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穆公眞一齋先生遺事 문목공진일재선생유사 (류숭조) 贈諡敎旨 증시교지 嘉善大夫成均館大司成兼經筵官柳崇祖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 가선대부성균관대사성겸경연관류숭조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 知春秋館成均館實錄事五衛都摠莩摠管贈諡文穆公者 道德博聞曰文 布德執義曰穆 지춘추관성균관실록사오위도총부도총관증시문목공자 도덕박문왈문 포덕집의왈목 가선대부 성균관대사성 겸 경연관 류숭조를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 부사 홍문관대제학 지춘추 관성균관실록사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증직하고 문목공 시호를 내린다. 도덕이 박문하니 가라사대 "문"이요, 포덕 이 집의하니 가라사대 "목"이라. 禮曹回啓 判書 尹定鉉 예조회계 판서 윤정현 예조에서 심의하여 임금에게 아뢰다. 판서 윤정현 觀此 上言則請考大司成柳崇祖易名之典事有此呼?柳崇祖以賢明之資承洛 ? 之源學 관차 상언즉청고대사성류숭조역명지전사유차호유류숭조이현명지자승낙민지원학 問精詣道義純正早膺儒臣之推薦兼掌賢關之訓誨尺?犯危則諫臣之風采可尙 문정예도의순정조응유신지추천겸장현관지훈회척소범위즉간신지풍채가상 이 상언(上言)을 생각해보니 고 대사성 류숭조 역명(易名)의 전사(典事)를 청 하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류숭조 는 현명한 자질로 낙민(洛?)의 연원을 이어서 학문에 정밀하고 정통하여 도의가 두텁고 밝아 일찍이 유신(儒臣) 의 추천을 받았고 겸하여 현관(賢關)의 훈회(訓誨)를 맡아 척소(尺?)가 위태로움을 범하면 간신(諫臣)의 풍채가 가상하였다. 橫經問難則聖朝之衛學益章五載成均旣蒙作成人才之褒二書撰進又承書?刊布之命 횡경문난즉성조지위학익장오재성균기몽작성인재지포이서찬진우승서관간포지명 而之於七書諺解之作一心性理之工羽翼乎聖經宗匠乎後學者也 이지어칠서언해지작일심성리지공우익호성경종장호후학자야 경(經)을 벗어나 어려움을 물으면 조정(朝廷)의 위학(衛學)은 더욱 문체가 빛 났고 5년 동안 성균관에서 이미 인재 양성에 대한 포상을 받았고 책 두 권을 써서 진상하니 승서관에서 간행, 반포케하고 또 7서적을 언문으로 써서 만들라는 하명이 있었다. 한 마음으로 성리 공부는 날개가 돋침인가! 성경은 후학자들 의 종장(宗匠)인가! 以是三朝之崇奬久而?隆一國之儒學賴而大明是蓋斯文之師表 昭代之名臣多士齊 ? 이시삼조지숭장구이미융일국지유학뢰이대명시개사문지사표 소대지명신다사제유 公議可見節惠之典事在合行秩爲正二品然後始議易名之典正二品可贈一款令吏曹 稟 공의가견절혜지전사재합행질위정이품연후시의역명지전정이품가증일관령이조 품 處何如 啓依 允 처하여 계의 윤 이것은 삼조(三曹)에서 권장함이 오래며, 그에 따라 융성케 하였으니 한 나라 의 유학이 힘을 입어 크게 밝아졌으며, 이것이 사문(斯文)의 사표(師表)가 되었 고 태평한 세상의 명신(名臣)으로 많은 선비가 고 르게 찬양하니 가히 절혜(節 惠)의 전사(典事)를 이에서 보겠으며, 행질(行秩)이 합하여 정2품이 된 후 에 비 로소 역명(易名)은 은전이 있었으니 정2품으로 가증하는 일관(一款)을 이조와 픔처에서 영(令)함 이 어떠하리있가. 계에 의하여 허락하노라. 諡狀 시장 昔我 中宗在宥之時有大司成眞一齋柳公以理學受知於 上卓然爲名儒其所著書皆散 석아 중종재유지시유대사성진일재류공이리학수지어 상탁연위명유기소저서개산 佚不傳惟大學十箴性理淵源撮要二書存百世之下猶可以知公之賢矣 일부전유대학십잠성리연원촬요이서존백세지하유가이지공지현의 옛 날에 중종의 성업(盛業)시대에 대사성 진일제 류숭조공으로부터 상께서 이학(理學)의 알음을 받았으니 탁연 (卓然)한 명유(名儒)가 되었으며, 그가 저술한 책이 모두 산질(散侄)이 되어 전해오지 않으나 오직 "대학십잠"과 "성리연원촬요" 두 책만이 있어 백세의 아래에서도 오히려 공의 현명함을 알고 있습니다. 