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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密陽孫氏)
氏族의 연원
밀양손씨는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되신 구례마(俱禮馬)를 득성시조로 하고 있다.
득성조 구례마는 대수촌장으로써 기원전 57년 갑자 4월에 다른 육부촌장과 더불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고대국가인 신라의 전신인 서라벌을 건국 하였다. 유리왕9년(서기32년 임진)에는 대수촌을 모량부로 고치고 성씨를 손씨(孫氏)로 사성하였다. 이후 태종 무열왕3년(서기656 병신)에 “문의왕(文義王)”으로 추봉되었다.
시조는 손순(孫順), 자(字)는 사구(士久)이며, 신라 흥덕왕 때의 인물로 지극한 효성이 왕에게 알려져 신라의 “국효(國孝)”로 일컬어졌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으며, 문효(文孝)라 시호(諡號)되었다.
‘갑자보(甲子譜)’ 손록편(孫錄)을 보면, 태자사인(太子舍人) 대광사도(大匡司徒)겸 대원수(大元帥) 손학산(孫鶴山)의 아들로 신라 개국공신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이라 하였다.
그에게 두 아들이 있어 큰 아들 손부(孫富)의 장남인 손익감(孫翼減)이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짐으로써 밀양손씨(密陽孫氏)의 관조(貫祖)가 되었다. 손순(孫順)의 둘째 아들인 수(秀)의 후손이 청주(淸州)를 본관으로 하였다.
‘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 손순(孫順)에게는 5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익감(翼減)이 응천(凝川)(밀양(密陽)의 고호(古號))군(君)에, 익담(翼淡)이 평해군(平海君)에, 익원(翼洹)이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짐으로써 그 후손이 각각 분봉(分封)받은 곳을 본관으로 하였고, 결국 밀양손씨(密陽孫氏), 평해손씨(平海孫氏), 경주손씨(慶州孫氏), 청주손씨(淸州孫氏)는 모두 손순(孫順)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보(甲子譜)’ 서문에는, 문효공(文孝公) 손순(孫順)으로 시조를 하여 기(起)1세(世)하여 그 뒤 4관(貫)으로 분봉(分封)되었는데, 밀양관(密陽貫)은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과 밀성군(密城君) 손빈(孫贇)으로 현조(顯祖)를 삼았다고 하였다.
손긍훈(孫兢訓)은 7세손으로 고려 태조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할 때 대광(大匡)의 벼슬로 큰 공을 세워 광리군(廣理君)에 봉하고 대광사도(大匡司徒)를 추증되시고 벽상공신에 올랐고 무열(武烈)로 시호(諡號)되었다. 그의 아들 손형(孫逈)은 고려개국2등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광리(廣理) 역시 밀양(密陽)의 옛 이름이다.
밀양(密陽)은 본래 신라의 추화군(推火郡)인데, 경덕왕때 밀성군(密城郡)으로 고쳤다. 고려조 성종 때 밀양자사(密陽刺史)로, 현종때 지밀성군사(知密城郡事)로 개칭하였으며, 공양왕 때는 증조 할머니 박(朴)씨의 고향이라 하여 밀성부(密城府)로 높였다.
조선조 태조때 밀성군(密城郡)으로 만들었으나 뒤에 밀양부(密陽府)로 고쳤으며 그뒤 변천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박(朴)·손(孫)·김(金)·당(唐)·대(大)·변(卞)·이(異)·조(趙)씨 등이 있었다.
좌사부공(左師傅公) 탁파·전농시사공 하파(典農寺事公 賀派)·중서령공(中書令公) 타파·군사공 영파(郡事公 榮派)
주요 세거지
시조 손순(孫順) 이하 20여대가 세거하였던 곳을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계해보(癸亥譜)’에 보면, 7세 손긍훈(孫兢訓)이 밀양(密陽)에 살았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19세 손빈(孫贇)의 현손인 23세 손용도(孫俑道)의도 자손들은 25세 손태좌(孫台佐) 27세 손두(孫斗)등 관향인 경남 밀양군 부북면 위양리 일대에 살았고 28세 손충보(孫忠輔)로부터 29세 손창조(孫昌祖)의 후계는 임란 당시 피난 곳인 경남 창녕의 영산(靈山)과 지금의 고령군 등의 다산(茶山)에 나뉘어 살았고 34세 손광후(孫光垕)와 손광열(孫光悅)등 형제의 후계들은 임난후 5세를 지나고 밀양으로 다시 회향(回鄕)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밀양손씨의 대종손인 43세 손관규(孫官圭)까지 후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주로 경남 밀양 부북면 덕곡리를 집성촌으로 윗대의 시조와 중시조님들의 유적들을 보존하며 살고 있다.
