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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그리움의 수채화 원문보기 글쓴이: 핑크
그대를향해 달려 가리라[랜스 암스트롱]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ㆍ29)은 프랑스를 일주하는 유명한 국제 사이클 경기인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다. 암스트롱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99년 우승 이후 5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이번에는 암스트롱이 넘어졌을 때 2위 울리히가 추월하지 않고 기다려 준 '자선'이 그의 우승을 도왔다는 평가도 나왔다. 개막 전날 팀 동료들과 미팅을 하고 나오는데 이름 모를 새들이 갑자기 날아오르면서 동료의 다리에 큼지막한 배설물을 쌌다. 해발 2천m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올라갈 때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아 고생했는데 도착해 확인해 보니 멀쩡하던 브레이크가 지나치게 조여져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험한 계곡을 내려올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뒷바퀴 브레이크를 떼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승하였다. 미국 사이클링 매거진은 그의 승리를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불치의 암을 극복하고 우승하는 감동의 인생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각고의 노력으로 고환암, 폐암, 뇌암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기적 같은 그의 이야기로 인해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고, 자서전 『그대를 향해 달려가리라』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 '암스트롱 암 연구재단' 이 설립됐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됐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그대 향해 달려가리라’의 내용을 요약해서 싣는다. (주간조선) (1971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랜스 암스트롱은 13세부터 철인 3종 경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사이클에서 두각을 보였고 고교 진학 후유망주로 떠올랐다)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사이클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사이클리스트. 그리고 그가 22세되던 해인 1993년 세계사이클선수권대회와 투르 드 프랑스대회의 베르뎅구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단거리 선수(sprinter) 자리에 올랐다) 나는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직업상 긴 싸움과 극심한 장애를 헤쳐나가며 고통과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고, 열심히 경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게 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텍사스주 플레이노 출신인 나는 1996년 사이클 선수로서 고지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전국적으로 1년에 7000건밖에 생기지 않는 그 병에 걸렸던 것이죠. (1996년 세계선수권대회을 앞두고 암스트롱은 생존율이 50% 이하인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한쪽 고환을 떼어냈고 암이 뇌에까지 퍼져 뇌 일부를 노려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의 생존율은 40% 미만이었다) 두통, 기침을 하면 나오는 피, 목의 통증, 눕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등등…. 나는 고통받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고 결혼도 물 건너갈 차례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직업, 나 자신…. 암은 나의 삶과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마저도 빼앗아 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나의 암은 고환에서 폐까지 전이된 3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장해둘 수 있는 나의 정자는 이미 필요한 양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나를 임신한 채 결혼했고, 내가 두 살 때 이혼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릅니다. 나의 이름은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그는 나를 두들겨 패곤했는데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잘 몰랐지만 마음만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기회로 삼아라.”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말씀이었습니다. 나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산책도 하고 활보도 하면서 매일 아침 사이클을 탔지요. 암에 걸렸는데 왜 사이클을 타냐구요? 아주 힘든 일입니다. 어머니는 내게 힘을 불러일으켜 주는 발전기와도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비서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사이클 연습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차로에서 차에 받쳐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3종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가 지난 후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찬성이었습니다. 결과는 3등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내 목표는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해에 나는 뚜르 드 프랑스의 스테이지에서도 21세로 최연소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일 뿐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슴이 미어지는 체험과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산과 평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자국, 사이클 타이어 펑크, 세찬 바람, 극도의 악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품날 정도의 무감각, 그리고 깊은 자기 성찰…. 목적지만이 달라졌을 뿐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시간에 의존하며 일정 시기마다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아보고, 숫자와 혈액검사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체크 포인트가 있다는 점이 사이클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사이클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 조바심을 내도 안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된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순간 거기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삶을 되찾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났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암은 뇌에까지 전이돼 있었습니다. "넌 사람을 잘못 골랐어.” 나는 고환암에 관한 책을 쓴 아인 혼 박사를 찾아 인디애나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인지 평화롭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념은 용감하고 영원한 인간의 특성입니다. 6시간 동안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
