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모사재인(謀事在人)
방은 북쪽 방향의 벽면에 촛불 두 개만이 켜져 있을 뿐이어서 흐릿한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온다면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을 테지만 창문에 두텁고 검은 커튼이 길게 드리워져 햇살의 침입을 막고 있는 중이었다.
굵은 양초 위에서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있는 두 개의 불꽃 사이에는 검은 제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검은 대리석 관이 놓여있었다.
연한 푸른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다 타들어 간 향을 새로운 향으로 바꾸어 향로에 꽂던 양천종(梁天宗)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강 아우.
그의 나직한 중얼거림엔 침통함이 가득했다.
관 뚜껑은 닫혀 있었지만 그 안에 누워 있는 자가 누구인지는 불문가지였다.
양천종은 관 앞에 마련된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손을 들어 관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대륙무성(大陸武聖)이라 추앙받으며 이미 오래 전 초인지경(超人之境)에 도달한 그도 북받치는 감정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강우림의 패사(敗死)는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천외천부의 잔당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자가 강우림을 패사시킬 정도의 능력자라고는 그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한국과 일본에 설치한 지부의 무인들과 장로인 곽병량이 당하며 상대에 대한 경각심을 갖긴 했지만 강우림이 상대와의 단독 대결에서 패사한 것은 곽병량의 경우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현장의 흔적은 강우림이 자신의 최고 절기를 펼치고도 당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가 암수(暗手)를 펼치지 않고도 본신의 실력만으로 강우림을 죽였다는 말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양천종은 눈을 감은 채 들었다.
그의 등 뒤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무거운 얼굴을 한 채 무릎을 끊고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양천종의 질문을 받자 말문을 열었다.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강 장로님이 당한 것만으로도 그자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그자를 죽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 들어가 있는 무력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냐?
그렇습니다.
군아와 친위대가 있고 장로 세 명과 무단의 아이들이 열이나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자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소회주님도 진인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그자에게 전력을 기울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으음.
양천종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렀다.
그의 질문에 대답한 중년 사내는 그의 수족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내가 그의 주변을 이십사 시간 따른 지도 이십 년이 넘는다. 조직과 그에 대해 그의 두 제자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잘 아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사내였다.
네 생각을 말해 보거라.
장로님들을 모두 보내거나 무단의 무인들을 모두 보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천부를 상대하면서 시간을 끈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회의 역사가 말해줍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속전속결해야 합니다.
중년인의 말을 들은 양천종의 입에서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것이다.
그와 함께 입을 닫은 중년인은 말없이 양천종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무저갱을 연상시킬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은 무심했다.
무단의 아이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채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었기에 부산의 앞바다에서 그처럼 속절없이 죽어간 것이다. 백두산에서 그들의 선배들을 잃지 않았다면.
다시 입을 연 양천종의 음성에선 짙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허허허,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천부의 숨통을 끊지 못했을 테니 부질없는 말이긴 하다만. 본회에 남아 있는 무단의 아이들을 소집하거라. 아직 부족한 그 아이들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보내지 않을 수 없구나. 장로들이 셋이나 가 있으니 그 아이들을 지휘해 충분히 천부의 잔당을 삭초제근(朔草除根)할 수 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회주님.
중년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호국무단(大護國武團)의 소속 인원은 모두 팔십 명이다. 그중 각 지회에 나가 있는 인원이 대략 사십 명 정도이고 본회에 남아 활동하는 자들이 사십 명 정도다. 하지만 그 사십 명을 모두 소집할 수는 없다. 대륙에 존재하는 여러 세력을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숫자가 열다섯 정도이니 소집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이십오 명 선이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충분했다.
양천종은 그들이 완성되지 않았다며 고개를 가로젓지만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일반 무술을 배운 고수 일백 명이 모여 있어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것이다.
한국에 가 있는 장로들이 그들을 지휘한다면 천부의 잔당들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이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년인은 양천종의 등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선 그의 왼편으로 별리 자금성의 웅장한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고 있었다.
이정동은 초조하고 불안한 기색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거실에 함께 앉아 있는 아홉 명의 사내들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팀장인 이정동조차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팀원인 그들이라고 다를 리 없는 것이다.