公諱崇祖字宗孝其先出完山高麗末有諱濕 贈掌令生五子皆登第? 二子諱克恕寶文閣 공휘숭조자종효기선출완산고려말유휘습 증장령생오자개등제제이자휘극서보문각 直提學是生諱濱直提學 贈吏曹參判於公爲曾祖祖諱敬孫中部令贈吏曹參議 직제학시생휘빈직제학 증이조참판어공위증조조휘경손중부령증이조참의 공의 이름은 숭조요 자는 종효이며, 그 선대는 완산 출신인데 고려말에 류습 은 증장령이고 다섯 아들을 두어 모두가 과거에 올랐는데 둘째 아들 극서가 보 문각 직제학으로 빈을 낳으니 직제학이며, 증이조참판이다. 이분 은 공의 증조가 되며, 조부는 류경손으로 중부령으로서 증이조참의가 되었다. 考諱之盛典牲署令 贈吏曹參判? 安東權氏 贈貞夫人公生於景泰壬申幼有志於學不 고휘지성전생서령 증이조참판비안동권씨 증정부인공생어경태임신유유지어학불 事詞章成化壬辰擧進士入太學學益進三舍生皆推爲師表 사사장성화임진거진사입태학학익진삼사생개추위사표 부친은 지성인데 전생서령(典牲署令)으로 증이조참판이 되었고 부인은 안동권씨 증정부인이다. 공은 문종2년 (1452)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뜻이 학문에 만 있고 사장(詞章)은 일삼지 않다가 태학에 입교하니 학문이 더욱 진전되어 삼사(三舍)의 학생들이 모두 사표(師表)로서 추대하였다. 擢文科授藝文檢閱師儒李克增 啓柳崇祖經明行修請兼帶成均館以敎諸生 上從之時 탁문과수예문검열사유이극증 계류숭조경명행수청겸대성균관이교제생 상종지시 命修欽敬閣公與金應箕掌其事己陞待敎奉敎遷司書司諫院正言拜吏曹佐郞 명수흠경각공여김응기장기사기승대교봉교천사서사간원정언배이조좌랑 문과에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을 제수 받으니 사유(師儒) 이극증이 아뢰기를 "류숭조는 경서에 밝고 행의를 닦 았으니 겸하여 성균관에서 모든 유생은 가르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때 흠경각을 수리하라는 명을 받고 공이 김응기와 함께 그 일을 관장하여 끝마치니 대교봉교에 오르고 사서와 사간원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忠淸道都事丁外憂服? 除弘文館副校理選經費局詳定員尋爲忠翊莩事歷吏戶曹正 충청도도사정외우복결제홍문관부교리선경비국상정원심위충익부도사력이호조정 郞司藝轉掌令昏朝政始亂公倡同僚?論主失十餘事 랑사예전장령혼조정시란공창동료소론주실십여사 충청도 도사를 할 때는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이 끝나 홍문관부교리를 제수받고 경비국 상정원에 선임되었다가 충익부 도사가 되었으며, 이조, 호조 정랑과 사예를 역임하고 장령이 되었는데 연산군의 정치가 문란하기 시작하여 공이 동료들을 모아 연산군의 실정(失政) 10여 가지를 상소하여 논하였다. 主嘗出遊還宮徑由書雲峴公進曰君子行不由徑?人君乎一事不正萬念從而皆不正因 주상출유환궁경유서운현공진왈군자행불유경황인군호일사부정만념종이개부정인 極諫主大怒旣而左遷護軍又拜司藝 극간주대노기이좌천호군우배사예 연산군이 일찍이 나가 놀다가 궁으로 돌아오는데 지름길인 서운현을 경유하려 하므로 공이 나가서 말하기를 "군자는 지름길을 가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임금께서 가시겠습니까? 한가지 일이 바르지 못하면 만가지 생각 이 따라서 모두가 바르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간곡히 간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이로 인하여 호군으로 좌천 되었고 또 사예로 옮겨갔다. 