 서른하나의 남자가 평생을 혼자 살수는 없지 않겠는가. 다른 여자에게 이 남자를 보내야 한..........다. 순순해서 곧잘 어리광까지 부리는 이 남자를 포근하게 잘 안아 주고 재워 줄 여자......... 내 발 씻겨 주기를 좋아하고 내가 자기 얼굴 씻어 주는 걸 좋아하는 이 좋은 남자의 새로운 여자가 될.........여자........생각만 해도 가슴이 쓰렸다.
참. 그 아가씨 잘 있어? 이름이 영은이랬지? 우리 결혼식 때 꼭 참석하고 싶다고 하는데 자기가 일부러 먼 곳에서 날아올 필요가 없다고 했던 그 여자 말야.
에이, 왜 그래? 순전히 농담인 거 알면서.
알아,
하지만 갑자기 그 여자가 궁금해서. 시집갔어,
우리 결혼한 뒤에 1년 정도 지나서 남편은 교수고 영은이는 개업의고 잘사는 것 같아.
으응 그렇구나. 연락은 하고 사는 모양이네.
작년 연말에 한번 전화 왔었다고 내가 애기했었잖아. 넌 그때 인쇄소에서 나온 영화 팸플릿 고르느라 정신없었고.
그 이후론 연락 안 왔어. 후회 안 해? 그 여자, 어머니가 캡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예쁘고 젊고 재원이고 집안 빵빵하고 당신 무지 사랑하고.
야아, 왜 이러니. 이 멋진 날에. 나 너 없으면 사흘도 못 산다는 거 잘 알면서 괜히 트집이네.
후후후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미주야 너 처럼 머리에서 국화 향기 나는 여자가 흔한 줄 아니? 그 향기 한 번으로 내가 완전히 갔다는 거 아냐. 난 미스터 세계 챔피언 같은 거 뽑지 말고 여자 사랑하기 세계 대회 같은거 열렸으면 좋겠어. 내가 나가면 보나마나 챔피언일 텐데. 같이 살고 있어도 아직 날 모르니? 섭섭하다.
만약 나 죽으면 혼자 살아야 돼. 알았지. 하지만 난 승우씨 갑자기 죽으면 절대 혼자 안 살 거다. 이제 웬만큼 지위가 잡히니까 주변에 괜찮은 남자들 쌔고 샜더라.
에이! 젤 듣기 싫은 소리다. 나 화낼 거야.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다니 부탁하는데 더 이상 재 뿌리지 마, 마치 어이없게 골을 내고 갑자기 심통 부리는 철부지 같이 보이니까.
하긴 내가 좀 심했다 그치?
응 위로해 줘. 응? 내 가슴을 쓰다듬어 줘 아까 네 말에 경기 일으켰거든.
미주는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쓸고 토닥거렸다. 그이 표정은 금세 천진난만하게 바뀌었다. 미주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그녀는 얼른 자기 쪽의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다는 게 점점 더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루하루의 일상이란 게 점점 더 뼈져리게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가볍게 흘러가 버린다고 느꼈던 시간은 얼마나 소중하고 안타까운 것인가.
작렬하는 태양아래 펼쳐진 자연의 생생함 아름다웠다. 처음 눈뜨고 보는 것처럼 산의 나무들은 푸르렀고 싱그러웠다.
미주는 창문 너머 풍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녹음 빛깔이 너무나 생생하네!
주문진을 지나자 바로 양양이었다. 4차선 도로옆으로 커다란 돌에 음각으로 새긴 지명이 세워져 있었다. 승우는 엑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놓고 브레이크를 밝아 속도를 줄이며 미주을 돌아보았다.
주소가 정확히 어디랬지?
미주는 수첩을 뒤적거렸다.
양양군........손양면 상운리.........상운초등학교 하조대를 지나서 공항 휴게소를 찾으면 돼. 거기 서서 보면 넒은 벌판이 있고 맞바라보면 길 들둑 너머 폐교 교사가 보인다고 했잖아.
그래 어림잡아 한 20분만 달리면 될 것 같아.
나 거기 가서 도자기 만들어야지.
네 속셈이 보인다. 너무 욕심은 부리지 말라고.
