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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스크랩 전무후무한 인간승리 랜스암스트롱 일대기
윤영도근육학교실 추천 0 조회 47 09.01.22 1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대를향해 달려 가리라[랜스 암스트롱]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ㆍ29)은 프랑스를 일주하는 유명한 국제 사이클 경기인 ‘뚜르 드 프랑스’에서 우승하였다. 암스트롱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99년 우승 이후 5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이번에는 암스트롱이 넘어졌을 때 2위 울리히가 추월하지 않고 기다려 준 '자선'이 그의 우승을 도왔다는 평가도 나왔다. 개막 전날 팀 동료들과 미팅을 하고 나오는데 이름 모를 새들이 갑자기 날아오르면서 동료의 다리에 큼지막한 배설물을 쌌다. 해발 2천m가 넘는 알프스 산맥을 올라갈 때 아무리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아 고생했는데 도착해 확인해 보니 멀쩡하던 브레이크가 지나치게 조여져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서 가장 험한 계곡을 내려올 때는 아예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 뒷바퀴 브레이크를 떼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승하였다. 

미국 사이클링 매거진은 그의 승리를 "20세기 스포츠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라고 평했다. 불치의 암을 극복하고 우승하는 감동의 인생 드라마를 연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과 각고의 노력으로 고환암, 폐암, 뇌암 등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고통을 극복하는 위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기적 같은 그의 이야기로 인해 클린턴 대통령은 그를 백악관으로 초청했고, 자서전 『그대를 향해 달려가리라』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또, '암스트롱 암 연구재단' 이 설립됐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됐다.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그의 저서 ‘그대 향해 달려가리라’의 내용을 요약해서 싣는다. (주간조선) 

(1971년 미국 텍사스에서 태어난 랜스 암스트롱은 13세부터 철인 3종 경기를 시작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사이클에서 두각을 보였고 고교 진학 후유망주로 떠올랐다)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사이클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사이클리스트. 그리고 그가 22세되던 해인 1993년 세계사이클선수권대회와 투르 드 프랑스대회의 베르뎅구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최고의 단거리 선수(sprinter) 자리에 올랐다)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대형 트럭이 지나가며 나를 진흙탕 속으로 내동댕이칩니다. 암도 내게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나는 25세에 고환암에 걸렸고 그것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후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강인한 체력을 지녔고, 직업상 긴 싸움과 극심한 장애를 헤쳐나가며 고통과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연습하는 것도 좋아하고, 열심히 경기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게 암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닙니다. 

텍사스주 플레이노 출신인 나는 1996년 사이클 선수로서 고지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플래시 왈론느대회에서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했고, 또 뚜르 드 뽕에서 우승, 리에지-바스또뉴-리에지에서 2등…. 처음으로 세계 톱 파이브(top 5)에 돌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고작 25세인 내게 고환암이 찾아왔습니다.

전국적으로 1년에 7000건밖에 생기지 않는 그 병에 걸렸던 것이죠.

(1996년 세계선수권대회을 앞두고 암스트롱은 생존율이 50% 이하인 고환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그는 한쪽 고환을 떼어냈고 암이 뇌에까지 퍼져 뇌 일부를 노려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당시 그의 생존율은 40% 미만이었다) 

두통, 기침을 하면 나오는 피, 목의 통증, 눕기만 하면 곯아떨어지는 등등…. 나는 고통받았습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었고 결혼도 물 건너갈 차례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경기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나의 직업, 나 자신….

암은 나의 삶과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마저도 빼앗아 갈 것 같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습니다.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나의 암은 고환에서 폐까지 전이된 3기에 해당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저장해둘 수 있는 나의 정자는 이미 필요한 양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훌륭한 아빠가 되고 싶었는데

하지만 내 인생의 출발점도 그리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17세에 나를 임신한 채 결혼했고, 내가 두 살 때 이혼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존재를 모릅니다. 나의 이름은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에게서 얻은 것입니다. 그는 나를 두들겨 패곤했는데 육체적으로 아픈 것은 잘 몰랐지만 마음만은 아팠습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경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기회로 삼아라.”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의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끈기 있는 운동선수로 만들어준 것은 당황스러운 상황을 무시해 버리는 능력과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어 내는 능력이었습니다. 양아버지 테리 암스트롱의 매조차도. 
암 진단을 받은 후 어머니와 나는 마치 사이클 경기를 위해 훈련할 때처럼 열심히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면 될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결코 혼자 있지 않도록 ‘공동체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나의 항암치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움직여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산책도 하고 활보도 하면서 매일 아침 사이클을 탔지요. 