그들이 예전부터 조직에서 은밀히 마련해둔 경기도 여주의 은신처에 도착한 것은 세 시간 전이었다. 은신처는 인가가 드물고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곳에 세워진 단층 주택이었다. 별장 형태로 지어진 곳이어서 편의 시설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긴 시간 숨어 지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흔적을 지우고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은신하라는 지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평소 철저하게 훈련되어 있는 그들이기에 모든 것은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그들이 조직에 몸을 담은 후 이런 경우는 처음 당하는 일이어서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도 빠르게 적응되지는 않았다.
팀장님,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이정동의 눈치를 살피던 유정래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이정동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다. 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 같은 말단이 어떻게 알겠냐?
말을 끝낸 이정동이 한숨을 내쉬자 전염이라도 된 듯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정동은 그런 팀원들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의 책임자는 그였다. 그가 흔들리면 팀원들도 흔들린다.
그가 아는 조직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그 힘은 전국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 폭력 조직들도 소리 없이 접수할 정도였다.
그가 조직에 가입한 것은 칠 년 전이고 그의 팀은 겉으로 작은 유통회사를 운영하며 동무파와 더불어 강북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폭력 조직 북악파를 관리해왔다.
얼마 전 지시를 받고 북악파의 손꼽히는 스트리트파이터 김영찬을 비롯한 십여 명의 아킬레스건을 잘라 병신을 만든 후 제거한 것도 그의 팀이었다.
물론 북악파라는 거대 조직을 그의 팀 혼자서 관리해온 것은 아니다. 다른 팀들이 몇 개 더 있다는 것은 눈치로 알 수 있었지만 이정동은 그 팀이 어디에 있는지 누가 속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속한 조직은 팀 단위를 벗어난 어떤 사항도 서로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철저한 점조직인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그 조직의 힘은 밤의 세계에서만큼은 무소불위에 가까워 그와 팀원들은 그동안 황제가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답답한 표정으로 거실에 마련되어 있는 감시카메라용 모니터에 시선을 주던
이정동의 안색이 변하며 벌떡 일어섰다.
저거. 기습이다!
그의 놀람에 가득 찬 외침을 들은 팀원들이 모니터를 보고 소스라치듯 놀라
소파에서 퉁기듯이 일어났다.
적!
그들 중 한 사람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주택의 앞 노상에 봉고차와 승용차 대여섯 대가 줄지어 서더니 그 안에서 언뜻 보아도 이십여 명은 넘어 보이는 건장한 양복 차림의 사내들이 앞 다투어 뛰어내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대부분 머리를 스포츠 형태로 짧게 자르고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알루미늄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 사시미가 들려 있었다.
부릅뜬 눈에 살기가 넘치는 것이 흉악한 표정들이었고 왜 이곳을 찾았는지 저들의 표정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모습들이었다.
이정동은 팀원들을 둘러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자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모니터 화면에 보이는 자들이 적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 조직의 명령으로 총을 폐기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은래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들고 나간다.
이정동은 허리춤에 꽂혀 있던 회칼을 꺼내 손에 들었다. 그와 팀원 개개인은 모두 일당십의 고수들이다. 저들의 숫자가 그들의 배가 넘는다 해도 꼭 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정동의 말을 들은 사내들의 얼굴에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곳은 도주로가 없다. 최후의 은신처로 마련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수진을 친 격이었다.
뚫고 나가지 못하면 이곳에서 뼈를 묻을 수도 있다.
사내들도 각기 무기들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정동이 현관문 앞에 섰다. 모니터에 보이는 적은 이미 대문을 부수고 저택의 좁은 정원으로 난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영상만을 전송하는 감시카메라 덕분에 마치 한 편의 무성영화를 보는 듯했지만 거실에 있는 자들에게 모니터에 잡히는 영상을 영화 감상하듯 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간다!
이정동은 회칼을 힘주어 잡으며 낮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말한 후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막 현관 앞에 도착했던 침입자 두 명이 놀라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정동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상체를 낮게 구부린 채 두 사내의 가슴께로 달려나간 그가 체중을 실어 연속으로 찔러댄 회칼이 두 사내의 복부에 스윽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들어갔다 나오며 그들의 몸에 피 구멍을 만들었다.