甲子士林禍起追論前事杖竄原州復逮繫獄加拷掠問前發不由徑之言者爲誰公對曰崇 갑자사림화기추론전사장찬원주복체계옥가고략문전발불유경지언자위수공대왈숭 祖也禍且不測有救者還配原州 조야화차불측유구자환배원주 연산군10(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지난 일을 논죄하여 원주로 귀양보낸 후 다시 옥에 가두고 고문을 하면서 묻기를 "전일에 지름길로 가지 않는 법이 라고 한 자가 누구인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숭조입니다"하니 화가 또 헤아릴 수 없이 닥칠 터인데 구하는 이가 있어 돌아와 원주에 유배되었다. 中宗開玉首開經筵於是三公交薦以副應敎召每進對論說縱橫發盡秘奧諸僚皆歎以爲 중종개옥수개경연어시삼공교천이부응교소매진대론설종횡발진비오제료개탄이위 莫及也自甲子以來詞訟淹滯至是牒訴雲委上特超公四資自典翰爲判決事 막급야자갑자이래사송엄체지시첩소운위상특초공사자자전한위판결사 중종이 반정을 하고 경연을 여니 이에 삼공이 서로 천거하여 부응교로 부르니 매번 나아가 대론을 할 때 종횡으로 비밀 되고 구석진 것을 다 펴내니 여러 동료들 모두가 찬탄하면서 공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갑자사화 이후 사송 (詞訟)이 담기어 막히니 이에 이르러 첩소(牒訴)를 운위(雲委)함에 임금께서 특별히 공을 4계급을 뛰어넘게 하여 전한으로부터 판결사가 되었다. 大臣啓柳崇祖學術高明經幄不可無此人乃換工曹參議兼帶經筵官蓋異數也燕山卒上 대신계류숭조학술고명경악불가무차인내환공조참의겸대경연관개이수야연산졸상 議從厚禮葬之大臣持不可公上箚極論其非請用陵儀別立廟 의종후예장지대신지불가공상차극론기비청용릉의별입묘 대신이 아뢰기를 "류숭조는 학술이 고명하니 경악(經幄)에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므로 공조참의로 바 꾸고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특이한 운세 이였다. 연산군이 죽으니 임금께서 의론하여 두터운 예로 장사지내려 하는데 대신들이 온당치 못하다고 말하므로 공이 임금께 글을 올려 대신들이 잘못임을 극간하고 능의(陵儀)를 쓰게 하고 별도로 묘를 세우도록 청하였다. 訃聞上國議者皆以爲曲說不可從柳子光請付有司論罪上不從卒用公言尋授大司成大 부문상국의자개이위곡설불가종류자광청부유사론죄상부종졸용공언심수대사성대 臣又啓性理之學不可絶其傳請選年少文官從柳崇祖受業報可 신우계성리지학불가절기전청선년소문관종류숭조수업보가 부음(訃音)을 듣고는 위에서 국위자(國儀者)는 모두가 곡설(曲說)을 하며 따름 이 불가하다 하니 류자광이 유사 (有司)에게 부쳐 논죄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 따르지 않고 마침내 공의 말을 받아들였다. 얼마 아니 되어 대사성을 제수 받으니 대신들이 또 아뢰기를 "성리를 배움은 그 전함을 끊는게 불가하오니 이 젊은 문관을 선발하고 류숭조를 따라 수업하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청하니 임금이 좋다고 하였다. 上視學謁先聖御明倫堂公講大學反復論存心出治之要翼日進大學十箴性理淵源撮要 상시학알선성어명륜당공강대학반복론존심출치지요익일진대학십잠성리연원촬요 二書上嘉奬?命刊行進階嘉善賜金帶表裏應命薦趙靜庵光祖金錫弘黃澤 이서상가장극명간행진계가선사금대표리응명천조정암광조김석홍황택 임금이 학궁을 살리고 선성을 알현하고 명륜당에 가니 공이 대학을 반복하여 강의하고 존심출치의 요점을 논 하였다. 다음날 "대학십잠"과 "성리연원촬요" 두 권의 책을 진상하니 임금께서 가상하구나 하고 권장하며 간행 을 명하였으며, 품계를 가선대부로 올리고 금대표낭을 하사하라 하므로 명에 따르고 정암 조관조, 김석홍과 황택을 천거하였다. 