잔 하나만 만들 거야. 자기가 평생 쓸 수 있도록 국화꽃도 그려 넣고 손잡이 아래 내이름도 써 놓고. 두 개 만들어야지. 세트로 자기하고 나한고 같이 마시는. 아니. 한 개만 만들 거야. 만들어서 승우 씨 준다니까! 욕심부리지 말라며?
야아 정말 오늘 언어불통이다. 맘대로 해!
그렇게 몇 번 가볍게 티격태격하다 보니 공항 휴게소가 나왔다. 그 들은 차를 세웠다. 선배 부부가 일러준 대로 앞쪽에 넒은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있었다. 시선이 벌판을 가로지르자 기다란 기차 같은 성냥갑 같은 교실 건물이 긴 방둑 너머로 보였다.
승우 씨! 저기야!
햐 무지 찾기 쉽군, 이거 너무 빨리 도착한 거 아냐?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전화해 볼까?
바로 코앞에서 무슨 전화냐?
점심 때문에 그렇지 시간이 좀 그렇잖아. 배고프니?
아니. 승우 씬?
오면서 계속 군것질을 했더니 전혀, 그냥 가 보자. 바다가 가까우니 나중에 회라도 좀 먹으면 되지.
승우 씨 정말 살판난 얼굴이다. 회 라는 말만 하면 자기 침부터 흘리는 거 알아?
그랬냐? 흡흐. 난 정말 솔직한 게 탈이야. 공항 휴게소에서 5백미터 정도 속초 방향으로 달리자 주철 선배가 말했던 대로 갈라지는 지점이 있었다. 다리도 있었다.
오른쪽 바다로 난 길로 2백 미처 정도 서행을 해서 폐교 입구에 닿았다. 헨드 메이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도자기 염직을 한다는 소제목이 입간판에 페인트 글씨로 씌어 있었다.
염직? 천에 물들이는 거 아냐?
야아. 근데 경희 선배 그런 것도 했었냐? 몰랐네!
손재주 있는 거 알아줬잖아. 생각 안 나? 나 4학년 때 오비 모임 있었을 때 말이야. 경희 선배 쪽빛 나는 개량 한복 입고 왔었잖아. 한복도 자기가 만들었다면서.
그랬었나? 근데........야아 여기 정말 살기좋다. 바다고 가까운 데 있고 교통 편하고, 공기좋고 맘껏 뛰어 놀 넒은 운동장도 있고, 나도 이런 데서 살고 싶다.
한 1년만이라도. 승우 씨, 우리 정말 그럴까? 주철 선배랑 경희 선배 한테 한번 부탁해 볼까?
어이구 아서요. 미주 너는 아마 한달도 못 견딜 거다. 영화가 하고 싶어서 미칠걸.
승우는 아직 미주가 영화사를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기획 실장에게 철저히 입 단속을 시킨 때문이었다.
승우는 차를 교문 안쪽에 주차시켰다. 운동장 반대쪽에서 어린 아이 두명이 그네에 매달려 놀고 있었다. 일곱 칸의 교실로 된 일자 형 교사가 산사처럼 조용했다.
흰페인트칠이 되어 있어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미주와 승우는 일단 아이들 쪽으로 걸어갔다.
누가 태현이고 태민이지?
큰 녀석이 태민이 작은 놈이 태현이. 두 살 차이라지 아마, 큰 녀석이 에닐곱 살 됐을걸.
미주에게 대답하며 승우는 아이들을 향해 크게 소리질렸다.
야, 태민아, 태현아! 작은 아버지 오셨다.
승우는 손을 활짝 펼쳤다. 하지만 두 아이는 말똥거리는 표정이었다. 우리 삼촌이나 작은 아버지는 아닌데, 처음보는 사람이 와서 아주 다정스럽게 아는 체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이 똘망똘망한 아이들이었다. 둘다 야무지게 생겼고 눈빛이 초롱했으며 되받아치는 것도 똑똑했다.
아저씨. 혹시 유괴범 아니에요?
야. 이런 좋은 데 사는 아이가 그런 흉악한 말도 알고 있네, 네가 태민이니? 예. 넌 태현이고?
.........예.
동생은 밤톨머리를 한번 긁더니 주먹을 자기 입으로 가져가며 쭈삣거렸다.
아빠 엄마는 어디 계셔?
흙 파러 갔어요. 흙?
아하, 도자기 만드는 흙?
아뇨. 인형 만드는 말흙이에요.