멍한 시선으로 이정동의 회칼과 자신의 복부에 난 상처를 보던 두 사내가 동시에 허물어졌다.
뒤따라오던 스포츠머리의 사내들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죽여!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르지만 살기 가득한 외침이 터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쇠파이프와 회칼이 곳곳에서 상대를 난자해 갔다. 어둠이 내려앉은 저택의 정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들어오는 자들과 나가려는 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좀 뒈져라, 개새끼들아!
제대로 맞으면 뼈라도 으스러질 것 같은 기세로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침입자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욕설이 흘러나왔다.
정신없이 회칼을 휘두르다 등에 상대가 휘두른 야구배트를 맞고 정원을 한 바퀴 구르고 일어난 이정동의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갈며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지만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이 너무 좁았다.
공간이 조금 더 확보되었어도 자신과 부하들은 충분히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대문과 현관 사이에는 폭이 5미터도 채 되지 않는 정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 삼십여 명이 넘는 건장한 사내들이 손에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며 뒤엉켜 있으니 제대로 솜씨를 발휘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그의 부하 중 여섯 명이 쓰러진 채 상대방에게 집단으로 린치를 당하고 있었다. 그들이 정신을 잃었음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남은 부하 세 명이 사내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머리통이 깨지며 쓰러진 것은 몇 초지나지 않아서였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전력을 다했지만 정원에 굳건하게 두 다리로 서 있는 상대는 아직도 반 정도가 남아 있었다.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을 한 사내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이정동의 주변을 포위했다.
곱게 맞고 쓰러졌으면 이렇게 피를 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양손에 두 자루의 잭나이프를 들고 서 있던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이정동은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하자 오히려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있었다.
알아서 뭐하게. 씨벌 놈.
잭나이프에 묻어 있는 핏방울을 정원에 떨치며 사내는 눈을 희번덕거렸다. 흰자위가 검은자위보다 더 많은 사내의 눈은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 뭐냐,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라고 하던데, 이 씨벌 놈은 자꾸 말을 하려구 하네. 태워버려라!
사내는 이죽거리며 말하다 차가운 명령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후두두둑
끄으으악!
사내의 지시가 떨어짐과 동시에 소나기가 쏟아지는 듯한 매타작 소리와 함께 이정동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쇠파이프와 알루미늄 야구배트 예닐곱 개가 동시에 그에게 떨어진 것이다. 피할 공간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쓰러지는 이정동의 모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잘 다진 고깃덩이를 연상시킬 정도로 무참하게 변해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조폭들 간의 전쟁은 여주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졌고, 새벽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십수 년 동안 대명회가 전국에 이룩했던 각 지역의 힘이 하룻밤 만에 붕괴되었다.
대명회의 반격은 미미했다. 그것은 그들의 저력에 비한다면 저항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믿기 어려운 허망한 패퇴였다. 하지만 그 허망한 패퇴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지시를 받고 움직인 조폭들조차 자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임한이 나타났다고?
윤찬경의 안색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그렇습니다, 회장님.
남국현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서울 우면동의 은신처에서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못하며 상황을 파악했던 그들이라 두 사람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며칠 잠을 자지 않는다고 체력에 문제가 생길 그들은 아니었지만 지난 밤 그들이 소모한 심력은 그들의 체력으로도 버터기 어려울 만큼 컸다.
어딘가?
서초동의 대검찰청입니다.
대검?
예. 경찰청 수사국장 유정기와 서울지검 강력부 부장검사인 윤형석이 아침에 대검으로 들어가는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임한은 그들과 만날 예정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제 움직인 자들은 검경이 아니었는데?
어젯밤 일어난 일도 그의 수작인 듯합니다. 이제는 어젯밤에 전국에서 벌어진 일의 마무리를 짓고 수습을 해야 할 때입니다. 어젯밤 전국 일선 경찰이 움직이긴 했지만 그것은 일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찰 내부의 협력자에게 들은 정보로는 경찰도 제대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지시대로 움직인 듯합니다. 우리 부하들과 조폭들로 전국의 유치장이 미어터질 지경이니 이제는 검경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허허허. 그놈이 조폭을 움직일 수 있다니, 설마 조직들이 덮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검경이 아니라 조폭이라니.
