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불해(無學不害)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는 말이다.
無 : 없을 무(灬/8)
學 : 배울 학(子/13)
不 : 아닐 불(一/3)
害 : 해할 해(宀/7)
출전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十八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18년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가을에 조(曹)나라 평공(平公)의 장사(葬)를 지냈다. 노(魯)나라 사람 가서 주(周)나라 대부 원백로(原伯魯)를 만나 이야기를 하였는데 배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와 민자마(閔子馬)에게 이야기 했다.
秋, 葬曹平公. 往者見周原伯魯焉, 與之語, 不說學. 歸以語閔子馬.
민자마(閔子馬)가 말했다. “주나라는 난(亂)이 있을 것이오. 반드시 배움을 싫어하는 많을 것이니, 나중에 대인들에게 미칠 것이오. 대인들이 잃을 것을 걱정하고 의심하며, 또한 말하기를 ‘배우지 않아도 좋으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할 것이오. 해가 없다면 배우지 않는다면 대충대충 처리해도 된다고 할 것이니, 아래에서는 능멸하고 위에서는 버릴 것이니 난이 없다고 할 수 있겠소? 본래 배움이란 생장(生長)과 같은 것인데, 배우지 않으면 몰락하게도니 이제 원백로(原伯魯) 망할 것이오!”
閔子馬曰 : 周其亂乎. 夫必多有是說, 而後及其大人. 大人患失而惑, 又曰; 可以無學, 無學不害, 不害而不學, 則苟而可, 於是乎下陵上替, 能無亂乎? 夫學, 殖也, 不學將落, 原氏其亡乎.
⏹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
통행본 20장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絶學无憂)
唯與阿其相去幾何,
美與惡其相去何若.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恍呵其未央哉.
아득하구나 끝이 없도다.
衆人熙熙, 若饗於太牢而春登臺,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마치 잔치 고기를 먹고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한데
我泊焉未兆, 若嬰兒未咳, 累呵如无所歸.
나는 덤덤하여 드러나질 않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
衆人皆有餘我獨遺.
뭇사람들은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버려졌다.
我愚人之心也憃憃呵.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바보같다.
俗人昭昭, 我獨若昏呵;
俗人察察, 我獨悶悶呵.
세속 사람은 환히 빛나는데 나만 홀로 어두우며,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
忽呵其若晦, 恍呵其若无所止.
없는 듯하되 마치 어두컴컴한 것 같고, 있는 듯하되 마치 멈출 데가 없는 것 같다.
衆人皆有以, 我獨頑以鄙.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비루하다.
吾欲獨異於人而貴食母.
나만 홀로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여 유모를 귀하게 여긴다.
⏹ 배움을 끊으면 걱정이 없다(絶學无憂)
내가 보기에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세상의 변화를 조심스러워 하고 사회적 가치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더 존중하자는 것이다.
글의 앞부분은 변화가 초래할 재앙에 대한 걱정을 담고 있고, 마지막 문장은 생명의 소중함을 환기시킨다. 나머지는 그러한 '노자'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식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성현영 같으면 무엇보다도 분별심을 버리라는 게 이 글의 교훈이라고 말할 것이다. 글이 길기 때문에 미리 해석의 관점을 밝혀둔다.
이 글은 세부적으로도 논란이 많다. 첫 번째 문장도 그렇다. 이 문장은 전체 논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다.
글 전체를 나처럼 보는 경우에도 이 문장이 반드시 글머리에 와야 할 당위성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미 이 문장은 이 글이 아닌 앞글의 마지막에 붙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 주장의 증거는 조공무의 '군재독서지'이다. 조공무에 따르면 지금은 실전된 장군상(張君相)의 '노자주'에서 이 문장이 앞글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앞글은 전체적으로 예교와 문식을 버리고 소박의 덕성을 회복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이 문장과 호응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초간문 발굴 이후 위축되었다. 초간문에서는 앞글 마지막에 글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표시가 붙어 있고, 이어서 다른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초간문 이후에는 오히려 이 문장이 통행본 48장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게 되었다.
초간문에는 통행본 48장에 해당하는 글에서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들은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무위에 이르니 무위하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부분만 실려 있는데, 지금 문장은 그 뒤를 이어 나온다.
