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1
[고난-사람의 차이는 고난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있다. ]구본형,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 동아 01.2.3. B1
(시119편 65-72)
구본형이 권하는 직장인의 자기혁명 10계명
1. 직장인은 죽었다. 고용 당한다는 개념을 죽여라. -강한표현 그러나 고용주가 해결사가 아니다.
2. 자기 속에서 가장 강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라.
3. 잃어버린 꿈을 찾아라. 자기 것만 남기고 다 버려라. -설교의 예
4. 혁명은 전략을 필요로 한다. 3년간의 자기 혁명 지도를 만들어라. -예수 사역 3년.
5. 삶은 분기점을 요구한다. 나의 날을 정하고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 말라.
6. 시간은 가장 희귀한 자원이다. 하루 10%는 자신에게 투자하라. -(7개국 청년 탐험대, "극에서 극까지"프로그램 ,24000킬로를 주로 자전거로 이동, 혹한 속에서도 갈수록 추워지는 남극의 12일 동안의 하루 30킬로 행군-Tv다큐물에서- 천리길도 한걸음부터 그 한 걸음의 중요성을 잊지말라.)
7. 상황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정성을 쏟아라.
8. 지금 하고 있는 방법이 최선은 아니다.
9. 틈새를 찾아 특화하라. 새로운 시장만이 새로운 기회다.
10.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라. 그러면 최고의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과연 위의 10계명이 자기 혁명을 가능케 할까? 변화에는 반드시 계기가 있다. --물리적인 변화 이전에 영적인 변화가 있고, 그 이전에는 고통스런 주님의 섭리가 있다. 고난이 복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삭개오의 경우)
시 119:65-72 (70절-한나라 충신 왕윤의 연환계(連環計)에 말려든 동탁은 자신의 심복인 여포와 천하제일의 미인 초선을 차지하려고 싸우다 여포의 방천화극에 맞아 죽는다. 동탁이 죽자 학정에 시달린 백성은 그의 비대한 몸을 저잣거리로 끌고 나와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붙인다. 동탁의 뱃살에 축적된 기름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불이 꼬박 하루 밤낮을 탔다고 삼국지는 전한다.)
예화2
[응답시기] -빨리빨리
(요11:17-21)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헛소동’에서 ‘의복을 헌옷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유행이다’라고 이미 예견한 바 있다. 그의 예언처럼 유행이란 덧없고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그 속도도 빠르다. 이걸 보면 바다에만 밀물과 썰물이 있는게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 생각과 행동에 조류가 있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어느 식당이나 가장 잘 팔리는 음식이 다 꼭 같다는데 그게 뭘까요? 그것은 어느 식당에도 없는 것--? "제일 빨리 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한다. "제일 빨리 되는 것으로 주세요".
나사로의 누이들이 급했다. 정말 급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소식 듣고도 이틀을 더 지체한 예수(6).
어느 목사님께서 "충청도 하나님"이란 이야기를 하셨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기도하는 즉시 응답을 받았다고들 하는데, 이 목사님이 체험한 하나님은 상당히 더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기도를 해도 감감 무소식일 때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급한 것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어떤 교회의 게시판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
"하나님, 저는 너무 조급합니다.
저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에게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인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21절의 가슴 찢어지는 소리, 시기에 관한 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 --주님의 응답은 정확하다는 것.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 --예수님의 말씀. 그러면 달라고 하지도 말고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라는 건가?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기다릴지 안 기다릴지 그 단서는 정확한 주님의 응답에 대한 신뢰 여부가 결정하는 것. 그 분은 더디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다. 단지 정확하다. 이에 대한 신뢰가 있느냐 하는 것.
자기가 뭘 구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바램이 뭔지 음미하라, 정확한 주님을 신뢰하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응답이 올 때 까지 잊지말라.
예화3
[혈과 육]-흙, 하늘, 등산
(고전 15 : 48-50)
천리안에 등산과 인생에 관한 재미있는 글 소개.