윤찬경의 눈에서 힘이 빠졌다.
지난밤의 일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자료를 폐기하고 부하들을 잠적시켰지만 사십 퍼센트에 달하는 부하들이 은신처를 발각 당했다.
기습은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전국의 은신처가 속절없이 드러났고 드러난 곳에 숨었던 부하들은 지금 모두 해당지역 경찰서의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마치 조폭과 경찰이 연합이라도 한 듯 조폭들이 회의 은신처를 기습해 부숴놓으면 끝날 때쯤 경찰이 나타났다. 부하들이 도주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을 기습했던 조폭들도 많은 숫자가 검거되었다.
전국은 지금 범죄와의 전쟁을 연상시키는 태풍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자들이 그렇게 무모하게 움직인 이유가 임한이었던 건가?
.남국현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왜 임한의 요구를 받아들였을까? 자신들의 피해도 막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윤찬경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폭이 의리 때문에 움직인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풋내기나 하는 것이다.
조폭은 이익 때문에 모인 자들이고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조직이 붕괴될 위험을 무릅쓰고 회의 은신처를 기습한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 임한이 대가를 보장한 듯싶습니다. 그가 그들을 움직인 것을 보면 그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예전부터 파악하고 있다가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보인 자입니다. 그는 조폭들에게 당근과 채찍을 병행했을 겁니다. 우리를 치면 자신이 갖고 있는 그들의 범죄 자료를 폐기시켜 주겠다거나 하는. 게다가 얼마 전 서충원이 은밀히 수하들을 키웠던 것처럼 그자들도 우리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들을 하고 있었으니 양쪽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그들도 이번에 심각한 타격을 받겠지만 그들의 수뇌부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직을 재건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만한 능력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임한의 제의는 거절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겁니다.
멍청한 놈들!
남국현의 말을 들은 윤찬경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노한 일성이 터져 나왔다.
닭대가리 같은 놈들. 교도소에서 일찍 나올 수 있다 해도 자신들이 예전의 조직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다니.
그들은 임한이 갖고 있는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결론은 다시 임한으로 돌아가는군.
놈을 제거하지 않고는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습니다. 대검이라. 복귀하겠다는 건가? 그놈이 무슨 생각으로 몸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가?
두 가지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국현은 침을 삼킨 후 굳은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한 공격을 위해 공권력을 동원하려면 대검에 모인 사람들에게 브리핑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리는 없지만, 그는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래 온 자입니다. 게다가 그는 아직 말단이라서 상부에서 부르면 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가 제아무리 중요한 인물이라도 그가 있는 곳으로 고위공무원들이 움직일 리가 없죠. 두 번째는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서라는 가정입니다. 정운과 이준하의 죽음을 그도 이제는 알 것이고, 이준하의 장례식이 내일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그를 쫓기 위해 광주에 내려가 있는 우리 힘의 일부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분산되는 것입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후자를 노린 포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국현의 말을 들은 윤찬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힘의 분산을 노린다는 것이 합당할 듯하군. 소회주님께 보고하겠네. 그놈이 노린다고 해도 광주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야만 한다면 불러야지. 판단은 소회주님이 하실 것이네.
문제는 그자를 추적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자는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예전처럼 두고 보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예, 그를 감시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라면 희생만을 키울 뿐입니다.
휴우. 그를 감시해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능력자라면 장로님들 수준의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하지만 그분들이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해주실지.
남국현의 목소리도 기어들어갔다.
원로원의 장로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상대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으려 할 것인가.
아마 그 말을 꺼내면 그들은 말을 꺼낸 자의 목을 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감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임한을 죽이기 위해서일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임한이 그들을 공격하는 검경과 함께 움직이는 동안 그를 공격한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장로들이 연합한다 해도 임한은 순순히 당할 자가 아니다. 그들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도 있는 것이다. 윤찬경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없다면 이렇게 머리를 복잡하게 쓸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 문제도 소회주님이 판단하실 일이야. 이제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네. 보고하고 그에 따른 지시가 내려오면 목숨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일세.
알겠습니다.
내색하려하지 않았지만 남국현의 음성은 씁쓸했다.
