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들여다보기〛
지구 종말의 한계상황에 처한
마지막 인간들의 실존적 고뇌
부두연극단의 <종말체험 End Game>
글_ 김문홍 극작가 연극평론가
형식 실험으로 일관한 연극적 신념
극단 부두연극단은 올해 창단 40주년을 맞았다. 이 극단은 창단 이래 한결같이 일관성 있는 레퍼토리 공연의 연극적 신념을 지켜오고 있다.(국제신문 2023.12.27 문화면 기사 참조) 창작극보다는 번역극을, 상업적 재미 위주의 작품보다는 해외의 현대 고전 명작, 부조리극, 동시대의 해외 문제작들을 주요 레퍼토리로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해 오고 있다. S.베케트의 전 작품을 공연했고, 주요 레퍼토리로는 <고도를 기다리며>, <에쿠우스>, <19 그리고 80> 등이 있다.
부두연극단이 세밑을 장식하는 지난해 마지막 공연으로 <종말체험 End Game>(S.베케트 작, 이성규 재구성 연출, 90m, 2023.12.26~30, 액터스소극장>이라는 이색 공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End Game>을 환경연극으로 재구성하여 선보이고 있는데, 방사능 오염, 지구 온난화, 바이러스 창궐로 인류 90%가 멸망하고, 마지막 남은 네 사람(햄, 클로브, 햄의 부모)이 표본실이라는 한계상황에 갇힌 그들의 실존적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환경연극이면서 관객 역시 무대를 지켜보는 타자가 아니라, 이 표본실에 피신하여 그들의 마지막을 적극적으로 관찰하며 지금까지 환경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생각을 성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관객참여형 연극'(이머씨브 씨어터)이기도 하다. 그래서 관객은 입장하면서부터 마스크를 배부받아 착용하고 손을 세척 하는 과정을 겪는다. 극장에 입장하면 방호복을 입은 해설자(권철 분)의 지시 지시를 따라야 한다. 해설자는 객석 여기저기에 소독약을 뿌리는가 하면, 극이 시작되면 관극할 때 관객의 처지와 입장, 그리고 태도를 권유하기도 했다.
극이 시작되면 해설자는 지금 이곳이 어떤 곳인가를 설명해 주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의 역할을 부탁하기도 한다. 때로는 극에 직접 개입하기도 하며 극중 장면을 설명하는 일종의 서사극 적 화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극 속의 클로브(이동희 분)가 빈대가 나왔다며 살충제를 뿌리면 극 중 의사 역(권철 분)을 맡은 배우가 직접 소독약을 객석에 뿌리기도 하고 가상의 쥐를 쫓기도 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전직 의사였던 햄(박상규 분)은 방사능 오염으로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해 휠체어에 의존해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전직 의사 햄의 조수였던 클로브(이동희 분) 역시 오염되어 절룩거리며 앉지 못하는 형벌을 감수하며 햄의 하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햄의 부모인 나그(김경수 분)와 넬(조미경 분)은 쓰레기통에 갇혀 사육당하고 있다. 햄은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고 싶어 한다. 그는 자학적이고 어느 때는 냉소적인 독백을 일삼으며 때로는 철학적인 대사를 읊조리고, 그의 하인인 클로브는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이 작품의 주제를 은유하는 대사와 독백, 방백을 일삼는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실존적 고뇌에 대한 환경연극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이들의 실존적 고뇌를 보여준다. 클로브의 몇몇 대사는 인간 멸종의 상황에서 다소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살아있는 아기를 발견하고, 때로는 인류의 재앙은 인간의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자연의 방치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것은 인간의 사랑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예언자적 구원을 은유하는 방백을 늘어놓기도 하면서, 관객에게 환경오염에 대한 성찰의 말을 은유적으로 상징하는 구원자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말미 부분에서 클로브의 망원경에 잡힌, 자신의 배꼽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발견은, 이 아이로 인해 다시 인류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암시를 주기도 한다.