바둑의 급수로 산 사랑을 평가하노니 후학(後學)들은 자기의 위치를 깨닳고 애써 배울일이라. 헐!
8급. 타의입산(他意入山)--이 부류는 산 보다 그림틀(티비)을 선호하야, 휴일이면 리모콘이 유일한 장난감인 바, 회사에서 또는 모임에서 결정된 산행이 있으면 어쩔수 없이 따라 나서는 인간이니라. 특징. 멀쩡한 하늘에서 비가 억수로 쏱아지기를... 그래서 산행이 취소 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놀부 심보가 있느니라.
7급. 증명입산(證明入山)--이 부류는 산을 좋아해 찾는 것이 아니라 사진 찍으러 가느니라. 애써 걷기는커녕 물 좋고 경치 좋으면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호치키스 찍듯이 찰칵찰칵 사진을 찍느니라. 특징. 경관이 좋은 곳을 배경으로 증명사진을 찍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한국의 산은 다 가봤다는 자료로 활용하느니라.
6급. 섭생입산(攝生入山)--이 부류는 오로지 '묵'으러 산을 가느니라.
한 배낭 가득히 묵거리를 챙기고 계곡을 찾아 퍼질러 앉아서 식탐을 즐겨하느니라.
5급. 중도입산(中道入山)--이 부류는 산행을 하긴 하되 꼭 중도에서 하산을 하느니라.
그리고 제 다리 튼튼하지 못 함을 탓 하지 아니하고 꼭 뫼만 높다 하는 인간이니라.
특징. 뭐... 꼭 정상을 올라가야 되나. 올라가면 누가 밀가루 배급이라도 준단 말이냐. 하는 자기 합리화 형.
4급. 화초입산(花草入山)--이 부류는 내내 집에만 있다가 진달래 철쭉 꽃피는 춘삼월이나, 만산홍엽으로 불타는 경치 좋은 계절이면, 갑자기 산에 미치는 인간형이니라.
특징. 제 얼골 못난 까닭에 예쁜 꽃이나 단풍을 꼭 끼고 사진을 찍느니라.
3급. 음주입산(飮酒入山)--이 부류는 그래도 좀 산을 아는 ^.^ 인간이니라. 산행을 마치면 꼭 '하산주'를 먹어야 산행이 끝났다고 주장하며, 산을 열심히 찾는 이유가 성취감 뒤에 따르는 맛 난 하산주 때문일 경우가 허다하니라.
2급. 선수입산(選手入山)--이 부류는 산을 마라톤 코스로 생각하고, 산을 몇 개 넘었다느니 하루에 이렇게 많이 걸었다느니 하는 것을 자랑하려 산을 찾는 인간이니라. 그러나 달리기 시합에 나가면 늘 꼬랑지니라.
특징. 이 인간을 따라 나서면 대개가 굶는다. 먹을 때도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해치우고 오로지 걷느니라.
1급. 무시입산(無時入山)--이 부류는 산의 정신을 좀 아는 까닭에 비가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제사가 있으나 아이가 아프나, 자기가 계획한 산행은 꼭 하는 스타일이니라. 특징. 폭풍이 몰아쳐 "오늘 산행 취소지요?" 하고 물으면 "넌 비온다고 밥 안먹냐?" 하고 되묻는 무식함이 돋보이는 부류니라.
**다음에 초단에서 쭉 올라가서 마지막,
9단 입산금지(入山禁止)--이미 죽어 코딱지만 한 산... 아니 봉분 아래 깔려 있느니라.
결국 사람은 흙에서 와서 산을 오르내리다가 무덤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말씀에는...
흙과 하늘이 대비됨. --우리는 하늘에도 속한 자가 되어야.
그 이유 : -혈과 육 --땅, 썩어질 것. (피가 거꾸로? 하늘로 향하고 싶어도 결국은 땅에)
혈과 육으론 안되는게 많다. --산에 오르는 이유 : 하늘을 보기 위해서.