붙여서 읽어보면 알겠지만 글의 흐름이 대단히 매끄럽다. 만약 순서가 초간문처럼 되어서 이 문장까지 하나의 글로 취급했다면 이 문장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문장은 이렇게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초간문이 어떻든 우리는 백서의 기본 골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초간문을 참고하고 '노자'를 해석해야 한다.
또 이 문장이 통행본 48장에 속한다는 것은 주장일 뿐이지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무리가 있더라도 이 문장을 아래 글과 연결시켜 설명해보자.
이때는 왕필의 해설을 참고할 수 있다. 왕필은 "학문을 하는 자는 날마다 더하고, 도를 행하는 사람은 날마다 덜어낸다"는 글을 언급하면서 학문을 하여 무엇인가 증진시키려는 시도는 자연의 본성을 해치므로 근심을 낳고, 무엇인가 증진시키려는 좋은 의도가 오히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대립면도 그리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조심해야 한다는 논지로 이 문장을 설명한다. 대충 이런 정도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여기에서의 배움도 역시 배움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위의 학문이나 세속의 학문을 가리킨다. 또는 하상공이 이미 설명한 대로 정교와 예악의 학문, 특히 예의 법도와 관련된 학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이런 학문에 대한 비판은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다. '좌전' 소공 18년조에는 노언(魯焉)이라는 사람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無學不害)"고 말하곤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그의 말은 지금 '노자'의 말과 차이가 없다. '좌전'은 민자마(閔子馬)의 입을 빌려 이런 주장을 방치하면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이런 주장이 그토록 일찍 가능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소공 18년이면 기원전 524년이다. 이때 노언이 말하는 배움도 역시 예학이다. 그 주장을 그대로 놔두면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가 생긴다는 민자마의 비판이 그 학문의 성격을 가늠하게 한다.
⚪ 唯與阿其相去幾何, 美與惡其相去何若.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얼마나 차이가 있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예기 곡례에 따르면 "부모가 부를 때는 '네에(諾)'라고 하지 않고, 나이 많은 사람이 부를 때도 '네에'라고 하지 않으니 '예(唯)!'라고 대답하면서 일어나야 한다."
곧 '유'는 공손히 응대하는 것이다. '아(阿)'는 갑본에는 '가(訶)'로 되어 있다. '아'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느릿느릿 불경스럽게 응대하는 것이고, '가'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는 것이다.
초간문에는 '가(可)'이므로 '아(阿)'일 수도 있고, '가(訶)'일 수도 있다. 보통은 '가'라고 많이 본다. 백서 발견 이전에 유사배는 갑본에 의거하여 '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흔히 '유'와 대응되는 말은 '아'이다. 공손한 대답(唯)과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꾸짖는 것(訶)은 전혀 다른 일이고, 윗사람이 부르면 재빨리 대답하여 공경을 보이는 것(唯)과 느릿느릿 대답하여 불경스러움을 보이는 것(阿)의 차이는 미묘하다.
지금 '노자'는 그 미묘한 차이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미묘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하라는 교훈이 성립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여기에서는 을본을 따른다. 대부분의 통행본도 '아'로 되어 있다.
성현영에 따르면 이 문장의 교훈은 커 보이는 차이란 실제로는 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차이를 괘념치 않고 선·악과 미·추의 분별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장자'를 읽듯이 '노자'를 읽고 있다.
⚪ 人之所畏, 亦不可以不畏.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 아름다움과 추악함은 백지 한 장 차이이기 때문에 설령 지금은 공손한 대답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언제 불경스러운 대답으로 바뀔지 모르며, 지금은 아름답다는 칭송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언제 추악하다는 비난을 당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언제나 매사를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좋다.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지금 문장이다. 곧 이 말은 "성인은 오히려 그것을 어렵게 여기니 그 때문에 어려움이 없이 마칠 수 있다"는 정신의 되풀이며, "전전긍긍하여 마치 깊은 못가로 다가가는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네"라는 우환 의식을 계승한 것이다.
'도응훈'은 성왕(成王)과 윤일(尹佚)의 문답을 통해 임금 노릇하기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를 말하면서 이 문장을 소개한다.
성왕이 말했다. "두렵구나, 왕 노릇하는 것이여."