19세 손빈(孫贇)의 현손(玄孫) 손용도(孫俑道)의 자손들은 29세 손창조(孫昌祖)의 후계(後系)가 경남 창녕(昌寧)의 영산(靈山)과 지금의 고령군(高靈郡)의 다산(茶山)에 나뉘어 살았고, 27세 손익(孫翼)의 후계(後系)는 진양군(晋陽郡) 일원에, 그리고 30세 손수림(孫秀琳)의 후계(後系)는 충북 옥천(沃川)에 각각 자리잡았던 것 같다.
손용도(孫俑道)의 6세손인 29세 손복기(孫復起)의 후계(後系)는 경남 김해(金海)의 주촌(酒村)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고, 25세 손계선(孫繼先)이 경남 거제(巨濟)에 들어가 살았고, 다시 그의 현손(玄孫)인 손희준(孫希俊)이 임진난(壬辰亂)을 피해 거제(巨濟)로 가 자리잡은 이래 그곳에도 자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손용도(孫俑道)의 동생인 23세 손시도(孫偲道)의 자손들은 28세 손세평(孫世平) 이래로 일부가 충북 충주(忠州)로 옮겨갔던 것 같고, 30세 손범(孫凡)의 자손은 울산(蔚山), 27세 손귀(孫龜)의 자손은 동래(東萊)에 세거의 터로 삼았던 것 같다.
또한 30세 손인갑(孫仁甲)의 자손들이 경남 의령(宜寧)땅에서 살다가 후에 일부가 김해(金海)로 옮겨갔고, 23세 손희광(孫熙光)의 후계(後系)는 28세 손구(孫垕)가 중종조에 평북 철산(鐵山)에 유배되었던 이후 철산(鐵山)과 용천(龍川) 등지에 산거(散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4세 손중륜(孫仲輪)의 자손들은 황해도 장연(長淵)과 안악(安岳) 등지에 살았던 것 같다.
25세인 목사공 손책(孫策)의 세 아들에서 비롯된 자손들은 맏아들 손검경(孫儉敬)과 동생 손유경(孫有敬)이 태종조에 보성(寶城)에 유배되자 손계경(孫季敬)이 어머니 원주이씨(原州李氏)를 모시고 함께 배소(配所)에 갔다가 손검경(孫儉敬)의 후계(後系)가 보성(寶城)과 나주(羅州)에, 손유경(孫有敬)의 후계(後系)가 보성(寶城)과 장흥(長興)·순천(順天)·강진(康津)에, 손계경(孫季敬)의 후계(後系)는 부안(扶安)·정읍(井邑)에 각각 자리잡았다.
26세 손익창(孫益昌)의 자손들은 전북 고창(高敞)의 무장(茂長)에 살다가 전주(全州)·함평(咸平) 등지로 산거(散居)하였다.
29세 손연수(孫淵壽) 이래로 여러 대의 묘영(墓塋)이 경남 사천군(泗川郡)에 소재하므로 그곳에 밀양손씨(密陽孫氏) 자손들이 세거했다고 믿어지며, 27세 손형로(孫亨老) 이래로 충북 괴산(槐山)에, 30세 손화숙(孫和叔) 이래로 공주(公州)에, 손윤생(孫潤生) 이래로 당진(唐津)에 자리잡은 후손들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26세 손득태(孫得台)·손득수(孫得壽) 형제가 평남 양덕군(陽德郡)에 살기 시작했던 사실이 ‘계해보(癸亥譜)’에 보이고, 29세 손기서(孫起緖)의 후계(後系)가 경북 청도군(淸道郡) 이서(伊西) 등지에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27세 손영(孫永)의 자손들은 손영(孫永)이 태조조에 함남 북청(北靑)땅에 유배된 이후 북청(北靑)의 후창(厚昌)·양화(陽化) 등지와 홍원군(洪原郡)의 보현(普賢) 등지에 산거(散居)했다고 믿어진다.