암에 걸렸는데 왜 사이클을 타냐구요? 아주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화시켜 주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 걱정을 다 짊어진 듯한 심정으로 떠나지만 전속력으로 다섯시간 정도 달리고 나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힘을 불러일으켜 주는 발전기와도 같았습니다. 학창 시절 비서 일을 하는 어머니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사이클 연습을 했는지 모릅니다. 교차로에서 차에 받쳐 뇌진탕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3종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하루가 지난 후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도 찬성이었습니다.

결과는 3등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내 목표는 이미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반 2학기였을 때 전미 사이클 연맹에서 주니어 미국 전국 팀과 함께 훈련을 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초대를 받았고, 1990년 세계청소년 챔피언십을 위해 모스크바에 가게 되기도 했습니다. 20세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US 프로 챔피언십에서 나는 우승했습니다.

다음해에 나는 뚜르 드 프랑스의 스테이지에서도 21세로 최연소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꿈 같은 일이었죠.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열린 세계 챔피언십에서도 이겼습니다. 
스물한 살 난 선수가 사이클 경기에서 세계적인 타이틀을 얻은 적은 없었습니다. 
사이클은 인생에 대한 은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일 뿐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슴이 미어지는 체험과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 산과 평원 깊게 팬 자동차 바퀴 자국, 사이클 타이어 펑크, 세찬 바람, 극도의 악운,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하품날 정도의 무감각, 그리고 깊은 자기 성찰…. 
나는 암을 경기처럼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만이 달라졌을 뿐 사람을 녹초로 만들고 시간에 의존하며 일정 시기마다 얼마나 진전되었는지 알아보고, 숫자와 혈액검사에 매달리는 것 그리고 체크 포인트가 있다는 점이 사이클과 비슷했습니다.

다만 사이클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 조바심을 내도 안되고 한눈을 팔아도 안 된다는 것.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매순간 거기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삶을 되찾는 것이 가장 큰 승리라는 생각을 하면 기운이 났습니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 나는 이것저것 팔고 검소한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암을 공부하는 학생이 되기 시작했죠. 환자는 그저 의사의 지시만 따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환자 역시 노력하는 것이 의사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암은 뇌에까지 전이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머리 속에 불청객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암과의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넌 사람을 잘못 골랐어.” 

나는 고환암에 관한 책을 쓴 아인 혼 박사를 찾아 인디애나대학병원으로 갔습니다.
그 병원에서 니콜스 박사와 샤피로 박사, 그리고 아인 혼 박사의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 생명이 달린 치료를 담당할 의사와 병원을 찾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거든요. 뇌수술이 있기 전날 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인지 평화롭게 받아들일 것인지.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쉬운 점은 있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리고 암이 별거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신념은 용감하고 영원한 인간의 특성입니다. 
스스로를 믿고, 의사들을 믿고, 치료를 믿고, 내가 믿겠다고 선택한 것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암에 걸리기 전에는 소름끼치는 세상의 부정에 대항하여 어떻게 매일 싸워야 하는지, 서서히 스며드는 냉소주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서서히 죽게 만들고, 냉소주의 그 자체이며, 영혼의 상실입니다. 

6시간 동안 수술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뇌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나이키, 지로, 오클리로, 밀튼-브레들리…. 치료비를 지원해줄 회사도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계약을 끝낼 권리가 있었는데도 계약금을 모두 지불해 주었고, 내가 다시 사이클을 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 

 

항암치료는 내가 죽느냐 암이 죽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공포였습니다.
탈모, 창백한 안색, 황폐화같은 것들은 암의 증세가 아니라 치료에서 나오는 부작용입니다.