윤일이 말했다. "천지 사이와 사해 안쪽의 사람들은 모두 잘해주면 내 은인이고, 잘못 대해주면 내 원수입니다. 옛날 하·상의 신하들은 오히려 걸·주를 원수로 여기고 탕·무에게 복종하였으며, 숙사(宿沙)의 백성은 스스로 그 임금을 죽이고 신농에게 귀복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모두 잘 아는 바인데 어찌 두려움이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노자가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공손한 대답과 불경스러운 대답이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처럼 신하였던 백성들이 반란자로 되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므로 언제나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오징은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일은 대단히 많고, 다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에게 근심이 많은 이유다"라고 하였다. 이 말도 맞다.
⚪ 恍呵其未央哉.
아득하구나 끝이 없도다
'황(恍)'은 원래 '망()'이다. 이 글자는 '망(望)'의 고자다. 이 글에서 똑같은 글자가 '황(恍)'으로 쓰인 용례가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황'의 가차자로 본다.
하지만 이 글자를 그대로 '망(望)'으로 보아도 아득하다는 뜻이고, 통행본처럼 '황(荒)'으로 보거나 '망(芒)', '망(忙)', '황(怳)' 등과 통하는 글자로도 볼 수 있다.
왕필은 통행본의 글자를 넓다는 뜻으로 보았고, 하상공은 황란하다는 뜻으로 보았는데 그 뜻이 그렇게 다르지 않다. 본문에서는 아득하다고 옮겨 두 뜻을 모두 포괄한다.
'미앙(未央)'은 대부분 끝이 없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이때 '앙(央)'은 '진(盡)'과 같은 글자다.
전체 문맥과 관련해 이 문장의 의미도 분명하지 않다. 해설마다 생각이 전부 다른데 대체로 왕필의 해설을 따르는 것이 나의 관점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는 이 문장이 "세속과 서로 다른 것이 너무 많다(遠)는 것을 탄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衆人熙熙, 若饗於太牢而春登臺. 我泊焉未兆, 若嬰兒未咳. 累呵如无所歸.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며 마치 잔치 고기를 먹고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한데, 나는 덤덤하여 드러나질 않으니 마치 갓난아이가 아직 웃지 못하는 것 같고,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
이 문장 아래로는 계속해서 뭇사람과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을 비교하는 글이 나온다. 이때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의 모습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담담하고, 어리석은 듯하다. 물론 그런 모습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노자'가 하고 싶은 말이다.
임계유는 이 글이 자기를 깎아내리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자화자찬이라고 하였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
'희희(熙熙)'는 즐거운 모양이다. '향(饗)'은 음식을 먹는다는 뜻으로 '향(享)'과 통하며, 또 '향(鄕)'과도 통한다. 갑골문에서 '향(鄕)'은 두 사람이 마주하고서 음식을 먹는 형상이다('卿'이라는 설도 있다).
태뢰(太牢)는 가장 훌륭한 제물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소로 보는 견해도 있고(이 경우에는 小牢가 양이다), 소·양·돼지를 모두 태뢰로 보는 경우도 있다.
또는 연향(宴饗)할 때 솥을 몇 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잔치 의식의 등급이 결정되었는데, 가장 많은 아홉 개의 솥을 사용하는 잔치의 음식을 태뢰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이 말에 우리 '뢰(牢)'자를 사용하는 이유는 제사에 희생될 동물이 따로 우리에서 사육되었기 때문이다(범응원).
"봄에 누대에 오르는 듯하다"는 것은 "봄에는 음양이 서로 사귀고 만물이 그에 감동하여 자라나므로 누대에 올라 그것을 바라보면 마음이 풀어지는 듯한(淫淫然) 것"을 가리킨다(하상공).
보통 "봄의 누대에 오른다(登春臺)"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노자는 "겨울에 강을 건너는 것 같다"는 말에서도 어순을 이렇게 하였다.
'박(泊)'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설문) 또는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소철). '조(兆)'는 원래 거북 껍질(주로 배껍질이다)이나 소의 견갑골을 불 위에 던져 그 균열 양상을 보고 미래를 예견했던 고대의 점법(卜)에서 그 균열된 모습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그래서 이 글자는 전조 또는 조짐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이 글에서 조짐이 없다(未兆)는 것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해(咳)'는 어린아이가 웃는 것을 가리킨다. '해(孩)'와 같다. '누(累)'는 피곤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피곤하여 돌아갈 데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은 지쳤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 열망도 접어두고 어떤 곳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는 마치 피곤한 공자가 상가집 개로 비아냥거림을 받을 때를 연상시키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뜻이 원활하게 통하지 않는다.
