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은혜에는 은혜로, 원한에는 원한으로
곽청은 한참 망설이는 것 같더니 목이 쉰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 녀석아, 그래도 필요하냐? 저… 마가는 보기에 다 된 것 같다.』
군유명은 나직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게 빠를 리가 없습니다, 사숙님. 한참 걸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 소금을 좀 더 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눈사람처럼 뒹굴 수가 있겠습니까?』
대천비 곽청은 무거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뻗쳐 그 반 푸대의 식염을 내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삼 푼 정도의 씁쓸함과 증오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곁눈질로 마백수의 그 여전히 펄쩍거리며 괴성을 질러대고 있는 붉은 팥죽을 뒤집어쓴 것 같고 번쩍번쩍 빛나는 매끄러운 몸뚱이를 바라보며 애써 구역질을 참으면서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런, 이래도 어디 사람이 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느냐? 나는 마치 지옥으로 떨어진 느낌이다.』
반 푸대의 식염을 받으면서 군유명은 냉랭하게 씩, 웃었다.
『사숙님, 이것 역시 관념상의 문제이지요. 어르신께서 저 놈을 사람으로 여기시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짐승이라고, 사람을 물어 죽인 못된 짐승이라고 생각해 보시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지옥에서는 마백수의 이와 같은 악귀 같은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곽청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더 말하지 않고 무거운 걸음걸이로 한켠으로 물러섰다.
와락 몸을 돌린 군유명은 그 순간에 어느덧 푸대자루의 주둥이를 틀어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의 동작은 그토록 번개와 같이 빨라서 거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았다.
한 웅쿰의 하얀 식염이 어느덧 한 무더기로 응결되어 쏜살같이 뻗쳐갔다. 그리고는 마백수의 그 껍질이 벗겨진 몸뚱아리와 머리 위 세 치 정도 되는 곳에서 갑자기 불똥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터져서 흩어졌다.
머리 위에서 소금이 쫙 흩어져 머리고 얼굴이고 할 것 없이 그의 온몸에 뿌려지는 것이었다.
식염은 짜고 따가운 성질이 있다.
마백수의 몸뚱이는 이미 가죽의 보호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늘고 부드러우며 끈적끈적한 속살이 모두 다 벌겋게 공기 속에 드러나 있는 상태인데 그 한 움큼의 따갑고 따가운 소금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강경한 힘에 의해 뿜어지듯이 아래로 떨어지니 그야말로 한 움큼의 시뻘겋게 달구어진 쇠 모래가 몸뚱이에 적중되는 것 같은 느낌을 준 모양이었다.
한 알 한 알의 소금은 모두 그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살 위에 붙어 버렸으며 어떤 소금은 심지어 살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와 같은 느낌은 설사 실제 체험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을 송연케 하고 진저리쳐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백수는 마치 돼지 멱따는 것 같이 뾰족한 울부짖음을 토해 내었는데 그 뾰족한 울부짖음의 소리는 마치 사람의 염통을 빠개고 사람의 오장육부를 찢어 놓는 것처럼 그토록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면서 간이 떨리고 혼이 놀라 달아나게 만들고 있었다.
마백수는 미친 듯이 훌쩍훌쩍 뛰었으며 실성한 사람이 사납게 날뛰는 것처럼 마구 몸부림을 쳐댔다.
그가 지극히 추악하고 야릇한 도약과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한 무더기 한 무더기의 하얀 소금은 사면팔방에서 그리고 아래위와 좌우에서 소나기처럼 연신 뿌려지는 것이었다.
그 허공을 가득 채울 듯이 날아서 뿜어지는 하얀 색의 수정체가 튀어서 떨어지는 힘은 또 그토록 미친 듯 사나웠으며 방향과 위치는 또 그토록 정확하게 겨냥되고 있었다.
불과 밥 한 끼 먹을 시간에 마백수의 그 껍질이 벗겨진 시뻘건 벌거숭이 몸뚱이는 어느덧 모두 다 한 웅큼씩 떨어지는 식염에 의해 겹겹이 층을 이루듯이 싸이게 되었다.
그의 몸뚱아리에 붙은 백색의 소금알이 미처 다른 핏물에 침투하여 녹아나기도 전에 새로 뿌려지는 소금알이 다시 붙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몸뚱이 전체에는 껍질이 벗겨진 이후에도 일종의 구역질이 나게 하는 엷은 붉은 빛과 하얀 빛이 얼룩져 있었는데 잠시 이후에는 어느덧 눈처럼 하얀 한 덩어리가 되고 말았고 흰 소금알이 촘촘하게 그를 감싸 놓고 있었다.
강렬한 짠 기운이 그 부드럽고도 연한 살속 안으로 스며들어 그가 변변히 저항도 못하는 가운에 일곱 군데 오관으로 스며들었으니 이는 마치 수천 수만 대의 빨갛게 달구어진 강철침이 그의 전신을 맹렬히 찌르고 매섭게 찌르는 꼴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마치 무수한 독이 있는 전갈의 꼬리에 붙은 독침과 독사의 독이빨과 독개미의 뾰족한 주둥이가 그의 심장과 폐를 긁어 들어가고 또한 골수 안으로 긁으며 파고드는 것 같았다.