** 통나무 봉훈련 : 하늘 (파랗다), 노래질 때까지 계속 (노랗다), 하늘은 원래 파랗다. 군기가 빠졌다는 증거, 다시 파래질 때까지 계속. 하늘은 혈과 육으론 안되는게 많다는 걸 깨닫게 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시민이다.
예화4
[시너지]-인간관계
전 4: 9-12
시너지란 상승효과를 말한다. 이는 인간 창조와 함께 본래적이다.
천재와 미녀가 만나서 왈, 머리와 외모가 만나면... 시너지효과, 반대로 천재의 외모와 미녀의 머리가 만나면...
역시너지 효과.
본문은 진정한 시너지즘이 뭔지 알려준다. 9와 12절은 시너지의 목표를 말해준다.
그런데 시너지에 있어서 현실적인 어려움은 사람들이 대등하면 경쟁하려 들고, 상하정립되어야 협력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의리의식은 배타적이다. 개인의 업적과 실적에선 차이를 인정하나 그것이 개별적 인간관계에선 갈등관계로 나타나기가 비일비재하다.
서울신대 김종한교수는 "가족관계에선 패자가 없다"고 한다. 또한 인간관계에선 무승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 진정한 시너지즘은 10,11절에서 출발한다. 승자가 되는 것보다 나의 이웃이 패자가 안되는게 더 중요하다.
예화5
[상처의 치유]-음치
사53:4-5
음치라는 문제가 심각한 문제인줄은 몰랐다. 신문을 보니, 獨 시사誌 :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음치가 脫毛나 勃起不全 같은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다. 어떤 처녀는 음치라는 사실 때문에 혼기를 놓쳐서 노처녀가 되고, 이 문제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교사도 있다니 말이다.
우리나라의 음치인구-- 서수남씨는 지난 10여 년간 노래교실을 운영하면서 관찰한 바를 토대로 전체 인구의 5∼10 % 정도. 음치치료전문가 李秉元(이병원·40)씨 도 30∼40명 규모의 직장이나 부서에 가 보면 2∼3명 정도 음치가 있더라면서 우리나라의 음치인구를 300만명 정도로 추정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음치여서 웃음거리가 될 때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만만치 않을 듯 싶다. 성경 잠언에도 잠 25:20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쏘다 위에 초을 부음 같으니라 했는데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는가? (첫음 못잡는 목사.)
그런데 상한 마음을 방치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상처는 당해보는 사람만이 그 심각함을 안다. 그런데 왜 그럴까? 예를 들어 농어촌에는 장애인이 많다. 가족들은 그들의 바깥출입을 꺼리기 때문에 전체 장애인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상처는 방치된다. 왜? 그럴까? 본문은 치유의 복음인데... 믿는 사람들도 복음의 진가를 모른다. 그 이유는?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마음의 상처라는게 인스탄트식으로 금방 치유의 진전이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처와 부정적인 마음은 서로 타고난 친구이다. 전염도 빠르다. 그러나 치유의 효과는 너무도 느리다. 그래서 복음이 좋은 말씀인건 알지만 말씀이 말로만 그쳐버린다. 마음의 상처와 부정적인 생각은 치유의 복음을 쉽게 몰아낸다. 그러므로 생각이 문제이다. 사람이 뛰다보면 걷고싶고, 걷다보면 앉고싶고, 그다음엔 눕고싶고, 그다음엔 자고싶은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몰아낸다. 그러나 누가 영원히 자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일어서야 하고 다시 뛰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상한 마음을 주님께 내어놓는다면 먼저 우리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본문을 진지하게 쳐다보라, 거기에서 그런 음성이 들리는가? --내 생각은 네 생각과 다르다. 생활에서 방치된 자신의 상처에 대한 고질적인 내 생각과 선포된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음치를 먼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먼저 치료한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를들어 음치가 치료되지 않는한 마음의 상처는 계속된다고 우리 마음이 고집부린다. 그리곤 다시 옛날로 돌아간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마음을 바꿀때는 그것은 혁명이다. 점진적인 혁명이다. 치유와 상처가 하나의 굴렁쇠가 되어 반복되다가 어느날 드디어 혁명이 완성된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영화배우 율 부린너는 그의 대머리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대머리 콤플렉스를 차라리 스님같은 민둥머리로 바꾸므로써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만든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상처와 부정적인 마음을 몰아내고 드디어 완전히 몰아내고 내 마음을 사로잡는 순간, 이같은 일이 일어난다.