항암치료는 암만 죽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세포도 함께 죽입니다. 외로운 치료입니다.
항암치료는 살아 있는 죽음 같았습니다. 약물은 내 조직을 구석구석 태우고 내 몸에 얼룩까지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나의 항암치료 결과는 날로 좋아졌습니다. 내가 암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사이클 선수의 본능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나는 암이 뒤쫓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이클을 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건강한 혈액세포를 파괴해서 헤모글로빈 수치를 끌어내려 산소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같은 간호사 라트리스는 내가 다른 환자들과 대화를 나누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나 자신에 관한 것, 내 치료, 내 투여량, 내 문제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는데 내가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800만명의 미국인들이 온갖 형태의 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회복기는 훨씬 힘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항암치료를 할 때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도 사이클 선수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의 병상을 지켜 주었던 연인 리사와도 헤어졌고, 진로에 대해서도 고민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암 연구를 하거나 경제학 공부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매력 있는 여인, 나의 아내 크리스틴이 나타났습니다. 
강인하고 독립적이고 민감하고 또 때가 묻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크리스틴은 눈썹도 없고 머리도 박박 민 나를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유럽으로 가서 투르 드 프랑스를 구경했고 사랑을 고백했죠. 마침내 나는 다시 경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94년 9월 4일 나는 1998년 시즌에 사이클 경기로 복귀하겠다는 선언을 하러 인터팍 엑스포에 갔습니다. 

(암스트롱은 1998년부터 다시 사이클을 타기 시작했다. 주종목을 단거리에서 장거리로 바꾸는 모험을 거쳐 마침내 1999년 투르 드 프랑스대회에서 우승한 암스트롱은 `인간승리의 신화'라는 찬사를 받았다) 

기자회견을 열고 신문기자들과 사이클 전문가들을 방안 가득히 모아놓고 경기 계획을 알려주었지만 아무도 내게 계약을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틴은 나의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크리스틴 어머니의 친구가 “어떻게 딸을 암 환자와 결혼시킬 수 있어?” 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럭저럭 70년 살기보다는 1년이라도 멋지게 살고 싶어요. 
인생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크리스틴의 생각이었죠. 
나는 공식적으로 암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병이 재발할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일상세계로 복귀할 것인가? 그것은 내가 암을 앓고 난 후 직면하게 된 문제였습니다.

마음 속 깊이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시 사이클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문을두드려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8개월 만에 내가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통과하는 하이킹인 루타 델 솔이었습니다. 14등을 했는데 사람들은 놀랐지만 저는 괴로웠습니다. 2주일 후 힘든 구간 경기인 파리-니스 경기에 참가 19등. 이기는 데 익숙해 있던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침착했습니다.
직업도 버리고 프랑스에 이사를 오고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거의 하룻밤 사이에 다시 은퇴를 하자는데도 말입니다. 아내 덕분에 은퇴 선언을 미뤘지만 나는 룸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이 가볍지도 않았고 자유롭거나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답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는데 암을 앓고 나서 생존자들이 느끼는 전형적인 태도였습니다. 신체가 회복되었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체와 더불어 영혼도 회복되어야 했습니다. 정말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뒹굴뒹굴 지내고 있었지요. 

크리스틴과 친구들은 나 없는 데서 어떻게 하면 내가 선수생활을 다시 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대화하며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은퇴를 하겠다는 내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1998년 5월 크리스틴과 샌터 바바라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나는 완전히 복귀했고 1998년 10월 1일 내가 암선고를 받은 지거의 2년이 되는 날 부엘타를 완주했습니다. 거기서 4위를 했는데 내가 한 경기 중 가장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그 경기는 너무나 힘들어서 반 이상의 선수들이 포기를 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일 동안 2348마일을 달리는 부엘타에서 4위를 한 것은 복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했습니다.

경기 내내 괴롭혔던 마약 구설수 

뚜르 드 프랑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긴 경기입니다. 
고속도로 가드레일처럼 길게 이어지고 여름 짚단을 말리는 들판처럼 넓게 펼쳐집니다.
피레네 산맥의 얼음 덮인 봉우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세 나라의 전경만큼이나 길게계속됩니다. 이제 나는 옛날처럼 무모하고 불안정한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기술과 방법 면에서 세련되었고 공격적인 면이 줄어들었습니다. 
무언가 나를 심리적으로나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밀어대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뚜르 드 프랑스였습니다. 