마백수의 그와 같은 목불인견의 울부짖음은 처절하고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마치 간과 피를 쥐어짜듯이 뾰족하고도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토해 내었으며 그 여운이 끌리면서 길게 이어졌는데 점차로 그치면서 기운이 다한 듯 푸르륵, 푸르륵, 하는 소리로 변해갔다.
마치 신음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발버둥을 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마치 그 누가 목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고 가뿐 것이었다.
나중에는 괴이하고도 끔찍한, 숨을 들이마시는 후… 후… 후후후… 하는 소리만 들렸다.
마치 풀무가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을 적에 일으키는 나직한 마찰음과 같은 음향이 마백수의 입에서 토해지고 있었다.
가끔씩 한 가닥 목구멍에서 맴도는 듯한 가냘픈 소리가 떨려 나오기도 했는데 그 소리는 원한을 품은 혼백이 애절히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악귀가 비탄에 잠겨 탄식하는 것 같기도 하여, 정말 끔찍하고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듯이 던져지고 확 퍼져서 뿌려지는 소금 알은 어느덧 멈춰지게 되었다.
군유명의 손에 들린 반 푸대의 소금이 이미 모조리 소모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냉혹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전혀 표정 없는 얼굴로 벌써부터 움직이지 못하고 땅바닥에 쓰러져 한 무더기의 눈덩이로 화한 마백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백수의 온 몸뚱이는 이미 두터운 하얀 소금으로 싸여서 바람 한 점 뚫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움츠린 채 그곳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보기에는 그저 허연 눈이 서로 녹아서 하나의 커다란 둥근 공을 이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은 진정 엄동설한에 굴려서 만들어 놓은 눈사람 같았다. 그 한 무더기의 설인은 지극히 경미하게 바르르 떨고 있었다.
마치 한 가닥 아직도 얼어서 꼿꼿해지지 않은 맥락(脈絡)이 여전히 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틀림없이 이미 기운이 다한 화산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것 같았다.
한참 후 군유명은 코를 몇 번 쫑긋쫑긋하더니 가볍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그 입 안의 희고 고우며 정제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 입 안의 이빨들은 마치 사람들에게 두 줄의 예리한 비수처럼 뾰족하고 악독하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그는 치아를 드러내고 만족스럽게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그 푸대를 던지고 손을 툴툴 터는 것이었다.
『사숙님, 이 한 막의 유희는 무난히 끝났습니다.』
대천비 곽청은 잔뜩 두 눈썹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듯 하면서 목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정말 너를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군유명은 뺨을 슬쩍 어루만지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어르신께서는 저걸 보십시오. 저것은 정말 하나의 눈으로 굴러서 만들어 놓은 눈사람 같지 않습니까?』
대천비 곽청은 씁쓸하게 말했다.
『이 녀석아, 나는 너의 냉혹한 심성이 어디로부터 이어진 것인지 이상한 생각이 드는구나.… 너의 사부도 매섭긴 했다만 너와 비교해 볼 때는 그야말로 너의 꽁무니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너의 부모님은 또 어떤가? 나는 너의 부모님들께서 살아생전에 얌전하게 본분을 지키시던 상인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너는 이토록 악독한 방법을 쓰다니, 도대체 어디서 배운 것이냐?』
군유명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사부님도 없이 스스로 통달하게 된 것이라고 해두지요, 사숙님.』
대천비 곽청은 싸늘히 코웃음 쳤다.
『너는 어째서 좀 더 좋은 것들에 통달하지 못했느냐?』
군유명은 픽, 웃었다.
『이런 것들은 본래 훌륭한 것입니다. 사숙님,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한 평생 간음과 노략질을 일삼는 악당이었다고 합시다. 그 자가 나중에 잡혀서 형장으로 끌려가 목을 잘리는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적에 그 한 칼로 그의 목을 자른다는 것은 얼마나 무자비한 짓입니까? 그러나 천하에 선량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마를 두드리며 경하해 마지않고 마음속으로 통쾌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직 그와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마땅하기 때문이지요. 사숙님, 간악한 자를 징계하고 형벌을 주는 목적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굳이 간악한 자를 형벌하는 수단에 대해서 꼬치꼬치 따질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대천비 곽청은 노한 듯 말했다.
『그것은 인도적인 문제란 말이다.』
군유명은 빙긋이 웃었다.
