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머리말
또다시 6월이 찾아왔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전쟁이 생각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숙명이겠지요.
여름으로 다가가는 6월의 푸르름 속에 감추어진 우리민족의 비극 6ㆍ25를 생각하면서, 군인들의 피가 아니었으면 북한 땅이 되었을 고성, 일반 국민이 가장 북쪽으로 올라가 볼 수 있는 고성,
최근 국내외 정세의 변화로 남쪽의 끝에서 북쪽의 시작으로 인식되는 강원도 고성으로 이번 달에 떠나봅니다.
< 통일전망대에서 >
고성 개관
위치와 영역
남북이 분단된 현실에서 행정구역상으로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고성군의 최북단은 현내면 송도진리 북단으로 북위 38°36′38″이다. 또한 민간인이 큰 절차 없이 들어갈 수 있는 남한 내에서 최북단의 땅이기도 하다.
북쪽으로는 북한의 금강산을 포함하는 분단된 고성군과 통천군에 인접하며, 남쪽으로는 속초시, 서쪽으로는 향로봉을 경계로 인제군과 접하면서 동쪽으로는 동해바다를 끼고 있다.
전체적 모양은 태백산맥을 서쪽으로 끼고 동해안을 따라가는 길쭉한 모양을 이루며, 동해안의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진부령과 미시령만이 내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로 비교적 외지며 주변적인 위치에 속한다.
면적은 북한의 고성지역을 제외하면 664.19㎢로 강원도 전체면적의 3.94%가 되는데, 강원도내의 군중에서는 양양군 다음으로 가장 작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현재 미 거주지역인 수동면을 포함 2읍 4개 면으로 구성되어있고 간성읍(180.1㎢)이 가장 크고 죽왕면(50.1㎢)이 가장 작으며,
군사지역으로 비거주지역인 수동면(144.1㎢)이 군내에서 2번째의 면적을 차지하여 분단의 안타까움이 남아있다.
< 속초와 경계 >
< 청간정에서 본 토성면 >
< 인제군과의 경계 >
역사
< 간성읍성 >
< 간성읍성 >
예로부터 함경도와 영동지방을 연결해주는 길목에 위치한 고성은 부족국가 시대에 동예에 속하였으나 삼국시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그 후 신라의 세력이 강성해져 진흥왕때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 대부분의 고성군 지역은 수성군으로 불리고 일부지역은 고성군으로 불리다가 고려때 각각 고성현과 간성현으로 불리게 된다.
나중에 간성현이 군으로 승격되어 고성현을 관할하다가 조선 세종때 고성현도 승격되어 고성군과 간성군으로 되었다가 1914년 군ㆍ면 통폐합에 의해 고성군으로 통합되었다.
1919년에는 간성군이 폐지되고 토성ㆍ죽왕 2개 면이 양양군에 넘어가고 고성군으로 불리게 된다.
해방당시에는 이 지역이 2읍 6면 (고성읍ㆍ장전읍ㆍ거진면ㆍ수동면ㆍ외금강면ㆍ서현ㆍ내면ㆍ간성면)으로 북한에 속하였는데, 휴전후 1954년에 수복하여 간성면ㆍ거진면ㆍ현내면ㆍ수동면 일부가 고성군이 되었다.
1919년에는 간성군이 폐지되고 토성ㆍ죽왕 2개 면이 양양군에 넘어가고 고성군으로 불리게 된다.
해방당시에는 이 지역이 2읍 6면 (고성읍ㆍ장전읍ㆍ거진면ㆍ수동면ㆍ외금강면ㆍ서현ㆍ내면ㆍ간성면)으로 북한에 속하였는데, 휴전후 1954년에 수복하여 간성면ㆍ거진면ㆍ현내면ㆍ수동면 일부가 고성군이 되었다.
1963년 토성면과 죽왕면이 다시 양양군에서 편입되고 1973에는 거진면이, 1979년에는 간성면이 읍으로 승격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한도 고성군 북부지역과 통천군 남부지역을 합쳐 고성군을 신설하고 장전읍을 고성읍으로 부르고 있어 현재 남북에 2개의 고성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간성읍성 >
< 고성향교>
<거진항 >
< 통일전망대에서본 북한>
기후
< 속초기상대(봉포) >
우리나라 기후를 구분하면 북에서 남으로 북부형-중부형-남부형-남해안형으로 나누는데 고성지방은 동위도의 서해안지방이 북부형 기후에 속하는데 반해 중부형 기후가 나타날 정도로 비교적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다.
이것은 태백산맥이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고,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는 난류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현상으로 평균기온이 동위도의 서해안에 위치한 황해도 해주(11℃)와 내륙의 철원(10.2℃)에 비해 약1~2℃정도 높다.
특히 1월에는 해주(-3.7) , 철원(-5.3℃)보다 약1~3℃정도 높으며 8월의 해주(24.5℃), 철원(24℃)에 비해 약 2℃정도 낮아 이 지역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기후가 나타난다.
강수량은 해주(995.8㎜)에 비해 많으나 내륙의 철원(1335.7㎜)에 비해 적지만, 겨울철 동해에서 불어오는 북동기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눈이 많이 내려 1월의 강수량은 해주(11.7㎜), 철원(21.8㎜)에 비해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가옥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쳐 평지보다 높게 가옥을 짖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지방에 위치하여 바람이 비교적 많은데 연간 평균풍속 3.2㎧로 인천다음으로 중부지방에서 바람이 가장 세며,
서쪽에서 지속적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4월~7월에 차고 습한 오호츠크해기단의 영향을 받아 영서지방은 푄(Fõhn)현상으로 고온건조해지만 영동에 속한 고성은 비가 내리거나 저온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밭작물에 냉해 피해와 어황(漁況)도 저조하게 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
평균기온(℃) -2.3 1.2 5.6 12.3 17.2 20.0 23.4 22.4 20.0 15.9 8.8 1.4 12.2
최고기온(℃) 1.2 5.3 10.1 17.2 22.2 23.6 27.1 26.3 24.1 20.3 13.3 5.5 16.4
강수량(㎚) -5.8 -2.7 1.1 7.1 13.5 17.0 20.1 18.8 15.9 12.0 4.0 -2.3 8.2
강수량(㎚) 37.6 64.4 20.8 4.1 7.2 126.6 233.3 56.9 311.5 234.9 36.7 20.2 1154.2
지형
< 봉포항에서 본 죽도>
앞에 바다를 두고 뒤에 백두대간의 큰 산맥을 끼고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고성은 비교적 단조로운 해안선과 지형을 가진 지역이다.
북한쪽 고성의 금강산(1,638m)ㆍ연일봉(1,592m)ㆍ무산(1,320m)에서 이어온 백두대간은 향로봉(1,293m)ㆍ칠절봉(1,172m)ㆍ마산(1,052m)ㆍ신선봉(1,204m)으로
연결되어 남쪽을 향해 내려가 군의 서쪽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들 산에서 발원한 남강ㆍ북천ㆍ남천ㆍ문암천ㆍ자산천의 짧고 기울기가 급한 하천이 흘러가면서 만들어 놓은 침식과 퇴적평야가 해안에 폭이 좁고 남북으로 길게 분포한다.
해안에는 산맥에서 침식되어 내려온 모래가 쌓여 63㎞의 해안에 폭이 좁고 긴 사빈(沙濱) 해안이 발달하여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뒤에는 높이 5m내외의 모래언덕인 사구(砂丘)가 형성되어있고 그곳에는 송림이 울창하다. 해안 사구의 배후에는 이수(離水)해안(지반의 융기나 해수면의 하강으로 형성된 해안)의 증거인 화진포ㆍ송지호ㆍ광포ㆍ천진호 등의 석호(潟湖)가 잘 발달되어있다.
암석으로 된 해안일부에서는 파도침식에 의한 해식애와 좁은 규모의 파식대가 발견되며 통일전망대 넘어 북한의 해금강일대는 이런 지형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보통 동해안에는 섬이 적다고 알려져 있지만 고성에는 19개의 작은 무인도가 있어 단조로운 동해안에 변화를 주는 조망을 제공한다.
< 송지호해수욕장 앞 죽도 >
< 북천 >
< 오호천과 인정리 평야>
<반암해수욕장 >
인구
2001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고성군의 인구는 34,728명으로 1968년 64,353명을 최고로 계속 감소추세에 있다.
이것은 1970년대부터 급속도로 발전하는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한 이농과 동해안의 어족자원의 감소, 휴전선 접경지역으로 인한 발전의 한계에 기인한다.
강원도는 시 지역에 70%, 군 지역에 30%의 인구가 분포하는데, 고성군은 강원도 전체인구 1,556,904명의 2.2%를 차지하여 11개의 군중에서 7번째의 인구를 가져 비교적 인구가 적다.
가구당 인구도 1968년에 5.4명에서 2.8명으로 크게 줄어들어 우리나라 농어촌지역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며, 읍ㆍ면별로는 인구가 거주하지 않는 수동면을 제외하고
거진읍이 9,886명으로 가장 많고 간성읍이 다음이며, 면 중에서는 토성면이 7,966명으로 가장 많은데 이는 속초시에 인접한 영향으로 생각된다.
현내면은 3,802명으로 가장 적은데 최북단의 접적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전입인구 보다 전출인구가 많은 실정으로 고성군에서는 고성군민되기 운동을 벌이고,
전입기념품지급과 출생아에게 육아용품지급, 주민등록 자진신고시 과태료 감면 등의 혜택을 주고 있다. 앞으로 북한과의 교류가 활성화되면 인구의 증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
<교암항 >
<동국여지승람>에는 이곳의 사람들이
"삼을 심되 길쌈을 하지 않고 그것으로 노를 꼬아 그물을 만들어서 고기 잡는 것으로 생업을 삼는다"라고 쓰여있는데,
이는 이 지역의 산업이 과거부터 수산업이 중심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고성 앞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으로 명태ㆍ오징어ㆍ꽁치ㆍ미역 등의 많이 잡히며 특히 명태는 이 지역의 어업을 대표하는 어종으로 2월에는 명태축제를 열기도 한다.