出拜黃海道觀察使大臣經筵官啓今將講周易柳崇祖深於易學不宜外授乃改同知中樞 출배황해도관찰사대신경연관계금장강주역류숭조심어역학불의외수내개동지중추 府事與贊成金應箕及諸儒臣討論易禮性理大全等書以備進講 부사여찬성김응기급제유신토론이례성리대전등서이비진강 더 나아가 황해도 관찰사로 배명되니 대신과 경연관이 아뢰기를 "장차 주역을 강론해야 하는데 류숭조가 역학 (易學)에 깊으니 외직을 주는 것은 마땅치 못 합니다"라고 하여 이에 동지중추부사로 교체하고 찬성 김응기 및 유신(儒臣)과 함께 역리(易理)를 토론하고 "성리대전"등의 책을 준비하여 강의를 진행하였다. 是歲壬申以疾卒于第訃聞上悼惜賜棺槨賻祭葬于驪州文谷酉坐之原配驪州閔氏監察 시세임신이질졸우제부문상도석사관곽부제장우여주문곡유좌지원배여주민씨감찰 亨孫女附公墓左繼配順川朴氏習讀季孫女墓在堤川俱贈貞夫人 형손녀부공묘좌계배순천박씨습독계손녀묘재제천구증정부인 이해 중종7(1512)년에 병으로 집에서 별세하니 부음을 듣고 임금께서 슬프고 애석하여 관곽을 하사하고 부제 (賻祭)하였으며, 여주대곡유좌의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배필 여주 민씨는 감찰 민향손의 딸인데 공의 묘소 좌 편에 부장(?葬) 하고 계배(繼配) 순천박씨는 습독 박계손의 달로서 묘소는 제천에 있으며, 모두 정부인으로 추증 되었다. 一男應台參奉女適內禁衛河益粹應台子炯參奉炯子瀾直長贈執義孫曾以下多不能盡 일남응태참봉녀적내금위하익수응태자형참봉형자란직장증집의손증이하다불능진 錄公剛方廉直孝友天至前後居憂皆廬墓三年兄弟之間人無間言 록공강방염직효우천지전후거우개려묘삼년형제지간인무간언 외아들 응태는 참봉이고 딸은 내금위 하익수에게 시집갔다. 응태의 아들 형(炯)은 참봉이고 형의 아들 란(瀾)은 직장인데 집의로 추증되었으며, 증손이하는 많아서 모두 기록할 수 없구나. 공은 강방(剛方)하고 겸직(廉直)하였으며, 효우(孝友)는 하늘에서 왔으니 전후하여 상중에는 모두 려묘(廬墓) 3년을 하였고 형제 사이에는 사람들의 간언(間言)이 없었다. 宗族窮甚者極力救濟居官淸愼詳明部決如流平生不事産業捐 ? 之日無以爲?在諫院 종족궁심자극력구제거관청신상명부결여류평생불사산업연관지일무이위감재간원 嘗與右相許琮同對許言宰相臺諫務要 상여우상허종동대허언재상대간무요 일가 중에 가난이 심한 사람에게는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고 관직에 있으면 청신하고 상명하여 선악을 판단하고 결정함에 물 흐름과 같았고 평생에 산업을 일삼지 않았으니 타계한 날 염을 할 수 없었으며, 간원에 있으면서 일찍이 우상 허종과 더불어 동대(同對)하고 허(許)가 재상과 대간이 힘써야 할 요점을 말하였다. 和同公力言宰相臺諫相可否爭是非非爲乖亂正欲引君當道不務合理惟務和同非社稷 화동공력언재상대간상가부쟁시비비위괴란정욕인군당도불무합리유무화동비사직 之福也許深愧服 지복야허심괴복 공이 화답하여 같이 힘써 말하기를 재상 대간이 서로 옳고 그르고 시비를 가리기 위한 괴란(乖亂)을 바로 함이 되지 못하고 임군을 끌어 도(道)에 임한다면 합리에 힘쓰지 않고 오직 화동(和同)에 힘쓴다면 사직(社稷)의 복이 안 된다고 하니 허(許)가 깊이 부끄러워하고 승복하였다. 時朝廷議船價平定論有異同公引大明律以證之成廟命赴京者質正而來右相成希顔以 시조정의선가평정론유이동공인대명율이증지성묘명부경자질정이래우상성희안이 質正官如京考律書果如公言 질정관여경고율서과여공언 그 때에 조정에서 선가(船價)의 평정을 논의하다가 논의가 다르고 같음이 있기에 공이 대명률(大明律)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성종이 명하기를 서울에 부임하는 자는 질정(質定)하여 오게 하라 하니 좌상 성희안이 질로 서 정관(正官) 하는데 서울에서 고율(考律)한다고 쓴 것은 과연 공의 말과 같다고 하였다. 嘗手製渾天儀無不?