예화6
[분노]-주차단속
(엡4:26-27)
시아주버니라면 남편의 형?
차를 타고 가다 부부싸움을 했다.
그 때 개한마리가 지나가자 남편 왈.
'당신 친척이잖아? 반가울텐데 인사나 하지.'
그러자 아내가 그 개에게 소리쳤다.
'안녕하세요? 시아주버님!'
살다보면 기분 나쁜 날이 있다. 그런 날을 사람들은 개같은 날이라고 한다.
주차단속에 걸리면 제일 많이 하는 변명--지금 막댔어요. 1분도 안되었는데.. (한겨레21,, 주차단속원의 하루)
미용실 앞에 차량 단속을 했더니 사람이 튀어나와서 하는 말. 1분도 안됐어요. 곧 나와요. -아 그럼 한참 걸리겠네 차 얼른 빼주세요,--하는말이 “아니에요. 벌써 머리 다 자르고, 감고, 드라이도 끝났어요. 금방 나가요.” 1분 만에? 대한민국의 운전자들은 1분만에 머리도 자르고, 밥먹고 이도 쑤시고, 영화도 한편 다 본다.
먹이 주위를 뱅뱅도는 솔개마냥 단속차량이 갈때까지 여기저기 피해다니다가 단속이 가면 도로 제자리로 꼬링하는 차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스틱카를 못붙이니까 핸드폰 걸기. 담배물고 딴청하기... 단속원이 속터진다는 것.
그러나 운전자들은 그렇게 생각안한다. -정말 단속할 곳은 제대로 안하고 그래도 양심적인 내차만 봉변을 당하기 일쑤-- 운전자가 나와보니 어느새 귀신같이 딱지를 붙여놓고 연기처럼 사라진 단속자들-야속하고 원망스럽고 화가치민다 이거다.
이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수없는 날이라고 한다.
개같은 날이든 재수가 없든 우리가 이런 경험가운데서 자유롭지 못한게 사실이다.
성경대로 우리가 분을 내긴해도 죄를 짓지 않으려면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않음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분이 나는데 어떻게 그럴수 있단 말인가? 싸운 사람이 마주치면 싸운 생각이 다시 나는 것이고, 다음날 차를 보면 어제의 스티카 일이 생각나는데 어쩌란 말인가?
여기에서부터 신앙의 영역이다. 이제부터 사람을 보지말자는 것. 예수님을 생각해본다. 예수님에게도 참기어려운 상황, 화가 나는 상황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그분은 다이루었다고 고백한다. 십자가의 원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그분이 참아내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입는다는 것(사53장). 그러므로 죄짓지말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사람을 보면 안되고- 죄짓는 데까지는 가지말라는 것이요, 틈을 주지말라는 것은 마귀에게 자기를 내주고 핑계를 대지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참아야할 이유는 오직 예수의 십자가 때문이다. 다른데서 이유를 찾자면 실패하기 쉽다.
예화7
[냉정함과 정] -부자,전쟁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테드 터너 CNN회장은 저녁 식사 중에 '너는 사람이 너무 물러서 안돼"라며 아들을 해고했다.
부자는 일반적으로 냉정하다. 부자는 자본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자본주의는 배타적 사유권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비윤리적이라고 말해선 안된다. 자본의 독점이 없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레마르크의 휴머니즘 가득한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기억하는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의 태풍 속에 공습은 계속되고 폐허만 남은 세상에서 주인공 그래비와 운명적인 여인 엘리자베스는 찰나적인 사랑에 빠진다. 눈 덮인 러시아 전선에서 휴가를 받고 온 그래비에게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존재의 이유가 될 만큼 강렬하다. 죽음의 거리에서 피어난 두 사람의 사랑은 인간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움과 동시에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시금 부대로 복귀한 주인공 그래비는 엘리자베스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살려준 빨치산에게 저격당해 허무하게 죽어간다.