비교적 다양한 어종이 분포하지만 해안선이 단순해서 거진ㆍ대진ㆍ아야진ㆍ문암항 등의 주요항구는 규모가 작으며, 북한과의 접경지역에 어로한계선이 있어 명태의 어획에 많은 제약이 있다.
어업인구는 4,648명으로 매년 감소하고 있으며, 겸업인구보다는 전업인구가 59.5%로 더많아 순수어촌이 많은 동해안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1년 현재 어획고는 13,155톤에 약 31억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강원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경지의 면적은 적어 경지면적은 4,334㏊로 군 면적의 8.8%를 차지하며 강원도 평균 6.2%보다는 만은 편이지만 전국평균 18.7%에 비하면 작은 편이다.
논의 면적은 65.8%로 전국평균 61.1%보다 많으며 강원도의 42.9%로 보다 많아 밭보다는 논이 많은 곳이다.
주요농작물은 쌀과 보리, 감자, 콩이 주가 되며 미시령의 흘리일대에서 고랭지 채소가 재배가 활발하다. 내륙은 민간인 통제지역으로 되어있어 산림의 보전이 양호하고, 목재ㆍ송이버섯ㆍ잣ㆍ밤 등의 임산물이 생산된다.
<아야진항 >
<봉포항 >
< 문암항>
< 가진항>
< 대진항>
< 항목논공단지>
<간성시장>
< 거진5일장 >
지역의 특성
과거
<고인돌(화진포) >
태백산맥으로 가로막혀 중앙에서 접근하기 어려웠던 고성은 대관령을 통해 접근이 수월했던 강릉에 비해 덜 알려지고 발전이 늦었던 곳이다.
지형적으로 배후에 높은 산과 작은 하천 그리고 바다가 어울러지고,
기후적으로는 비교적 따뜻하고 풍부한 강수량으로 인해 사람이 일찍부터 거주하기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중앙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한 지역으로 남게된다.
바다를 끼고있으나 항구발달의 조건이 불리하고 농업이나 정어리와 명태 어획과 같은 수산업 외에는 특별한 산업의 발달이 없어 북쪽의 원산이나 남쪽의 강릉을 중심지로 하면서 주변 배후지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그나마 이지역 경제의 밑바탕이었던 정어리나 명태의 어획은 대폭 감소하고, 6ㆍ25전쟁 이전에는 인위적인 분단으로 인해 북쪽의 영역에 속하였고 전쟁후 수복하게 되었지만
많은 지역이 군사적인 이유로 출입금지지역으로 묶이면서 더욱 발전이 어려워져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된다.
< 1950년대 거진(고성군지) >
<삼포봉수대 흔적(삼포리) >
<삼포봉수의 군진지 >
<소련군 주둔 자리(고성파출소)>
현재
1981년 11월부터 시작되어 1984년에 완공된 진부령 도로의 2차선 확장공사는 외통길에 비만 오면
진흙수렁이었던 길을 반듯하게 포장해놓아 고성지방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경관과 순박한 문화적 특성을 태백산맥의 서쪽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다.
같은 해에 문을 연 고성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장소인 통일전망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방문해서 고성지방 이상의 것을 보고 느끼게 된다.
남북의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의 비극을 그대로 축소해 놓은 고성은 북에서 잠시만 있다간다고 생각하고
내려온 많은 실향민들이 언제든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이곳에 뿌리깊게 정착하지 못하게 되었고, 고향에서 살아온 방식을 고수하면서 임시로 사는 그런 고장이었다.
전쟁의 흔적과 각종 군사시설은 이 지역 발전을 저해하는 동시에 이 지역의 시간을 그대로 멈추게 하였으며,
< 잼버리장 표시 >
<잼버리 기념비 >
그들에게 아픔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부터 그들과 같은 세대들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의 현실을 느끼게 된다.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인구를 끌어들일 만한 산업이 없는 이곳에서 1991년 세계 잼버리대회가 개최되고 많은 지역이 군사보호지역에서 해제되면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 잼버리 대회장(고성군지)>
<간성읍 >
미래
< 남북연결도로 공사(통일전망대앞) >
고성에 통일전망대가 생기면서 일반인이 북한지역을 가장 쉽게 가까이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여러번 들릴 때마다 남북의 긴장감을 느끼게 되고, 북한의 해금강일대와 앞쪽의 남북의 군사시설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안타까움과 무기력 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한 통일전망대일대는 그런 감정보다 엄청난 변화 속에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 동해선남북출입사무소(통일전망대) >
휴전선을 관통해서 도로와 기차길이 연결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곳이 남북의 대립점이 아닌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지역개발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통일전망대 일대의 이런 변화가 바로 고성의 미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많은 규제와 통제 속에서 소외되고 방치되었던 이곳에도 민족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희망이 보이고,
그 중심에 선 고성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근에 금강산과 설악산 같은 아름다운 산과 장쾌한 푸른 바다를 가지고, 지난날 민족 비극의 흔적을 뒤로한 채 희망을 향해 달려가는 고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지리적으로 가 볼만한 곳
고성으로 가기
고성은 동쪽 끝 태백산맥에 가려진 멀고 외진 곳이다.
이곳에 가는 길도 외딴 마을에 들어갈 때 느끼듯이 오직 하나뿐이다.
따라서 어떤 길을 통해서 들어가느냐 보다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가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전국 어디에서나 결국은 외길인 7번 국도를 이용해야한다.
7번 국도를 따라 동해안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하면서 올라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고,
수도권에서 오려면 인제를 통해 46번 도로를 따라 진부령을 넘거나 56번 도로를 따라 미시령을 넘으면 되고 다른 지역에서도 한계령, 대관령을 넘게되지만
결국은 7번 국도를 만나 고성으로 향하게 된다. 필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떤 방법을 통해서 들어오느냐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자동차보다는 도보나 자전거를 권하고 싶다. 필자는 91년 동해안 일주 자전거 여행의 끝지점으로, 97년 휴전선 일주 자전거 여행의 출발점으로 이곳 고성을 자전거로 방문한 적이 있다.
도보여행이 가장 좋지만 너무 느리고 적당한 속도감과 페달을 직접 밟아야 하는 정직한 자전가야 말로 고성여행에 가장 좋은 수단이다.
비록 통일안보공원을 지나 명파리 끝의 민통선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자전거로 갈 수는 아쉬움은 있지만 원하는 것을 모두 해볼 수 없다는 것에서도 고성군의 지역성을 확인할 수 있어 의미 있다고 생각된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고성의 푸른 바닷가 길을 자전거로 달려보자.
<대대삼거리 >
< 대대삼거리 >
< 거진버스터미널>
최북단! 끝에서 출발로
고성은 휴전선에 접한 많은 지역이 그렇듯이 남한의 최북단 지역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곳보다 최북단이란 느낌이 절실한 것은 지리적인 위치뿐만이 아니라 타지역과의 단절성에서 오는 관계적인 느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하면 시작과 끝에 많은 의미를 두는데 이곳 고성은 끝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을 역으로 돌리면 시작이 되니 참으로 의미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최북단 시외버스정류장(대진) >
-명파리 마을
< 명파리>
< 명파리 입구 >
<명파리 입구 >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는 동해안 최북단 마을로 서쪽으로 민간이 비거주지역인 수동면이 북쪽으로는 민통선이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막혀있는 절해 고도의 마을이다.
마을 서쪽의 산은 온갖 지뢰로 덮여있는 산이고 북쪽에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절박감은 이 마을을 더욱더 고립되게 하였다.
동해의 맑은 물과 백사장을 낀 경관 때문에 명파(明波)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으며 광산천과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명파천이 바다로 흘러가 토양이 비옥하고 각종 어족이 풍부한 곳이다.
서쪽의 갈전마을 주변에는 일제부터 금과 은이 많이 산출되었고, 지금은 폐광되었지만 한때 전국에서 순도 2위를 자랑하던 은을 채굴했던 광산이 있었다.
1994년 10월 민통선이 배봉리에서 현재의 명파리 북쪽으로 북상되면서, 민통선 밖으로 마을이 나오게 되어 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곳은 지난 태풍이 영향인지 여름이면 낚시꾼들로 붐비던 명파천 주변은 하천 공사로 어수선했고 아담한 풍경의
최북단 학교인 명파초등학교도 올해 새로 건물을 신축해서 예스러움은 사라져 이곳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는 좋겠지만 옛것에 대한 집착이 강한 필자로서는 아쉬웠다.
1995년 국토 최남단 마라도의 마라분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것도 의미 있어 보이고,
26명의 전교생이 최북단학교의 의미를 지켜 가는 모습이 한없이 고맙다.
최북단 해수욕장으로 피서지의 분위기가 색다른 명파해수욕장도 무거운 철조망과 함께 특유의 적막감을 보여주었다.
배봉리에서 쑥고개를 내려오면 왼쪽으로 보이는 철도의 흔적은 6ㆍ25전에는 원산까지 이어졌던 동해북부선 철도의 일부분으로 이곳으로 주민의 대부분이 이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다.