야. 이 놈 정말 똑똑하네. 언제 오시니?
조금 있으면요. 근데 하저씨 아줌마는 누구세요?
아 우리....... 너희 엄마 아빠의 후배들이다.
후배요? 그럼 울 아빠 엄마의 쫄병들이겠네요?
졸병? ............하하하 맞다 맞아. 그렇지.
승우는 녀석들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승우와 미주는 두 아이를 그네에 태우고 밀어 주었다. 형제는 잠시 누가 하늘 높이 발로 차나 시합을 벌이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그네을 멈췄다. 그러고는 무슨 만화인가 비디오인가를 봐야 한다며 부리나케 교사 뒤쪽으로 달려가 사라졌다.
미주와 승우는 아이들이 떠난 빈 그네에 앉아 몸을 흔들었다.
교사 왼쪽으로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조금만 더 자라면 시골 동네 어귀에 선 느티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나머지 은행나무는 어디에 서 있을까? 은행나무는 암수가 마주서야 열매가 열리고 꽃이 핀다던데.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미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근처에는 자잘한 단풍나무와 얼룩버즘나무, 측백나무만 보일 뿐 또 한 그루의 은행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정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변한게 없었다. 건물과 그 앞의 화단, 국기봉. 네모난 연단. 시소. 그네 철봉 따위, 하지만 미주의 눈엔 참으로 정겹게 보였다. 교사 중안 연단 가까이에는 도자기를 굽는 큰 가마와 작은 가마통 같은 게 보였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암 따위는 가볍게 비켜 나갈 수 있는 지혜와 기회를 가질수 있을 텐데.
쇠줄에 커다란 고무판을 얹은 그네를 끼끄덩 끼끄덩 쇠줄 소리를 내며 타던 승우가 미주를 돌아보았다.
내가 밀어 줄까?
됐어. 자기나 맘껏 타.
춘향이 만들어 줄랬더니!
반바지 입은 춘향이도 있냐? 치마폭이 나부껴야 맛이지.
그래도 내 눈엔 춘향이보다 예쁘 보인다 뭐.
향단이로 보이겠지.
또 삐딱선 탄다.
너 우리말 나온 김에 배로 한번 탈까? 요즘 고깃배로 하루 정도 싸게 빌릴 수 있다던데?
재밌겠다. 그래 내일 타자. 주철 선배하고 낚시도 하고
어이구 그거였군요.
파닥거리는 고기를 낚아 올리는 즉시 회를 떠서 초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을 네가 몰라서 그래.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몰라.
그래, 그럴 거야. 승우 씬 나 죽어도 입가에 초장만 질질 흘리고 있을 거야.
왓핫하! 정말 오늘 네 심통 못 말리겠다. 잘못 말린 오징어는 배배 꼬이게 돼 있어. 뭐 역시 네 쏘는 맛은 일품이야.
우리 저녁때 쏘가리탕 해 달래자. 승우 씨 혓바닥 쏘이게!
하하하, 또 당했어. 오! 난 역시 너 없인 못 살아!
미주는 들은 체도 않고 정색을 했다. 승우 씨 주철 선배하고 경희 선배 있을 때 나보고 너, 너 하지 마,
그건 또 왜? 그 두선배는 내가 너 2년 선배란 거 잘 알잖아. 창피하단 말이야.
풋 알았네요. 미주 씨! 됐어?
응 알고 있니? 그 맛에 내가 널 데리고 산다는 거?
알지 그럼 내가 바본 줄 아는가 봐. 히히히!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들판에 자라는 키 큰 녹색의 벼들이 일으키는 소리가 마치 파도 소리처럼 담장 너머로 밀쳐 들었다.
언제 오려나? 멀리 간 거 같진 않은데?
우리 그 녀석들 보러 갈까? 학교도 둘러보고 아님. 녀석들이랑 만화 영화나 같이 보든지.
넌 애들이 그렇게 좋니?
그럼 애들 보면 조 땅콩같이 작은 것들이 언제 다 자라나. 신기하잖아.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그건 또 왜?
글쎄 말해 봐.