『천하의 사람들은 선악을 나누어 놓고 있으며 사람들에 대해서 예의로써 제약을 가하고 있습니다. 예교(禮敎)가 이어지도록 보호하고 미풍양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파괴자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 방식을 우리들은 왕법(王法)이라고 합니다. 왕법의 수단이 가볍던 무겁던 또한 무자비하던 자비하스럽던 간에 왕법이 추구하는 것은 다만 천하의 좋은 사람들의 안녕과 삼강오륜을 존속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왕법의 아래에서 그 제재를 받은 악인들이 받아야 하는 제재의 전인후과(前因後果) 또한 모두 인도(人道)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도를 위해서 또한 그와 같이 비인도적인 사람들을 참회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 인도를 위해서 그와 같은 죄악을 소멸코자 하는 것입니다. 인도를 위해서는 수단이 약간 잔혹하다 하더라도 괜찮은 것입니다. 대전제(大前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대천비 곽청은 그만 말문이 막히는 듯 말이 없다가 잠시 이후에야 식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는 왕법이 아니다. 너는 왕법이 아니란 말이다.』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저 자들은 모두 다 악인들입니다. 왕법이 미처 도달하지 못하거나 즉시 적절한 처리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들은 우리 강호의 전통과 규칙에 의거해서 저와 같은 악인들을 상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을 물리치되 뿌리째 뽑으라는 말이 있고 천하의 간악한 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들고 나서서 잡아 죽여야 합니다. 문제는 다만 사람들이 그가 악인인지 악인이 아닌지 잘 분별을 해야 할 것이고 어떤 등급의 벌을 받아야 적절한 것인가를 신중히 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숙님, 우리 무림인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지는 율법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천비 곽청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정말 늙었다. 말하는 것도 빈틈이 너무 많아서 일격도 감당을 하지 못하는군.…』
군유명은 심심(深심)하게 말했다.
『사숙께서는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쩌면 제가 말하는 도리가 약간 요상한 데가 있는지 모르지만 저는 저에게 아직도 인성(人性)과 인도를 존중하는 일면이 남아 있다고 믿습니다.』
대천비 곽청은 목쉰 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가 한 말을 기억해 두어라!』
군유명은 씁쓸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시선을 금미에게로 옮겼다.
이제 석실에 있던 네 명의 포로 가운데 금미만 유일하게 살아서 남아 있는 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크게 벼르면서 이 산으로 보물을 찾아 온 사람들 가운데서 겨우 그녀 혼자만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에 그 일막의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며 날카롭고 전혀 인간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형벌은 모두 금미의 눈앞에서 서서히 펼쳐진 바가 있었던 것이며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숨이 막히게 하고 전율을 느끼게 하였던 일들이 하나하나 발생한 것이다.
또 그토록 그녀로 하여금 간담이 찢어지고 심장이 터질 정도로 하나하나 마무리 지어진 것이었다.
곳곳에 피가 뿌려져 있었고 콧속에 비린내와 노린내가 스며들어 금미의 머릿속에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녀의 세 명 동료는 이제 겨우 세 무더기의 시체 같지도 않은 시체로 남아 있으니 그 얼마나 참담한가.…
그녀의 얼굴빛이 백짓장처럼 희어졌다. 너무나 희어져서 엷은 푸른빛이 감돌 지경이었으며 입술은 이미 과거의 풍성하고도 윤기 있는 모습을 상실하고 바짝 말라 균열이 생겨 있었으며 구름같은 머리카락은 산산이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몸에 걸치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구겨질대로 구겨져서 더러운 피를 묻히고 있었고 흙먼지도 묻어 있었다.
금미의 아름답고 요염하며 깍쟁이 같은 귀여움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으며 이제 그녀가 지니고 있는 것은 오로지 낭패한 모습 이외에 오로지 절망과 비통, 그리고 공포뿐이었다.
군유명의 눈초리는 차갑고도 예리하여 마치 한 쌍의 예리한 장검을 쏘아내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그 순간 금미는 자기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으며 삽시간에 그녀의 호흡이 촉박해지고 입가 역시 끊임없이 실룩이게 되었으며 두 동공의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는 그녀의 눈빛마저도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전혀 웃음을 띠우지 않은 군유명은 근본적으로 금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손을 움직여 그녀의 혈도를 풀어주더니 싸늘한 어조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매우 애석한 노릇이지만, 금 소저, 이제 당신 차례가 되었군.』
금미는 전신을 맹렬히 한 번 부르르 떨었으며 억지로 가슴 속에서 후려치는 두려움과 아픔을 억누르고 머리를 한 번 떨쳤다.
조그마한 동작으로 망막에 뿌옇게 차오르는 눈물을 떨구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량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이미 준비 되었어요… 당신은… 손을 써요…』
군유명은 냉랭히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한옆에 서 있던 대천비 곽청이 반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급히 부르짖듯 물었다.
『네 녀석은 나에게 응낙한 바를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군유명은 기억하고 있었다.
대천비 곽청이 그에게 요구한 것은 잔혹한 방법으로 금미를 살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제 대천비 곽청은 다시 그를 깨우쳐준 것이었다.
대천비 곽청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나직하고도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나는 먼저 나가겠다. 이 녀석아, 나는 실로 더 계속해서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군유명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곧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는 어르신의 뜻을 따라 행하겠습니다.』
대천비 곽청은 금미를 한 번 바라보더니 급히 금미의 그 비애와 원망, 그리고 처절한 빛이 서려 있는 시선을 급히 피했다.
곽청은 잠시 망설였다가는 발을 돌리더니 총총히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갔다.