마을을 지나가면 도로를 따라 많은 식당들이 들어서 있는데 간판의 이름에서 북한을 떠올리는 금강산ㆍ평양ㆍ해금강ㆍ함흥 등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어 이곳이 북한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7월이면 일반감자와 감자 속이 자주 빛으로 껍데기를 깍아내고 썰어서 사과와 함께 갈아먹으면 성인병에 좋다는 자주감자를 파는 길가의 주민들의 모습이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여행객을 맞이한다.
<최북단 가계(명파리) >
<명파리 음식점 간판 >
<명파초등학교 >
<명파해수욕장 >
- 백두대간의 끝
< 백두대간종주등반기념비 >
<종주완주표식 >
"태백산맥, 소백산맥, 차령산맥...."지금까지 우리가 흔하게 쓰던 산맥의 이름들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용하던 이 산맥의 이름과 위치를 지도를 통해서 확인해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차령산맥의 경우 남한강이 산맥을 관통해서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다시말 하면 산맥을 하천이 관통한다는 뜻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지리적 개념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령산맥을 이와 같이 지도상에 그려놓은 것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분지로(小藤文次朗)로,
1900년과 1902년에 두 번의 우리나라 지질조사를 통해 지질구조선 즉 땅속의 맥 줄기를 기본으로 우리나라의 산맥을 그려놓은 것을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해왔다.
결국 산맥이라는 개념을 땅위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땅속의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했으니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문제는 당시 고토분지로가 이러한 산맥의 개념을 만들었을 때 이미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눈에 보이고 우리의 생활개념에 맞는 산맥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해방이후에도 지금까지 우리의 개념에 맞는 것을 잃어버리고 일본의 자원수탈용으로 만들어진 산맥의 개념을 계속 사용해왔다는 것에 있다.
1980년 우리나라의 산맥체계를 전통적인 지리인식으로 작성한 조선 영조때 실학자였던 여암 신경준의 <산경표>가 알려지면서 비로소 우리의 생활 개념에 맞는 산맥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이미 10세기 초에 도선의 <옥룡기>에서도 등장하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인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도 이러한 산맥의 체계가 그려져 있었다.
산경표에 나오는 우리의 전통적인 산맥의 개념은 지질구조가 아닌 실제 지표에서 나타나는 산줄기의 흐름을 하천을 중심으로 살펴보아 하천의 원류가 되는 분수계(分水界) 체계로 인식하였다.
즉 우리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많은 강과 하천을 먼저 생각하고 그 하천의 근원이 되는 산을 파악한 방식으로, 이것은 산줄기의 이름이 강이름과 연관시켜 지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산경표에는 1개의 대간(大幹), 1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구분해놓았는데, 가장 기둥이 되고 규모가 크며 끊어짐이 없는 산맥을 간(幹)으로 이름 붙이고 다음단계의 산맥을 정맥으로 다시 정맥에서 뻗어 나가는 소규모의 산맥을 기맥(岐脈)으로 기록하였다.
이 체계적인 산맥표현의 가장 근원이 되는 산맥이 바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이다.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마천령-함경-태백-소백산맥을 거쳐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1,400㎞에 이르는 긴 산줄기로 북한의 큰산과 남한의 설악산ㆍ태백산ㆍ속리산ㆍ덕유산ㆍ지리산을 포함하며, 남한에는 6개 도와 32개의 시ㆍ군에 걸쳐있는 지형적으로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산맥이다.
이중 우리가 답사가 가능한 구간은 지리산의 서 고성의 진부령까지 약 650㎞으로 방법과 체력에 따라 다르지만 연속으로는 60~90일정도, 구간으로 나누어서는 길게는 2년 혹은 평생의 시간을 가지고 종주하게 된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의 종주는 결국은 고성의 진부령 혹은 향로봉에서 끝을 맺게 되고 더 이상 백두산으로 향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그래도 이곳까지 해냈다는 만족감에 종주를 마치게 된다.
이곳 고성의 진부령이 대부분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종점이 되며 일부는 민간인 통제지역인 향로봉까지도 가보기도 한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남에서 북으로 향하며 이것은 분단된 조국의 남쪽에 살고있는 우리로서는 당연한 여정이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에 방문한 진부령에서 알프스스키장이 있는 밖흘리 마을로 향하는 언덕의 백두대간의 능선이 보이는 길옆에 한전기공의 산악회에서 만든 백두대간 종주 기념비와
'가자 백두대간으로'라는 각 등산회의ㅡ표식을 붙일 수 있는 구조물위에 몇 개의 종주를 마친 산악회의 표식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어둠 속의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는 백두대간의 의미가 아직 덜 알려진 91년에 이곳 진부령부터 지리산까지 자전거를 이용해서 비록 백두대간의 능선 길은 아니지만 최인접 도로를 이용해서 자전고로 종주한적이있다.
이는 이곳 고성의 진부령이 백두대간의 끝이 아닌 백두대간의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여행으로 앞으로 이곳에서 종주를 마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곳에서 북쪽의 백두산을 향해 백두대간의 종주를 시작할 날을 기다려 본다.
안보의 전시장 남북분단의 현장
-6ㆍ25 전쟁중의 주요 전투
6ㆍ25전쟁 이전에 북한 치하에 있던 고성지역은 개전 초기에는 전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전쟁의 후반기에 들어와 남북이 모두 점령지역의 확대를 위한 고지확보의 전쟁에서 주요한 전투의 장이 된다.
고성지역의 대표적인 전투로는 향로봉 전투, 건봉산 전투, 월비산 전투 등이 있다.
향로봉 전투는 전쟁이 교착상태로 들어간 1951년 3월에서 6월까지 고성군과 인제군이 인접한 향로봉(옛이름 마기라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한국군 수도사단과 제11사단이 향로봉 북쪽의 주요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북한군 제13사산과 제45사단을 격퇴하고 남강 선으로 진출한 공격전투이다.
< 자유의 탑(거진) >
건봉산 전투는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가 있는 산으로 1951년 4월 20일부터 휴전직전까지 한국군 5ㆍ8ㆍ9사단과 미 제10군단과 북한군 5개 사단이 2년에 걸쳐 공방전을 벌인 전투다.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뀌기를 20여 차례 거듭하였던 치열한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의 승리로 거진 지역을 수복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월비산 전투는 고성 서남쪽에 위치한 월비산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월비산은 동북쪽으로 고성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남쪽으로 7번 국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전상의 요충지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한국군은 전 전선의 최북단(서부전선보다 80Km 북쪽)에 위치한 월비산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북한군은 남강 북쪽으로 물러서게 되어 현재의 고성지방을 있게 한 전투이다.
이와 같은 치열한 전투와 전쟁에서 희생된 많은 장병들이 피에 의해 현재의 고성은 존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성지방을 답사하면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성지역에는 이런 전쟁의 상처와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지금의 분단의 모습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안보의 전시장이다.
<충혼비(송죽리)>
<도로낙석(초도리)>
-합축교
고성군청이 있는 간성읍과 거진읍의 경계를 흘러가는 북천은 진부령 부근의 칠절봉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진부리와 장신리, 광신리를 거쳐 간성읍의 북쪽을 지난 동해로 흘러가는 26㎞의 하천이다.
이 하천을 건너는 다리 중에 가장 하류 쪽이 있는 다리가 합축교(合築橋)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원도 철원의 ㆍ승일교ㆍ와 마찬가지로 남북이 같이 만들어 합축교라 불려진다.
다만 말 그대로 남북이 동시에 함께 만들었다면 좋으련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부분을 만들어 완성한 다리로 어찌 보면 남북의 화합보다는 남북분단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폭6m, 길이 214m, 높이 5m로, 6ㆍ25전쟁 전에 북한지역이었던 이곳에 1948년 북한이 남쪽에 9개의 교각을 만들다가 전쟁으로 중단하고,
그 후 전쟁이 끝나 수복이 된 후에 남한에서 나머지 북쪽의 8개의 교각을 1959년에 국군 공병부대가 착공해서 1960년에 개통했다.
총 17개의 교각을 남북이 합작으로 만들어 12년 만에 완공한 의미 있는 다리이다.
< 합축교>
< 합축교 >
북한에서 만든 부분은 받침대를 시멘트로 하고 난간은 철파이프를 사용하지 않아 조잡하고 우리가 한 부분은 교각은 쇠로 받침대를 하고 난간을 철로 만들어 견고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보면 현재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며, 과거 냉전시대에 사고라고 생각되어 큰 의미는 없다.
다리의 원래 이름은 북천교(北川橋)였지만 남북이 합쳐야 한다는 뜻에서 합축교라고 불렀다고 하며, 최근 교통량의 증가로 4차선 도로가 확장되어 1988년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었는데 다리에는 합천교라는 이름대신 북천교라고 쓰여져있고 지도에도 북천교로 표기가 되어있다.
<신 북천교>
<신 북천교>
-민통선
< 건봉사 입구 민통선 >
민통선(民統線) 민간인통제지역을 구분하는 선으로 군 작전 및 군사시설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선이다.
보통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의 범위로 민통선에서 남방한계선까지를 민간인통제구역 혹은 민통선북방구역이라고 부른다.
38선 이북지역 중 휴전선 이남지역을 수복지역이라고 하는데 고성군은 전역이 수복지역이고,
수복지역 중 1954년 미육군 제8군단 사령관의 직권으로 귀농선(歸農線)을 만들어 이 선의 이북지역은 민간인의 출입을 제한한다.
1958년에 이르러 휴전선이 장기적인 선으로 고착되는 것으로 판단되자 귀농선(민간인통제선)의 북방에서의 영농을 제한적으로 허가하게 되면서 민통선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1989년에는 민통선을 북상시켜 많은 지역을 해제함으로써 고성지역에서는 건봉사와 명파리의 출입이 자유로와 진다. 고성군은 민통선 북방지역의 농지면적이 적어 수복된 5개 군중 수복으로 확보한 농지면적이 3위에 속하는데,
민통선 내의 경지는 토지에 대한 근거서류가 미비한 경우가 많아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예상되지만, 고성은 90%의 영농가가 소유자로 되어있어 분쟁은 적은 편이다.