항암치료는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였습니다. 항암치료는 암만 죽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함께 죽입니다. 외로운 치료입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이클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혈액세포를 파괴해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끌어내려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같은 간호사 라트리스는 내가 다른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800만명의 미국인들이 온갖 형태의 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내가 아직도 사이클 선수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매력 있는 여인, 나의 아내 크리스틴이 나타났습니다. 1994년 9월 4일 나는 1998년 시즌에 사이클 경기로 복귀하겠다는 선언을 하러 인터팍 엑스포에 갔습니다. (암스트롱은 1998년부터 다시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다. 주종목을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바꾸는 모험을 거쳐 마침내 1999년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우승한 암스트롱은 `인간승리의 신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기자회견을 열고 신문기자들과 사이클 전문가들을 방안 가득히 모아놓고 경기 계획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내게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은 나의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크리스틴 어머니의 친구가 “어떻게 딸을 암 환자와 결혼시킬 수 있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럭저럭 70년 살기보다는 1년이라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의사들은 병이 재발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음 속 깊이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사이클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문을두드려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8개월 만에 내가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통과하는 하이킹인 루타 델 솔이었습니다. 14등을 했는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2주일 후 힘든 구간 경기인 파리-니스 경기에 참가 19등. 이기는 데 익숙해 있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침착했습니다. 나는 나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암을 앓고 나서 생존자들이 느끼는 전형적인 태도였습니다. 신체가 회복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체와 더불어 영혼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정말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뒹굴뒹굴 지내고 있었지요. 크리스틴과 친구들은 나 없는 데서 어떻게 하면 내가 선수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대화하며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은퇴를 하겠다는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98년 5월 크리스틴과 샌터 바바라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는 완전히 복귀했고 1998년 10월 1일 내가 암선고를 받은 지거의 2년이 되는 날 부엘타를 완주했습니다. 거기서 4위를 했는데 내가 한 경기 중 가장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 경기는 너무나 힘들어서 반 이상의 선수들이 포기를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일 동안 2348마일을 달리는 부엘타에서 4위를 한 것은 복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기 내내 괴롭혔던 마약 구설수 뚜르 드 프랑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입니다. 기술과 방법 면에서 세련되었고 공격적인 면이 줄어들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쉴 때도 나는 혼자 훈련했습니다.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헌신해 주었습니다. 르 퓌 뒤 푸에서 열린 시작 경기에서 나는 승리했고 나는 미국 팀을 위해 미국산 사이클을 타고 뚜르 드 프랑스에서 선두로 달리는 최초의 미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언론이 마약 의혹을 나타낸 것입니다. 항암치료가 경주하는 데 득이 되었다고 말한 기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암 치료가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1초라도 할 수가 있다니! 암 환자가 받는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고, 약물검사를 하고, 내 결백을 강조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사이클연맹은 내 약물 검사가 사실상 깨끗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경기조직위원장인 장 마리 르블랑은 “병을 이겨낸 암스트롱이 투어를 달린다는 자체가 상징이다.” 라고 했습니다. 파리에 들어가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설 때 감정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수십만명의 관중들이 거리에 둘러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결승선을 지났습니다. 내가 우승한 것입니다. 