合於經傳纂經書諺解以敎蒙士正宗戊午上謂筵臣曰經書諺解曾 상수제혼천의무불문합어경전찬경서언해이교몽사정종무오상위연신왈경서언해증 以爲柳眉巖所爲乃知出於大司成柳崇祖?巨儒也 이위류미암소위내지출어대사성류숭조진거유야 일찍이 손수 혼천의를 제작하였는데 경전(經傳)과 합치되지 않음이 없었고 경서언해를 편찬하여 어린 선비들을 가르쳤다. 정조22(1798)년에 임금께서 연신 (筵臣)에게 말하기를 "경서언해는 일찍이 류미암(柳眉巖)이 한 것으로 되었는데 이에 대사성 류숭조에게서 나왔으니 참으로 큰 선비이다"라고 하였다. 公文蒿遭兵?蕩然其學之造詣後生靡得以考然猶幸有二書者在夫性命之說自聖人所 공문호조병선탕연기학지조예후생미득이고연유행유이서자재부성명지설자성인소 罕言子貢以下不得與聞卽今士大夫 한언자공이하부득여문즉금사대부 공의 글 원고가 병란을 만나 불에 타 없어져 그 학문의 조예는 자세히 고찰 할 수 없으나 다행이도 두 권의 책이 전해 오니 저 성명(性明)의 설이 있다는 것은 성인으로부터도 드문 것이요 자공(子貢) 이하를 말 한 것을 함 께 얻어 듣지를 못한게 바로 오늘의 사대부이다. 夫人能言之誠以先儒發揮論辨殆無餘蘊其書浩乎如淵海學者力半而功倍固易易也然 부인능언지성이선유발휘론변태무여온기서호호여연해학자역반이공배고역역야연 求能自得者亦極? 焉 구능자득자역극선언 많은 사람이 능히 성(誠)을 말하는 것은 선유(先儒)들이 논변(論辨)을 발휘하 였으나 거의 불 더미에서 남은 게 없는데 그 책이 넓기가 바다와 같아 학자들 이 힘을 반만 드리고 공은 갑절이나 얻으니 진실로 주역이 쉬워졌다. 그러나 능 히 구하여 스스로 얻는 자 또한 매우 드물겠구나. 公當我世祖卽位之初退溪栗谷諸先生未作東方之士於是學蓋猶情然矣不由傳授超然 공당아세조즉위지초퇴계율곡제선생미작동방지사어시학개유몽연의불유전수초연 獨造公於斯道可謂卓越宏博而有創始之功者矣 독조공어사도가위탁월굉박이유창시지공자의 공이 우리 세조 즉위 초를 당하여 퇴계, 이율곡 여러 선생 등 동방의 선비가 이 학문을 짓지도 않았으니 덮여 아직도 장님이었다. 전수(傳受)를 받지도 못하 였고 초연하게 혼자서 지었으니 공은 사도(斯道)에 탁월하게 넓고 넓어 창시(創 始)의 공이 있는 분이다. 且其二書光明純粹辭約以備其於修己治人之方深得洙泗洛 ? 相傳之正誠使爲人君者深 차기이서광명순수사약이비기어수기치인지방심득수사락민상전지정성사위인군자심 體而力行焉則天德王道之要亶不外乎是公之學亦於此焉盡之使其文藁充屋皆可崙也 체이력행언즉천덕왕도지요단불외호시공지학역어차언진지사기문고충옥개가략야 또 그 두 권의 책은 광명하고 순수하여 말은 간략하게 또 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방법을 갖추어 깊이 수사락민(洙泗洛?)이 서로 전하는 정도를 얻어서 정성이 인군(人君)된 이로 하여금 깊이 체득하고 힘써 행한다면 천덕과 왕도의 중요함이 진실로 여기서 벗어나지 아니하고 공이 또한 이 범주에서 모두 사용되었으며, 그 글의 원고가 집에 가득하였으나 모두가 없어지고 약간 남은 것이다. 故其處昏朝而直聲震世 ? ?竄遂談笑而處之及夫左右涌幄一出於經術爲廢主請加敦 고기처혼조이직성진세류설서수담소이처지급부좌우유악일출어경술위폐주청가돈 親之思 ?權貴而不顧長國子五年論者謂無甚讓於胡安正 친지사오권귀이불고장국자오년론자위무심양어호안정 고로 혼조(昏朝)에 처하여 옳고 곧은 상계(上啓)가 세상을 진동시켰고 죄인으로 잡혀가 귀양지로 쫓기어도 담소하며 처신하였으니 생각하건대 모신(謀臣)의 좌우에서 한결같이 경술(經術)을 내어 연산군을 위하여 돈친(敦親)의 은덕을 더 하기를 청하며, 권귀(權貴)함을 돌아보지 않았고 국자감의 장(長거)을 5년이나 하니 논자(論者)들은 말하기를 호안정(胡安正)으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을게 없다고 하였다. 