대검찰청 5층의 사무실에 들어선 한은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가 있었다.
왔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를 맞은 것은 경찰청 수사국장 유정기였다.
임한은 유정기에게 인사를 한 후 유정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차례로 인사했다.
두 사람 모두 임한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국정원의 남기호 부장이고, 그 옆의 굵은 뿔테 안경을 쓴 투박한 인상의 사내는 서울지검 강력부의 윤형석 부장검사였다.
윤형석은 예전 수원지검 특수부에서 근무할 때 한을 일본으로 보냈던 사람이다.
오랜만이네.
윤형석은 특유의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부장님.
한의 음성도 담담했다. 하지만 그는 맥박이 조금 빨라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도 긴장한 것이다.
윤형석이 승진해서 서울지검 부장검사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산에 내려와 강력반에 복귀한 직후였다. 며칠에 불과했지만 함께 일했던 사람이라 검찰에서 윤형석의 승진과 인사이동에 관한 소식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한이 자리에 앉자 회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네 명이 둘러앉은 모습이 되었다.
남기호는 테이블 위에 있던 파일을 집어 들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지난밤에 이루어졌던 일에 대한 자네의 설명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명회 붕괴 작전의 상황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자네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네.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부르지 않을 수 없었어. 이해해주게.
괜찮습니다.
자네의 연락을 받고 유 국장님과 합동해서 어젯밤 전국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감시했네. 폭력을 행사한 쌍방 대부분의 인물들을 검거해 해당지역의 경찰서 유치장에 집어넣었고, 그들의 처리에 대한 문제는 2차장님이 검찰과 이야기를 마친 상태네. 고생했네. 자네가 어떻게 조폭을 움직일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움직인 덕에 우리의 일이 많이 줄었어. 성과가 엄청나다네.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밤에 벌어진 일은 거의 남김없이 정보 파악이 되었다.
국정원과 경찰은 전국의 폭력 현장에 사용 가능한 전 인원을 투입했다. 그것은 한의 연락을 받은 국정원의 남기호가 2차장을 움직였고 2차장은 국정원장을, 그리고 국정원장은 경찰청장의 협조를 받아 이루어졌다. 어제 낮에 이미 국정원장이 경찰청장에게 대명회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며 전격적인 협력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작전이었다.
대명회의 하부조직과 조폭 70퍼센트 정도가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나머지 30퍼센트도 이동 경로와 은신처가 드러난 상태였다. 앞으로도 검거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임 형사의 이야기를 남 부장님에게서 들었다. 그동안 위험한 일에 발을 들여 놓고 있었더군. 우리와 상의가 없었던 것이 조금은 섭섭하기도 해.
유정기였다.
말은 그랬지만 유정기의 얼굴에 섭섭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을 보고 있었다.
그는 관료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는 해도 생각이 유연한 사람이다. 그는 한이 대명회에 대한 정보를 조직 내부 계통으로 보고하지 않은 고충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이 경찰 내부 보고 계통으로 대명회에 대한 정보를 공개했을 때 한의 계급으로는 오히려 역효과가 더 컸을 것이다. 아마 제대로 수사에 착수하기도 전에 한이 먼저 어떤 형태로든 반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능력이 있다고 혼자 모든 것을 하지는 못한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비록 지금까지 한이 국정원과 보조를 맞추며 일을 해왔지만 그가 경찰신분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유정기가 충분히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자네에게도 고충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자네가 공을 탐해 조직에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우리는 공무원이야.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하는 일인데 어디에서 일하든 상관이 있겠나.
유정기는 웃으며 말했다.
한도 담담하게 마주 웃었다. 유정기는 박송원만큼이나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어젯밤 경춘파와 북악파, 동무파 그리고 대원파를 비롯해 그들의 직간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는 전국의 조폭 삼천여 명이 일제히 움직였네. 자네가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익히 아는 일이지만 어떻게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는지 무척 궁금하더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네가 그동안 국정원에 보고한 적도 없었고.
예전에 제가 대명회와 부딪쳤던 일이 있었습니다. 남 부장님도 아시는 일이죠.
한의 시선이 잠깐 남기호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유정기에게 돌아갔다.