극의 종결 부분에서 클로브는 방독면을 쓴 채 표본실을 떠나고, 햄은 자신을 성찰하며 죽음을 수용하는 독백을 중얼거리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들의 승부는 결국 종말을 맞고, 이 비극적 상황을 관찰자적 태도로 지켜보던 관객 역시, 환경에 대한 성찰로 극장 밖을 나서며 환경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일종의 서사극 적 비전으로 관객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행동까지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진 일종의 도덕적 교훈의 연극으로,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의 서사를 추동하고 있는 햄과 클로브의 몇몇 대사를 살펴보면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현실 인식을 추론할 수 있다. 작품 후반부에서 클로브는 “누군가 말했다. 바로 그거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전 들었어요. 넌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것을 생각해 보아라. 모든 게 단순하고 명료해질 테니. 전 들었어요. ‘모든 죽어가는 이들을 정성껏 돌봐야 한다’라고.” 하는 대사를 끝으로 바깥으로 나간다. 그 전에 모든 것이 다 소멸한 사이에서 아이가 자기 배꼽을 보며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도 역시 클로브이다. 이런 에피소드를 추론해 볼 때 우리는 그의 희망적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클로브는 곧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올해 부산지역 연극계 마지막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두연극단의 환경연극 <종말체험 End Game>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극단의 연극적 이념과 목표에 적합한 공연으로 창단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점이다. 재미 위주의 공연으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엄혹한 현실을 냉담하게 바라보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지만 작품을 해석하는 연출자의 독창적인 실험적 형식미학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독보적인 연극 문법을 엿보게 한다는 점이다. 관객을 연극에 참여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환경연극을 소재로 한 관객참여형 연극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극장의 모든 스텝이 방호복으로 갈아입은 채 관객에게 마스크를 배부하고, 해설자라는 새로운 인물의 설정으로 시종일관 무대의 상황과 인물을 관찰하면서 극에 간접 개입하기도 하고, 관객의 허구 개입을 유도하기 위한 갖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원작인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이라는 난삽한 희곡을 ‘지금 이곳’의 환경오염과 접목시켜 관객에게 접근하기 쉬운 공연 텍스트로 전환하고, 30여 쪽에 달하는 환경에 관한 안내 책자를 제공하여 작품의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대 세트 역시 표본실에 가깝게 장치하고, 시종일관 음울하고 절망에 가까운 극적 분위기를 위해 어두운 청색 계통의 차가운 색감의 조명 디자인 역시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금 서툴고 깔끔하지 않아도 연극 정신이 살아있는 그 형식미학을 살리려 안간힘을 쓴 연출자의 그 정신을 다시 확인했다는 점이다.
관객의 상상력을 보강하는 입체적인 대사의 아쉬움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다. 이 작품은 극적 행동이 약하고, 반복적인 행동이 반복되면서 대사에 의해 극의 추동력이 되고 있는 만큼 극 중 인물의 화술의 적확한 운용이 절대적이다. 클로브 역의 이동희는 표정과 시선 처리, 다양하고 입체적인 연기 패턴으로 극에 생동감을 주고 있다. 문제는 햄 역의 박상규 배우이다.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는 만큼 관객에게 말하는 방백과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독백, 그리고 대사를 입체적으로 운용하고 앉아서 연기하는 만큼, 대사의 입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행동을 보완하는 표정, 시선, 마임을 입체적으로 구별해 관객의 상상력을 보강하는 대사를 운용해야 하는데, 그 점이 흡족할 만큼 성과를 내지 못해 다소 아쉬웠다. 햄의 아버지(김경수 분)와 어머니인 넬(조미경 분)은 행위 연기와 제스처, 그리고 표정 연기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데, 너무 거기에만 마음을 기울이다 보니 대사의 발성이 명확하지 못해 대사전달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연극은 모든 장면에 다 심혈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커튼콜까지의 마무리도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시종일관 애써 무대를 지켜본 관객들의 감정이입에 방점을 찍는 행위이며 주제와 작가의 현실 인식을 정리하기 때문이다. 또한 커튼콜 역시 연극의 연장 선상에 있어 관객에게 마지막 서비스를 한다는 예의로 더욱더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것이 좀 아쉬웠다.
평자는 지난해 부산지역의 연극 결산을 생각해 보면서 연출자의 형식미학이 돋보이는 작품에 주목하고 있다. 부두연극단의 환경연극 <종말체험 End Game>을 위시해서, 연출의 힘을 보여준 동그라미 그리기의 <집을 떠나며>(박장렬 연출), 옛 가옥의 방을 옮겨 다니며 억압과 굴욕적인 여성주의의 서사를 보여준 극단 C의 <레드 힐 Red heel> (황지선 연출), 연기 앙상블과 무대 미술의 예술적 미학을 보여준 극단 시나위의 <세자매>,(이기호 연출), 시극 형태의 난해한 희곡을 시적 판타지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표현한 극단 공연예술 창작집단 어니언 킹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전상배 연출), 연작 연극의 형태로 현실을 희극적 톤으로 풍자한 극단 배우 창고의 <매혹적인 이야기>, (김가영 연출), 배우의 힘과 연기 앙상블, 무대 전환의 기능적 순발력을 유려하게 시도한 극단 동녘의 <1945>, (최용혁 연출), 시극 형태의 철학적인 선문답으로 인간 삶에 있어서 숨의 연대를 일깨우고 강조한 극단 일터의 <하늘을 먹는 자 좌뜰 천식이> (김선관 연출) 등의 작품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작품들은 하나같이 연출자의 독창적인 형식미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부두연극단의 <종말체험 End Game>은 원로 연출가의 끊임없는 형식 실험의 열정을 확인하게 한 몇 안 되는 공연 중의 하나였다.
첫댓글 오염된 환경으로 주제를 바꿔 시도한 점이 돋보입니다.
결국 생명의 탄생이 지구를 살리는 힘입니다.
배꼽은 태아를 연결하는 끈이며 우주의 중심이죠.
그늘에서 묵묵히 연극에 헌신하는
출연진과 무대감독, 그리고 작가들!
평론을 해주시는 선생님!
모두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