군유명은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틀림없군. 사람의 마음이란 역시 나약하거든 과거 사람을 죽일 때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대천비 곽청 사숙님께서도 차마 더 참고 보시지를 못하는구나.…』
자조하듯 씩, 웃어 보인 군유명은 금미의 앞으로 다가가 금미를 주시했다.
그녀 역시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 광경은 매우 미묘했다.
한참 후에 군유명은 금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초췌해졌군. 이미 홍갈의 옛날 배포와 모습은 사라지고 없구려.』
금미는 군유명이 매섭기 이를 데 없는 손을 무자비하게 쓰기 전에 그와 같은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어리둥절해져서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다를 바가 무엇인가요? 사람이 한 번 죽고 나면… 초췌하든 아름답고 요염하든 다를 바가 뭐겠어요? 어찌 됐든 간에 한 번 죽는 것이 아니겠어요?』
군유명은 빙그레 매우 야릇한 웃음을 띠우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매우 아름답고 나이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한 무림세가에서 성장했으니 원래 매우 행복하고 매우 달콤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어야 마땅하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이렇게 빨리 죽으면 안 되오. 정말 아주 애석한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구려.』
금미는 경련을 일으키듯 입술을 바르르 떨더니 나직이 말했다.
『이제,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 다 논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군유명은 담담히 그 말을 받았다.
『금미, 당신은 나에게 대해서 줄곧 매우 활달하고 진솔했소. 엄격히 말한다면 당신은 나를 약간 돌보아 주었소. 결코 그들처럼 나를 한 마리 개처럼 다루지 않았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느 정도 당신에게 보답을 해야 될 것 같구려. 당신은 내가 어떻게 보답해 줄 것을 원하는지 그 방법을 말해 보시오.』
금미는 잠시 의혹에 찬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정말 그와 같은 뜻이 있나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굳이 말을 꺼내겠소?』
금미는 재빨리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요. 제발 통쾌한 방법을 써 달라는 거예요. 나를 너무 고통스럽게 죽도록 하지 마시고 나로 하여금 죽더라도 너무 난처한 모습으로 죽지 않도록 해주세요.』
금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군유명은 갑자기 빙긋이 웃었다. 그는 천천히 가부좌를 틀고 금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금미가 불안과 놀람, 그리고 의혹 속에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부드럽고도 온화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말해 주시오. 금미, 당신은 죽음이 두렵소?』
금미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나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요.』
군유명은 빙긋이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두렵소?』
금미는 잠시 주저하더니 처량하고도 가련하게 입을 열었다.
『사태가 이미 이리 된 이상 당신은, 군유명, 당신은 칼이고 도마이며 나는 도마 위의 고기예요. 나를 죽이든 살리든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당신이 굳이 다시 나를 조롱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군유명은 두 손 부비며 무겁고도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결코 당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금미, 나는 다만 당신의 솔직한 심정을 알고 싶을 뿐이오. 죽음의 가장자리에 놓이게 되었을 적에 우리들 마음속의 생각이나 걱정이 같은지 알고 싶다는 말이오. 그러나 어느 정도 다른 점이 있는 것 같구려.』
금미는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어떠한 점이 다른가요?』
군유명은 맑고 밝은 눈동자를 반짝이었다.
『매우 간단하오. 불가(佛家)에서는 사람의 몸뚱이는 원래 하나의 악취를 풍기는 취피낭(臭皮囊)이라고 했소. 그리고 이 취피낭을 내 버리면 한평생 지니고 다닐 무거운 짐을 버린 것과 같으며 그로서 가벼운 연기처럼 혼백은 곧장 훌쩍 걱정 없는 경지로 빨리 떠오르게 될 수 있다고 했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몇 사람이나 그와 같은 사대개공(四大皆空)의 경지를 실천할 수 있었으며 근심 걱정 없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겠소? 신체는 물론 취피낭이라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버리기를 아쉬워하고 있소. 금미, 당신도 틀림없이 그 대다수의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오.』
금미는 조금도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인정해요.』
군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전혀 다른 점이오. 금미, 당신이 나보다 강하지 못하고 내가 일으켜 놓은 패업(覇業)을 탈취하지 못한 원인도 모두 여기에 있는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생과 사를 꿰뚫어 볼 수 없었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진체(眞諦)를 분명히 터득하지 못했소. 그러니까 당신은 너무나 인간 세상에 욕심과 미련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오. 당신도 알겠지만 나 역시도 조금은 두려워하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할 때 그 모든 것을 모조리 팽개쳐 버리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염두에도 두지 않소. 죽음이란 것은 일종의 해탈(解脫)인데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것은 또 다른 일로서, 죽음이라는 것은 어찌 됐든 간에 사람의 모든 것을 해탈시켜 주는 것이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들에게 감금을 당한 채 당신들의 수중에서 꼼짝 못하고 길을 오는 동안 당신은 나의 매우 침착하고 담담한 태도를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소? 맞았소. 나는 한 점의 희망을 나의 동굴을 지키고 있는 사숙님에게 걸고 있었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못 되었으며 만의 하나 실수가 없다고도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었소. 내가 그렇게 차분하게 된 것은 주로 내가 생사를 너무나 담담하게 보는 데에 있었던 탓이오. 사람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십 년이고 수십 년이고 심지어는 백 년을 살다가 가오. 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의 쓴 열매를 주로 맛보면서 그저 용렬스럽고 바쁘게 한 평생을 보내지만 끝내는 대한(大限)에서 도망치기가 어려운 것이오. 나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으며 심정 역시 너무나 짙게 우울했소. 그러나 나는 결코 도피하려고 하지 않았소. 하지만 만약에 피할 수 없는 액운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나는 기꺼이 그 기회를 빌어 무거운 짐을 팽개쳐 버리겠소. 이것 역시 일종의 즐거음이란 말이오. 전체적으로 말해서 그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면 나는 모든 것을 깨뜨려 버리게 되는 것이오. 그것이 여러분과 비교해서 다른 점이오.』
금미는 가련한 어조로 물었다.