나는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쉴 때도 나는 혼자 훈련했습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승리하는 것과 체외수정으로 어렵게 얻은 아이를 건강하게 낳는 것, 그 즈음 크리스틴과 나는 이 두 가지 목적만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크리스틴은 진지하게 헌신해 주었습니다. 
아내가 지루해하거나 불만을 표시했다면 살아가기가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 내가 우승하리라고 점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내게는 단지 미국의 감동적인 암 생존자라는 각주만 붙어 있었습니다. 

르 퓌 뒤 푸에서 열린 시작 경기에서 나는 승리했고 나는 미국 팀을 위해 미국산 사이클을 타고 뚜르 드 프랑스에서 선두로 달리는 최초의 미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암스트롱에게 무언가 있을 거야”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프랑스 언론이 마약 의혹을 나타낸 것입니다. 항암치료가 경주하는 데 득이 되었다고 말한 기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암 치료가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1초라도 할 수가 있다니! 암 환자가 받는 치료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고, 약물검사를 하고, 내 결백을 강조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국제사이클연맹은 내 약물 검사가 사실상 깨끗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경기조직위원장인 장 마리 르블랑은 “병을 이겨낸 암스트롱이 투어를 달린다는 자체가 상징이다.” 라고 했습니다. 

파리에 들어가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설 때 감정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수십만명의 관중들이 거리에 둘러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결승선을 지났습니다. 내가 우승한 것입니다. 
뚜르 드 프랑스에서의 승리와 암 극복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물으면 나는 암을 택할 것입니다.

암이 인간으로서, 남성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나에게 해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당신은 살 확률이 90%라든지 50% 혹은 1%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암이 재발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전히 싸우라고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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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0살쯤 되었을 때, 등에는 미국 국기를 달고 헬멧에는 텍사스의 별을 붙인 채 사이클로 알프스산맥 내리막길을 시속 75마일(약 120km)로 달려 내려가, 아내와 열 명쯤 되는 내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결승선을 통과한 다음, 그 유명한 프랑스의 해바라기 밭에 누워 우아하게 숨을 거두고 싶었습니다.”

랜스 암스트롱의 자서전이랄 수 있는 ‘이것은 자전거 이야기가 아닙니다(It’s not about the bike, 2000년)’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말에서 암 때문에 그렇게 우아하게 죽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불안한 회고와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교차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생존률 60%의 3기 고환암과 싸워 결국 완쾌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세계최고, 최대의 자전거 이벤트인 뚜르 드 프랑스의 5연패란 금자탑을 쌓았다.

암을 이기고 뚜르 드 프랑스까지 5연패한 이 기적의 철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랜스 암스트롱은 1971년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17살 때 암스트롱을 임신한 상태로 결혼했으나 암스트롱이 두 살이 되기 전에 이혼했고, 이듬해 테리 암스트롱과 재혼해서 암스트롱도 그의 성을 물려받게 된다.

암스트롱은 7살 때 처음으로 자전거를 갖게 되어 여느 어린이들처럼 즐겁게 타고 놀았다.

그러다 10대가 되어서는 당시 인기가 높던 미식축구 선수가 되려고 했지만 적성이 맞지 않아 포기하고 대신 수영을 시작한다.

천부적인 심폐능력으로 수영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그는 13살 때 텍사스주 1500m 자유형 경기에서 4위에까지 올랐다.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32km는 사이클로 다녔고, 하루 10km의 수영 훈련을 꾸준히 했다.

그 즈음 아이언 키즈(Iron kids, 어린이 철인3종경기) 대회에 나가 거푸 우승을 거둔다.

15살 때인 1987년에는 대통령배 철인3종경기에 나가 쟁쟁한 어른 선수들 사이에서 32위에 올라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에는 같은 대회에서 5위로 뛰어오르면서 각종 철인3종경기에 출전,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이후 사이클계의 주목을 받게 된 그는 18살 때 미국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1990년 모스크바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한다.

이 대회의 몇 종목에서 1위를 하며 사이클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미국국가대표팀의 새 지도자인 크리스 카마이클 밑에서 경기요령 등을 배우고 사이클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건너가 훈련하면서 각종 대회에도 참가했다.

미국 국내의 프로팀인 스바루-몽고메리팀에도 소속되어 각종 국내경기에 참가했고, 국제대회에는 미국 국가대표로 뛰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첫 번째 경기에서는 꼴찌를 했고, 개인경기에서 그나마 14위에 올라 체면을 세웠다.