當時語之曰經學問於柳大司成史學問於金慕齋旣又爲作諺解擧國學者至今遵守其卒 당시어지왈경학문어류대사성사학문어김모재기우위작언해거국학자지금준수기졸 也士大夫相弔曰柳先生云亡斯交厄矣 야사대부상조왈류선생운망사교액의 당시에 말하기를 "경학(經學)은 대사성 류숭조에게 묻고 사학(史學)은 김모재(金慕齋)에게 물어라 하였다"고 전한다. 이미 언해(諺解)를 저작하여 대부분의 학자가 지금까지 준수하여 왔다 그가 별세함에 사대부가 서로 조문하여 말하기를 "류선생이 돌아가셨으니 사문(斯文)의 액(厄)이로다"라고 하였다. 太學有爲之食素七日者此則公理學之發諸事爲而孚於人者也豈非體用實學東方之大 태학유위지식소칠일자차즉공리학지발제사위이부어인자야개비체용실학동방지대 賢乎哉是歲嶺南儒生上言乞加褒隆上命特贈吏曹判書賜節惠之典於 현호재시세영남유생상언걸가포융상명특증이조판서사절혜지전어 성균관에서는 7일이나 소식(素食:평소에 먹는 밥)하였으니 이는 공의 이학(理 學) 개발로 모든 일이 사람들에 게 믿게 함이었다. 어찌 실학을 체용(體用)한 동 방의 대현(大賢)이 아니겠는가. 이 해에 영남유생이 상언하여 포륭(褒隆)을 더 하기를 비니 임금께서 특별히 명하여 이조판서를 추증하였으니 절혜(節惠)의 은전을 하사하도다. 是公後孫養天屬正鉉以請諡行狀顧惟先生道繼前賢功在後世諸家之述贊揚無憾謹綴 시공후손양천속정현이청시행장고유선생도계전현공재후세제가지술찬양무감근철 其大略如右云 崇祿大夫行龍槐衛上護軍兼弘文館提學知實錄事尹定鉉謹撰 기대략여우운 숭록대부행용양위상호군겸홍문관제학지실록사윤정현근찬 이에 공의 후손 양천이 정현에게 부탁하여 시(諡)의 행장을 청하매 무릇 선생은 오직 도(道)를 전현(前賢)에게서 이어받아 공은 후세로 이어집니다. 제가(諸家)의 지음을 찬양하며 한(恨) 없이 삼가 우(右)와 같이 그 대략을 끝맺는다. 숭록대부 행용양위상호군 겸 홍문관제학지실록사 윤정현이 삼가 짓다.
전주 류씨 진일재 류숭조 1452년 (문종2)-1512년 (중종7) 자 종효(宗孝), 호 진일재(眞一齋) 석헌(石軒), 시호는 문목(文穆) 진일재 류숭조는 1452년 전생서령을 지낸 지성(之盛)과 안동 권씨 사이에서 태어나 1472년(성종3)에 진사, 1489년(성종20)에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유(師儒, 선비들을 지도할 만한 학문과 인격을 갖춘 유학자)에 선임되었다. 장령(掌令)으로 연산군의 실정을 간하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난 뒤 공조참의, 경연참찬관, 대사성,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이중에 특히 성균관 직을 오래 맡았다. 수장인 대사성(大司成, 5년간 재직)을 비롯해 사성, 사예, 직강, 전적, 박사, 학정, 학록, 학유 등 모든 직을 망라했을 정도였다. 그는 성균관의 행정부터 교수 학습에 이르는 모든 직무에 정통했던 관료요 유학자였다. 당시 논자들의 말인 "경학(經學)은 류 대사성(柳大司成, 柳崇祖)에게 묻고 사학(史學)은 김 모재(金慕齋, 金安國)에게 물었다"와 대신들이 국왕에게 건의한 "성리학의 전수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연소한 문신을 뽑아 류숭조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해야 합니다"라는 내용은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그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이룬 역할은 단순히 인재양성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다. '도학의 맥 수수(授受)'의 문제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 도학의 맥은 진일재 류숭조를 통하지 않게 그려졌다. '도학정치를 주장한 대학자 