『당신은… 내가 이미 그 지경에 이른 이상 모든 것을 깨끗이 포기하고 삶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거로군요?』
군유명은 부드럽고도 온화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당신의 심령(心靈)이 활짝 밝아지기를 바라오.』
금미는 태연하게 웃었다.
『당신이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것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해요. 군유명, 당신은 정말 사람들이 높이 사고 믿음을 남기는 그런 회자수예요…』
금미 목이 메이는 듯 다시 말했다.
『이제 당신은 그와 같은 단계의 액겁에서 벗어났어요. 나는 당신만 못해요. 군유명, 죽지 않든 죽든 좀처럼 저의 마음 속의 욕심을 팽개칠 수가 없으며 삶에 미련을 갖지 않을 수가 없어요.』
군유명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탄식해야 할 일이구려.』
금미는 쳐들고 구슬픈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은 손을 쓰세요, 군유명.』
군유명은 생각해 보더니 기이한 눈초리로 그녀를 주시했다.
잠시 후 군유명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당신이 똑똑하고 지혜가 많다고 했소. 금미, 틀렸소, 틀려. 당신은 실로 매우 멍청하고 매우 우둔하며 또한 융통성이 없구려.』
금미는 떨리고 또한 의혹에 빠져서 입을 열었다.
『당신은…』
군유명은 그 말을 뚝 잘랐다.
『나는 어느 정도 당신에게 대해서 약간의 보상을 하겠다고 언약을 한 바 있소.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당신 스스로 내가 어떻게 보장하기를 바라는지 솔직하게 말해 보라고 했소.』
금미는 의혹에 사로잡힌 얼굴이 되었다.
『나는… 나는 이미 제의했잖아요. 당신이 나를 좀 더 통쾌하게 죽도록 해주기를 바란다고…』
군유명은 조롱하듯 웃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 나는 결코 당신에게 내용과 종류를 한정하지 않았소. 다시 말한다면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요구를 무엇이든지 제의할 수 있단 말이오.』
금미는 별안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어리둥절해진 끝에 곧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환희와 전율이었다.
금미는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고 또 약간 흐리멍텅해진 것 같기도 했으며, 또한 어느 정도 미칠 듯이 기뻐하고 있는 것 같은가 하면 또 약간의 의혹에 차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당신은 말하기를…』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보상이나 요구를 무엇이든 제시해도 좋다고 말했소. 예를 든다면 당신은 어째서 당신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구하지 않는 것이오?』
마치 청천벽력의 천둥번개가 귓가에서 울려퍼지는 듯 금미는 머리가 그만 윙윙 소리가 나게 되었고 한 차례 심한 현기증이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가슴이 뛰고 입이 바짝 마르면서 얼굴이 붉어졌고 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의 자기의 생각을 믿을 엄두가 나지 않는 듯 그녀는 입을 벌리고 혓바닥이 굳어져서는 더듬거렸다.
『군… 군… 유명… 당신은… 정말이에요?』
군유명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오.』
파르르 떨며 금미는 제대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나는… 나는… 이제라도… 제의할 수… 있나요… ?』
군유명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은 통쾌하게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오?』
금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흐르는 그녀의 두 눈의 뜨거운 눈물이 확확 흘러나왔다. 그녀는 매우 측은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나는 다른 요구로 바꾸고 싶어요…』
군유명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좋소.』
금미는 몸을 떨면서 다급하고도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군유명은 매우 솔직하고도 시원스럽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 들어주리다.』
눈물이 마치 실 끊어진 진주알처럼 한 알 한 알 주르르 그 창백하고도 아름다운 홍조를 띤 두 뺨 위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우느라고 전신을 경련하듯 떨고 있었으며 울음이 되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이 메어 울고 있는 것이었다.
이 어찌 너무 기뻐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군유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다만 묵묵히 금미가 한껏 울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는 그와 같이 한 번 실컷 울게 됨으로써 금미의 마음속에 서려 있던 두려움과 공포, 수모, 비분, 그리고 황란(惶亂)함을 태반이나 잘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미는 하룻밤 동안 겪은 고초와 시달림을 당했기에 마땅히 한 바탕 쏟아 놓을 필요가 있기도 했다.
한참 후 군유명은 살그머니 자기가 사숙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그 삼베로 만들어진 커다란 수건을 내밀었다.
