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문(全州崔門) 최사의(崔士儀)
조선초 청백리(淸白吏) 최사의(崔士儀)
○ 1376년(우왕 2)∼1452년(단종 즉위), 고려말 ~ 조선초 문신, 청백리(淸白吏),
○본관은 전주(全州), 자(字)는 범숙(範叔), 시호는 양도(良度),
○ 조부는 감찰대부(監察大夫) 최재(崔宰)이고, 부친은 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使) 최유경(崔有慶)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랐다,
○ 태조 2년(1393) 의랑(議郞-정4품)으로 재임중, 임금이 세자(世子)의 현빈(賢嬪) 유씨(柳氏)를 내쫓았는데, 여러 대간과 헌부에서 간하였다가, 임금이 노하여 모두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고, 다음날 공은 본향(本鄕)으로 귀향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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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13년(1413) 6월 24일 부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使) 최유경(崔有慶)에 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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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6년(1424) 10월 임금이 최씨(崔氏)와 박씨(朴氏)를 선택하여 후궁(後宮)에 들이었는데, 최씨(崔氏)는 공에 딸이다, 다음날 명의 궁주(明懿宮主)로 봉하고, 공은 충좌사 상호군(忠佐司上護軍-정3품)에 임명 되었다,
○ 세종 8년(1426) 7월 공조 참의(工曹參議)가 되고,
○ 세종 9년(1427) 3월 이조 참의(吏曹參議-정3품)가 되었다,
○ 세종 10년(1428)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어 재임중 선위사(宣慰使)로 평양(平壤)에 다녀 오고, 9월 호조 참판(戶曹參判-종2품)에 올랐다,
○ 세종 12년(1430)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종2품)를 거쳐,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재임중 11월 임금이 시복(時服) 차림으로 백관을 거느리고 정조(正朝)를 하례하는 표·전문(表箋)을 배송(拜送)하였는데.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유한(柳漢)과 함께 표·전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다가,
○ 세종 13년(1431) 2월 말에 돌아 왔다, 3월 경기 감사로 있을 때에, 성개(成槪)의 청탁을 좇아 농번기에 황해도로 이문(移文)하여 도망한 종[奴]을 체포해 보내게 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 되었다, 10월 다시 중군총재(中軍摠制)로 복직하고,
○ 세종 14년(1432) 1월 개성 부유후(開城副留後)가 되었다, 2월 인순부 윤(仁順府尹)이 되고, 3월 예조 좌참판(禮曹左參判-종2품)을 거쳐, 7월 다시 인수부 윤(仁壽府尹)이 되었다가, 8월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 12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종2품)가 되고,
○ 세종 15년(1433) 10월 사은사(謝恩使)가 되었다, 12월 형조 좌참판(刑曹左參判)으로 자리를 옮기고,
○ 세종 16년(1434) 2월 북경에서 돌아 왔다, 4월 한차례 연임되고, 6월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거쳐, 9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 세종 17년(1435) 2월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어 재임중
○ 세종 19년(1437) 2월 기민이 길을 지나가다가 진제장 옆에서 죽은 일이 있어 그 책임으로 판한성부사 이숙묘(李叔畝) 등과 함께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 곧 풀려 났다,
○ 세종 19년(1437) 6월 인수부 윤(仁壽府尹)이 되고,
○ 세종 21년(1439) 한차례 연임 되었다, 이어서 곧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기린(麒麟)이 나타난 것을 하례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 갔다가 3월에 돌아 왔다, 6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 세종 23년(1441)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가 되고, 윤 11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정2품)에 올랐다,
○ 세종 24년(1442) 6월 다시 인수부 윤(仁壽府尹),
○ 세종 26년(1444) 11월, 세종 27년(1445) 6월 두차례 연임 되고,
○ 세종 28년(1446) 6월 가돈녕부사(加敦寧府事)를 거쳐 7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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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종 즉위년(1450) 7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종1품)에 오르고, 9월 6일 졸하였다,
2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쌀·콩 아울러 20석과 종이 80권을 사부(賜賻)하였다.
최사의의 자(字)는 범숙(範叔)이며 전주 사람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직사(職事)에 올랐다가 여러 번 중외의 벼슬을 역임하여 판돈녕부사에 제배(除拜)되었고 궤장(几杖) 을 하사하고 이어서 치사(致仕)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7세였다. 딸이 세종의 후궁에 들어가서 1품에 이르렀다. 수염이 없고 얼굴이 노파(老婆)와 같아서 세상에서 원숭이 재상[獼猴相]이라고 하였다. 증시(贈諡)는 양도(良度)인데, 온량하고 화락함을 좋아함이 양(良)이고, 마음이 능히 도의(道義)를 절제함이 도(度)이다.
○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출처] 전주최문(全州崔門) 최사의(崔士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