1930년경,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자손들은 널리 퍼져 충남 당진군(唐津郡) 고대면(高大面), 전남 보성군(寶城郡) 노동면(蘆洞面)·복내면(福內面), 경북 영천군(永川郡) 고경면(古鏡面), 경남 진주(晋州)·밀양(密陽)·의령군(宜寧郡) 일원, 전북 부안군·정읍시·담양군, 황해도 장연(長淵)·송화(松禾), 평남 양덕군(陽德郡)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0년대에 와서는 특히 경남 밀양군(密陽郡) 밀양읍(密陽邑) 교동(校洞)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씨족史
밀양(密陽)손씨는 신라 흥덕왕(826~835) 때에 효자로 유명한 손순(孫順)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손순(孫順)은 신라 개국 당시 6부촌장(部村長)의 한사람인 무산(茂山) 대수촌장(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후손이다. 손씨(孫氏)가 유래하게 된 것은 신라 유리왕 9년(서기32)에 6촌(村)에 사성(賜姓)할 때 손성(孫姓)을 받음으로써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손순(孫順)을 시조로 하여 기(起)1세(世)하고 있다. ‘계해보(癸亥譜)’에 의하면 구례마(俱禮馬)로부터 손순(孫順)에 이르기까지 세대(世代)와 휘(諱) 및 역임한 관직명이 잘 정리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그 사실성에는 의심이 간다. 고려 인종 때 고금(古今)의 기록을 토대로 해서 삼국(三國)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에 신라왕실세계(王室世系)- 김씨(金氏), 박씨(朴氏), 석씨(昔氏)-도 정확히 갖추기 어려웠다. ‘갑자보(甲子譜)’의 손성태(孫性台) 발문(跋文)에 “밀양손씨(密陽孫氏)는 문효공(文孝公) 휘(諱) 순(順)을 시조(始祖)로 하여 광리군(廣理君) 휘(諱) 긍훈(兢訓)으로부터 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정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시조인 손순(孫順)은 신라 때 국효(國孝)로 일컬어졌던 유명한 효자다. “삼국유사”기록에 의하면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아내와 함께 품을 팔아서 노모를 봉양했는데, 철부지 어린 아들이 늘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다. “아이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의 굶주림이 오죽하겠는가.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님은 다시 모실 수 없는 법이다”라고 하여, 손순(孫順) 부부는 노모를 위해 아이를 땅에 파묻기로 했다. 취향산(醉香山) 기슭에 구덩이를 팠다. 아이를 묻으려는 순간 땅속에서 기이한 석종(石鐘)이 솟아 나왔다. 이는 길조로 여겨졌는데, 이에 손순(孫順)은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석종(石鐘)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리니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 안까지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흥덕왕은 그에게 집 한채와 매년 쌀 50석을 주게 하였다. 손순(孫順)에 관한 이야기는 품을 팔아 겨우 노모를 봉양해야만 했던 어려운 생활상을 전해주는 것이면서도 효도의 상징으로 손씨(孫氏) 일문(一門) 뿐 아니라 전국에 모범으로 되어 왔다.
손익감(孫翼減)은 손순(孫順)의 손자인데, 신라조에 공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짐으로써 밀양손씨(密陽孫氏)로 본관을 쓰게 한 인물이다.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에 추증되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진 7세조 손긍훈(孫兢訓)에 이르러서다. 그는 태조 19년(936) 후백제의 신검군(神劍軍)을 대파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때 왕식렴(王式廉) 등과 함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장수로 출전하여 개국공신이 되어 무열(武烈)의 시호를 받았다(華閥譜). 이 전쟁에서 ‘고려사(高麗史)’에 대상(大相) 긍준(兢俊)으로 나타나는 인물이 손긍훈(孫兢訓)이 아닌가 한다.
손형(孫逈)은 광리군(廣理君)의 아들이며 고려개국공신2등으로 고려 태조 원년에 물장성령(物藏省令)이 되었고, 10년에 행(幸)으로 사명(賜名)받고 대상(大相)이 되었다 한다. 손광립(孫光立)은 9세조인데, 현종 원년 과거에 올라 전중승(殿中丞), 상서좌승(尙書左丞)을 거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한다.
손현(孫顯)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손사순(孫事純)은 예부상서(禮部尙書), 손약진(孫若辰)은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15세조 손변(孫抃)의 처음 이름은 습경(襲卿)이었다. ‘고려사’ 손변(孫抃)傳에는 수주인(樹州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안부판관(天安府判官)으로 재직하면서 정최(政最)로 평가받아 공역서승(供驛署丞)에 배임(拜任)되었다. 예부시랑(禮部侍郞),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고종 38년에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졸(卒)하였다. 성품이 강직했으며 이사(吏事)에 능해 판결하는 것이 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한다. 손변(孫抃)은 아내가 국서(國庶)에 연관되어 관직생활 중에 대성(臺省)·정조(政曹), 학사전곡(學士典誥)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한다. 이에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세족(世族)가문에서 다시 아내를 취하라고 권하자, “자기의 환로(宦路)를 위하여 30년 조강지처를 버리겠는가”고 하며 듣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그의 아들도 과거에 나아가지 못했다.