류숭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학자'로 조광조를 언급할 뿐 도학 정통성은 한훤당 김굉필로부터 이어진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러한 학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균관의 사범(師範)으로서 조광조를 지도했던 역사적 사실과, 도학의 맥을 계승하기 위한 그의 노력까지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실록을 읽다가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다. 진일재 사후 만5년 뒤인 중종12년 2월의 일이다. 경연에 입시한 조광조가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을 것을 아뢰는 자리였다. 이때 돌연 조광조는 진일재를 평하고 나섰다. "신이 보건대 류숭조는 학술이 있었다지만 그의 사람됨이 거칠고 경박하여 유자(儒者)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 성균관의 서재를 더 넓히기를 주청하여 비록 (유생을) 많이 불러 모았지만 한갓 국고만 허비했을 뿐이었습니다." 조광조의 평에 중종은 "류숭조가 대사성일 때 과연 유생이 많이 모였다고 했다. 그러나 한갓 모으기만 힘써서 될 일인가? 모름지기 쓸 만한 사람으로 양성시켜야지, 단지 많이 모은 명성만 냄은 불가하다"라 하였다. 이렇게 국왕과 호흡이 잘 맞던 조광조는 참소를 입고 2년 뒤 죽임을 당했다. 이 대화를 음미해 보면, 조광조는 스승인 류숭조가 성균관 직에 있으면서 교육자로서 이룬 탁월한 업적에 대해 혹평한 것은 그가 갈망했던 이상적 왕도정치(王道政治)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조광조가 비판했던 성균관의 '양적 팽창'은 선비의 저변 확대로 후일 사림의 재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조광조 같은 불세출의 인물도 류숭조의 성균관에서 비로소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뒤집어 보면 이는 진일재의 기여와 역할이 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하지만 조광조의 영향력은 퇴계 이황을 거치면서 유림 사회에서는 절대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부정적 평가는 음으로 양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872년 고종이 "칠서언해를 누가 지었나?" 라고 물었을 때 강관(講官) 김세균(金世均, 1806-1884)이 "류숭조가 집해(輯解)하고 문순공(文純公) 이황이 바로 잡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류숭조에게 별호와 문집이 있는가? 어느 시대 사람인가?"라고 재차 물었다. 그때 김세균은 "사적인 별호로 석헌(石軒)이라 하고 진일재(眞一齋)라 하기도 합니다. 문집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문순공과 같은 시대 사람인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경연에 입시하는 신하는 당대 대표 학자다. 그럼에도 김세균이 말한 이야기를 보면 잘못된 내용이 있다. 첫째, 진일재의 문집 문제다. 실제로 그것은 진작 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늦었지만 진일재 문집은 1808년(순조8) 경 호곡(壺谷) 류범휴(柳範休, 1744-1823) 등이 간행했다. 