현재 고성지역을 여행하다 일반적으로 만나게 되는 민통선은 진부령에서 향로봉 방향과 건봉사에서 냉천리와 송강리 방향, 명파리 북단에서 만나게 된다.
이 지역의 발전을 저해하는 면과 국가안보라는 차원의 양면성을 가진 민통선은 빠른 시일에 통일이 되어 생태계의 보고를 보존하는 국립공원 선으로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민통선입구(명파리)>
<민통선출구(명파리)>
-어로 한계선
고성에는 민통선 외에 수산업과 관련돼 또하나의 민통선인 어로한계선이 있다.
북한과의 대치 속에 있는 서해와 동해의 어민들에게는 바다의 민통선으로 서해에서는 북한과의
꽃게잡이 등에서 분쟁의 가능성이 있고 동해에서는 주민들의 중요한 어족자원인 명태잡이에서 역시 위험성을 안고있는 선이다.
어로한계선은 우리 어선들이 고기잡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불법으로 북한해역을 왕래하거나 북한이 의도적으로 이들을 납북해 가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1964년에 어로저지선이라 하여 북위38°35′45″에 처음 설정하였다.
1967년 동해에서 해군56함정이 어민들을 보호하다 북한의 공격에 의해 격침되자 1마일 남하하여 38°34′45″로 다시 정하게 된다. 고1968년에는 다시 5마일 남하하여 38°30′으로 변경하고 이 선에서 38°15′해역을 특정해역으로 하여 이곳에서의 어업은 지도를 받아 선단을 편성해서 어업활동을 하게 한다.
그 후 다시 북상하여 1989년 북위38°33′으로 확정하여 현재에 이르며 명태성어기인 10월1일~3월31일에는 북위 38°34′까지 북상하여 조업이 가능하고,
저진리 앞바다의 황금어장인 저도 부근은 4월1일~9월30일까지 일정구간에서 조업이 허용된다. 는
이처럼 복잡한 선들이 고성앞바다에 그어져 있으며 바닷물 수온의 상승으로 한류성 어족인 명태 등의 어획량이 줄면서 좀더 북쪽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려는 어민과 이를 막고 어민을 보호하려는 경찰과 군 당국간의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다.
구 어로한계선인 38°30′은 대진항의 등대를 중심으로 연결한 선이며 지금의 어로한계선은 명파리를 지나 민통선을 넘어 사람이 살지 않는 저진리 앞바다를 지나는데, 명파리 마을에서 보면 멀리 북쪽 산정상의 철탑 위에 붉은 색의 등모양의 표시가 보이는 것이 어로한계선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56함추몰비 >
< 대진항 등대>
-통일전망대
고성을 대표하는 장소를 꼽으라면 단연 통일전망대일 것이다.
198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동해안 지역에 비로봉과 해금강을 바라 볼 수 있고 아울러 반공교육에 도움이 될 수있는 시설을 간성 북방에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지시하여 시작된 통일전망대 조성공사는 83년 7월에 착공, 84년 2월 9일에 완공되어 공개된 안보관광지이다.
해발 70m의 고지 위에 위치한 이곳은 원래 우리 군의 시설이 위치했던 곳으로 휴전선과 남방한계선이 만나는 북위38°35′에 위치한다.
1층 북한의 생활용품과 안보관련 전시관을 둘러보고 2층이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가까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신선대, 옥녀봉, 채하봉, 일출봉, 집선봉 등 금강산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곳을 방문했을 때 눈에 띄는 것은 이런 경치가 앞에 휴전선이란 특수성에 의해 아무런 인공적인 구조물 없이 탁트여 보여
시간이 멈추어버린 동해안의 옛모습을 볼 수 있어 필자는 이곳 방문에 또 다른 의미를 둔다.
멀리 보이는 해안의 해금강의 기암절벽인 시스택과 사빈과 사구 그리고 내륙의 산들과 석호가 어우러진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모습에서 기쁨을 느끼지만,
눈을 조금 내려 밑의 철책선과 그 연결선상의 산 능선에 우리 군과 북한군의 시설물과 철책, 그리고 군인들의 모습을 볼 때면 다시 한번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게 되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주변에 산재해있는 각종 군(軍)과 종교적인 조형물에서 이곳이 인위적이고 조화를 이루지 못한 지역임을 알 수 있고,
마냥 촌스러워보이는 그 조형물들이 우리의 현실이니 안타깝다.
그래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남북을 연결하는 각종 도로와 철도공사를 비롯해서 주차장 옆의 동해선남북출입사무소에서 다시 한번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어 돌아오는 길은 여유로와 지는 마음이었다.
이곳에 들어가려면 10㎞남쪽에 위치한 통일안보공원에 들려 출입수속을 해야한다.
<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통일안보공원) >
< 출입증>
< 호림유격전비(통일안보공원) >
< 통일전망대>
소정의 주차료와 어른 2,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신청서에 인적사항과 차량번호를 기입하면 30분 간격으로 통일전망대로 향하는 민통선을 지날수있게된다.
출발 전에 8분 정도의 안보교육을 위한 영상을 상영하는데 시대의 흐름을 너무 뒤지는 것 같아 아쉽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무관심하게 영상물을 보는데 얼마나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다.
오히려 통일전망대 일대의 경관에 대한 입체적인 화면이나 역사, 지리적인 내용의 소개가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시설을 만드는데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므로 주차비와 입장료 징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검토해야할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안보공원이나 통일전망대와 같은 안보관광지에 걸맞은 전시물의 개선과 촬영하기 좋은 자리를 선점하고 다른 사람의 촬영을 막는 그런 상행위도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떻든 이런 시설물이 필요 없는 시간이 점점 다가 오는 것처럼 느껴져 그나마 다행이다.
< 북한전시관(통일전망대) >
< 휴전선(통일전망대주변)>
<통일전망대에서 본 북쪽해안>
<통일전망대에서 본 남쪽해안 >
고성의 교통
고성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진부령과 미시령이란 커다란 고개를 넘어야 하고 길도 국도 7호선이 유일한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고성에도 6ㆍ25전쟁 전에는 철도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만 곳곳에 남아있다.
-고성으로 향하는 길목 고개들
<진부령 동물이동통로>
<진부령밑 고가낙석>
<진부령 정상>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으로 가는 고개는 얼른 생각해보면 대관령, 한계령, 미시령, 진부령이 대표적으로 생각난다.
이들 고개 중에서 가장 낮고 오르기 쉬운 고개는 진부령(陳富嶺)이다.
자전거를 이용해서 넘어보면 진부령은 다른 고개들 보다 넘기가 쉬워 몇 구비 돌다보면 해발 520m의 고개 정상에 도착한다.
고성에서 오를 때면 그높은 산은 어떻게 넘어갈까 걱정이 되지만 보이는 산보다 낮은 곳에 고개가 있어 어찌 보면 싱겁기도 하고,
다른 고개와 달리 고개 위에 마을이 있어 황량하지 않아 좋다.
고개 위 마을은 흘3리가 되는데 이일대의 흘리마을은 항상 날씨가 흐려 흘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하며,
고개 위의 흘3리와 좀더 올라가 알프스스키장이 있는 흘1리, 그리고 스키장 왼쪽의 흘리분교앞으로 들어가면 흘2리가 있다.
고개 위의 마을 흘3리는'조쟁이 마을'이라고도 하는데 조(朝)는 아침을 뜻하고 쟁이(商)는 장사를 뜻하는 말로서,
옛날 물물교환이 성하던 시절에 영동과 영서지방의 중간인 이곳에서 동해의 해산물과 영서의 임산물이 서로 교환되었고,
그 장(場)은 주로 아침에 서서 조장이라 불리면서 조쟁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고개 정상에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들이 항상 마지막 사진촬영지로 이용되는 '진부령' 표석이 세워져있고
그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1957년에 세운 우리 군이 중공군을 물리치고 향로봉과 설악산을 점령한 전적지임을 알려주는 '향로봉지구전적기념비'가 서있다.
왼쪽에 작은 몸체로 '설화희생순국충혼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56년 2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영동지방일대에 폭설이 내렸을 때 이곳 향로봉에서 근무하던 우리 군인들이 희생을 당하였고 이를 위로하기 위해 세운 비다.
이 고장이 예로부터 '통고지설(通高之雪)'이라 하여 통천과 고성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지역성을 간접적으로 표시해주는 상징물이다.
진부령 표석 옆에는 옛 흘리 출장소를 개조해서 문을연 진부령 문화스튜디오가 있으며, 이곳에 화가 이중섭의 상설 전시실과 각종 전시회, 그리고 도예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문이 닫혀있었지만 이 지역의 문화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공간으로서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게 큰 고개 위에 미술관이 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황태요리로 유명한 부흥식당과 고개 넘어 인제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겨울철에는 황태덕장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길 북쪽에 어김없이 자리잡은 군부대의 모습도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이 고개를 지나가는 46번 도로는 고성에서 출발하여 경춘 국도를 경유해서 인천까지 연결되며,
1981년 간성읍 장신2리에서 정상까지 2차선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1984년에 완공되었다.
진부령 고개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흘1ㆍ2가 나오는데 이곳은 진부령 스키장이라는 알프스리조트가 있다.
지금은 수도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많은 스키장이 생겨 스키인의 발길이 줄어들었지만 한때는 최고의 설질(雪質)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스키장이었다.
