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 김상헌
성명 : 김상헌(金尙憲) , 1570년 ~ 1652년
본관 : 안동(安東)
자 : 숙도(叔度)
호 : 청음(淸陰)
시호 : 문정(文正)
출생지 : 한양(漢陽)
출신지 : 한양(漢陽)
분묘지 : 경기도(京畿道) 석실(石室)
입사경로 : 1590년(선조 23) 진사시(進士試) 합격, 1596년(선조 29) 식년시(式年試) 병과 급제
내관직 : 도승지(都承旨), 대사헌(大司憲), 좌의정(左議政)
외관직 : 고산찰방(高山察訪), 경성판관(鏡城判官)
증직및기타 : 영의정(領議政)
사승 관계와 학문 수수
김상헌은 16세가 되던 1585년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다.
윤근수에게 수학하기 전까지는 가정에서 초학을 이수하였는데, 외조부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백씨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당형인 휴암(休庵) 김상준(金尙寯)에게서 학문적 도움을 받았다. 그밖에 신흠(申欽), 이정귀(李廷龜), 류근(柳根)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칠서지옥과 안동으로의 이주
김상헌은 27세인 159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611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정인홍을 탄핵하는 문서의 초고를 작성했다는 이유로 광주부사로 좌천된 바 있다. 그 뒤 44세 때인 1613년에는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이 일어났다.
칠서지옥이란 서얼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정권을 쟁취하고자 북인들이 일으킨 옥사로서 이 일로 인해 광해군은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였다. 또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될 때 그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김상헌도 파직되었다.
이때 그는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박해를 피해 안동 풍산(豊山)으로 이주하였다.
제주 안무어사가 되다
32세 때인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吉雲節)의 역옥(逆獄)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제주도의 역옥은 선산 사람인 길운절 등이 제주도에 들어와 도민들을 유혹하여 반란을 도모했다가 사전에 발각된 사건이다.
선조실록에는 이와 관련하여 “김상헌을 제주 안무어사로 삼았다. 김상헌은 전에 전랑으로 있을 때 의논에 변별함이 많아 그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김상헌을 명하여 보낸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청나라로 압송되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김상헌은 예조판서였다. 청과의 전쟁은 중과부적으로 패퇴를 거듭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던 인조가 결국 삼전도의 수모를 당하고 항복할 때까지 그는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였다.
주화론을 대표하던 양명학자 최명길(崔鳴吉)과 대립하였고, 항복을 결정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고 통곡함으로써 주전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되었다. 또 청이 명을 침략하기 위한 전쟁에 조선군 5천 명의 징발을 요구받았을 때, 「청물이병조호서범(請勿以兵助虜西犯)」을 올려 출병을 반대하였다.
결국 청은 조선에 김상헌을 청나라로 보내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이 요구에 따라 김상헌은 71세의 노구를 이끌고 중국으로 가서 6년여 동안 볼모로 심양 등지에 잡혀 있었다.
그가 심양에 있는 동안 국내의 대표적 주화론자 최명길을 만날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본심을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었으며,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에도 꿋꿋하게 지조를 지켜 청나라 사람들조차 감동하게 했다.
최명길과 심양에서의 해후
김상헌은 대표적인 주전론자이고, 최명길은 대표적인 주화론자여서 양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역사의 라이벌로 꼽힌다. 김상헌은 한 때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심양의 감옥에서 극적인 해후를 갖는다.
주전론을 견지한 김상헌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지속했던 최명길까지 청나라로 잡아갔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두 사람은 비로소 상대방의 진심을 확인하고 화해하기에 이른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했는데,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상헌도 처음에는 명길을 남송의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여겼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정조 임금의 김상헌 흠모
김상헌의 도학과 절의에 대해 정조 임금도 높이 평가하였다.
『홍재전서』에 보면, 정조는 “청음 김상헌은 바른 도학과 높은 절의를 우리나라에서 존경할 뿐만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도 공경하고 복종하였으니 문장은 나머지 일일 뿐이다. 내가 그를 옛날 정승이라 하지 않고 선정(先正)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는 말로 김상헌을 칭송하였다.
정조가 김상헌을 대학자에게 부여하는 선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추숭하였다는 것을 보아 얼마나 그를 높이 평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가족이야기
조 : 김생해(金生海)
생부 : 김극효(金克孝)
양부 : 김대효(金大孝)
모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유길(鄭惟吉)의 딸
형제 : 김상용(金尙容), 김상관(金尙寬), 김상건(金尙謇), 김상복(金尙宓)
충절과 문장의 가문
김상헌의 가문은 특히 그의 대에서 시작하여 충절과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불을 질러 자결한 형 김상용(金尙容), 손자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형제, 김수항의 아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은 충절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경술문장으로 유명했으며, 노가재(老嫁齋) 김창업(金昌業),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도 그의 집안이다.
불을 질러 자결한 형 김상용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은 문과 급제하여 좌의정까지 지낸 사람이다.
1623년 인조 반정 후 집권당이 서인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를 거쳐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유도대장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고자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1632년 우의정에 임명되자 거듭 사양하여 허락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후에 정조 임금은 그와 동생 김상헌을 함께 일컬어 ‘쌍절(雙節)’로 칭하였다.
학문이야기
스승 : 윤근수(尹根壽)
향사 : 서간사(西磵祠) , 석실서원(石室書院), 봉명서원(鳳鳴書院), 서산서원(西山書院), 운계사(雲溪祠)
학파 : 기타 학파
교유인물
홍서봉(洪瑞鳳), 이안눌(李安訥), 조희일(趙希逸), 장유(張維)
의리 사상
김상헌과 최명길의 사상적 특징은 흔히 경(經)의 사상과 권(權)의 사상으로 요약된다.
두 사람이 모두 경(經)의 절대성과 권(權)의 융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최명길이 수단은 간혹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하는 면에서 권(權)에 비중을 두는 반면, 김상헌은 상황이 아무리 급박해도 저울질은 신중해야 한다고 하여 어디까지나 경(經)의 원칙론에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김상헌의 사상은 역사 속에서 의리 사상으로 나타났다. 그의 의리 사상은 북벌사상 및 의병 정신으로 이어졌으며, 조선조 후반 서세동점의 시기와 한말 외세에 의한 국권 피탈의 시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자주성을 수호해 갈 수 있는 이념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역사적 평가
김상헌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절의와 명분을 내세워 현실적 판단에서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과 대립했고, 그가 작성한 항복 문서를 찢어버린 일화로 인하여 조선조에서 의리와 절조의 상징이 되었다.
요컨대 당시 이조판서였던 최명길의 현실적 정책이 국가와 민생을 전쟁의 참화에서 구했고,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의 절개와 의리가 이후의 역사에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가와 민족을 구하는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고 본다.
[출처] 청음 김상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