그럼에도 김세호는 본 적이 없다고 한 것. 영남과 중앙 정계와의 학문적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진일재가 중종의 명에 의해 간행한 조선 성리학 연구의 주요 이론서인 대학잠(大學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조차 소개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는 진일재의 생애에 무지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퇴계보다 49년 선배이며 그가 가르친 조광조조차 퇴계보다 19년 선배다. 그런데도 김세호는 단순히 '퇴계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얼버무렸다. 진일재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온당하지 못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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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은 2011년 4월 29일 오후 1시 30분부터 조선전기 사림파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성리학자이면서도 도통론에 가려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중종대 학자 진일재 류숭조(眞一齋 柳崇祖, 1452~1512)의 사상과 업적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진다. 이날 학술대회는 안동대 안병걸 교수의 '조선전기 사림 형성과 진일재'란 주제의 기조발표가 있다. 이어 '조선전기 사림세력 형성의 역사적 배경'(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전기 사림파 성리설의 전개와 특징'(김용헌, 한양대), '진일재 성리사상의 본질과 사상사적 의의'(김종석, 한국국학진흥원), '칠서언해의 국어사적 의의'(이영경,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의 발표가 있을 예정이다. 류숭조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성리학 이론가로서 5년간의 성균관 대사성 직을 비롯해 거의 15년을 성균관에서 보내면서 후학들에게 성리학 이론을 전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숭조가 한국유학사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도통론이 갖는 막강한 명분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그가 생존해 있던 시기에는 '정몽주……김종직'이라고 하는 도통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도통론은 류숭조가 죽고 난 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사림들이 자신들의 학문적, 정치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바로 이처럼 가려진 인물 연구를 통해 조선전기 유학사를 올바로 복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출처] 文穆公眞一齋先生遺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