암이 인간으로서, 남성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나에게 해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당신은 살 확률이 90%라든지 50% 혹은 1%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암이 재발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전히 싸우라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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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0살쯤 되었을 때, 등에는 미국 국기를 달고 헬멧에는 텍사스의 별을 붙인 채 사이클로 알프스산맥 내리막길을 시속 75마일(약 120km)로 달려 내려가, 아내와 열 명쯤 되는 내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한 다음, 그 유명한 프랑스의 해바라기 밭에 누워 우아하게 숨을 거두고 싶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의 자서전이랄 수 있는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It’s not about the bike, 2000년)’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말에서 암 때문에 그렇게 우아하게 죽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불안한 회고와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교차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존률 60%의 3기 고환암과 싸워 결국 완쾌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세계최고, 최대의 자전거 이벤트인 뚜르 드 프랑스의 5연패란 금자탑을 쌓았다. 암을 이기고 뚜르 드 프랑스까지 5연패한 이 기적의 철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랜스 암스트롱은 1971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7살 때 암스트롱을 임신한 상태로 결혼했으나 암스트롱이 두 살이 되기 전에 이혼했고, 이듬해 테리 암스트롱과 재혼해서 암스트롱도 그의 성을 물려받게 된다. 암스트롱은 7살 때 처음으로 자전거를 갖게 되어 여느 어린이들처럼 즐겁게 타고 놀았다. 그러다 10대가 되어서는 당시 인기가 높던 미식축구 선수가 되려고 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수영을 시작한다. 천부적인 심폐능력으로 수영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그는 13살 때 텍사스주 1500m 자유형 경기에서 4위에까지 올랐다.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32km는 사이클로 다녔고, 하루 10km의 수영 훈련을 꾸준히 했다. 그 즈음 아이언 키즈(Iron kids, 어린이 철인3종경기) 대회에 나가 거푸 우승을 거둔다. 15살 때인 1987년에는 대통령배 철인3종경기에 나가 쟁쟁한 어른 선수들 사이에서 32위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에는 같은 대회에서 5위로 뛰어오르면서 각종 철인3종경기에 출전,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사이클계의 주목을 받게 된 그는 18살 때 미국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1990년 모스크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한다. 이 대회의 몇 종목에서 1위를 하며 사이클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국국가대표팀의 새 지도자인 크리스 카마이클 밑에서 경기요령 등을 배우고 사이클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건너가 훈련하면서 각종 대회에도 참가했다. 미국 국내의 프로팀인 스바루-몽고메리팀에도 소속되어 각종 국내경기에 참가했고, 국제대회에는 미국 국가대표로 뛰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첫 번째 경기에서는 꼴찌를 했고, 개인경기에서 그나마 14위에 올라 체면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사이클에서는 미국세가 유럽에 크게 뒤지고 있어서 그 정도도 좋은 성적이었다. 올림픽 이후 암스트롱은 뚜르 드 프랑스에서 3번이나 우승한 미국의 사이클 영웅 그레그 레몽드 뒤를 이을 재목을 찾고 있던 세븐일레븐팀에 입단해 유럽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 출전한 스페인의 클라시카 산 세바스천 대회에서 꼴찌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다시는 꼴찌는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스위스 취리히 대회에서 2위에 올라 표창대에도 섰다. 21살 때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 경기에서 최연소로 우승을 휩쓸어 1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해 뚜르 드 프랑스에 처음 출전했지만 12구간에서 기권했다. 그러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처음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95년 다시 뚜르 드 프랑스에 도전했지만 역시 중도하차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96년 10월 뜻밖에 고환암 3기의 선고를 받게 된다. 생존률은 겨우 60%였고 회복되더라도 사이클은 고사하고 걷기도 힘들며 아이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몇 달간 수술과 힘든 화학요법을 받으면서 완치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암스트롱은 잠시 쉰 다음 98년 시즌부터 사이클 경기에 복귀했다. 18개월만에 처음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달리는 ‘루타 델 솔’로, 14위에 올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예전의 암스트롱이 돌아온 것이다. 크리스 카마이클과 함께 훈련을 거듭해 컨디션을 되찾은 암스트롱은 98년 세계 3대 투어경기 중 하나인 부엘타 라 에스파니아에서 4위에 올랐고 이후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USPS팀에 소속된 그는 이듬해 뚜르 드 프랑스에 출전, 대망의 우승을 거둬 인간승리의 감동을 세계에 전했다. 이후 올해까지 암스트롱은 뚜르 드 프랑스를 5연패하면서 ‘뚜르 드 프랑스’의 사나이로 신화를 쌓아가고 있다. 또 수술전 보관해둔 정자를 이용해 체외수정으로 아들 하나도 얻었다. 그는 암을 극복하면서 사이클 선수로서, 한 인간으로서 더욱 높은 차원의 삶을 성취하게 된 셈이다. 그의 투병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칼 아우스만 박사는 그의 우승광 경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본 그 사람입니까. 머 리카락 한올없이 앙상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간신히 몸을 움직이던 그 사람입니까. 오 하나님,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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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선수 처럼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이겨내고 사이클링은 그저 스포츠일 뿐이고 더 힘든 것은 삶이라는 표현에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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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그리움의 수채화 원문보기 글쓴이: 핑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