⚪ 衆人皆有餘我獨遺, 我愚人之心也憃憃呵. 俗人昭昭, 我獨若昏呵. 俗人察察, 我獨悶悶呵.
뭇사람들은 여유가 있는데 나만 홀로 버려졌다. 이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바보같다. 세속 사람은 환히 빛나는데 나만 홀로 어두우며, 세속 사람은 똑똑한데 나만 홀로 어리숙하다
'유(遺)'는 버려졌다는 뜻이다(하상공). '용용(憃憃)'은 통행본에 대개 '돈돈(沌沌)'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어리석은 모양을 가리킨다(고형). '소소(昭昭)'는 빛이 번쩍이는 것이다(왕필). '찰찰(察察)'과 '민민(悶悶)'은 다른 글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이 문장은 역시 뭇사람(세속 사람)과 '나'를 비교하는 글이다. 여기에서 '나'는 언뜻 보기에 불행한 처지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에게서도 비판받지 않으며,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에 동정을 받을지언정 미움을 사지는 않는다.
불행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전하다. 밝은 곳이 그늘로 변하면 밝은 곳에 있었던 사람은 추위를 느낀다. 하지만 미리 그늘에 숨은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아쉬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늘을 춥게 여기지 마라.
⚪ 忽呵其若晦, 恍呵其若无所止. 衆人皆有以, 我獨頑以鄙.
없는 듯하되 마치 어두컴컴한 것 같고, 있는 듯하되 마치 멈출 데가 없는 것 같다. 뭇사람들은 모두 쓸모가 있는데, 나만 홀로 어리석고 비루하다
'홀(忽)'은 없는 것 같아서 잘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반면 '황(恍)'은 있는 듯하지만 잘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회(晦)'는 백서에 원래 '해(海)'이지만 성현영에 따르면 하상공본에는 원래 '회'로 되어 있다고 하였고, 왕진본, 사마광본, 소철본 등도 역시 '회'로 썼으며, 육덕명에 따르면 엄준본에도 원래 '회'였다고 한다.
이 글자로 보는 것이 더 부드럽기 때문에 이렇게 고친다. 이 문장에 나오는 두 개의 '이(以)'에서 앞의 것은 '용(用)'과 통하고(왕필), 뒤의 것은 '이(而)'와 통한다(마서륜).
이 문장 역시 '나'와 뭇사람을 비교하는 글이다. '나'는 노자의 길을 따르는 사람이다.
⚪ 吾欲獨異於人, 而貴食母
나만 홀로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여 유모를 귀하게 여긴다
'사모(食母)'에는 논란이 있지만 어떤 견해에서든 생명의 배양과 관련된다. '예기' 내칙에 "대부의 자식에게는 유모(食母)가 있고, 사(士)의 경우에는 부인이 직접 그 자식을 기른다"는 말이 있으므로 오징과 초굉의 설을 좇아 유모로 본다. 유모는 낮은 신분이지만 젖을 주어 생명을 기르는 사람이다.
'노자'가 앞에서 묘사한 남과 다른 '나'의 모습은 결과이다. 지금 서술하고 있는 것이 노선이다. 노자가 남과 다른 것은 지금 밝히는 것처럼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한" 노선의 결과이다.
이 노선의 핵심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유모(食母)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유모는 젖을 주는 사람이므로 노자는 허울 좋은 귀족 양반 마님보다는 실속 있는 유모를 택한 것이다.
곧 노자는 사회적 영달보다는 개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노선을 선택했다. 뭇사람과 달라지기를 원한 노자는 허영심을 버림으로써 영원히 배부르게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밥줄, 젖줄을 찾은 셈이다.
그런데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노자와 남들과 달라지고자 한 노자는 같은가? 앞에서는 남들과 같아져야 한다고 말하고 여기에서는 남들과 달라지고자 하는 노자는 정말로 동일한가?