1984년 북설악 개발주식회사가 창립되면서 스키장이 개설되어 1991년 휴양콘도 미니엄과 한국스키박물관이 들어서고 주변의 관광지와 연계되어 4계절 관광지로 각광받았다. 또한 이 지역은 지반의 융기에 의한 고위평탄면 지형으로 고랭지의 기후와 넓은 평탄지를 이용하여 각종 채소를 재배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곳이다.
<진부령 표석>
<향로봉지구 전적비 >
<설화희생추모비 >
<진부령 흘1리마을 >
<진부령 흘1리마을>
<흘리분교 >
< 알프스 스키장>
<알프스 스키장 >
고성으로 향하는 또 하나의 고개는 미시령(彌矢領)이다.
<신증동국여시승람>에는 미시파령(彌矢坡嶺)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간성의 서남쪽 80리 쯤에 있으며 길이 있었으나 예전에는 폐지하고 다니지 않았는데 성종 24년에 양양부(襄陽府) 소동라령이 험하고 좁다하여 다시 이 길을 열었다"라고 쓰여 있다.
당시 한양에서 관동지방으로 향하는 길은 원주에서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가는 길과 인제에서 설악산을 넘어 양양으로 향하는 길이 대표적인데
양양으로 향하는 소동라령을 버리고 미시령으로 길을 바꾼 것이 약 500년 전의 일이었다.
미파시령이란 의미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가파른 고개라는 뜻으로 해방후 1950년경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으나 6ㆍ25전쟁후
폐쇄되어 방치했다가 1991년 토성면 신평들에서 세계잼버리대회 개최와 설악산 관광객의 증가에 따라 1989년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설악산 울산바위 >
< 금강산 화암사 >
옛사람들은 미시령을 경계로 금강산과 설악산을 나누었다고 하는데, 미시령을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암절벽은 설악산의 울산바위이며,
왼쪽에 위치한 수바위가 인상적인 신평리의 화암사는 '금강산 화암사'로 불린다.
최근 레져인구와 설악권 관광객의 급증으로 4차선 확장공사 및 터널공사가 2001년에 시작되어 2006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 완공되면 설악산은 물론 고성지방의 접근도 훨씬 쉽고 빨라지며 겨울철에 이 지역 방문에 가장큰 어려움이었던 눈에 대한 대비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고성 답사에서는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미시령이었고, 미시령 휴게소 앞에서 보이던 멀리 속초시내의 야경이 인상적이었다. 고개 남쪽에 길옆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쓴 '미시령'이란 표석만이 어둠 속에 오가는 차량들의 불빛에 숨죽이고 있었다.
<화암사와 속초앞바다 >
<미시령 표석 >
< 미시령 정상>
< 미시령정상에서의 속초야경>
-동해북부선
< 광포호 입구이 동해북부선 흔적 >
< 동해북부선 기차역자리(토성) >
일제시대 관북지방의 지하자원을 운송할 목적으로 1937년 12월에 개통된 동해북부선은 양양-속초-고성-외금강-통천-안변-원산을 연결하는 철도였다.
원래 일본은 관북지방과 강원지방의 지하자원 수송을 위해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연결한 후,
동해남부선을 따라 부산까지 연결되는 철도망을 갖추기 위하여 노반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해방으로 양양이 남북으로 나누어지면서 동해북부선 열차의 연결도 어려워지게 되었고 6ㆍ25전쟁 중에도 운행되었던 열차도 국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양양역에서 새벽5시, 10시 오후 4시, 9시 등 하루 4차례 운행했던 열차는 1950년 폐쇄될 때까지 14년 동안이 지역의 지역성을 반영하듯 일본군,
소련군, 북한군이 이용한 후 국군에 의해 파괴되어 그 흔적을 7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보면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남북한의 철도연결 합의로 통일전망대 바로 아래에 있는 터널의 보수 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한층 더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데, 보도에 의하면 2006년 강릉-고성이 연결되고 2010년까지 동해중부선인 포항-삼척이 연결될 예정이라고 한다.
계획대로 완공되면 동해안의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시원스럽게 북을 향해 달리는 열차를 타볼수가 있으며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연결되는 물류망으로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구기차역앞(토성)>
<동해북부선 터널(통일전망대 밑)>
-7번 국도
7번 국도의 운명도 동해북부선 철도와 그 맥을 같이한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울산-경주-포항까지는 내륙을 통과하다가 포항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북으로 올라간다.
흔히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말을 하는데 7번 국도야말로 이 말이 적격인 도로라고 할 수 있다.
< 7번국도(명파리) >
달리다가 좋은 포구가 있으면 들려서 싱싱한 횟감과 바다를 감상하고 다시 달리다 마음에 드는 산이 있으면 올라갈 수 있는 별다른 생각 없이 단순하게 연결된 도로가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동해를 따라 달리다 보면 동해북부선과 마찬가지로 통일전망대에서 남한의 구간을 멈추고 돌아서게 한다.
조금 달리면 해금강이고 계속 달리면 원산과 흥남 청진을 거쳐 우리나라에서 가장 북쪽인 함경북도 온성까지 가서 중국과 러시아를 볼 수 있는 길이다. 총연장 514㎞의 이 길을 계속 달려 중국과 러시아의 땅으로 자전거 여행을 꿈꿔본다.
석호(潟湖)의 고향 고성
< 광포호 >
< 천진호 >
시생대~중생대까지 비교적 평탄함을 유지하던 우리나라는 신생대에 접어들면서 동쪽이 융기하는 비대칭적 융기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우리나라의 등줄산맥인 함경ㆍ낭림ㆍ태백ㆍ소백산맥이 형성되게 되며 이후 몇 번의 빙하기를 거친 후 지금부터 1만5,000년 전쯤부터 빙하가 녹기 시작하여 해수면이 상승하다가 6000년쯤 지금의 해안선에 도달하게 된다.
동해안은 해수면이 상승되면서 해안에 침수지역이 생기고 그에 따라 작은 만(灣)들이 형성되게 된다.
이러한 만 앞으로 해안에 쌓였던 모래들이 조류를 따라 이동하면서 모래기둥을 만들어 만을 가로막으면서 사주(沙洲)가 되고 강물이 갇히면서 호수가 형성되는데 이것이 동해안에 산재해 있는 석호이다.
석호는 큰 하천의 하구에서는 하천을 통해서 운반된 퇴적물질의 양이 많아 석호 내에 쌓이면서 석호의 크기가 작아져 결국 충적지로 변해 사라지게 되어, 현재 동해안에 남아있는 것은 소규모 하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해나 남해에서는 하천을 통한 퇴적물의 운반이 많으므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동해안에 있는 호수 중에 상태가 양호하게 잘 보존된 석호로는 송지호와 화진포호를 들 수 있는 데 이모든 것이 고성이 위치하니 고성은 석호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호는 일반적으로 민물인 경우가 많은데 여름철의 우기때 호수의 수위가 올라가 좁은 수로를 통해서 바다로 물이 흘러가고 갈수기 때는 모래기둥의 확장으로 입구가 막혀 호수의 수위가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광포호천진호 이들 석호 중 가장 의미 있는 석호는 죽왕면에 위치한 송지호다. 호수둘레 약 4㎞로 보통 수심 4~5m를 유지하며 면적도 20만평이나 되는 송지호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있는 호수로 민물과 바닷물이 혼합된 곳에서 발견되는 재첩과 같은 어패류는 물론 도미와 전어 같은 바닷고기와 잉어 같은 민물고기가 같이 살고있는 곳이다.
7번 국도를 지나가다 보면 호수가 보이지만 공현진교에서 왕곡마을로 가는 길로 따라 들어가면
1988년 전통가옥보존지구로 지정된 왕곡마을과 함께 한적한 농로 길에서 호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석호의 운명을 생각하면 슬퍼지는데, 호수로 유입되는 퇴적물의 증가로 호수 주변은 수심이 낮아져 저습지로 변해 점점 작아지고,
일부지역은 인공적으로 매립화 작업을 통해 논으로 이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송지호로 들어가는 하천은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였으며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많은 재첩을 볼 수가 있었다.
본격적인 재첩의 채취는 여름철에 이루어지며, 현재는 호수의 보호를 위해 낚시는 금지하고 있다.
호수 앞으로는 폭100m의 백사장 길이 2㎞의 송지호 해수욕장이 있고, 해수욕장 왼쪽에는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섬인 죽도가 있어 황량함을 줄여준다
< 송지호 >
< 송지호 하구 >
<송지호 주변 저습지 >
<송지호 주변 저습지 >
<논으로 변한 구송지호>
< 논과 송지호>
<송지호로 유입하는 하천>
< 송지호의 재첩>
< 화진포호 >
< 화진포호 >
< 화진포호 >
또 하나의 호수인 화진포호는 남한의 석호로는 가장 큰 호수로 16㎞의 둘레에 72만평의 면적과 수심 14~15m의 호수로,
송지호와 마찬가지로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는 호수이다.
옛날 이 일대는 가평(加平)이라 불렸으며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열산호(烈山湖)라 불렸다고도 한다.
호수주위에는 울창한 자연 송림과 갈대가 무성하며 호수의 해안으로는 길이 1.5㎞에 수심 1~1.5m이 화진포해수욕장이 신라시대 해군기지였던
금구도와 함께 자리잡고 있어 단순한 동해안의 여행에 변화와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겨울철이면 염분이 있어 얼지 않는 호수에 많은 철새들이 날아들고 여름에는 민물이 있는 화진포호를 사이에 둔 백사장에 많은 피서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아름답고 시원스런 경치를 가진 이곳을 놓치지 않고 권력자들이 휴양지를 세웠는데, 6ㆍ25전쟁 이전에 북한의 영토였던 관계로 1948년부터 김일성과 가족들이 휴양했던 '김일성 별장'이 해수욕장의 남쪽 끝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필자가 방문할 때는 역사안보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이곳을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출입이 금지되있었다.