가수 조성모의 '아시나요' 뮤직 비디오에서는 한 병사가 정글에서 베트콩을 경계하지 않고 나비를 구경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전쟁터에서 전쟁의 법칙을 무시하고 휴머니즘을 찾으면 당신이 죽는다.
사람이 냉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예화 처럼 이기적이다. 비인간적이다. 배타적이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반대로 정이란 사사로움에 치우쳐 대의를 그르치기가 쉽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이 냉정하기가 쉽지 않고 따뜻한 정을 무조건시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정의와 공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정함이 그 진가를 나타낼 때가 있음을 유념해야 하는 것이고 그 경우가 본문의 경우이다. 냉정함이란 우리의 정서로 볼 때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태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냉정함은 십자가의 냉정함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자
기를 내어주는 가장 큰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예화8
[영생]-이산의 아픔
(눅10:25-28)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영생은 이 땅의 문제인가 아니면 저 세상의 문제인가?
85년 이산상봉후 성경탐독 신학책 낸 이재운 변호사 [인간의 사후세계]-2001년
85년 9월21일 오전 10시 평양의 고려호텔. 35년 만에 만난 아버지를 얼싸 안은 이재운(李在運·66) 변호사는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라며 감격해 했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지도자 동지의 은총"이라며 아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6·25전쟁 당시 14세이던 3대 독자를 피란 보내며 "우리 집안 종자만큼은 꼭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했던 아버지. 그때 그 기도의 힘으로 이렇게 살았다고 통곡이라도 하려 했건만. 이변호사는 서울로 돌아온 후 6개월여간 음식도 넘기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버지 같은 체제의 희생자들, 어머니는 예수라는 단어조차도 들어보지 못하시고 사망,
이변호사는 그때부터 성경을 파고들었다. 94년부터는 변호사 업무도 모두 정리하고 아예 지방으로 내려갔다. 한 줄 한 줄 새겨가며 통독한 것이 200여회. 서양사 동양사도 두루 훑었다. 의문을 풀고 싶었고 해답을 찾고 싶었다. 오랜 방황 끝에 이제 그는 나름대로 성경에서 해답을 찾았다고 한다.
'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며 중요한 것은 사후세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라는 것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가 영생에 이르는 길은 구원의 고백을 통해서 이지만, 또한 영생을 얻은 자의 삶을 통해서 증거되어야 한다. 이 사람은 구원의 고백보다는 사랑의 행위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입장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부모님 때문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구원의 고백은 없었지만 사랑의 정신으로 살았을 자기 부모님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우리가 교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물론 이러한 희망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님이 영생의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시한 것이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교리적 구원 자체가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는 만큼 영생자의 삶이 중요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 영은 이생과 내생에서 연속성을 갖고 있음도 잊지말아야 한다. 한국인은 현세에서 잘먹고 잘사는 일에 전통적으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러면서도 저 세상 천국에 대한 집착도 크다. 그 결과 현세에서는 기복을 구하고 사후에는 천당을 구하니 그것이 영생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밝히신 영생은 현세에서 구해야 하는 중요한 인생의 문제로 부각된다. 현세에서 영생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내세에서 자랑스럽지 못한 구원의 자리에 있을 뿐이다.
예화9
[동행]-신발가게 주인
단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구로시장에 가면 믿음상회라고 하는 신발가게가 있다. 그 주인은 신발과 맺은 인연만 40년에 가깝단다.
75년도에 구로에 와서 "새마을 화점"이라는 노점상을 했고 9년 후에는 청계천으로 그리고 87년도에 지금의 자리로 왔다. 그래서 이젠 '신발도사'가 됐고, 원근 각처에 단골손님도 많이 있다. 그 가게에는 돌박이 아기가 걸음마할 때, 그러니까 맨 처음 세상을 내딛을 때 신는 고무신에서 "발에 끼는 것은 다 있어요"이다.