노자는 편집된 책이므로 정합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물론 편집자의 의도가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정합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겠지만 억지로 해서는 안 된다. 이 글도 초간문에는 앞부분만 나오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 앞부분만 있었던 글을 편집자가 지금처럼 살을 붙여놓은 것이다. 그 살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든 편집자 자신의 해설이든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앞뒤의 글이 서로 어긋나게 되었을 수 있다. 노자에서 보이는 사상의 비정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은 이것이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표면적인 비정합성을 정합적인 것으로 돌리는 해설을 제시하는 것이다.
가령 이 글에서 "남이 두려워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남들이 사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고자 하는 인순의 원리고, "남과 다르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인순 속에서도 내면의 자유를 향유하는 고답의 경계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니
배우지 않으면 해로움이 없다
(좌전 소공 18년)
▶️ 無(없을 무)는 ❶회의문자로 커다란 수풀(부수를 제외한 글자)에 불(火)이 나서 다 타 없어진 모양을 본뜬 글자로 없다를 뜻한다. 유무(有無)의 無(무)는 없다를 나타내는 옛 글자이다. 먼 옛날엔 有(유)와 無(무)를 又(우)와 亡(망)과 같이 썼다. 음(音)이 같은 舞(무)와 결합하여 복잡한 글자 모양으로 쓰였다가 쓰기 쉽게 한 것이 지금의 無(무)가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無자는 '없다'나 '아니다', '~하지 않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無자는 火(불 화)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無자를 보면 양팔에 깃털을 들고 춤추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무당이나 제사장이 춤추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춤추다'가 본래의 의미였다. 후에 無자가 '없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 되면서 후에 여기에 舛(어그러질 천)자를 더한 舞자가 '춤추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無(무)는 일반적으로 존재(存在)하는 것, 곧 유(有)를 부정(否定)하는 말로 (1)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공허(空虛)한 것. 내용이 없는 것 (2)단견(斷見) (3)일정한 것이 없는 것. 곧 특정한 존재의 결여(缺如). 유(有)의 부정. 여하(如何)한 유(有)도 아닌 것. 존재 일반의 결여. 곧 일체 유(有)의 부정. 유(有)와 대립하는 상대적인 뜻에서의 무(無)가 아니고 유무(有無)의 대립을 끊고, 오히려 유(有) 그 자체도 성립시키고 있는 듯한 근원적, 절대적, 창조적인 것 (4)중국 철학 용어 특히 도가(道家)의 근본적 개념. 노자(老子)에 있어서는 도(道)를 뜻하며, 존재론적 시원(始原)인 동시에 규범적 근원임.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실재이므로 무(無)라 이름. 도(道)를 체득한 자로서의 성인(聖人)은 무지(無智)이며 무위(無爲)라고 하는 것임 (5)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어서 없음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없다 ②아니다(=非) ③아니하다(=不) ④말다, 금지하다 ⑤~하지 않다 ⑥따지지 아니하다 ⑦~아니 하겠느냐? ⑧무시하다, 업신여기다 ⑨~에 관계없이 ⑩~를 막론하고 ⑪~하든 간에 ⑫비록, 비록 ~하더라도 ⑬차라리 ⑭발어사(發語辭) ⑮허무(虛無) ⑯주검을 덮는 덮개 ⑰무려(無慮), 대강(大綱)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빌 공(空), 빌 허(虛)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있을 유(有)이다. 용례로는 그 위에 더할 수 없이 높고 좋음을 무상(無上), 하는 일에 막힘이 없이 순탄함을 무애(無㝵), 아무 일도 없음을 무사(無事), 다시 없음 또는 둘도 없음을 무이(無二), 사람이 없음을 무인(無人), 임자가 없음을 무주(無主), 일정한 지위나 직위가 없음을 무위(無位), 다른 까닭이 아니거나 없음을 무타(無他), 쉬는 날이 없음을 무휴(無休), 아무런 대가나 보상이 없이 거저임을 무상(無償), 힘이 없음을 무력(無力), 이름이 없음을 무명(無名), 한 빛깔로 무늬가 없는 물건을 무지(無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을 무자(無子), 형상이나 형체가 없음을 무형(無形),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하는 것이 없음을 무념(無念), 부끄러움이 없음을 무치(無恥), 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음을 무리(無理),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이르는 말을 무원고립(無援孤立),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을 형용해 이르는 말을 무궁무진(無窮無盡),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능(無所不能), 못 할 일이 없음 또는 하지 못하는 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엇이든지 환히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무불통지(無不通知),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기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일체의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일체의 상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념무상(無念無想), 아버지도 임금도 없다는 뜻으로 어버이도 임금도 모르는 난신적자 곧 행동이 막된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부무군(無父無君),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매우 무지하고 우악스러움을 일컫는 말을 무지막지(無知莫知), 자기에게 관계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이고 함부로 나서서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불간섭(無不干涉), 성인의 덕이 커서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유능한 인재를 얻어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짐을 이르는 말을 무위이치(無爲而治), 몹시 고집을 부려 어찌할 수가 없음을 이르는 말을 무가내하(無可奈何),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나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무용지물(無用之物) 등에 쓰인다.