손변(孫抃)의 아들 손세정(孫世貞)은 음직(蔭職)으로 희궁록사(禧宮祿事)에 임명된 후 합문사(閤門使), 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쳤으며, 원종(元宗) 9년 몽고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충렬왕조 병마부사(兵馬副使)로 합포(合浦)에 출전하였다. 손백분(孫白賁)은 예부상서를 지냈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고려 충렬왕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올라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진 19세조 손빈(孫贇)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단계로 이어져오다 이후에 자손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손빈(孫贇)이 손자인 손탁의 후손이 좌사부공파(左師傅公派), 손하(孫賀)의 후손이 전농시사공파(典農寺事公派), 손타의 후손이 중서령공파(中書令公派)로 나누어졌고, 군사공(郡事公) 손영(孫榮)의 후손은 자손이 번성해 다시 여러 분파(分派)로 되었다. 손영(孫榮)의 4세손인 손책(孫策)의 후손이 목사공파(牧使公派), 손급(孫笈)의 후손이 군수공파(郡守公派), 손지(孫智)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손수령(孫壽齡)의 후손이 오곡공파(梧谷公派), 손이(孫貽)의 후손이 형조판서공파(刑曹判書公派), 손수성(孫壽星)의 후손이 진사공파(進士公派), 손숙재(孫淑才)의 후손이 국자진사공파(國子進士公派)로 평리공의 손자 손기(孫琦)의 후손이 정승공파(政丞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이상은 손빈(孫贇)의 큰아들 손광(孫洸)의 후손들이고, 둘째아들 송라찰방(松羅察訪)을 지낸 진사공(進士公) 손원(孫沅)의 후손은 그 5세손에 이르러 손부산(孫富山)·손용유(孫龍游)의 두 손자에게 후손이 이어졌는데, 손부산(孫富山)의 후손이 따로 분파되어 기로공파(耆老公派)를 이루었다.
19세조 손빈(孫贇)은 원종조에 과거에 오른 후 3조(朝)를 섬겼으며 누차 청요직(淸要職)을 맡았다. 충숙왕 때 여진족이 변방을 침범하자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이를 물리쳤고, 온성(穩城)에 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 손빈지비(孫贇之碑)라는 전승비가 세워졌다. 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정당문학(政堂文學)·상장군(上將軍)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밀성군 손빈(孫贇)의 아들인 손광(孫洸)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그 아들 4형제인 손탁(孫탁)·손하(孫賀)·손타(孫타)·손영(孫榮)은 각각 좌사부(左師傅),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중서령(中書令), 한림학사(翰林學士)에 각각 이르렀다. 손맹견(孫孟堅)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을 지냈고, 손약수(孫若水)는 문과(文科)를 거쳐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지냈다. 그 아들인 손억(孫億)도 문과를 거쳤는데,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손계견(孫季堅)은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지냈고, 손자인 손기(孫琦)는 공민왕조에 정승(政丞)으로 치사(致仕)하고 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에 봉해졌다.
목사공 손책(孫策)은 고려말 과거에 급제, 관직이 수주목사(樹州牧使)에 이르렀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정신으로 항거하다가 처형되었다. 부인 원주이씨(原州李氏)가 두아들의 적소인 전남 보성으로 내려가 장남 검경(儉敬)은 나주(羅州)에, 둘째 아들 유경(有敬)은 보성(寶城)에, 셋째 아들 계경(季敬)은 정읍(井邑)에 각각 정착해 나주(羅州)·보성(寶城)·정읍(井邑)의 각 파조(派祖)가 되었다. 손수경(孫守卿)은 도첨의(都僉議)를 지냈고, 손사(孫俟)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손고(孫顧)는 한성부윤(漢城府尹), 손창(孫昌)은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밀양손씨(密陽孫氏)의 후손 중에서 조선전기의 인물로는 손서륜(孫敍倫)을 들 수 있다. 문종 2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집현전박사가 되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단종 양위 후 낙향했다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가 사형되었다. 손비장(孫比長)은 세조 10년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급제, 성종(成宗) 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다시 급제하였다. 승지(承旨), 행상호군(行上護軍)을 거쳐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진(撰進)했고, 예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손윤생(孫潤生)은 관찰사의 관직에 올랐고, 손세옹(孫世雍), 손대남(孫大南), 손순석(孫淳錫)은 대사간(大司諫), 장악원정(掌樂院正),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지평(持平)을 지낸 손영제(孫英濟)는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스승과 함께 주자학의 보급에 힘썼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나라에 공을 세운 인물도 많이 배출되었다. 손홍록(孫弘祿)은 임진왜란때 오희길(吳希吉)과 함께 태조의 어영(御影) 및 역대의 실록(實錄)을 정읍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옮겨 지켰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全州史庫) 외의 다른 사고본(史庫本)이 모두 소실되었음을 생각하면 나라의 역사를 보존한 그의 공로는 길이 기억될 만 하다. 