그 신발가게 주인에게서 듣는 인상적인 말이 있다. 처음에 손님과 실랑이를 하면서 화날 때는 속내를 다 드러냈는데, 성질 급한 한국인은 이게 문제라며 일본 사람들 장삿속을 배웠단다. 그네들은 손님이 열 켤레를 신어보고 그냥 가도 90도로 절하면서 그냥 보내준다. 이것을 터득하는데 23년이 걸렸단다.
한 우물을 파는 삶의 가치란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그 분야의 최고가 되면 최고는 최고끼리 통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시다. 그 분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 높으신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 였다.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라는 말씀이 있다. 높으신 하나님과 인간이 동행하는 세계란 바로 최고의 세계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해할 때에도 신비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면, 사람의 평범한 삶 자체에서 배어나오는 "연합"의 개념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경지에 까지 이를 수 있음을 믿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예화10
[충만]-한일관계에서의 자기중심주의
요 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옵 1:3 바위 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렘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도다
다른 사람의 중심주의는 눈에 잘 띈다. 가령 지나친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기주의자)이나, 외국의 지나친 국수주의적 주장(자국중심주의)은 당장 눈에 거슬린다. 보통의 한국인은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일본의 국수주의적 행보를 감지할 수 있다. 지난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일본 극우세력의 역사 교과서 왜곡은 자국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행태는 성토와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밝게 찾아내면서 자기 눈에 든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우리는 일본의 극우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우리 자신의 똑같은 자국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데 익숙하다. 가령 우리는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해 벌어진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교과서에서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난리”란 뜻이다. 이 용어를 일본의 역사 교과서가 그대로 채용할 수 있을까? 전쟁의 다른 쪽 당사국인 일본이 이 용어를 수용할 수 없다면, 그건 객관적인 명칭이 될 수 없다. 이는 일본이 1592년에 터진 그 전쟁을 ‘조선 정벌’이라 부르는 걸 한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동해’와 ‘일본해’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외국 지도를 보며 통탄을 금치 못하는 신문 기사나 독자 투고를 흔히 접한다. 이런 글에 대해 보통의 한국인들은 대부분 공감과 공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의 자국중심주의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동해’라 부르는 그 푸른 바다는 한반도의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해’(East Sea)라 불린다. 그러나 일본인에게 그 바다는 서쪽에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방향감각이 이상해지지 않는 한 그들은 그 바다를 결코 ‘동해’라 부를 수 없다. 그건 우리가 ‘황해’를 ‘동해’라 부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황해를 ‘서해’라고도 부르지만, 중국인들은 그 바다를 ‘동해’라고 부른다. 이 경우는 ‘황해’라는 중립적인 명칭이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왜 ‘동해’를 ‘일본해’라 부르느냐”는 질문이 얼마나 답답한 발상인지는 이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바다가 일본의 영해가 아니므로 ‘일본해’라는 명칭 또한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중립적인 대안을 내놓아야지 “왜 ‘동해’를 ‘일본해’라 부르느냐”고 따지는 건, 정신병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기중심주의의 발현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다. 우리 스스로는 잘 체감하지 못하지만, 한국인의 자국중심주의는 일본을 포함해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지독한 수준이다. (한겨레21 이상수의 동서횡단)
말씀 충만, 성령 충만 --"저 혼자 충만"이 문제다. 원래 이런 것들이 본질상 "저 혼자"는 의미가 없다.
자기중심주의적인 충만이란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거짓 충만이다. 흔히 수직관계는 잘되는데 수평관계에는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자기 중심주의적인 신앙 충만의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예수에게서 충만과 사랑의 행위를 어찌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 자기중심주의적인 충만은 필시 그 중심이 교만에 이르고야 만다. 내가 말실수를 해서 내 자존심이 망거진 것을 아파하는 것보다 상대가 나로 인해 받은 상처를 더 깊이 아파하는 날이 와야 진실로 충만한 신앙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