▶️ 學(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은 ❶회의문자로 아이들이 양손에 책을 들고 가르침을 본받아 깨우치니 배우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學자는 '배우다'나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學자는 臼(절구 구)자와 宀(집 면)자, 爻(효 효)자,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學자를 보면 집을 뜻하는 宀자 위로 爻자를 감싼 양손이 그려져 있었다. 한자에서는 爻자가 무늬나 배움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이것은 '배움을 가져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의 學자는 집이나 서당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子자가 더해지면서 '아이가 배움을 얻는 집'이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學(학, 교, 할)은 (1)철학 또는 전문적인 여러 과학을 포함하는 지식의 조직체. 곧 현실의 전체 또는 그 특수한 영역 및 측면에 관하여 체계화된 지식의 계통적 인식 (2)학문(學問) 등의 뜻으로 ①배우다 ②공부하다 ③흉내내다 ④모방하다 ⑤가르침 ⑥학교(學校) ⑦학문(學問) ⑧학자(學者) ⑨학통(學統) ⑩학파(學派) 그리고 ⓐ가르치다(교) 그리고 ㉠고지새(되샛과의 새)(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익힐 련(練), 익힐 습(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르칠 교(敎), 가르칠 훈(訓), 가르칠 회(誨)이다. 용례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학교(學校),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문(學問), 사물을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습(學習),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을 학자(學者), 학문의 실력이나 역량을 학력(學力), 공부하여 학문을 닦는 일을 학업(學業), 학문의 사회나 학자의 사회를 학계(學界),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출신 학교에 따른 연고 관계를 학연(學緣), 학문의 기술 또는 학문의 방법이나 이론을 학술(學術), 공부한 이력을 학력(學歷),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을 학비(學費), 배워서 얻은 지식을 학식(學識),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학생의 무리 또는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학업을 닦음을 수학(修學),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배우지 못함이나 학문이 없음을 불학(不學), 일정한 목적과 방법으로 그 원리를 연구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우는 학문을 과학(科學), 인간이나 인생이나 세계의 지혜와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哲學),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학교에 들어감을 입학(入學), 개인의 사사로운 학설 또는 개인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사학(私學), 외국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留學), 학문에 나아가 닦음 또는 상급 학교로 나아감을 진학(進學), 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한동안 수업을 쉬는 일을 방학(放學), 방학을 마치고 다시 수업을 시작함을 개학(開學), 다니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겨가서 배움을 전학(轉學), 학문에 힘써 공부함을 면학(勉學),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배운 것을 항상 복습하고 연습하면 그 참 뜻을 알게 됨을 이르는 말을 학이시습(學而時習),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학여불급(學如不及),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함을 일컫는 말을 학업정진(學業精進),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말을 학여역수(學如逆水), 외고 읽을 뿐으로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고 또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을 일컫는 말을 기송지학(記誦之學), 배우지도 못하고 아는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불학무식(不學無識), 널리 공부하여 덕을 닦으려고 뜻을 굳건히 함을 이르는 말을 박학독지(博學篤志)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부적절(不適切),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나 죽여 없애야 할 원수를 일컫는 말을 불구대천(不俱戴天), 묻지 않아도 옳고 그름을 가히 알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불문가지(不問可知), 사람의 생각으로는 미루어 헤아릴 수도 없다는 뜻으로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묘한 것을 이르는 말을 불가사의(不可思議),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일컫는 말을 부정부패(不正腐敗), 지위나 학식이나 나이 따위가 자기보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함을 두고 이르는 말을 불치하문(不恥下問),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라는 뜻으로 마흔 살을 이르는 말을 불혹지년(不惑之年), 필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음을 일컫는 말을 불요불급(不要不急), 휘지도 않고 굽히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어떤 난관도 꿋꿋이 견디어 나감을 이르는 말을 불요불굴(不撓不屈), 천 리 길도 멀다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먼길인데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달려감을 이르는 말을 불원천리(不遠千里) 등에 쓰인다.