손덕침(孫德沈)·손덕호(孫德浩)·손덕순(孫德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손덕침(孫德沈)·손덕순(孫德淳) 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영천(永川)·창암(倉巖)에서 왜군과 교전, 적이 여현(礪峴)을 넘지 못하게 했다. 손덕호(孫德浩)는 왕(王)을 의주(義州)로 호종, 호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손응록(孫應祿)은 의병을 거느리고 이순신 진(陣)중에 나아가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안골포(安骨浦)에서 순절하였다. 손윤선(孫胤先)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손기양(孫起陽)은 선조 2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전적(典籍), 경주제독(慶州提督), 울주판관(蔚州判官), 영천군수(永川郡守),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역임했다. 광해군 4년 이후 정치에서 떠나 낙향했다. 손명래(孫命來)는 숙종 36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손상륭(孫尙隆)은 숙종조에 학행이 독실하고 지극한 효도로 이름이 있었다. 부모의 전후상(喪)에 각각 3년씩 여묘(廬墓)했다. 고향에서 향약계(鄕約契)를 수계(修契)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후진(後進)에게 문무(文武)를 강론하니 쌀 50석을 내려 포상하였다. 숙종 43년 절충장군용양위부사직(折衝將軍龍驤衛副司直)에 임용되었다. 손석초(孫錫楚) 역시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있었다. 손인갑(孫仁甲)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손만중(孫萬重)은 전적(典籍), 손석모(孫錫謨)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광수(孫廣洙)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냈다.
손씨(孫氏)의 후손 중에서 19세기 말 동학(東學)에서 활동하여 이름이 있는 인물로는 동학수접주(東學首接主)였던 손화중(孫華仲)과 동학(東學) 3세 교주(敎主) 손병희(孫秉熙)가 있다.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는 고종 9년 동학(東學)에 입교(入敎),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수제자가 되었다. 갑오년(1894)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호서지방을 석권했다. 정부가 요청한 외국군(일본군)의 개입으로 농민봉기가 실패하자 상해로 망명했다. 1906년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3세 교주(敎主)에 취임, 교세(敎勢)확장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敎主)를 인계하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참여, 피체되어 영어의 몸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상춘원(常春園)에서 죽었다.
손일민(孫一民)은 독립운동에 종사한 인물이다.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광복회(光復會)에 참가하였다. 1918년 만주주재 민족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다음해 대한독립단장 조맹선(趙孟善)과 협의하여 하르빈의 러시아 군대에 한인청년훈련과(韓人靑年訓練課)를 설치하려다가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931년 중경(重慶)으로 가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등을 통합,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였고, 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병사했다. 손정도(孫貞道)는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하고, 1912년 선교사(宣敎師)가 되어 만주(滿洲)에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 하르빈에서 일본 수상 계태랑(桂太郞) 암살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진도(珍島)에 감금되었다. 1914년에 석방, 3·1운동 후에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장(臨時議政院議長)이 되어 활약하는 한편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다. 그의 동생인 손진도(孫眞道)·손경도(孫敬道)·손리도(孫利道) 등도 광복대열에 참여했으며, 부인 오신도(吳信道)와 큰딸 손진실(孫眞實)도 애국부인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제시대에 활약한 밀양손씨(密陽孫氏)의 인물 중에서 역사학자 남창(南滄) 손진태(孫晋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거쳐 서울대 사범대학 학장을 거쳤으며, 문리대 학장으로 재직 중 6·25 때 납북되었다. 민족의 설화, 민담, 습속 등 주로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조선심(朝鮮心), 조선(朝鮮)정신, 조선의 얼을 강조한 신민족주의사학자였다. ‘조선민족설화의 연구’, ‘한국민족문화의 연구’ 등의 저서를 남겼다.
손호(孫滸)는 신민부(新民府)에서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친일분자 암살과 군시설 파괴 및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국내에 잠입 1928년 왜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손원일(孫元一)은 손정도(孫貞道)의 아들이며, 우리나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배 한척 없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해군을 일으켰으며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손기정(孫基禎)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인물이다. 체육계에서 많은 활동하였으며 KOC상임위원, 서울올림픽조직위원을 지냈다.