금미는 그 수건을 받아서 여전히 흐느낌을 멈추지 않은 채 얼굴의 눈물자국을 닦았다.
군유명은 온화하고도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충분히 울었으리라고 생각이 드는구려.』
금미는 가슴속으로 만감이 교차하고 무한한 느낌을 극력으로 억제하면서 한편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연신 훔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정말 괴로워요…』
군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응당 기뻐해야 하거늘 어째서 괴롭다는 것이오?』
금미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인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당신에게 미안해요…』
군유명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어느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오?』
금미는 눈물자국을 훔쳤는데 한쪽 손에 들고 있는 그 희고 고우며 부드럽고 매끄러운 오른손은 가볍게 떨리고 있다.
그녀는 얼굴을 쳐들었는데 그 예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토록 미안해하며 그토록 황송해 하는가 하면 또한 그토록 불안한 것 같았다.
이제 대녕하 금씨 집안의 소주인 그녀는 보기에 완전히 평소의 발라함과 짓궂음을 상실한 것 같았고, 아미와 입술 사이에 떠올라 있던 영악함과 오만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연약하고 매우 부드러우며 매우 측은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그녀와 같은 나이 또래의 처녀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그 나이의 여자가 응당 갖추어야 할 갖가지 표정과 멋으로 가득 찼으며 다시는 더 특출하게 보이지 않고 다시는 더 삐뚤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토록 겁을 집어먹은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한 보드랍기 이를 데 없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목이 메어서 말했다.
『저는… 저는 한 번도… 사람들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그러나 이번만큼은… 저는 제가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그들을 도와 당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해치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자기의 양심을 속이면서 하늘이 용납하지 않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는… 제가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토록 탐욕스럽고 그토록 잔인하게 변했던 것은 잘못이에요…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한 명의 무고한 생명을 몰래 해치려고 했는데… 그 재물들은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요.… 그것들은 원래 죽어도 저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었고 저는… 어째서 그와 같이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약탈을 하려고 했는지 후회하고 있어요. 정말이에요.』
군유명은 심심하게 물었다.
『이제야 당신은 그러한 일들을 깨닫게 되었소?』
금미는 서글픔에 젖어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제가 그 일을 응낙하게 되었을 때에 이미 생각했던 것들이에요… 그러나… 저는 부인하지 않아요. 그 일은 사악하고 의롭지 못하지만 그 일 뒤에 감춰져 있는 대가는 실로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어요. 저는 그와 같은 유혹을 견뎌내지 못했으며… 저는 더구나 체면을 생각해야 했어요. 그들이 저를 청하고 그토록 유리한 조건을 내걸게 되었을 적에 한 쌍 한 쌍의 반짝이는 눈들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대하게 되자 저는… 저는 도저히 약하게스리 사양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말씀드리는데 줄곧 마음속으로 불안했으며 줄곧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었어요.… 저는 억지로 그와 같은 마음들을 억누르고 간신히 버티어 나갔던 것인데… 저는 정말 후회스러워요.…』
그러다가 금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했는지 다시 황송한 얼굴이 되어서는 물었다.
『어째서… 군유명… 당신은 나를 용서해 주시는 거죠?』
이어 그녀는 다시 잇따라 보충질문을 했다.
『내가 여인이기 때문인가요?』
군유명은 싸늘히 웃었다.
『아니오. 나는 결코 여인에 대해서 특별히 너그럽지는 않소. 다시 말해서 나를 도모하고 해치려 한 사람은 그 사람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보복을 받게 될 것이오.』
금미는 일순 어리둥절해졌으며 약간 불안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저를 용서하시나요?』
군유명은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당신 자신이 이미 말한 바가 있소.』
금미는 얼떨떨해졌다.
『제가 말한 바가 있다고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왜냐하면 당신은 그래도 시비를 알고 선악을 가릴 줄 알았으며 충간(忠奸)을 분명히 할 줄 알았소. 그밖에 당신은 어찌되든 간에 얼마간 양심이란 것을 가지고 있었소.』
금미는 갑자기 창백한 얼굴을 삽시간 부끄러워하는 홍조를 가득 띠우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저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요.』
군유명은 담담히 말했다.
『수치를 안다는 것은 용기가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신은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과 자기의 잘못을 굳이 완강하게 고집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오. 금미, 당신도 알다시피 한 사람이 아무리 나빠도 상관이 없는 것이오. 다만 그의 양심이 죽지만 않고 또 뉘우칠 줄을 알기만 한다면 어찌 되었든 간에 희망이 있는 것이오. 당신이 바로 그런 경우요. 그러나 당신의 그 동료들은 그렇지 못했소. 그들은 양심마저도 죽어 있었소. 양심이 죽어 있는 사람을 남겨 두어서 무엇에 쓰겠소? 그들은 인의(仁義)가 소멸된 사람들이었소…』
찬 기운을 들이마시며 금미는 아직도 두려운 듯이 땅바닥에 그 세 구의 사람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시체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말했다.
『군유명, 당신은 너무나 악랄해요. 진정 악랄하기 끝이 없어요.』
군유명은 빙그레 웃었다.
