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클래식] 나치에 희생당한 유대인 진혼곡… 방관한 러에 항거
문화일보 2023-04-13
■ 이 남자의 클래식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바비야르’
1941년 독일, 소련내 우크라 침공
키이우 ‘바비 야르’ 계곡서 학살
가슴 아픈 역사 음악으로 만들어
묵인한 소련 비인간적 행태 비판
구소련 출신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정권의 권력에 시달려야만 했던 대표적인 예술가다. 1936년 스탈린(1879∼1953)이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공연을 관람하던 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페라의 내용이 당의 선전과는 무관한 통속적인 내용이었고, 음악 또한 스탈린의 귀에는 그저 혼란스러운 음들의 나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틀 뒤엔 정부기관 잡지 ‘프라우다’에 그의 오페라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비평이 실리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에겐 비밀경찰의 취조와 감시가 따라붙어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에게 자유로운 창작은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 이듬해인 1937년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인 답변”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새로운 작품 교향곡 제5번을 완성해 발표해야만 했다.
이런 연유로 20세기 작곡가 중 가장 위대한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정권에 순응한 작곡가’라는 오명 또한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를 정권의 나팔수로 매도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가 작곡한 교향곡 제5번의 음악적 내용은 공산당을 찬양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당이 자신의 교향곡 제5번을 찬양하는 것을 두고 ‘우스꽝스러운’ 코미디라고 말한 바 있다.
또 지금 소개할 작품을 보면 오히려 그는 강한 외압을 견뎌내며 러시아와 인류애를 위해 투쟁했던 작곡가라 할 만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9월 19일,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 내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침공한다. 그러나 이때 벌어진 시가전으로 인해 오히려 수많은 독일군이 전사하게 된다. 분명 소련군들에 의한 피해였지만 독일은 이 공격을 유대인들의 배후 조종에 의한 것이라 판단하고 보복을 결심한다.
결국 나치 독일군은 키이우에 살고 있던 3만4000여 명의 유대인을 모두 모아 키이우의 ‘바비 야르’ 협곡에서 이틀 동안 끔찍한 학살을 감행했다. 1962년 쇼스타코비치는 이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을 음악 작품으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한 진혼곡이었을까.
이 작품은 단순히 추모적인 성격만을 띠진 않는다. 오히려 이 사건을 암묵적으로 묵인했던 소련인들의 비인간적 행태, 여전히 소련 내에 만연해 있는 반유대주의 행태를 고발하고 더 나아가 동조하고 공모했던 소련 정부를 향한 항거이자 외침이었다. 당시의 소련은 나치독일을 적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그들의 반유대 정책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2년 3월 27일 쇼스타코비치는 1961년에 발표된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시 ‘바비 야르’를 텍스트 삼아 단악장의 교향시를 완성했다. 불과 6주 만에 이뤄진 일이었고 쇼스타코비치는 1962년 7월 20일 교향곡의 스코어 작업을 마쳤다.
안우성 남자의 클래식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