이곳은 1937년에 일본이 원산에 있던 외국인 휴양촌을 이곳으로 옮겨와 독일인 건축가 H.Weber에 의해 1398년에 '화진포의 성(城)'이라는 돌로된 건물을 세웠고
이것이 김일성의 가족이 이용하면서 지금까지 '김일성 별장'이라고 불리고 있는 곳이다.
6ㆍ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재건축하고 1999년부터 역사안보전시관으로 운영하다,
2004년 8월을 목표로 복원작업을 하고있는 것이다.
바로 앞 주차장의 군 휴양시설 옆에는 1920년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해방 후 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이용되다 전쟁 후 이기붕 의 처가 별장으로 사용했던 '이기붕 별장'이 있다.
해안의 해수욕장에서 호수를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작은 산 중턱 화진포와 주변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승만 별장'이 자리잡고 있는데,
1954년에 신축하여 1961년 폐허되어 철거된 것을 1999년 육군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을 전시해놓고 있다.
이처럼 권력자뿐만 아니라 선교사, 군인들의 휴양지로 이용되는 화진포호 주변은 고성지방의 자연경관을 대표하는 장소이다.
지리적인 관점에서는 규모가 작은 송지호가 석호를 관찰하기에는 더없이 좋아 보이지만 화진포도 다른 석호와 마찬가지로 규모가 축소되는 현상을 살펴볼 수가 있고, 넓은 호수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화진포호 유입하천 >
< 화진포호 하구>
<화진포 해양박물관 >
< 이승만 별장>
<이승만별장 내부 >
< 이기붕별장 내부>
<김일성별장 >
< 김일성별장 입구>
많은 해수욕장과 육계도
<천진해수욕장>
<삼포해수욕장>
<봉수대해수욕장> 동해안을 여행하다보면 당연한것럼 보이는 것이 해수욕장이다. 지형학에서 사빈(沙濱)이라고
하는 이 모래들은 대부분 하천을 통해서 산에서 운반되어 온 것으로, 고성에도 크고 작은 여러 해수욕장들이 즐비하다.
최북단의 황량한 명파해수욕장에서부터 남쪽의 하일라비치해수욕장 사이에
미치진ㆍ초도ㆍ화진포ㆍ거진ㆍ반암ㆍ가진ㆍ공현진ㆍ 송지호ㆍ봉수대ㆍ삼포ㆍ백도ㆍ교암ㆍ아야진ㆍ청간 해수욕장과 그 밖의 간이해수욕장이 여러 곳이 있다.
모두들 주변 경관과 잘 어울러지고 7번 국도에서 머지 않아 쉽게 접근이 가능하며 물이 맑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금강산 콘도가 있는 현내면 마차진리의 무송대(茂松臺)는 <동국여지승람>에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으니 전에는 송도(松島)라고 하였으며 송림이 무성하고
모랫길(沙路)로 육지와 이어지고 바닷물이 불으면 섬에 들어갈 수 없으며 파도가 치면 모래가 스치는 소리가 난다(沙鳴). 무송부원군 윤자운이 관동지방을 순시할 때 이 섬에서 머물러 갔다고 하여 무송대라고 이름하였다."로 적혀있다.
이 섬은 지형학적으로 육계도(陸繫島)인데, 육계도는 동해안에서 주로 분포하며,
해안의 모래가 조류에 의해서 육지에서 떨어져있는 섬과 연결되어 육지화 된 섬을 말한다.
모래가 파도와 연안의 조류에 의해 운반되다가 바다 쪽으로 쌓여 만들어지는 모래 둑을 사취(砂嘴)라고 하며
사취가 육지에서 뻗어나가 해안 가까이에 있는 섬에 연결되면 육계사주라 하고 그 섬을 육계도라 하는 것이다.
해안에 인접한 섬은 파도를 막아 모래를 잘 집적시켜 섬 뒤에 삼각형의 사취를 발달시키는데 이러한 모습을 이곳에서는 잘 살펴 볼 수가 있다.
<송지호해수욕장>
<공현진해수욕장>
<화진포해수욕장>
<무송대와 육계도>
고성의 취락
우리나라의 취락은 오랜 역사를 가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장소에 불규척으로 배열되어 형성된다.
바다와 인접하여 생활하고있는 이 지역 사람들은 해안에서 멀지 않은 구릉지대에 취락을 형성하여 살기 시작했으며,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면서 중앙에서 떨어진 변방에 위치하여 방어적인 개념의 성곽취락과 곳곳에 봉수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간성읍과 같은 행정 중심의 취락과 일부 구릉지역에 동족부락이 발달하는데 왕곡마을이 있는 오봉리가 대표적이다.
동해북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에 취락이 더욱 발달하여 고성과 간성은 이 지방의 행정ㆍ교통ㆍ경제활동의 중심지가 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근대적인 어업이 발달하게되자 항구 조건이 좋은 거진ㆍ 대진ㆍ아야진 등과 같은 곳이 중요어항으로 성장하고 6ㆍ25전쟁으로 수동면과 같이 비거주지역이 생기거나
거진읍의 '쌔비촌'과 같은 이주마을이 생기기도 한다. 최근에는 여가와 관광문화의 확산으로 7번 국도 주변의 교통과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중심으로 토성면 원암리와 같은 대규모의 숙박 및 관광취락이 생기기도 한다.
일부지역에서는 흘리와 같은 고개 위의 영(嶺)취락과 건봉사 입구의 해상리와 같은 사하촌(寺下村)의 흔적이 있으나 지금은 많이 변화되었다.
-중간적 형태의 가옥구조
취락에서 가옥을 지을 때는 그 지역의 기후와 지형에 가장 잘 맞게 만들어 생활하게 되는데 고성지방에서도 그런 특성을 잘 볼 수 있다.
고성은 우리나라의 가옥구조의 구분상 중부형 가옥구조에 겹집구조가 나타난다.
중부형 가옥구조는 북부형과 남부형 중간으로 추위와 더위에 대비한 구조물이 같이 나타나는 형태로 멸악산맥과 차령산맥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겨울철이 북쪽지방에 비해서 덜 추운 지방이지만 백두대간의 큰 산이 인접하고 눈이 많이 내려 겹집구조와 마당 위에 기단을 높이고 집을 만들며, 여름철에는 더위가 심해 대청과 외부에 툇마루를 배치하였는데, 이런 특별한 가옥구조를 쉽게 일부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다.
6ㆍ25전쟁으로 많은 가옥이 파괴되었지만 죽왕면의 삼포리와 오봉리에 전통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가옥들이 일부 남아있다.
삼포리의 어명기 전통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7번 국도에서 마을까지 가는 길에 안내판이 곳곳에 잘 설치되어있다.
한식기와를 사용하고 댓돌을 자연석인 화강암을 다듬어 사용한 것과 □자형의 가옥구조에서 부유층가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약400년 전에 건축된 것이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었고, 영조 26년(1750년)에 어태준(魚泰俊)이 같은 장소에 옛모습대로 3년에 걸쳐 복원한 가옥이다.
현주인 어명기의 2대 조부인 어명주가 1860년대에 농토 3000평으로 구입하여 대대로 가옥만은 팔지 말라는 유언이 있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46년 북한치하때는 지주가옥으로 몰수되어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6ㆍ25전쟁 당시에는 한국군 1군단 사단사령부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던 건물이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잡고 ㄱ자형의 몸체에 겹집구조(田자형 구조)로 일명 '양통집'이라고도 하는데,
이 가옥처럼 정주간(부엌과 방 사이에 문이 없는 주거공간으로 쉽게 표현하면 부뚜막의 연장으로 보면 됨)이 없는 양통집은 강원도, 영동지방, 소백산맥의 산간지대에서 볼 수 있으며
정주간이 있은 양통집은 더추운 함경도지방에서 볼 수 있다.
이 가옥은 외양간을 부엌 앞으로 돌출 시킨 것이 특이한데 옛날 사람들의 삶에서 재산1호였던 소를 관리하기 편리한 면은 있지만 위생상의 문제점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추운 산악지방에서 볼 수 있는 구조로서 추위를 견디면서 생활하기 편리한 면이 있어 고성의 오봉리를 중심으로 한 다른 지역의 가옥에서도 볼 수 있는 구조다.
이것은 이 지역이 추위가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집을 지을 장소가 협소해서 겹집의 형태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집의 내부에는 넓은 마루가 부엌과 연결되어있어 여름에는 시원함을 주는 이중적인 구조도 보인다.
이번의 방문에서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집 내부가 모두 잠겨있어 자세히 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함종 어(魚)씨의 집성촌으로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을 감안해 장대석 위에 높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집을 세워 팔작형의 지붕과 어우러져 키가 훤칠하고 시원해 보이는 가옥이다.
현재는 뒤쪽으로 문이 나있지만 옛날에는 앞쪽으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1996년 산불로 소실된 방앗간에 있는 디딜방아를 보면 이 집의 깊은 내력을 느낄 수 있다.
어명기 가옥주변에는 현대식의 가옥 옆에 보존상태는 덜 양호하지만 비슷한 형태의 가옥에 사 람들이 직접 거주하고 있어 좋은 학습자료를 제공해준다.