『홍갈자라고 일컬어지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금미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나직하고 가늘게 말했다.
『저는 스스로 적지 않게 보아왔으며 적지 않게 겪어 왔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벌써부터 혼자서 일면(一面)을 담당하고 혼자서 담당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그러나 당신 앞에서, 군유명, 어느 쪽으로든 저는 이제야 알겠는데 정말 아직도 훨씬 뒤떨어지고 있어요.…』
군유명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지금 이 시각에 이와 같은 장소에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나는 겸손을 피울 필요가 없을 것 같구려. 그렇소. 당신은 확실히 나에게 견줄 수가 없소. 물론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내가 보기에도 당신 역시 쟁쟁한 인물이오.』
평소 고집이 세고 영악하며 슬기로운 홍갈 금미는 이 때 그녀의 평소 보여주던 그 짓궂은 면을 은폐하려야 은폐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사실이 그녀가 확실히 상대방에 비하여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금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후 당신은 보복을 할 작정인가요?』
군유명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오. 자기가 한 일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은혜이든 원한이든 그리고 인덕이든 원수든 말이오, 알겠소?』
금미는 심장이 한 차례 떨리는 금치 못하면서 겁먹은 듯 말했다.
『저는… 저는 알고 있어요!』
군유명은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면 됐소.』
금미는 생각해 보고 다시 물었다.
『저의 생각에 당신은 제가 지금 당장 떠나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는 않군요.』
군유명은 착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맞았소. 나는 내가 원한을 갚을 때까지 남이 내 일을 방해하기를 바라지 않소.』
금미는 매우 다급하고도 간절하게 또한 진심으로 입을 열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팔지 않을 게요, 절대로요!』
그녀는 다시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저는 정말 당신에게 미안해요. 당신을 해치려고 했는데도 당신은 비단 저를 죽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제시해 주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토록 깊은 은혜와 중히 여기는 의리로서 저를 대해 주었군요. 또한 그토록 솔직하고 진지했어요.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당신에게 해로운 일을 다시 저지른다면 제가,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군유명, 당신은 저를 의심하지 마세요. 그렇게 된다면 저는 다시 살아갈 자격이 없어진다고 느끼게 돼요…』
군유명은 말했다.
『그렇게 외골수로 따질 것 없소. 금미, 나는 그렇게 당신을 의심하지 않소. 다만…』
그는 잠시 망설였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나는 이미 한 사람도 감히 믿을 수 없게 되었소!』
금미는 아연해졌다.
『그것은 어째서인가요?』
군유명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다시 설명을 해야 하겠소? 친 누이동생처럼 가까운 피붙이에 약혼자와 같이 정이 깊은 사람은 물론이요, 다년간 형제처럼 은혜와 의리로 똘똘 뭉쳤던 사람들도 모두 다 나를 팔아 넘겼는데 다른 사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오.』
군유명을 바라보는 금미의 그 한 쌍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광채는 그토록 그윽하고 그토록 진실한 것이며 정열(貞烈)한 것일 뿐 아니라 늠름한 것이기도 했다.
그와 같은 표정에 군유명은 그만 놀라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그는 묵묵히 금미를 같이 마주 바라보고 있었는데 네 개의 눈동자가 서로 맞닥뜨리게 되는 그 찰나 군유명은 심현(心弦)이 한 차례 떨리는 것을 자제하기 어려웠다. 이 얼마나 뼈에 사무치는 감격의 순간인가!
금미의 동공에서 군유명은 그녀 마음 속의 절의(節義)가 서려 있고 그녀 마음속의 진지함을 엿볼 수 있었으며 그녀 마음속의 깨끗함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더 그녀 마음속의 진솔함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속삭임이요, 양심의 부르짖음이요, 생명의 신호였다. 그리고 그것은 적나라한 것으로서 도저히 위장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전체적인, 형채도 없고 소리도 없는 마음은 완전히 군유명의 의식 속에 쏟아지게 되었는데 한 점의 거짓도 없었고 한 점의 작위적인 점도 없었다.
금미는 나직하고도 목쉰 소리로 한 자 한 자 또렷이 말했다.
『저는 퍽이나 실망했어요… 군유명, 왜냐하면 당신이 나와 그들을 한데 묶어서 비교했으니까 말이에요… 당신은 내가 그들과 마땅히 다르다는 것을 아셔야 했어요.… 저는…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겠어요!』
군유명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증명이라고? 당신의 뜻은?』
금미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의 뜻은 제가 당신 쪽에 서서 당신을 돕고 당신의 원한을 갚아주고 씻어주겠다는 것이에요.』
군유명은 약간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들이 당신이 의리와 친구들을 배반했다고 비난하는 것이 두렵지 않소?』
금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굳건하게 말했다.
『내가 이러는 것은 결코 의리와 친구들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고 사악과 어둠을 포기하고 광명을 향해 나아가는 거예요.』
군유명은 잠시 생각을 해 보고 입을 열었다.
