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안나푸르나-사우스”가 바로 눈앞에 펑퍼짐하게 보이고,
夕陽노을에 반사되어 약간 붉은 빛을 띠는 만년설에 뒤덮인“다울라기리”가 서쪽에 보이고
동쪽으로는“히운츌리”“마차푸차레”가 연이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거대한“히말라야”白山群에 눈이 시었다.
“선글라스”의 고마움을 느끼며 대자연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뉘엿뉘엿 약해져가는 夕陽이지만“안나푸르나”連峰 斜面白雪에 반사되어 사정없이
튀어나오는 빛의 강력함은 모든 걸 압도하고 있었다. 산은 시시각각 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산자락 밑으로 기어드는“트레커”들에게 시퍼렇게 노기를 띠는 것 같기도 하고,
어서 오라고 길을 밝혀주는 것 같기도 했다.
천길만길 단애(斷崖)의 계곡들은 푸르른 녹음으로 부드럽게 싸여 안온하게까지 보이고,
이제 한 나절만 달려가면 <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을 만져볼 것
같은 희열(喜悅)이 전류처럼 온몸에 흘렀다.
"마차푸차레"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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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계곡에는“랄리굴라스”群落의 붉은 반점(斑點)과 돌집들로
점점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유난히 돌이 많아 보인다.
돌담, 돌집 심지어 골목길바닥까지 모두 평평한 판돌로 깔려 있다.
심지어 우리와 비슷한 모습의, 틀림없이“몽골로이드”계일 마을 주민들도
돌을 닮아서인지 무뚝뚝해 보였다. 돌과 함께 돌처럼 살아가는 주민들!
“나마스테!”
하고 다정한 인사말을 건네 보아도 돌아오는 건 엷은 미소뿐이다.
일행 모두가 지친 몸을 이끌고 용케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투크체”마을에 도착해,
<Tukuche Lodge>에 여장을 풀었다.
“롯지”는 이 동네서 제일 커 보이는“나가야”(長屋)다.
방을 배정받자마자 첫날 부지불식간에 당한 신선생의 배려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
신선생보다 내가 먼저 들어가 문간 쪽 침상을 차지했다.
북쪽으로“히말라야”연봉을 훤히 바라다 볼 수 있도록 넓게 유리창을 낸 방이었다.
창 넘어 보이는 한 마장 떨어진 계곡으로는“랄리굴라스”의 붉은 꽃들이 녹음과 어우러져
있고 그 너머로 白山들이 병풍을 이루다 시피하고 있으니 桃源境이 따로 없어 보인다.
나는 여장을 풀고 골목길로 홀로 나와 마을 윤곽을 대충 잡아보며 이집 저집 기웃거리다
털모자, 장갑,“머플러”등이 진열되어 있는 잡화가게로 들어가 이것저것 흥정에 들어갔다.
이 허술한 가게에도 손바닥만한 전자계산기는 있었다.
우선 미화20불짜리를 내놓고 “네팔-루피”로 1500“루피”를 받았다.
공식 환율보다 나에게 후한 계산이었다.
역시“달러”의 위력은 이곳 벽촌에서도 대단했다.
고동색과 흰색이 교직된 고깔모양의 털모자와 연초록과 검은 색이 잘 어울린 털“머플러”,
이 두 가지에 천“루피”를 달라는 걸, 750“루피”에 샀다.
아마 이곳 동네 아낙들이 손으로 짠 염소나 양털 제품일 것이다.
50은 넘어 보이는, 검은 구리 빛 얼굴은 분명 "몽고로이드"형인 주인내외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연신 굽실거리며 <싸게 주었으니 딴 손님을 데려오라는!>시늉을 한다.
역시 장사치들은 세상 어딜 가나 눈치코치가 훤하다!
그러나 속이려 드는 빛은 전혀 볼 수 없는 순박한 산골사람 그대로였다.
나중에 슬쩍 나이를 물어보니, 이들의 실제 나이는 겨우 30대 후반이었다.
가난에 찌들어서인지 나이보다 10년 이상 더 늙어 보이는 것이다.