그때 그들 조직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전부 말씀드리기엔 상당히 복잡합니다. 나중에 따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유정기는 짤막한 대답으로 한의 말을 받았다. 궁금한 사항이긴 했지만 현재
시점에서 조폭들이 움직인 이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움직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이 움직여서 대명회 붕괴 작전이 생각보다 수월해졌고 그 움직임 덕분에 조폭들을 검거할 수 있는 명분과 근거가 만들어졌다. 이유는 나중에 들어도 되는 것이다.
자네가 국정원에 보고한 것 중에 박 의원에 대한 것도 있더군. 그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테러를 당한 것이 확실하다고?
유정기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습니다.
한의 대답에 유정기는 물론이고 남기호와 윤형석이 긴장으로 굳은 표정이 되었다.
일국의 국회의원에 대한 테러가 사실이라면 이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사고 당시 운전기사를 비롯해서 수십 명의 목격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했지만 테러의 가능성은 발견할 수 없었어.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
그분의 상처를 보고 받으셨을 텐데요?
뇌에 입은 상처와 척추 부상 말인가?
예.
그것이 왜? 특이한 상처이긴 하지만 그런 상처는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라는 게 의사들의 결론이었어. 그리고 당시 교통사고 외에는 박 의원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목격자들의 한결 같은 진술이었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런 상처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게 누군가? 설마?
설마가 맞습니다. 대명회에는 특수한 고대 무예를 수련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상처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한에게 묻는 윤형석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은 윤형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렇게 윤형석을 바라보던 한은 손을 들어 오른쪽 머리카락을 뒤로 제쳤다.
절반밖에 남아있지 않은 그의 귀가 드러났다.
한은 자신의 귀와 뺨에 난 상처를 손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들을 상대해 왔으니까요. 이 상처는 그자들과 부딪치며 난 것들입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저는 무술을 오래 수련했고 나름대로는 꽤 실력이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무술을 익힌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익히고 있는 것은 아주 특수한 무술이고 그 무술 중에는 기를 이용해 사람의 신체를 상하게 하는 수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 의원님은 그 기술에 당하신 겁니다.
자네도 그런 기술을 사용할 수 있나?
그렇습니다.
흠.
방 안이 정적에 잠겼다.
사람들의 안색은 무거웠다.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대명회라는 사안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서 공개한 비전에 기록된 내용이 허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긴가민가하던 유정기와 윤형석은 상황이 그들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달았다.
지난밤 대명회의 하부 조직을 검거할 때도 그 규모의 거대함과 이미 은신처를 마련해 둔 치밀함 그리고 전국에 걸쳐 은신처를 마련할 수 있는 그들의 자금력에 긴장한 그들이었지만 박송원이 당한 테러는 그들에게 긴장을 넘어선 경악으로 다가왔다.
어젯밤의 일로 그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네. 비록 수뇌부는 검거하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한 출국금지조치가 취해진 상태고, 통신망과 금융 관련 조회를 통해서 수뇌부 대부분의 인적 사항도 파악되었네. 어제 저녁부터 검경과 국정원의 베테랑들이 여덟 개의 팀을 이루어 각 지역 수뇌부들에 대한 추적에 들어갔고.
윤형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한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포상에는 별 관심이 없는 자. 언제나 무심한 표정의 말단 형사. 가진 바 능력이 계급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 자. 비밀이 많은 자는 믿기 어렵다. 하지만 임한의 그동안 보여 온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며 축적해 온 대명회에 관한 정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대한 것이다.