< 전경(어명기 가옥) >
< 사랑채(어명기 가옥) >
< 사랑채 돌담(어명기 가옥) >
< 가옥측면(어명기 가옥) >
< 마당위 기단(어명기 가옥>
<아궁이(어명기 가옥) >
<방아간(어명기 가옥) >
<가옥 길안내표석 >
< 다른 가옥(삼포리)>
< 마을의 다른가옥(삼포리)>
-왕곡전통마을
< 왕곡마을 동학사 기념비 >
송지호 해변에서 불과 1.3㎞정도 떨어진 곳에 해안지방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깊은 산골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7번 국도에서 안내판을 따라 좁은 길로 접어들어 작은 언덕을 넘으면 마을입구의
안내 간판과 1889년 천도교 교조인 최시형이 이 마을에 숨어서 동학을 전파한 것을 기념한
'동학사적기념비'사이로 기와지붕이 숲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의 마을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금성(錦城)ㆍ적동(笛洞)ㆍ왕곡(旺谷)마을로 불려오다가 일제시대에 모두 합쳐져 오봉리로 되었다.
마을 뒤쪽으로는 오음산(五音山)이 있는데 산 정상에서 주변 5개 마을의 닭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오봉1리를 왕곡마을이라고 하며, 풍수리지적으로 인근의 송지호와 함께 작은 5개의 산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분지로 외부와 차단되어 안전하다는 곳으로, 임진왜란과 6ㆍ25전쟁 속에서도 잘 보전이 되었고 이 일대를 휩쓴 1996년의 대형 산불 때에도 아침에 불이 이 지역을 통과했고 바람의 방향이 마을에서 산 쪽으로 불어주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가옥은 남향으로 자리를 잡았고 마을의 안 길과 연결되는 담을 넘어 앞마당은 개방적이지만 뒷마당은 밖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어있고 나무를 심어놓아 여름에도 시원함을 줄 수 있는 배치를 하였다.
특히 굴뚝의 모양이 특이해서, 돌과 진흙을 섞어 쌓거나 기와를 기하학적으로 쌓아올린 위에 항아리를 얹어 놓았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수수한 아름다움이 이 마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강릉 함씨의 동족부락으로 어기명 가옥에서 볼 수 있었던 겹집의 구조와 부엌과 외양간이 연결된 구조의 50~100년 된 가옥들 50여채가 모여있는
이곳은, 1988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전통가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가옥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고 마을 안 길을 정비하느라고 어수선하였다.
전국의 다른 전통마을이 그렇듯이 너무 인위적인 정비보다는 긴 안목과 시간을 가지고 옛 것으로 동화되어 가는 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재산권 행사의 불편함을 해소하면서 좀더 미래지향적인 주민들의 의식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근의 송지호와 연결된 자연과 전통이 조화된 관광지로서 전국의 어떤 곳보다 좋은 관광자원을 보유한 곳이기도 하다.
<왕곡마을 전경 >
< 왕곡마을의 가옥>
<가옥내부의 마루 >
< 왕곡마을의 굴뚝>
< 왕곡마을의 굴뚝>
<왕곡마을의 굴뚝 >
<왕곡마을 효자각 >
< 왕곡마을 효자비>
< 왕곡마을 정비사업>
<왕곡마을 가옥보수공사 >
-이주민 촌락들
우리나라의 인구의 이동은 경제적인 차이와 사회적인 혼란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에 따라 자연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이주민들의 마을이 형성되어왔다.
고성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런 형태의 마을로는 거진읍의 '쌔비촌'을 들 수 있다.
지금은 민간인 비거주지로 사림이 살지 않는 수동면 사람들이 대진ㆍ거진ㆍ간성 등지에 이주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들 중 수동면 사비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촌락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는 마을이 쌔비촌이다. 쌔비라는 이름은 수동면 사비(沙飛)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들이 이처럼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는 이유는 사비리가 전주 이씨 집성촌으로 서로가 친인척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날이라 번화한 거진읍에서 쌔비촌을 물어보면 누구나 잘 아는 곳으로 거진 읍사무소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가면 보이는 마을이다.
조용한 골목 안에서 중년의 여성들이 생선을 다듬으면서 큰 목소리로 떠드는 소리에서 이 곳 사람들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 쌔비촌>
<쌔비촌 >
또하나의 이주민 촌락은 토성면 신평리의 재건촌이다.
지도에 재건촌이라고 나와있어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부락일 것이라는 생각에 들려보았다.
신평리 잼버리대회장에서 인흘리로 향하다보면 신평2리라는 마을 안내표석이 보이는데 이곳이 재건촌이다. 비슷한 크기의 집들이 모여있는 이곳에 주민에게 마을의 유래를 물어보니,
고성의 어딘가에서 이주한 것이 아니고 1967년 박정희 정부시절에 전국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곳에 땅과 집터를 제공해 주고 이주시켜서 생긴 마을로 15가구가 살고있고,
지금은 신평2리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재건촌이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는 듯 해서 자세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과거에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산간 오지였을 이곳에 어떤 연유에서든 정들었던 삶의 자리를 떠나 찾아온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난 마을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땀과 노력에 의해 형성된 마을이라고 생각된다.
지난 과거를 멀리하기보다는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알려주고 확인시켜주는 유럽의 마을들이 생각났다.
< 재건촌 입구>
< 재건촌>
고개와 취락
1,000m가까이 되는 높은 고개는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개를 넘지 않고서는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없기에 어려운 고통을 감수하면서 힘들게 넘어 다녔다.
각종 산짐승과 재물을 빼앗으려는 무리들을 피해 이른 아침에 올라가기 위한 숙박이나, 많은 사람이 모여 같이올라기기 위한 장소,
혹은 군인들이 파견되어 오가는 사람들을 보호했던 시설들이 커다란 고개 아래나 위에 생기고 그곳에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된다. 큰 고개가 많은 고성에도 이런 고개와 관련된 마을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진부령 정상에 있는 조쟁이 마을인 흘리와 미시령 아래 지금은 콘도들이 즐비한 원암리, 인제군으로 넘어가는 대간령 아래 마을인 토성면의 도원리,
진부령을 넘어가는 마지막 마을이면서 옛날 고성사람들이 한양으로 향하던 유일한 길이었던 소똥령(마을 사람들은 쇠똥령으로 부르기도 함) 아래 마을인 장신2리 등이 있다.
조쟁이 마을과 흘리일대는 영취락의 전통대로 지금도 진부령을 넘어가는 사람들이 들렸다가는 곳으로 주변에는 많은 숙박시설이 들어선 알프스리조트가 있고,
< 원암리의 현대설악콘도 >
< 원암리 >
원암리 역시 설악산의 콘도마을로서 대명콘도ㆍ현대설악콘도ㆍ일성콘도 등이 밀집하고 90년에 들어와 개발된 강알카리 성분의 온천이 있어 여행자의 피로를 덜어주고 있다.
도원저수지가 있는 도원리는 아름다운 경치와 맑은 물이 흘러 고성군에서도 자연환경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고,
1991년 마을관리휴양지로 지정되어 자체에서 관리운영하며 휴양촌과 관광농원등을 조성할 예정이다.
장신2리 역시 농촌테마마을로 지정되어 체험하고 즐기는 마을로 개발하고 있다.
이처럼 과거의 고개와 관련되어 오가는 사람들의 휴식공간을 제공해주던 마을들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어 지리적인 특색은 변화가 없으며,
이런 마을은 지역적 특색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개발이 될 때 더욱더 마을의 발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도원리>
<도원리에서 본 대관령 방향 >
<도원리 산촌개발 >
<해상리 >
<장신2리 >
<진부령 정상마을 >
고성의 자연재해 산불
1996년 동해안 자전거 일주를 마치고 대진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송지호 주변은 국도변까지 불에 타 흉한 모습을 하고있었던 것이 눈에 선하다.
1996년 4월23일 오전 죽왕면 마좌리 군부대의 사격장에서 시작된 불길은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을 타고 주변으로 퍼져나가 4월 25일 오후에 진화될 때까지 3762㏊의 산림과 주택 70채를 포함한
건물 227동, 가축 355마리, 각종 농기계 등 당시 피해액만도 200억이 넘었고 여의도 면적의 6배가 불타버린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그 후 2000년 4월6일에도 고성군 죽왕면에서 시작된 산불이 울진ㆍ삼척까지 쓸고지나가 이 지역의 산불은 이제 연례 행사처럼 치러지고 있다. 이 지방이 산불이 이처럼 잦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상건조기후의 영향을 들 수 있는데 봄철에 자주 부는 서풍이 태백산맥을 넘어올 때 푄현상을 일으켜 영동지방에 고온 건조한 현상을 일으켜 고성지방은 더욱 건조해지게 된다.
원래 이 고장에는 양간지풍(陽杆之風)이라 하여 양양과 고성지방은 바람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있고
이런 강한 바람과 건조한 날씨는 작은 부주의만으로도 커다란 산불을 일으킨다.
산림청에서는 사용하고 있고,
학자들 간에는 자연복구와 인위적 복구가 양분하고 있기도 하다.
고성지방의 자연적 특성상 앞으로도 산불은 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높으며,
지형과 토양적 특성상 회복이 빠르게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군부대 앞을 지날 때면 부대앞 간판에 '산불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글귀가 써있을 정도로 지역민들에게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산불이 일어난 다음의 다양한 복구방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전의 예방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산불지역(죽왕면 삼포리) >
< 산불지역(죽왕면 삼포리)>
<산불지역의 신축주택(삼포리)>
<산불지역(왕곡2리)>
건봉사
고성을 이야기하면서 건봉사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고성을 대표하는 사찰이자 영동지방을 대표하는 사찰이며, 6ㆍ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상징으로 생각하고 싶다.