『금미, 당신은 다시 고려해 보시오. 나는 결코 당신마저 이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것을 원하지 않소.』
금미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쩌면 군유명, 당신은 나의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작용이 너무 작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와 같은 의심이 정확한 것인지는 우선 제쳐두고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다면 어찌 됐든 간에 한 푼 정도의 불편은 더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당신은 제가 필요할 때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저는 이미 한 평생의 남은 모든 것을 다해서 당신의 너그럽고도 무거운 은혜에 보답할 준비를 해야 마땅해요. 군유명, 당신은 어째서 저를 받아주지 않으려 하지요?』
군유명은 망설였다.
『당신도 아다시피 나의 이런 일은 반드시 이에는 이로 대하게 될 것이고 피로써 한을 풀게 될 것이오.』
금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 역시도 마땅히 알아야 해요. 그것들은 결코 나에게 낯선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나 당신의 사숙의 눈에 저는 어쩌면 매우 평범하고 용렬할지 모르지만 여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저는 결코 약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더군다나 나는 대녕하 금씨 집안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지요.』
군유명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장안 철위부의 괴수가 대녕하 금씨 집안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약간 우스꽝스런 일이 되지 않겠소?』
금미는 정색을 했다.
『저의 귀에 거슬리는 충고를 이해해 주세요. 군유명, 이 며칠 사이에 당신의 철위부는 이미 깃발을 바꾸어 달았을 것이며 다른 천자(天子)가 등극했을 것이에요. 그리고 당신에게 충성을 다하던 부하들도 그들에게 박해를 받았거나 핍팍을 피해서 도망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울 거예요. 지금 당신은 그 철위부의 괴수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빈 껍질에 불과해요. 아래 위 모두 합쳐 겨우 당신 한 사람만 남게 된 거예요. 장래에 인원수에 있어서 어쩌면 당신은 우리 금씨 집안에 속하는 사람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매우 커요.』
군유명은 손바락으로 가볍게 무릎을 두드리더니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동가라는 녀석이 어쩌면 이미 나의 기업을 흡수하고 나의 중요한 부하들을 바꾸고 나의 영도대권(領導大權)을 찬탈하는 일에 착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믿소. 그러나 나의 시체가 없는 마당에 어떤 구실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있는지 의심스럽소.』
금미는 지혜로운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아주 조리 있게 말했다.
『그것은 간단해요. 내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원래 정했던 계획대로 당신의 시체를 접수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되고 우리 한 떼의 손을 써서 일을 저지른 사람마저 모조리 실종된 것을 보면 즉시 더욱 진일보한 수단을 채택하겠어요. 첫째로 저는 즉시 내 편에 서지 않은 사람들을 암암리에 깨끗이 제거하고 기업을 찬탈하는 조처를 발동시키겠어요. 그리고 둘째로 저는 안팎으로 당신이 이미 액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퍼뜨리고서 이미 사람을 보내 당신의 시체를 운반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할 거예요. 셋째로 내가 당신의 약혼녀와 누이동생의 도움을 잘 운용하고 당신의 부하들을 유도하여 내가 당신의 기업을 반드시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될 형세를 조성하겠어요. 그밖에도 만약에 제가 당신의 시체를 찾아내지 못하게 되었을 적에 얼굴을 망가뜨려서 당신을 대신할 사람을 하나쯤 찾아낸다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 때 다시 당신의 약혼녀와 누이동생, 그리고 이미 당신을 배반하고 떠난 부하들을 시켜서 당신이라고 확인을 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리고 어떻게 일을 박진감 있게 처리하는가,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사지 않게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보아서 의논하면 되는 거예요. 저의 생각으로 동가는 권모술수에 능란하고 심지가 깊으며 음흉하고 교활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가 꾸미는 짓은 우리들보다도 완전하고 빈틈 없으며 더욱 치밀하게 벌여 놓았을 거예요. 군유명,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군유명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금미는 다시 물었다.
『제가 당신을 돕기를 원하나요?』
군유명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당신은 정말 영악하구려! 역시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금미는 기쁘고 흐뭇한 듯 입을 열었다.
『저에게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신데 대해서 당신에게 사의를 표하는 바예요. 군유명, 당신은 당신이 이와 같이 조치하기를 잘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증명해 보이겠어요!』
군유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는 믿소. 금미, 당신의 영악함과 당신의 과단성, 그리고 당신의 지혜 및 당신의 수법을 나는 모두 다 가르침 받아보지 않았소?』
금미는 부끄러운 듯 말했다.
『당신에게 비하면 아직도 훨씬 뒤떨어져요.』
군유명이 웃으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적에 석실의 철문이 어느덧 열려지면서 대천비 곽청이 손에 네 개의 커다란 삼으로 엮은 푸대자루를 들고 총총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아, 이제 일은 끝났겠지? 네 녀석은…』
별안간 옛날 무림에서 위명이 쟁쟁했던 대천비 곽청은 완전히 얼떨떨해졌다.
처음엔 거의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는 모양으로 손가락을 들어 온 얼굴에 웃음을 짓고 있는 금미를 가리켰다가 다시 환히 미소를 짓고 있는 군유명 쪽을 향해서 괴성을 질렀다.
『오오…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