그들에 대한 추적이 완료된 것은 아닐세. 여러 사람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해. 하지만 지금도 드러나는 문제들이 있어. 지난 밤 검거된 대명회의 조직원들은 대략 사백 명 정도네. 앞으로 검거 가능할 정도로 인적사항이 드러난 자들은 백오십 명 정도이고. 그리고 그들 각 지부라는 곳이 운영했던 회사들은 모두 중소규모의 무역회사였네. 직원 수가 삼십 명을 넘지 않을뿐더러 연매출액 백억 미만의 회사들이고, 그들의 자금이 합쳐진다 해도 육백 억 미만이야. 하지만 그들의 회사와 조직 운영 자금을 제외하면 여유 자금이 턱없어. 조폭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금이 있고 예전에 파악된 것도 있긴 하지만 그 자금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그렇게 많을 수는 없는 일일세. 이런 사항은 금융권, 국민연금, 무역 협회와 통신 회사를 통해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네. 지하 조직으로서는 규모가 대단하고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분명 나라의 암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이 충분하긴 하지만 비전에 적힌 대로의 꿈을 꾸기엔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드는 조직이지. 그 정도의 자금에 흔들리기엔 우리나라의 정재계가 그렇게 허약하지 않네. 조직원들도 깡패들보다 솜씨가 좋다고는 하지만 무력으로 위협해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치안이 형편없지도 않고. 어떻게 생각하나?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흔적을 지웠군요.
한은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에 탄식이 흐르고 있었다.
윤형석의 말에는 국가기관이 대명회를 바라보는 한계가 드러나 있었다.
한도 윤형석처럼 대명회 아니 대한호국회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렇게 고민이 많지도 각오가 처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자네 말대로 흔적이 많이 지워진 상태일 수도 있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작전이 완료될 즈음이면 그들은 조직의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것이 나를 비롯한 윗분들의 한결 같은 의견일세.
우리나라에 있는 그들의 기반 대부분이 이번 작전을 통해 붕괴될 것이라는 부장님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조직을 재건하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은 것은 유정기였다.
유정기는 대명회를 붕괴시키는 작업의 실제적인 책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번 작전에 동원된 사람들 중 90퍼센트 이상이 경찰인력이기 때문이다.
대명회의 수뇌부는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저도 비전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일입니다만 수뇌부에 기록되어 있는 인적 사항을 조회한 사진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제가 만났던 자들은 대명회의 수뇌부 중 무력을 담당했던 자들입니다. 대명회는 무력과 행정을 담당하는 자들로 이원화 되어 수뇌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중 정말 무서운 것은 무력을 담당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무력은 정말 무섭습니다. 그들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는 자들이라면 조폭들은 언제든지 휘하로 흡수할 수 있습니다. 인적 기반을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단 말입니다. 자금은 본국인 중국의 조직이 지원해줄 것이고요. 무력을 담당하는 자들이 건재하다면 그들의 조직은 언제든지 재건 될 수 있습니다.
무력이라?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의 말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들이다.
한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저들은 대명회의 무력 책임자들이 갖고 있는 능력을 모른다. 그 때문에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다고 그가 가진 능력을 공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기호를 비롯한 저들은 뛰어난 사람들이지만 공무원들이었다. 그가 가진 힘을 어떻게 사용하려 할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네가 말하는 그들의 무력이 물론 조폭들에겐 통할 수 있겠지. 조폭들이야 결국 주먹에 의존하는 자들이니까. 하지만 공권력은 다르지 않은가. 어떤 조폭도 공권력과 대항해 싸울 수는 없어. 그들이 조직을 재건한다 해도 노출된다면 오늘처럼 다시 붕괴될 걸세.
윤형석은 확신에 차 있었다.
한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어젯밤의 작전은 전격적이었는데도 확보된 회에 대한 증거와 인력은 한이 예상했던 수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회가 갖고 있는 저력을 알 수 있게 하는 일이었지만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 저력을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와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본 대명회의 힘은 너무 차이가 심한 것이다. 그나마 남기호가 어느 정도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그도 유정기나 윤형석이 갖고 있는 대명회에 대한 인식을 크게 넘어서지는 못했다.
어쨌든 그 일은 이번 작전이 끝난 후에 다시 논하세. 그들이 재건을 꿈꾸게 하려면 지금 그들을 무너뜨려주어야 하지 않겠나.
남기호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말한 행정과 무력의 양 수뇌들은 모두 출국금지조치 되었네. 그들 중 이 나라를 빠져나간 자들은 없어. 모든 공항과 항만이 철저하게 감시되고 있고 밀항선도 지금은 활동하는 것이 없을 정도네. 그자들이 아직 이 나라에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수사관들이 그들의 종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네. 확실히 부하들과는 달라. 전혀 흔적이 없네. 자네 생각을 듣고 싶네. 그들이 어디에 있을 것 같은가?
