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효 아키텍트-120] 현장중심 문화도시계획가 성원선(下)
매일경제 2022.03.11
[효효 아키텍트-120] 성원선은 대학에서 강의를 그만두고 2014년 서울시 (하)월곡동 도시재개발지구 집창촌 내 사진작가 김규식이 마련한 대안 공간 '더 텍사스 프로젝트'에서 '무정주(nonsettlement)' '행복도시' 2개의 전시 프로젝트를 기획·진행했다. '무정주'는 작가 23명을 모아 도시재생이나 재개발과 관련된 전시다.
▲ <무정주>(nonsettlement) 전시 현장 설명회 / 사진제공= 성원선
성원선은 '더 텍사스 프로젝트'에 처음 가던 날을 잊지 못한다. 김규식 작가가 앞서서 이렇게 말했다. "저만 따라오세요. 절대 옆을 보면 안 됩니다. 혹시 이모님들이나 남자들이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마세요." 그날도, 그 이후에도 미술가들에게 말을 거는 이들은 없었다.
성원선은 기획자로서 그 폐쇄적인 지역을 열게 하는 작은 구멍 하나 내는 것을 전시 방향으로 정했다. 골목을 건축가의 눈길로 훑었고, 그 공간을 현상학적 분석 결과를 성매매가 일어났던 바로 그 장소에서 세미나로 진행했다. 그날 바로 그 옆에서는 여전히 영업을 준비하던 소위 이모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담을 두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전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리와 단절이 없으면, 세상과 열려 있는 모든 공간에서 사람들은 제정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들과 함께 그곳에서의 전시를 예술가의 작업적 기반이나 성과로 삼지는 않았다. 그 공간에서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단절된 세상의 이야기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작가들과 함께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사회와 도시의 이면들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어떤 공통감각과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 건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전시에 앞서 도시계획가 정석, 건축가 조한의 강연을 통해 도시재생과 재개발에서 예술의 역할을 주제로 다뤘다.
근대 시기 미아리는 공동묘지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4대문 안 판잣집의 강제 철거에 따른 이주민들의 정착지였다. 196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일명 '종3' 유곽 철폐로 미아리 텍사스의 역사가 시작됐다. 1980년대 지하철 4호선 공사가 완공되면서 인근 지역은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더 텍사스 프로젝트'는 2017년부터 재개발 시작 전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성원선은 역사적으로 공권력이 번갈아가며 '포함과 배제(inclusion and exclusion)'를 시행한 그곳에서의 전시와 세미나 활동을 도시와 장소성에 대한 개념의 접근들을 실증하기 위한 대안적 사례로 꼽는다.
한국 사회는 문화 영역에서조차 성매매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는 걸 터부시한다. 영화 '고래사냥'(1984년)은 주인공으로 집창촌 출신 춘자를 내세운다. 당시의 도시 재개발에 따른 그녀의 귀향에 두 남성이 동행하는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 1901~1991)가 저서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이 지니고 있는 중층성과 복합성'을 말한다. 오늘날 공간은 자본의 높은 수익을 보장하기 위한 장이며, 저항과 전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위계적으로 재편된다. 돈이 많이 드는 작업 건축은 권력과 자본의 시녀 노릇을 하고, 가난한 사람을 항상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공간은 단순히 지배의 공간만이 아니며 전면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르페브르는 공간을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산물로서, 더 나아가 생산 작용 자체로 파악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복합성을 보여주고 있다.
▲ 블루프린트 2017- 구룡포 프로젝트 박성진 작가 / 사진제공 =성원선
성원선은 2017년 포항시 구룡포 마을 프로젝트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근대적 일본식 거리가 남아 있으며 다방이 많은 곳이었다. 구룡포는 도시재생 측면에서 미술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마을, 삶터를 예술의 장소로 여긴다는 건 현대미술 기획자에게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프로젝트다. 작은 전시 공간이 아닌, 하늘과 땅과 마을이 캔버스가 된다는 건 가슴 뛸 만큼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다. 내 집 앞의 풍경을 누군가 상상으로 재창조하는 것은 마치 내 집에 남이 주인 행세를 하는 격이니, 소통과 관계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성원선은 주민들 날것의 삶이 그대로 노출돼 구경거리가 되는 '벽화마을'이 아닌 주민이 삶의 중심이 되고 주민과 더불어 상생하는 '삶터 가꾸기'를 주안점으로 둔 문화마을 조성을 콘셉트로 잡았다.
관광지화를 목표하면서도 예술적으로 접근했다. 성원선은 주민 이해와 동의를 구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나의 방식으로 선택했다. 성원선에게는 오랜 시간 그곳에 정주한 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를 넘어설 시간은 없었다. 주민들을 만나고, 마을을 해설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매우 즐거웠다. 구룡포 마을은 그 후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성원선이 떠난 후 구룡포 마을은 많은 작가들이 함께했다.
▲ 몽땅플라타너스 -성북 예술 가압장 / 사진제공 = 성원선
성원선은 2017년 11월에 성북문화재단에서 일을 시작했다. 재단은 지역문화예술 진흥과 지역주민들 삶의 질을 위해 문화예술 사업을 기획 운영하고, 관련 시설을 운영하며 지원·후원한다. 근래에는 지역의 문화예술정책을 마련하는 기관으로도 역할한다.
성원선이 맡고 있는 문화도시TF는 2021년에 만들어진 팀이다. '문화도시'사업은 2018년도부터 지역문화진흥법에 의해 추진되는 전국의 도시를 대상으로 한 사업이다. 총 5년간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는데, 문화예술정책을 마련하고 관련 사업을 추진하면서 도시경영의 원칙과 비전을 제시하고, 도시만의 브랜드와 정체성을 주민을 통해 형성하는 복합적인 사업이다.
실제 삶의 토대인 지역에서 문화적인 공동체성을 찾아내고, 지역 공동 삶의 변화와 도시의 전환을 만드는 에너지를 일으키기 위해 다양한 예술적 접근 방식들을 활용한다. 도시, 예술, 사회, 문화적인 것을 통칭해서 '문화도시'라고 한다. 어떤 면에서는 기술과 문화가 결합한 융합예술이기도 하다.
성북은 전통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고 구내 대학이 8개나 있다. 재단은 지역적 특징을 살려 예술인의 생활과 활동의 안전망을 만들고, 지역 주민들이 일상에서 접근하는 도서관을 문화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성북 구내 대학 8개를 연결해 청년들 삶의 문화와 미래의 일거리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려고 준비하고 있고, 다양한 문화예술 단체와 기관들의 정보·기록을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고 축제와 포럼을 열며, 일상의 공간을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연결하고자 한다.
성원선은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가로 시작해 이젠 의사 및 정책 결정 작동 방식이 다른 문화 도시계획가가 됐다. 작가로서의 원천은 삶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사유하는 힘을 빌려오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 건축가 할아버지가 그려놓은 도면 위의 가로세로 선이 만든 그리드에 문화를 입히고 있다.
성원선은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를 론칭한 미술·문화 정책 행정가 클라우스 부스만을 롤모델로 삼는다. 부스만은 뮌스터시에 문화 산업을 일으켰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지역의 미래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는 탁월한 전시기획자이기도 했다.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독일관 대표 작가로 한스 하케와 백남준을 선정해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케 했다. 백남준은 독일 국적이 아니었으며, 한스 하케는 독일에 비판적인 작업을 많이 해 온 작가였다.
[프리랜서 효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