역대 주요 인물
▲신라조
손구례마(孫俱禮馬) 문의왕(文義王) 손씨득성원조
손학산(孫鶴山) 대광사도겸대원수
손순(孫順) 시호 문효공 봉 월성군, 손씨 시조
손부(孫富) (이부상서(吏部尙書))
손익감(孫翼減) (응천군(凝川君))
손응상(孫應尙) (시(諡) : 문렬(文烈)·병부상서(兵部尙書))
손성조(孫聖祖) (사공(司空))
손도명(孫道明) (병부상서(兵部尙書))손도양(孫道良) (시(諡) : 문충(文忠)·병부상서(兵部尙書))
▲고려조
손긍훈(孫兢訓) (광리군(廣理君)·사도(司徒) 시호(諡號): 무열(武烈))
손형(孫逈) (시(諡) : 문렬(文烈)·대상(大相))
손광립(孫光立) (예부상서(禮部尙書))
손갱재(孫賡載) (영동정(令同正))
손현(孫顯) (형부상서(刑部尙書))
손사순(孫事純) (예부상서(禮部尙書))
손인미(孫仁美) (영동정(令同正))
손변(孫抃) (좌복야(左僕射))
손영(孫瑩) (형부상서(刑部尙書))
손백분(孫白賁) (예부상서(禮部尙書))
손빈(孫贇) (밀성군(密城君)·사도(司徒))
손광(孫洸) (판도판서(版圖判書))
손탁 (좌사부(左師傅))
손영(孫榮) (한림학사(翰林學士))손약수(孫若水)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
손귀린(孫貴麟) (목사(牧使))
손책(孫策) (수주목사(樹州牧使))
손숙재(孫淑才) (자(字) : 사예(士藝)·국자진사(國子進士))
손수경(孫守卿) (좌정승(左政丞) 도첨의(都僉議)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
손승명(孫承明) (자(字) : 치명(致明)·호(號) : 은암(隱菴)·영동정(令同正))
손기(孫琦) (재상(宰相) 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
▲조선조
손유호(孫攸好) (자(字) : 일덕(一德)·선략장군(宣略將軍))
손서린(孫瑞麟) (여주목사(驪州牧使))
손이순(孫以恂) (연일진병마절도사(延日鎭兵馬節度使))
손수림(孫秀琳) (자(字) : 경서(瓊瑞)·옥천군수(沃川郡守))
손응(孫凝) (군자감정(軍資監正))
손호(孫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계인(孫繼仁) (명천부사(明川府使))
손집(孫緝) (오위장(五衛將))
손계수(孫繼壽)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학(孫鶴) (직제학(直提學))
손흥서(孫興緖) (자(字) : 경업(景業)·영광군수(靈光郡守))
손후(孫垕) (승지(承旨))
손원효(孫元孝) (부제학(副提學))
손경석(孫景錫) (능주목사(綾州牧使))
손은란(孫恩蘭) (자(字) : 태형(太馨)·승지(承旨))
손은(孫誾) (좌의정(左議政))
손급(孫笈) (영천군수(永川郡守))
손암회(孫巖會) (자(字) : 화신(和愼)·군자감정(軍資監正))
손축(孫軸) (자(字) : 정로(定路)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비장(孫比長) (자(字) : 영숙(永叔)·호(號) : 입암(笠巖)·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손세옹(孫世雍) (자(字) : 시경(時卿)·호(號) : 용강(龍岡)·대사간(大司諫))
손시성(孫時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경상(孫景相)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우(孫藕) (호군(護軍))
손성일(孫誠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손덕경(孫德慶) (중추부사(中樞府事))
손수번(孫壽蕃) (승지(承旨))
손정(孫挺) (공조판서(工曹判書))
손집경(孫執經) (대사성(大司成))
손효경(孫孝經) (자(字) : 난륜(蘭倫)·오위장(五衛將))
손효선(孫孝先) (자(字) : 중승(仲承)·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응룡(孫應龍) (자(字) : 이서(而瑞)·동지밀직사(同知密直司))
손윤주(孫允柱) (상호군(上護軍))
손양계(孫良桂) (자(字) : 춘우(春雨)·순천부사(順天府使))
손진(孫溱) (자(字) : 사청(士淸)·개성부윤(開城府尹))
손효정(孫孝貞) (자(字) : 양지(養誌)·삼사좌윤(三司左尹))
손윤생(孫潤生) (자(字) : 신지(身之)·충청관찰사(忠淸觀察使))
손여성(孫汝誠) (남원부사(南原府使)
손서(孫敍) (성천부사(成川府使))
손효윤(孫孝胤) (도정(都正)
손사(孫俟) (자(字) : 효장(孝章)·시(諡) : 문헌(文憲)·예조판서(禮曹判書))
손영(孫永) (호(號) : 북해(北海)·형조참판(刑曹參判)
손록승(孫祿承) (호조참판(戶曹參判))
손만평(孫萬平) (자(字) : 균밀(均謐)·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보겸(孫寶謙) (자(字) : 치원(致元)·중추부사(中樞府事))
손경탁(孫景卓) (자(字) : 원일(元一)·호(號) : 매포(梅圃)·충의위부장(忠義衛部將))
손기겸(孫起謙) (자(字) : 성로(聖老)·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명준(孫明俊) (자(字) : 명서(明瑞)·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영선(孫永善) (자(字) : 선행(善行)·중추부사(中樞府事))
손서억(孫瑞億) (자(字) : 천과(千果)·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서의(孫瑞儀) (자(字) : 봉리(鳳利)·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계창(孫繼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종서(孫宗緖) (자(字) : 달부(達夫)·군자감정(軍資監正))
