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문장 / 이용헌
‘ㅡ’모음 하나뿐인 속초 앞바다가 진종일 시를 쓰고 있네.
수평선 가득 떠도는 비문非文을 처얼썩철썩 후려치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네.
달랑 남은 백사장 위에 천 번도 더 썼다 지우는 시,
밀었다 두드렸다 밤새 퇴고推敲를 해도 끝내 한 행을 넘지 못하네.
‘ㅡ’ 아득도 하다는 듯 ‘ㅡ’ 깊기도 하다는 듯, 달빛은 자꾸 허연 지우개가루를 뱉어내네.
철퍼덕철퍼덕 앉았다 누웠다 파도는 빈 종이만 구겨 던지네.
생각하매 나 태어난 생生의 바다도 ‘ㅡ’모음 하나였네.
‘ㅡ’모음으로 누워 젖을 빨고 ‘ㅡ’모음 하나로 옹알이를 하였네.
모음에 자음을 더하거나 자음에 모음을 더하기까지는 무수한 입술들이 스쳐갔네.
행과 행을 넘어 행간을 짚기까지는 아직도 숱한 눈과 귀를 훔쳐야 하네.
태초의 문장은 모음 하나, 속초 앞바다가 온몸으로 태초의 말씀을 풀고 계시네.
까마득한 수평선 위로 낯익은 자음들이 날아가네.
너의 나무였다 / 이용헌
하늘아래 와지직 찌그러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단 한 번 너에게 몸을 허락하고
무참히 던져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을 담으면 물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이 되고
내 온전히 네 것으로 되는 길은 아득하나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거우면 차거운 대로
꼭 한 번 몸을 열어 촉촉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처음부터 나의 생生은
네 목울대 근처를 서성이는 목마른 나무였거나
차마 혀와 입술로 해갈하지 못한
또 다른 고백을 받아 적는 순백의 종이였거니
수천수만의 꿈 잘리고 말리다가
끝내는 마음까지 척, 비어버린 종이컵이 되었다
알아?
단지 네 입술이 몸에 닿는 순간 미련 없이 열반하는 나
백병원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가 언 땅을 찍고 있다
채송화 줄기처럼 연붉은 발가락을 바짓단 밖으로 내놓고
불광동 옥탑방에 세 들어 살던 비둘기가
탑골공원에 나가는 일은 일과 아닌 일과였다
3호선을 따라 무악재를 넘어 종로3가에 이르는 길은
그가 기억해야 하는 유일한 항로였다
기껏해야 빵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는 노후지만
척신隻身의 그에게도 날개는 있었다
장기판을 거들거나 사물패를 따르다가도 그는 훌쩍
하늘로 오를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높이 날 수 없다는 것, 그에게는
적빈赤貧이 곧 자유였다
방하착放下着을 아시나요?
날개가 점점 무거워져요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나이에 그는 그녀를 만났다
창공의 편대에서 떨어져 나온 은빛 비행기처럼 희디흰
그녀의 처소는 달비듬만 내려앉는 공원벤치라 했다
한때는 축포소리에 맞춰 수없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그녀는
어느 날부터 날갯짓을 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속깃을 씻겨주는 이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싸구려 밥집을 기웃거리거나
근처 낙원떡집 앞을 서성이거나 가끔은 넋 나간 기억으로
도로를 무단횡단 하는 것이었다
출근길 신호대기 중 횡단보도 너머로 본 그것,
희뿌연 아스팔트 위에 채송화 꽃물 붉었던 그 자리,
오늘 그녀는 이승의 마지막으로 방하착을 알고 갔을까
모가지가 댕강댕강 잘려나간 가로수들이 조문행렬로 서 있는
마른내길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 등솔기를 들썩이며 곡哭을 하고 있다
*방하착(放下着):일체의 집착이나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의 불교용어
- <내일을 여는 작가> 2007 신인상 당선작
[당선소감] - 이용헌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때로는 깜깜하고 때로는 눈부신 무언가가 나를 끌고 다녔다. 몽유(夢遊)의 행려처럼 하릴없이 곤고한 나를 인도하고 지배하는 내 안의 교주는 시공을 넘나드는 시마(詩魔)였다. 눈을 뜨면 쪽창에 걸린 새벽별이 예언의 묵시처럼 가물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사이비 신도(信徒), 시시종종 시를 욕보이고 구구절절 문학을 배반하기 일쑤였다. 고백컨대 나는 아직도 사무사(思無邪)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평생을 시인 흉내만 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시는 나에게 절망이자 곧 희망이다. 비루한 현실에서 절망을 구걸 없이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시의 힘을 빌리는 일뿐이었다. 궁극적으로 절망의 밑바닥에는 생과 사의 양단(兩端)만이 존재한다. 생을 버리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는 희망 쪽이다. 그 희망 쪽에 목숨을 걸게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절망과 슬픔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슬픔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문학은 결국 상처와 결핍의 이야기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사람 냄새가 나는 시를 쓰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다구니와 하늘의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도 달팽이처럼 유유히 사유의 늪을 기어가고 싶다. 이제 시를 잃고 흘러간 과거는 나의 이력에서 지울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뒤에서 힘이 되어준 풀밭 동인들, 특히 문학에 대한 열정만 믿고 노심초사 조언을 아끼지 않은 선배 시인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부족한 글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늦깎이로 다시 출발하는 나를 묵묵히 응원해준 여러 벗들과 광은, 채은 두 아이와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심사위원 : 안상학. 김근.
* 이용헌 : 1959년 광주 출생.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