한결 땅거미가 짙어지는 가운데 방으로 돌아와 창밖을 보니,
멀리 서쪽의“다울라기리”봉은 아직 붉은 노을에 紅潮를 띠고 있는데,
눈앞의 거대한“안나푸르나”主峰(= 南峰)은 은은한 회색빛을 띠어 맨눈으로 편안하게
바라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造化란 말인가!
“안나푸르나”主峰의 맨 꼭대기, 둥그스름한 삼각모양의 정상근처모습이 영락없이
<아기를 품에 안고 애틋하게 내려다보는 아낙>
의 얼굴모습으로 시시각각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맨 정상은 아직 빛이 남아 이마처럼 보이고 그 밑 움푹 패여 들어간 양쪽은 어둠에 짙어져
두 눈의 형상을, 그 중간 길게 튀어나온 곳은 콧날의 형상을, 그 밑에 엷은 미소를 띠는
입모양 그리고 턱. . 여인의 이목구비가 이렇게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빛의 조화였다.
억겁의 세월을 두고 맑은 날 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인간에게
이런 모습을 한 순간씩 연출해온“안나푸르나”!
그래서 인간들은 <풍요의 여신=“안나푸르나”>란 이름을 붙인 것일 게다.
나도 분명히 그 女神像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 애틋한 女神像은 그리 오래 가지는 않는다. 한 10여 분이나 될까,
점차 그 모습이 이지러지며 검어지는 대기에 싸여 사라져 가는 것이다.
그 거대한 세계의 지붕의 일각을 이루고 있는 한 봉우리가 한 순간이나마
이렇게 그윽한 사랑의 化身으로 나타나는 모습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신비감을 넘어
인류의 미래가 어두운 것만은 아닐 거라는 희망이 생겨나는 황홀감을 맛보았다.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인자한 모습의“안나푸르나”영봉(靈峰)의 여신상이 하루에 한 순간이나마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한, 아무리 아귀다툼하던 인간들이라도 이런 대자연의 모습에
감화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고야”의 명화
<“보르도”의 우유 파는 여인(La lechera de Burdeos)> 을“마드리드”-“프라도”미술관에서
본 적이 있는데,“안나푸르나”의 이런 모습이 그녀와 너무나 닮았다.
<우유 파는 여인(=乳母)>은
“보르도”지방의 아낙들이 젖먹이를 떼놓고 포도밭 일터로 나갔을 때,
동네 갓난애들에게 젖을 물리는 것을 직업으로 가진 여인(유모)을“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그 후 이 그림은 영국의 산업혁명당시 젊은 아낙들이 젖먹이를 떼놓고 공장에 나가
혹사당하는 시대에 더욱 각광 받은 애틋한 표정의 여인상이 되었다.
구라파 판 女工哀史를 대변해 주는 그림인 것이다.
풍만한 유방과 청초한 얼굴모습에 연민의 정이 가득한 눈빛,
가난한 여염집 여인네의 부덕(婦德)이 살그머니 그리고 절절이 배어나오는 명화다.
그런 여인상을 나는“안나푸르나”靈峰의 造化를 통해 한 순간이나마 바라볼 수가 있었다.
다시 볼 수 없는 하나의 幸運이었다!
“안나푸르나”남봉의 <풍요의 여신상>은 얼마가지 않아 검은 빛으로
이지러지기 시작하더니 흔적 없이 사라지고, 금방 산 전체로 어둠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보여준“안나푸르나”정상의 큰 바위 얼굴 여신상은,
앞으로도 아마 내 일평생 잊혀 지지 않는 여인의 환영(幻影)으로 남을 것이다.
"롯지"식당에서 즐거워하는 소설가 현기영과 신경림(내가 사드린 고깔모양털모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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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크체-롯지"아래층에는 둥근 "페치카"식 질화로가 큰"홀"을 훈훈하게 해 주고 있었다.
진흙으로 굴뚝까지 꼬리모양으로 한 발 가량 달아 올리고 거기다 연통을 연결해 놓았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지게 아궁이에서는 굵직한 장작불이 활활 잘도 타올랐다.
“랄리굴라스”꽃나무처럼 단단한 수목을 땔감으로 써서인지 화력이 좋았다.