손극영(孫克永) (자(字) : 능신(能信)·참의(參議))
손부서(孫富緖) (한성좌윤(漢城左尹))
손익수(孫益壽)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홍로(孫泓魯) (자(字) : 남중(南重)·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승표(孫承杓) (자(字) : 공겸(孔兼)·성주목사(星州牧使))
손취생(孫就生) (자(字) : 자욱(滋旭)·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처흠(孫處欽) (자(字) : 사기(士起)·중추부사(中樞府事))
손광(孫曠) (자(字) : 매남(每南)·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응래(孫應來) (자(字) : 윤거(潤居)·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례부(孫禮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민달(孫敏達)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진(孫瑨) (자(字) : 진의(進義)·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언상(孫彦相) (자(字) : 원보(元甫)·군자감정(軍資監正))
손립생(孫笠生) (자(字) : 선여(善餘)·공조참의(工曹參議))
손현남(孫顯南) (자(字) : 태지(泰之)·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손광문(孫光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진봉(孫進鳳) (고흥군수(高興郡守))
손서응(孫抒應) (자(字) : 응룡(應龍)·파주목사(坡州牧使))
손철문(孫哲文) (자(字) : 문응(文應)·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병주(孫炳周)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호일(孫豪一) (자(字) : 백영(伯英)·군자감정(軍資監正))
손효갑(孫孝甲) (자(字) : 이백(而百)·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희도(孫希道) (자(字) : 덕부(德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명윤(孫命胤) (자(字) : 선술(善述)·성균관제학(成均館提學))
손득문(孫得文) (자(字) : 채오(彩五)·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충우(孫忠佑) (중추부사(中樞府事))
손흑룡(孫黑龍) (자(字) : 경운(景雲)·호(號) : 청암(晴庵)·호조참의(戶曹參議))
손흥걸(孫興傑) (자(字) : 은도(殷道)·호(號) : 경암(敬菴)·호조참의(戶曹參議))
손명구(孫命耈) (자(字) : 일로(日老)·호(號) : 금계(錦溪)·이조참판(吏曹參判))
손두경(孫斗經) (자(字) : 성서(聖瑞)·좌부승지(左副承旨))
손인창(孫仁昌) (자(字) : 취보(吹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순백(孫舜伯) (자(字) : 인숙(仁叔)·중추부사(中樞府事))
손만(孫蔓) (자(字) : 춘영(春榮)·해주판관(海州判官))
손군서(孫君瑞) (자(字) : 군화(君化)·이조참의(吏曹參議))
손만정(孫萬正)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손익(孫翼) (우후(虞侯) 강진현감(康津縣監))
손응지(孫應智) (수사(水使)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손흥립(孫興立) (자(字) : 희언(希彦) 첨정(僉正)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손여흥(孫汝興) (자(字) : 언술(彦述)·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홍윤(孫弘胤) (자(字) : 현숙(顯淑)·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여익(孫汝益) (자(字) : 군술(君述)·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손상억(孫尙億) (자(字) : 화중(和中)·한성판윤(漢城判尹))
손석윤(孫錫胤)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손기윤(孫起胤) (자(字) : 자승(子承)·이조참의(吏曹參議))
손상전(孫尙典) (자(字) : 정화(正和)·중추부사(中樞府事))
손기조(孫琪祖) (공조참판(工曹參判))
손명인(孫命寅)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손응록(孫應祿) (자(字) : 수지(綏之)·호(號) : 노천(蘆川)·호조판서(戶曹判書))
손윤선(孫胤先) (자(字) : 경부(敬夫)·호(號) : 검와(儉窩)·의병장(義兵將))
손기양(孫起陽) (자(字) : 경징(景徵)·부사(府使))
손재일(孫在馹) (자(字) : 내량(乃亮)·호(號) : 일송(一松)·학자(學者))
손두흥(孫斗興) (통정대부(通政大夫)·절충장군(折衝將軍))
손중삼(孫重三) (통정(通政))