당시만 해도 사이클에서는 미국세가 유럽에 크게 뒤지고 있어서 그 정도도 좋은 성적이었다.

올림픽 이후 암스트롱은 뚜르 드 프랑스에서 3번이나 우승한 미국의 사이클 영웅 그레그 레몽드 뒤를 이을 재목을 찾고 있던 세븐일레븐팀에 입단해 유럽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하지만 처음 출전한 스페인의 클라시카 산 세바스천 대회에서 꼴찌를 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후 다시는 꼴찌는 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스위스 취리히 대회에서 2위에 올라 표창대에도 섰다.

21살 때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 경기에서 최연소로 우승을 휩쓸어 100만 달러의 보너스를 받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 해 뚜르 드 프랑스에 처음 출전했지만 12구간에서 기권했다.

그러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 처음으로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95년 다시 뚜르 드 프랑스에 도전했지만 역시 중도하차했다.

이후 각종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96년 10월 뜻밖에 고환암 3기의 선고를 받게 된다.

생존률은 겨우 60%였고 회복되더라도 사이클은 고사하고 걷기도 힘들며 아이도 갖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몇 달간 수술과 힘든 화학요법을 받으면서 완치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암스트롱은 잠시 쉰 다음 98년 시즌부터 사이클 경기에 복귀했다.

18개월만에 처음 참가한 경기는 5일간 스페인 전역을 달리는 ‘루타 델 솔’로, 14위에 올라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예전의 암스트롱이 돌아온 것이다.

크리스 카마이클과 함께 훈련을 거듭해 컨디션을 되찾은 암스트롱은 98년 세계 3대 투어경기 중 하나인 부엘타 라 에스파니아에서 4위에 올랐고 이후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USPS팀에 소속된 그는 이듬해 뚜르 드 프랑스에 출전, 대망의 우승을 거둬 인간승리의 감동을 세계에 전했다.

이후 올해까지 암스트롱은 뚜르 드 프랑스를 5연패하면서 ‘뚜르 드 프랑스’의 사나이로 신화를 쌓아가고 있다.

또 수술전 보관해둔 정자를 이용해 체외수정으로 아들 하나도 얻었다.

그는 암을 극복하면서 사이클 선수로서, 한 인간으로서 더욱 높은 차원의 삶을 성취하게 된 셈이다.