주위에 수건이나 빨래를 널어두면 금세 말랐다.
고단한 일정을 무사히 마친 일행들은 하나 둘 뿌듯함과 안도하는 얼굴빛을 띠고“홀”로
모여들어,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런 나른한 분위기에 취해 있는데, 갑자기 차대장이 내 옆을 휙 지나쳐가며
<김 선생님이 만나고 싶어 하던 녀석들이 나타났습니다! 딴 사람들 눈치 못 채게 따라오세요!>
라고 했다. 얼결에 구석진 곳까지 뒤따라갔더니 낯선 젊은이 둘이 차대장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전에 대면한 적이 있는 사이인 것 같았다.
나는 차대장의 긴장되고 민첩한 언동으로 보아,
그들이 <인민정부 세금>을 받으러 온 반군(叛軍)들이란 걸 직감했다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마오이스트”라 부른다).
“트레킹”지역 아무데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해 보이는 시골청년들이었다.
아무런 무장도 없었다. 무장투쟁을 벌리는“게릴라”의 화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시골농투성이 같기도 하고“포터”노릇을 생업으로 하는 청년들 같기도 했다.
미소 짓는 순박한 얼굴이나 초라한 행색이 영락없이 이곳 주민인 것 같았다.
눈치 보거나 서먹한 구석이 전혀 없이 천연덕스러워 적대감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이도 스무 살 안팎이나 될까 호리호리하고 어려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평소 자신들 생업으로 일상을 보내다가 유사시에만 본색을 들어 내보이는
무장반군세력의 첨병인 것이다.
산악지대가 대부분인“네팔”- 전국토의 70%를 이미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투크체”도 아마 그들의 영향력이 완벽하게 미치는,
그들로서는 무장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 안전한 해방구인 것 같았다.
나는 너무나 예상 밖의 행색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들을 보며,
모택동이 <정강산, 준의>회의에서 당시 중국공산당 당수 진독수, 이립삼의
도시노동자무장투쟁노선의 잇다른 실패를 비판하고 농촌 농민위주의
독자적인 투쟁노선 즉 "게릴라"전, 지구전을 선언하며
<인민대중은 물, 무장대원(게릴라)은 물고기!>,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도시를 포위하라!>, <인민에게 빌려 쓴 바늘 하나라도 반드시 돌려주라!>,
<잠자고 난 뒤 쓰러진 곡식 대, 풀포기는 반드시 일으켜 세우고 떠나라!>. . .
고 한 말들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모택동은 <준의 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최고"리더"가 되기 시작하여 필경 신중국 탄생의 주역이 되었다).
그런 행동강령이 현실로 벌어지는 현장을 난생 처음 목격하게 된 것이다.
차대장은 그들에게 바짝 다가서며 두런두런 밀담을 나누었다.
어느 틈에 한국말을 조금 아는 주방팀장“땜바”가 가끔 통역노릇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먼발치서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중요한 얘기가 끝난 것 같아,
다가서며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라고 양해를 구한 다음“셔터"를 눌러 대었다.
사진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조건 뿐,
그들은 태무심하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리곤 눈 깜짝 할 사이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 이야길 나누어 보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조용한 만남이고 순식간의 헤어짐이라
우리 일행들 대다수가 눈치도 못 채었다.
그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투크체”마을에 사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계곡 하나 건너 이웃 마을에서 온 것일까?
"롯지"주인 내외는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도 그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어디로 사라지는지를 결코 말해 주지 않는다.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하기야 내가 그들의 행방을 알아 무슨 도움을 줄까만은!
나중에 차대장에게 들어보니,
그들은 <인민정부>발행의 신분증을 갖고 있었으며,
영어가 서툴러 손짓 발짓 섞어가며 겨우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고 했다.
흥정 결과는 일인당 20불 달라는 걸 15불로 깎았고 한 사람 분은 탕감 받았다고 했다.
<정식으로 인민정부가 들어서면 갚아준다>는 영수증까지 써 주었다며,
차대장은 휴지 쪽 같은 막 종이에 휘갈겨 쓴 영수증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영어인지 현지어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아마“네팔”문자일 것이다.
이런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안전한”트레킹“이 보장되는 것이다.