손병문(孫秉文)(가덕진첨절제사(加德鎭僉節制使))
[등과인명(登科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손광원(孫光元) (현종조)
손변(孫抃) (명종조)
손빈(孫贇) (원종조)
손영(孫榮) (충렬왕조)
▲조선조
손차면(孫次綿) (장령(掌令)) 손창(孫昌) (한림(翰林))
손고(孫顧) (도사(都事)) 손번(孫蕃) (판교(判校))
손비장(孫比長) (승지(承旨)) 손상장(孫尙長) (군수(郡守))
손세옹(孫世雍) (대사간(大司諫)) 손관(孫灌) (현감(縣監))
손태좌(孫台佐) (전적(典籍) 전적(典籍)) 손수(孫洙) (교리(校理))
손홍적(孫弘績) (한림(翰林)) 손한(孫翰) (사간(司諫))손흥서(孫興緖) (군수(郡守)) 손여성(孫汝誠) (부사(府使))
손영제(孫英濟) (군수(郡守)) 손기양(孫起陽) (부사(府使))
손척(孫倜) (응교(應敎)) 손탁(孫晫) (박사(博士))
손해영(孫海英) (전적(典籍) 손만중(孫萬重) (전적(典籍))
손기룡(孫騎龍) (찰방(察訪)) 손명래(孫命來) (현감(縣監))
손만일(孫萬逸) (찰방(察訪)) 손석모(孫錫謨) 손석주(孫錫周)
손진익(孫鎭翼) 손회경(孫會慶) 손석지(孫錫祉)
손지형(孫之亨) (지평(持平)) 손종옥(孫鍾玉) (지평(持平))
손경현(孫庚鉉) (가선(嘉善))
조선조 급제자
차면(次綿) (단종(端宗) 2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비장(比長) (세조(世祖) 10년·춘시(春試)·을과(乙科))
차면(次綿) (세조(世祖) 12년·기영시(技英試)·삼등(三等))
창(昌) (세조(世祖) 14년·춘시(春試)·병과(丙科))
서륜(敍倫) (문종(文宗) 2년·별시(別試))·병과(丙科))
비장(比長) (성종(成宗)7년·중시(重試)·일등(一等))
상장(尙長) (성종(成宗) 2년·별시(別試))·병과(丙科))
번(蕃) (성종(成宗)1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집경(執經) (성종(成宗)1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세옹(世雍) (연산(燕山)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관(灌) (연산(燕山)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태우(台佑) (중종(中宗)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洙) (중종(中宗)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홍적(弘績) (중종(中宗)3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한(翰) (명종(明宗)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흥서(興緖) (명종(明宗)10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여성(汝誠) (명종(明宗)16년·식시(式試)·을과(乙科))
영제(英濟) (명종(明宗)16년·식시(式試)·병과(丙科))
기양(起陽) (선조(宣祖)2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척(倜) (선조(宣祖)35년·알성시(碣聖試)·병과(丙科))
탁(晫) (광해(光海)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해영(海英) (인조(仁祖)26년·식시(式試)·병과(丙科))
만중(萬重) (숙종(肅宗)19년·식시(式試)·병과(丙科))
기룡(騎龍) (숙종(肅宗)28년·식시(式試)·병과(丙科))
명래(命來) (숙종(肅宗)3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석모(錫謨) (영조(英祖)4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주(碩周) (영조(英祖)50년·함경별시(咸鏡別試)·병과(丙科))지형(之亨) (순조(純祖)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조(錫祚) (순조(純祖)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영일(永一) (철종(哲宗)14년·정시(庭試)·병과(丙科))
상철(相喆) (고종(高宗)7년·정시(庭試)·병과(丙科))
덕한(德漢) (고종(高宗)11년·정시(庭試)·병과(丙科))
경현(庚鉉) (고종(高宗)2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명섭(明燮) (고종(高宗)28년·정시(庭試)·병과(丙科))
[벌열(閥閱)]
●문형(文衡)
: 손척(孫倜) (선조조)
●호당(湖堂)
: 손척(孫倜) (광해조)
●청백리(淸白吏)
: 손척(孫倜) (선조조)
●명륜(明倫)
: (효행(孝行) 손성호(孫聖浩) (증호군(贈護軍)) 손동현(孫東賢) (증감찰(贈監察)· 정려(旌閭))
열녀(烈女) 손씨(孫氏) (백낙성(白樂成)의 처·고종조·증숙부인(贈淑夫人))
●문집(文集)
: 배민록(排悶錄) (손기양(孫起陽)) 창사집(昌舍集) (손명래(孫命來))
人口數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慶州鄭氏(경주정씨)는
1985年에는 摠 70,670家口 300,808名,
2000年에는 摠 94,465家口 303,443名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
출처 중앙일보 성씨의 고향
[출처] 밀양손씨(密陽孫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