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비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에는 각 지부의 위치와 수뇌부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에 따른 수사를 철저하게 하셨을 테고 그럼에도 그들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비전에 기록되어 있지도 않고 지부와는 어떤 연관성도 없는 드러나지 않은 장소에 은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각 지부의 수뇌들이 각기 다른 장소에 은신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모여 있을 가능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제가 파악한 바로는 한국지회는 현재 중국 본토에서 온 고위급 인물에 의한 지휘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지부 수뇌부들의 인적사항이 파악되었고 전국수배와 출국금지를 당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수뇌부가 각기 다른 장소에 은신하고 있다면 한 사람이 검거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연쇄적으로 검거될 우려가 있습니다. 점조직인 대명회지만 수뇌부는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을 테니까요. 게다가 그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결국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결론인데 떠날 수단이 마련된다 해도 그들이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면 한 곳으로 모일 때 누가 검거될지 모르는 위험부담을 안아야 하고 통일된 행동을 취하기 어려워집니다.
필요한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고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한곳으로 모아 관리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한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일성재단에서 부딪친 자나 부딪칠 뻔한 자들은 해경호에서 만난 곽병량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초인들이다. 분명 원로원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이라면 지부의 지부장들을 흩어놓았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데리고 이 나라를 벗어나려고 할 것이다. 물론 그 시기는 그를 제거한 이후가 될 것이다.
일리가 있는 의견이네. 그렇다면 자네는 그들이 어디에 모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윤찬경이 있는 곳입니다.
그 한국지회장이라는 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비전에는 그의 인적사항과 거처가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름만이 있었을 뿐이죠. 그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흠.
사무실은 침묵에 잠겼다.
한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윤찬경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상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인 것이다.
제가 지금 윤찬경이 머물고 있는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확실하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수일 내로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눈이 빛을 발했다.
필요한 것이 있나? 어떤 것이든 이번 작전에 한해 자네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지원해주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네.
남기호는 기대를 감추지 않으며 말문을 열었다. 한에 대한 그의 믿음은 반석과도 같았다.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인 것이다.
자네 몸에 최근 상처가 늘어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네. 자네는 도움이 필요없다고 늘 말하지만 혼자 움직이는 것은 위험해.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위험하다면 더욱 혼자 움직여서는 안 돼. 원한다면 최고의 요원으로 구성된 팀을 자네에게 붙여주겠네.
여럿이 움직이면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은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정보력은 여러 사람이 자신들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놓칠 정도로 녹녹하지 않습니다. 배려는 감사하지만 지금은 저 혼자 움직이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필요하다면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고집불통. 휴우.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위험한 단독 행동은 가능한 한 피해주게. 그렇게 하겠다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했거든.
남기호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 누군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강재은이다.
한은 조금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장님.
그런데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건가?
남기호의 말이 대충 끝난 듯하자 말문을 연 것은 유정기였다.
경찰서 복귀가 언제쯤 가능할 것 같으냐는 질문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의 대답을 들은 유정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수원에는 내가 알아서 말을 해 두겠네. 자네가 이번 일을 끝낼 때까지 자네는 본청에 파견을 나온 것으로 해 두겠네. 자네의 부탁대로 청운이란 친구의 집 주변은 전경 일개 중대 병력이 세 겹으로 에워싸고 24시간 보호를 하고 있는 중이네. 그들의 능력이 어떻든 그 인의 장막을 뚫고 침입할 수는 없을 거야.
수원의 일은 염려 말고 최선을 다하게. 많은 사람들이 자네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장님.
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쌍방 모두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
남기호 등은 한의 생각과 앞으로의 작전에 대한 구상을 한의 보고를 들으며 가다듬을 수 있었고, 한은 어제부터 이루어진 검경과 국정원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은 대검찰청의 정문을 나섰다. 그는 걸어서 대검찰청에 왔다.
그에게 자동차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게다가 자동차는 이동하기에는 편리하지만 그의 적인 회의 능력으로는 추적하기에 가장 적당한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도로 맞은편에 있는 서울지검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간은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은 자신의 의도가 적중했음을 알았다.
사방에 느껴질 듯 말 듯한 날카로운 기의 흐름이 손에 잡힐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