무슨 요지경을 잠시 들여다 본 기분이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이런 곳에서까지 두 개의 정권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가운데,
이곳 무지렁이 백성들은 이편저편 등살에 노심초사,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아직 이 지구촌 곳곳에는 하루하루 목숨 걸고 살아가야 하는
분쟁지역이 수도 없이 많은 것이다. "네팔"의 서북쪽은 바로 "아프가니스탄"이 아닌가!
영국에 용병으로 팔려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는,
다부진 분위기의 "쿠르카"족"포터"(왼쪽), 인도계"포터"(오른 쪽, 아마 "하리잔"일 게다)와 함께.
"네팔"사회는 다민족인데다가 "카스트"제가 인도나 마찬가지로 엄격하다.
"포터"들은 북방계"구르카"족, "따망"족, "쉐르파"족, "구룽"족. . .인도계"하리잔"(불가촉천민)들이다.
이네들 선조는 영국식민지 당시 용병으로 대거 팔려나갔다. 특히 "구르카"족 용맹성은 세계적이다.
지금도 이들 젊은이들은 용병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최고의 출세로 여긴다.
인도의 "쉬크"교도들처럼 "쿠르카"족은 그 용맹으로 이름난"몽고로이드"계 부족이다.
이젠 "쿠르카"하면 용병, 또는 초승달처럼 휘어진 "네팔"단도(=쿠르키)의 대명사가 되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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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파는 여인>을 그린 "고야"의 <자화상>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미술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시험에 떨어지는 등 좌절을 겪기도 했다.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고야는 종교화를 그리면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고야는 <나의 스승은 자연과 벨라스케스와 렘브란트다>라고 말했듯이 초기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1786년 고야는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 등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고야의 생애에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쳤다. 46세 때 갑자기 중병에 걸려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고야는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의 아픈 삶에 깊이 주목하여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담은 그림을 많이 그렸다. 고야는 말년에 마드리드 교외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고야는 낭만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고야의 작품은 제리코와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들라크르와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의 양식은 미켈란젤로와 고야의 예술을 합쳐 놓은 것이다> 라고 하면서 고야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캔버스에 유채, 260×345cm, 1814년작, 프라도미술관 소장
잔인한 인간학살을 고발하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닥쳐 있는 절망의 순간, 인간의 삶이 막다른 상황에 다다랐습니다. 차라리 지옥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1808년 5월 3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는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점령하고 스페인 궁전 앞 프란시페 피오 언덕에서 애국자들을 처형했습니다. 고야는 이 잔인한 장면을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고야는 이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전합니다. 하늘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고 언덕 한 모퉁이에서 끔찍한 대량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땅바닥에는 시체 더미들이 널브러져 있고, 붉은 피가 땅을 흥건히 적시고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두 팔을 높이 쳐든 남자는 최후의 순간을 당당히 맞이하고 있습니다. 곧이어 죽음을 당할 양민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습니다. 더욱 엄청난 피비린내를 예고합니다. 저 멀리 교회의 종탑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악마와 같은 행위를 똑똑히 지켜보고, 그 진실을 역사적으로 증언하는 등불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야는 죽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비극․절망․고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그림 방법을 골랐습니다. 주관적인 열정을 쏟아 넣어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힘 있고 움직임이 강한 X자의 대각선 구도, 연극 조명 같은 강렬한 빛과 그림자의 대비, 거친 붓놀림 등을 구사했습니다. 고야는 죄 없는 인간의 죽음에 울부짖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폭력과 잔인성을 그림으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민중의 저항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스페인의 역사적 비극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공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상 <김복기>님의 블로그에서. ("고야"의 위<"마드리드"1808년5월3일>학살장면이 1950년 한국전쟁 중 황해도 신천에서 일어난 신천대학살을 소재로 한국전쟁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피카소"의 1951년작 <한국에서의 학살> 모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총살장면 구도가 꼭 같습니다! 범초)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는 처참한 모습입니다.
(다음 회에. . . .)
범초
첫댓글 범초님 아주 좋은 곳에 가셔서 좋은 것 많이 보시구요.경험도 많이 하셨네요.
매번 여러가지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