그의 투병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칼 아우스만 박사는 그의 우승광 경을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본 그 사람입니까. 머 리카락 한올없이 앙상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간신히 몸을 움직이던 그 사람입니까. 오 하나님, 이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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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의 전설 랜스 암스트롱(Lance Armstrong)
암스트롱은 고교 졸업 후 본격적으로 사이클 선수로 데뷔하게 된다. 그리고 1993년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하면서 주목받는 선수로 성장했고, 미국의 엘리트 스포츠 육성의 중점 훈련대상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고환암'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미 가슴에 12개의 종양이 생겨 있었고, 뇌에까지 암세포가 번져있었다. 생존 확률은 의학적으로 단 3%에 불과하다는 진단마저 들었다.
하지만 랜스 암트롱은 거기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쪽 고환을 잘라내고 뇌로 번진 암세포를 제거하기 위해 뇌를 절개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몇 차례의 대수술과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받으며 간신히 생명의 끈을 붙잡았다. 여기까지만해도 암스트롱은 정말 대단한 일을 이뤄낸 것이다. 3%에 그치는 생존확률을 뚫고 생명을 부지했으니까 말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사이클 훈련을 병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주위에서 '무리다'라는 반응들이 줄을 이었지만, 그는 사이클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아 나갔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불사조처럼 부활하여 1999년 뚜르 드 프랑스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1%의 희망'을 현실로-
2004년 암스트롱은 자신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1%의 희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암을 극복한 용기와 도전적인 정신자세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병마로 고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그는 2004년과 2005년 실제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또 다시 승리하며 투르 드 프랑스 7연패를 달성했다. 1%의 희망을 현실로 되살려낸 암스트롱이었다.
불가능 할것만 같았던 암스트롱의 삶....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고... 그는 모든 현실과 모든 벽을 뛰어 넘고 극복해 냈다.
1%의 희망만 있어도 달린다 는 그의 신념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나에게 프랑스 투어와 암에서 어느 것을 이기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암을 택할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프랑스 투어 우승자라는 소리보다는 암 정복자라는 소리를 더 듣고 싶다.”
프랑스 사이클 투어를 무려 5차례나 우승한 미국의 랜스 암스트롱.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사이클 스포츠에서 미국인으로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그는 암투병을 거치고서도 세계 최고봉에 우뚝 선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다. 
아마추어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거둔 암스트롱은 자격이 되자 즉시 프로에 입문했다. 사이클 고수들과 진검승부를 펼쳐보기 위해서이다. 데뷔전으로 ‘세바스챤 클래식’에 출전하였다. 뭔가 감이 좋았다. 루키지만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마음속에 생겼다. 111명의 프로가 출전하여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다. 최악의 날씨였다. 비가 계속 내려 몹시 추웠다. 몸이 따뜻해지질 않아 뼛속까지 얼어붙는 냉기가 느껴졌다.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몸에 온기가 생기질 않으니 혈액순환이 제대로 될 턱이 없다. 순위가 점점 처지기 시작하더니 꼴찌로 밀려버렸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우승이 문제가 아니라 기권을 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오히려 암스트롱을 괴롭혔다. 길가로 차전차를 돌려세우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멈출 수는 없어. 중도포기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줘서는 안돼!” 랜스 암스트롱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50명이나 기권한 시합이었지만 끝까지 버텼다. 골인하기 위해서 언덕을 넘었다. 스페인 관중들이 비웃으며 떠들었다. “저 꼴찌로 들어오는 불쌍한 선수 좀 봐.” 완벽한 꼴찌였다. 일등보다 무려 30분이나 늦게 골인점을 통과한 것이다. 
암스트롱은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과연 프로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사이클을 포기해야겠다는 판단이 들어 코치인 크리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선을 통해서 크리스의 격려가 들려왔다.
“랜스, 이 시합이 네 인생에서 가장 많은 교훈을 준 배운 시합이 될 것이야.”
꼴찌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황스런 일이다. 그것도 특별한 이유 없이 최선을 다한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경쟁대상자 중에서 자신의 능력이 바닥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참 묘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꼴찌는 반대로 기회의 순간이기도 하다. 앞서 가는 사람들을 맨 뒤에서 멀찌감치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이다. 그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승부하고 있는가를 차근차근 분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그래서 꼴지도 이래저래 배울 것이 많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암스트롱은 데뷔전에서 철저하게 무너져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스스로 무너지지는 않았다. 레이스를 포기하고 쓰러지는 암스트롱이 아니라, 집요하게 쫓아오는 투지를 자신의 강점으로 내놓았다.
암스트롱은 다시 도전하겠다고 결심했다. 이틀간 쉬고 다음 대회를 준비했다. ‘쥬리히 챔피온십’ 대회였다.
가슴이 터지더라도 페달을 밟겠다고 다짐하고 훈련에 돌입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번 대회에서 꼴찌로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시합에 돌입하자, 페이스 조절이고 뭐고 상관없이 꼴찌를 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신과의 승부를 했다. 결국 암스트롱은 2위로 골인라인을 통과했다.
시상대에 선 그는 ‘내가 그렇게 엉망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선배들에게 확인시켜줄 수 있어 안도감이 생겼다고 한다. 데뷔전에서 꼴등하고 그 즉시 다음 대회에서 2등. 프로 사이클리스트들은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괴물이 일으키는 꼴찌의 반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된 꼴찌에게 일등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드디어 한국에 랜스암스트롱이 왔다. 암스트롱은 세계스포츠중 가장 힘들다는 뜨루드 프랑스에서 7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선수이다. 그때문에 유명한 것은 당연한데, 이선수의 내력을 보면, 고환암을 극복하고 그후에 연이어 7연패를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믿기힘든 사실이고,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이겨낸 그가 생각한 7연패의 위업은, 사실 그에게 암보다는 어렵지 않았다는 것.

그의 말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선수 처럼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이겨내고 사이클링은 그저 스포츠일 뿐이고 더 힘든 것은 삶이라는 표현에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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