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다 부서진 서울
조 흥 제
어느 마을에서 하룻저녁 자고 고개를 넘으니 집이 많았다. 그 고개가 미아리고개였다.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 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 돌아 보고 또 돌아보고, 맨 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라는 노래를 탄생시켰던 금사향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 고개’였다
6·25 때 북한으로 납치되어 간 사람이 많았는데 그 장면을 아내의 입장에서 보고 느낀 바를 가사로 만들어 가락에 실은 노래다.
서울의 집은 다 부서지고, 전깃줄도 끊겨 수양버들 같이 축 늘어져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그리웠던 서울, 얼마나 오고 싶었던 서울이었던가. 서울은 이렇게 처참한 몰골로 나와 첫 대면을 하였다.
도로 가운데 기찻길이 있다. 우리 동네 기찻길 같이 철로 밑에 자갈도 없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것은 기찻길이 아니라 전차 길이었다. 전차는 큰 길 가운데로 자갈도 깔지 않고 다녔다.
나는 55년도 서울에 올라 와 전차를 타 보았다. 정류장에 서면 남자 차장이 문을 드르륵 열면서 ‘여기는 ooo역입니다’하고 안내 해 주었다. 전차는 인력거가 다닐 때 도입한 교통수단이어서 편리했지만 자동차가 많아지자 길 가운데로 기우뚱기우뚱, 느릿느릿 달려서 교통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67년도에 퇴출되었다. 그러자 전차가 앞을 막아 달리지 못하여 답답하던 차들이 쌩쌩 달렸다.
전차가 퇴출된 것을 아쉬워하는 노래가 ‘마포 종점’으로 은방울 자매가 불렀다. 그 노래가 나오게 된 동기가 애달프다. 마포 종점 앞에 연예인들이 많이 오는 술집이 있었다. 전차가 운행을 멈추었을 때 밤마다 마포 종점에 와서 전차를 붙잡고 우는 여자가 있었다. 연예인이 술 마시다 나와서 그 장면을 보고 주인에게 그 여자에 대해서 물으니 그녀의 애인이 미국에 유학 가서 교통사고로 죽어서 그와 전차 타고 다니면서 연애 할 때를 그리워하면서 운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만든 노래가 마포 종점으로 정두수씨가 가사를 썼다.
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 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녹 슬은 전차 길을 밟고 시가지를 지나니 넓은 들이 나왔다. 거기가 왕십리 벌이라고 했다. 신당동을 지나서는 전부 들이었다. 미아리 너머에도 집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니 그 때 서울은 참 작았다.
우리 앞에 특무상사 계급장을 단 군인이 부인과 함께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갔다. 어머니는 그 트렁크를 우리 소에 싣게 했다. 강을 건너기가 힘들면 그의 도움을 받을까 해서였다. 6·25 날 임진강을 건너다 하도 고생을 많이 해서 한강에서도 못 건너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얼마 안 가서 소가 우뚝 서더니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맴을 돌았다. 그 바람에 등에 실었던 짐들이 막 흩어져 떨어졌다. 짐이 다 떨어지자 소는 돌아서서 시내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외삼촌과 사돈어른이 쫓아가서 얼마 만에 소를 끌고 왔다. 길바닥에 흩어진 짐을 소에 다시 싣고 가는데 몇 발짝 가더니 소는 또 우뚝 서서 전과 같이 세차게 맴을 돌아 짐을 다 내려뜨리고는 또 시내 쪽으로 달렸다. 외숙과 사장어른이 쫓아갔으나 꼬리를 하늘로 뻗치고 씩씩거리면서 뛰는 놈을 어쩌지 못했다.
여자들 사이에서 ‘그 트렁크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어, 소가 그걸 무서워하는 모양이야.’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직까지 아무 말썽도 부리지 않고 잘 오던 소가 두 번씩이나 난동을 부린 것은 분명 그 트렁크와 관계가 있다. 그 군인은 미안했던지 트렁크를 가지고 갔다. 등허리에서 들리는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소는 저를 죽이려는 것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소는 덩치가 큰 놈이 무서움은 되게 탄다.
우리는 한강 나루에 당도했다. 그 곳이 광나루라고 했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넜다. 소는 뗏목 배에 태웠는데 그 사이로 물이 출렁거리자 놈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꼼짝을 못했다. 소가 겁쟁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광나루를 건너자 얼마 안 가서 날이 저물었다.
길 가 어느 농촌에서 좀 자고 가자고 했더니 거절 하였다. 어찌어찌하여 어느 집 헛간을 얻어 거기서 자게 되었다. 부엌은 안 빌려 주어 밖에서 돌 세 개를 궤 놓고 냄비에 밥을 해 먹었다.
된장을 좀 얻으러 어머니께서 마을에 갔다 오시더니 주는 집이 없다고 이 고장 인심이 고약하다고 했다.
그 때 피란민들은 돈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돈이 없기도 했지만 서로가 이해해 주어서였다. 강을 건널 때도 공짜, 잠을 잘 때도 공짜였다. 하지만 후방으로 갈수록 그게 아니었다. 광주만 해도 한강 이북과는 인심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튿날 큰 외숙이 피란생활하시는 용인군 묘현면으로 갔다. 밖에서 장작을 패시던 외할아버지는 말없이 다가서 손을 잡은 어머니를 보고 입만 벌리셨다. 그 속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작은 외숙은 형님네 소를 어려움 속에서도 무사히 끌고 왔으니 얼마나 가슴 뿌듯하셨을까.
그 곳에는 중공군이 20여 일 있었다고 하니 3개월을 넘게 있었던 양주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1·4 후퇴 때 우리보다 한 발 먼저 서울에 당도한 중공군은 오산까지 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중부전선에서도 원주에서 멈추었다.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일수도 있지만 보급이 더 큰 어려움일 수도 있다. 비행기의 폭격으로 다리는 모조리 끊기고, 비행기가 무서워 밤에만 무거운 포탄이나 실탄을 사람이나 가축으로 날랐으니. 북한에서 멀어질수록, 보급로가 길어질수록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그들도 미군과 같이 남의 나라에 와서 싸워 주어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리라.
중공 정부는 휴전 후에 참전 대가로 북한에게 백두산을 내 놓으라고 했다. 북한에선 어려운 문제가 있어 일부를 가져가라고 했더니 전부 가져갔다. 뒤늦게 북한의 항의로 백두산의 3분지 1을 가져 간 것이 지금의 백두산 천지가 경계다. 사변 전에는 백두산 전체가 북한 소유였다. 만약 앞으로 전쟁이 나서 중국이 개입하면 종전 후 뭐를 달랠까. 북한 땅의 반을 내 놓으라고 하지 않을까. 미국도 땅은 안 뺏어 갔지만 값 비싼 무기를 사라 하고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싸우면 한미방위조약에 의해서 미국의 요청이 있을 때는 우리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래야 북한이나 중국이 우리를 침범하면 미국이 싸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