▶️ 害(해할 해, 어느 할, 어찌 아니할 갈)는 ❶회의문자로 갓머리(宀; 집, 집 안)部 집에 들어앉아 사람을 헐뜯고 어지럽히는(丯) 말을(口) 한다 하는 뜻이 합(合)하여 남을 해치다, 방해하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害자는 '해치다'나 '해롭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害자는 宀(집 면)자와 丰(예쁠 봉)자,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丰자는 풀이 무성하게 올라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흉기를 그린 모양자로 응용되었다. 害자는 집안에 어지러운 말다툼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글자로 본래의 의미는 '상해를 입히다'이다. 그래서 害자는 누군가를 해치거나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害(해, 할, 갈)는 (1)이롭지 못함 (2)손상(損傷)시킴 등의 뜻으로 ①해하다 ②거리끼다 ③해롭다 ④시기하다 ⑤훼방하다 ⑥방해하다 ⑦해 ⑧재앙(災殃) ⑨요새 ⑩손해(損害) 그리고 어느 할의 경우는 ⓐ어느(할) ⓑ어찌(할) ⓒ막다(할) ⓓ저지하다(할) 그리고 어찌 아니할 갈의 경우는 ㉠어찌 ~ 아니하다(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방해할 방(妨), 폐단 폐(弊),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이로울 리(利)이다. 용례로는 당을 해롭게 함을 해당(害黨), 해로움과 악함을 해악(害惡), 좋고 바른 것을 망치거나 언짢게 하여 손해를 끼치는 것을 해독(害毒), 사람을 해침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을 해인(害人), 힘써 일하는 데 방해함을 해공(害工), 백성을 해롭게 함을 해민(害民), 해치고자 하는 마음을 해심(害心), 해치고자 하는 뜻을 해의(害意), 적을 해침을 해적(害敵), 어떤 사람이 재물을 잃거나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해를 입은 상태를 피해(被害), 불법적으로 남을 해침을 침해(侵害), 폐가 되는 나쁜 일 또는 나쁘고 해로운 일을 폐해(弊害), 남의 일에 헤살을 놓아 해를 끼침을 방해(妨害), 가지고 있거나 누릴 수 있는 물질이나 행복 등을 잃거나 빼앗겨 좋지 않게 된 상태를 손해(損害), 막아서 못 하게 해침을 저해(沮害), 이익과 손해를 이해(利害), 남의 생명을 해침을 살해(殺害), 재앙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재해(災害), 남에게 해를 줌이나 남을 다치게 하거나 죽임을 가해(加害), 해가 있음 또는 해로움을 유해(有害), 못견디게 굴어서 해롭게 함을 박해(迫害), 남의 몸에 상처를 내어 해를 입힘을 상해(傷害), 거리껴서 해가 됨을 장해(障害), 홍수로 인한 해를 수해(水害), 추위로 얼어 붙어서 생기는 손해를 동해(凍害), 넌지시 남을 해롭게 함을 음해(陰害), 스스로 자기 몸을 해침을 자해(自害), 추위로 말미암아 받은 손해를 한해(寒害), 물건을 해치려는 마음을 일컫는 말을 해물지심(害物之心), 이해 관계를 이모저모 따져 헤아리는 일을 일컫는 말을 이해타산(利害打算), 해롭기만 하고 하나도 이로울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백해무익(百害無益), 이로움과 해로움과 얻음과 잃음을 일컫는 말을 이해득실(利害得失), 겉으로는 유순하나 속은 검어서 남을 해치려는 간사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음유해물(陰柔害物), 이익과 손해가 반반으로 맞섬을 일컫는 말을 이해상반(利害相半)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