글쎄...........흐으음 그래 난 딸이 더 좋아. 우선 예쁘잔아. 하는 짓도 그렇고. 노란 원피스에 흰 스타킹. 빨간 구두를 신기고 리본을 매 주면 인형 같잖아. 손을 요렇게 모으고 무릎을 까닥대면서 병아리 같은 입을 삐죽이며 노래을 부르면......... 야아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그러다가 승우는 자기의 들뜸을 쥐어박듯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
미주야 그냥 그렇다는 거지 별 뜻은 아냐.
내가 뭐랬니? 흐으음 딸이라.........좋아. 그럼 그쪽으로 한번 노력해 보지.
미주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태아가 딸이란 것을 정란이가 애기해 줬던 것이다. 승우가 외아들이라 아들을 원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뭐......... 너 방금 뭐, 뭐랬나? 그.......그럼 너...........너.......혹시 미주야............너? 미주는 그네에 앉은 채로 턱을 쳐들고 한쪽 다리를 꼬고는 거만스레 팔짱까지 꼈다.
그래. 나 임신했어!
저.......저.........정말이냐? 미주야 진짜지? 지금 자........장난하는 거 아니지? 농당이라면..........나 나 무지 화낸다. 농담이라면 지금 말해!
승우 씨. 정말이야. 정란이가 그러는데 4개월이래. 아기가 완전히 들어섰대. 안전하게
미주는 헨드폰을 꺼내 들었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볼래? 그럴 필요도 없지. 내 아랫배를 만져 봐도 돼. 도톰한 정도를 지나 약간 볼록해졌으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몰랐지? .......어디?
승우는 환희가 터지기 직전의 얼굴로 한쪽 무릎을 끓으며 미주의 셔츠 밑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확실하게 배가 좀 불러 있었다. 그런데 그걸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갑자기 승우는 벌떡 일어나 운동장 4백 미터 트랙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마구 펄쩍거리면서.
재 참 별나네. 결혼 전 백사장에서도 비슷하게 하더니 역동적이긴 하지만 좀 그렇네. 점잖게 미소를 짓고 어깨를 가볍게 안아 주면 안 되나? 저 날뛰는 것 좀 봐. 이거 뭐 완전히 영화 병태와 영자에 나오는 병태처럼 나대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미주는 행복하게 승우가 헉헉거리며 네바퀴째 운동장을 도는 것을 지켰보았다. 담뿍 미소를 지었지만 미주의 눈에는 눈물이 얼비쳤다. 운명이 가혹하지 않고 좀 너그렇게 그냥 평범하게 대해 주었으면 얼마나 기뻣을까. 그 냥 처음 임신한 여느 여자들처럼 그러나 지금 미주는 평범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경지란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승우는 텅빈 운동장을 온몸으로 휘저어 기쁨으로 가득 채운 뒤 헉헉거리며 미주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두 무릎을 끓고는 미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고마워. 미주야! 정말 너무나 고마워.
고맙긴 뭐. 그 대신 두 번째는 안 만들어 준다. 하나로서 만족해야 돼 알겠어?
물론이야 하나라도 난 우주를 통째로 얻은 것 같아. 그 이상 뭘 바랄 수 있겠어?
근데 그거 언젠가 나한테 썼던 말 아냐?
그래 너를 가졌을 때는 내가 여신을 얻은 것 같다고 한 것 같은데? 아닌가?
에구구 능청스럽게 이젠 말도 잡아떼요.
미주는 자신의 무릎에 뺨을 붙이고 두 손으로 자신의 허리를 싸안은 승우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하늘이 파래. 햇빛은 눈부시고 나뭇잎은 너무나 푸르러 바람결에 바다가 묻어 있는 것 같아. 미주는 고개를 들고 자꾸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은 승우의 검은 머리 숲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문득문득 떨고 있었다. 그의 머리 숲에서 빠져 나오기가 무섭다는 듯 승우는 뱃속에 있는 아기에게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하며 행복한 웃음 소리를 냈고 미주는 턱을 치켜든 채 하늘을 향해 목을 늘였다. 이 남자는 여자와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여자에게 굽혀 주고 무릎을 끓어 주어도 그만큼 더 높아지는 사람이다. 부드러움과 착함과 겸손함과 밝음을 가진 이 남자. 이 남자와 함께했고 함께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는가.
미주는 서러운 기운을 삼키며 목을 완전히 젖혀 눈부신 하늘을 가뭇하게 올려다보았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서. 뼈 속에 푸른 바람과 함께 깊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여 저 하늘 구름 어디엔가 모아 두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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