신라 법흥왕 7년(520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이 절의 원래 이름은 원각사(圓覺寺)라 하였는데, 그 후 도선국사가 고려 태조의 명을 받아 중수하면서 서봉사(西鳳寺)라 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때 나옹화상이 중건하여 건봉사(乾鳳寺)라 이름 붙이게 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조가 자신의 원(願)을 비는 사찰로 삼고 예종도 자신의 원당(願當)으로 삼는 등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조선말까지 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거대한 수행처로 존재하여왔다.
송광사ㆍ해인사ㆍ통도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사찰로 꼽혔던 건봉사는 조선후기의 전성기 때는 건물의 수효가 3,183칸에 상주 스님만 100여명이 넘었고 낙산사ㆍ신흥사ㆍ백담사ㆍ화암사ㆍ수타사 등 강원도 일대의 대부분의 사찰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이곳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승군을 양성하여 금강산일대와 평양성 등에서 전투에 참가하였고, 왜란이 끝난 후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돌려 받은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가 이곳에 봉안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절에서 봉명중학교란 사립학교를 운영하였고 지금 불이문 앞의 넓은 터가 당시의 운동장이었다고 한다.
6ㆍ25전쟁 전까지 건물의 수가 766칸이었으나 전쟁중 인근의 향로봉 지역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북한군이 은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건봉사에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해상에서 함포사격으로 인해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건물이라고는 입구의 불이문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철저히 파괴되고 사라져 지금도 이곳에 가면 넓은 절의 터에 건물은 몇채보이지 않고 과거에 많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의 터만 즐비하게 남아있다.
건봉사를 방문했을 때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불이문으로 전쟁중 유일하게 남았다는 의미와 4개의 나무 기둥아래를 받치고 있는 돌기둥에 사찰의 수호기능을 가미한 금강저를 새겨놓아 불이문만으로도 과거 이 절의 위세와 아름다움을 살펴볼 수 있다.
불이문을 지나 계곡을 따라 오르면 능파교(凌波橋)라 부르는 돌다리가 보이는데 이번 방문 때는 새로 보수공사 중이어서 그 모습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전에 이 절을 찾았을 때는 건봉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장소로 고해의 파도를 헤치고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뜻의 다리를 건널 때면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나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얼마전 수해에도 끄떡없이 버텨냈다는 이 다리에서 과거 많은 건물로 들어찼을 때 절의 모습을 상상하고 주변경관과 연결시켜본다. 현실과 부처님의 세계라는 정신적인 두 세계는 물론 절내부 공간상에서 대웅전과 부속건물 두지역을 연결해주는 연결로로서의 기능이 아름다움을 같이하고 있다.
다리를 건너기전에 범종이 있는 곳의 입구에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솟대형 석간이 암석 위에 서있다.
보통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년을 위해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우는데,
<건봉사 포교당(간성읍) >
< 1930년대 건봉사 >
<건봉사 불이문 >
대개의 솟대는 나무로 만들어 오래가지 않지만 일부지역에서 돌로 솟대를 만들고있지만 이렇게 사찰에 솟대가 있는 경우는 보기 쉽지가 않다.
이곳의 솟대에는 불기(佛紀) 2955년 무진(戊辰)이라는 글이 새겨있어 1928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고,
만들 당시에 글씨에 색을 칠했는지 알 수 없지만, 붉은 색이 칠해져 약간은 중국 사찰의 느낌이 나서 어색했다.
능파교를 건너 군부대가 임시로 복원한 대웅전을 향하는 계단 양쪽에 돌기둥 즉 석주가 세워져있다.
불교를 모르는 필자의 눈에는 이상한 문양으로만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는데
'십바라밀'로 바라밀은 지혜의 세계로 건다간다는 뜻이며
10은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의 6바라밀에 방편(方便)ㆍ원(願)ㆍ력(力)ㆍ지(智)의 4바라밀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좌우 두 개의 돌기둥에 5개씩 이런 상징물을 새겨놓았는데 920년대에 조성한 것으로 심오한 불교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놓은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돌아오는 길에 과거 절입구에 있던 수색부대의 초병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해상리에서 절까지의 길도 말끔하게 포장되어있었지만
주차장 아래의 길을 막고 있는 민통선에서 아직도 분단은 현재진행형임을 느끼게 된다.
<건봉사 터>
<건봉사 능파교>
<능파교>
<건봉사 석간>
<건봉사 바라밀>
<건봉사 바라밀>
<건봉사 홍예교>
<건봉사 옛도로(해상리~건봉사)>
청간정
예부터 우리민족은 한여름 경치가 아름답거나 마을의 입구에 가옥의 축소판인 작은 정자를 지어 더위를 피하면서 의견을 나누고 정보를 교환했던 곳이 있었다. 서민들의 마을 속에 만들어진 것을 모정(茅亭)이라 하고, 사대부들의 교류와 풍류의 장소는 누정(樓亭)이라고 한다. 이중 누정은 사방이 탁트인 전망이 좋은 곳에 세워놓고 시를 짓거나 토론을 하는 장소였다.
고성지방을 비롯한 관동지방에는 해안의 절경지대에 이러한 누정이 많이 지어져 있으며
지금도 관광명소로 사랑받고있는데 그중 고성지방을 대표하는 누정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이다.
관동팔경은 영동팔경이라고 하며 총석정(통천)ㆍ삼일포(고성)ㆍ의상대(양양)ㆍ경포대(강릉)ㆍ죽서루(삼척)ㆍ망양정(울진)ㆍ월송정(평해)ㆍ과
함께 고성의 청간정은 남한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관동팔경으로 본래 만경루라는 누각이 청간역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누각이 없어지고 만경대 옆에 있는 청간역 정자로 옮겼다고 하니 원래는 청간역의 정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중종 15년(1520)에 중수한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생각된다.
12개의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정자에 오르면 멀리 설악산의 울산바위가 보이고 밑으로는
청간천이 바다와 만나고 있으며 토성면과 죽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1884년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1928년 다시 지었다가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보수하고 지금의 현판도 그가 써놓은 것이며
1981년에 최규하 대통령의 지시로 해체ㆍ복원하였으며 누각 안에는
그가 이곳에서 본 경치를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글이 남아있고 송강 정철이 쓴 글도 남아있다.
청간정의 북쪽에 위치한 경찰시설이 눈에 거슬리지만 고성지방 해안을 따라 널려있는 철조망을 생각하면 이제 낯설지도 않다.
<청간정 >
< 청간정에서 본 청간천 >
< 청간천 >
<현판(이승만) >
< 현판>
<정철의 글>
< 최규하 대통령 글>
<청학정 >
천학정은 청간정의 북쪽 약 3㎞에 위치한 작은 산에 위치한 정자로 1931년 이 지방 유지들에 의해 세워졌다.
파도의 침식에 의한 해식애와 각종 암석들이 주변에 산재하며, 청간정에서 보는 장쾌한 바다와는 달리 앞바다의 섬인 가도를 비롯하여
인근의 교암리 마을에 인접하여 아기자기하고 친숙한 느낌을 준다. 바로 앞에 절벽 위에 있는 군의 경비초소 또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아쉬움을 주는 모습이다.
<청학정에서 본 동해 >
< 청학정과 동해바다>
먹거리/특산품
태백산맥을 끼고 긴 해안선이 발달한 고성은 싱싱한 어패류가 풍부한 지방이다.
이곳에서 산출되는 어패류는
명태ㆍ도루묵ㆍ꽁치ㆍ가오리ㆍ준치ㆍ가자미ㆍ대구ㆍ고등어ㆍ멸치ㆍ양미리ㆍ방어ㆍ 광어ㆍ열갱이ㆍ우러기ㆍ새우ㆍ게ㆍ오징어ㆍ문어ㆍ해삼ㆍ소라ㆍ전복ㆍ미역 등이 산출된다. 이밖에 명태ㆍ도루묵ㆍ명란ㆍ멸치 등을 발효시킨 식혜 등이 향토의 별미로 손꼽힌다.
이 지방 식품의 특징은 어느 동해안지방과 마찬가지로 횟감이나 국거리 혹은 구이, 조림 등으로 한정해서 먹고있어 다양한 식문화가 발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징어와 미역을 제외한 가공ㆍ건조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교통의 불편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생선 중에서 가장 우리들에게 사랑 받는 대표 어종은 명태다.
한류성 어종인 명태는 서해의 조기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우리와 친숙한 생선으로 그 쓰임새도 다양하여,
굿판에 올라오거나 대문에 복 달라고 매달아놓은 것도 명태다.
우선 명태와 관련된 이름만 해도 여러 가지인데 현재 가장 귀한 생것인
생태, 얼린 동태, 추운 겨울에 찬물에 담근 후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는 황태, 두달쯤 말린 북어, 보름정도 반쯤 말린 코다리, 명태의 치어로 생맥주 집에서 즐겨먹는 노가리 등 참으로 재미있고 적절한 이름들이 있다.
최근 명태가 귀해지니까 금처럼 귀하다하여 금태, 원양과 국내산을 구별하는 진태, 낚시로 잡은 가장 비싼 낚시태 등의 새로운 이름도 등장하였다.
명태는 내장을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창란젓과 명태의 알을 소금쳐 양념을 넣고 발효시킨 명란젓 등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생선이다.
수심150m의 찬물에 사는 명태는 북한의 함경도 일대가 최고의 어장이며
겨울철 남하하는 한류를 타고 11월말에서 이듬해 2월 중순까지 거진과 속초까지 내려온다.
사실 고성의 거진항은 명태잡이로 인해서 성립하고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남한의 명태주산지로 그 명성을 알렸다.
그러나 최근에 바닷물의 수온상승으로 명태의 어획량은 점점 줄어들고, 원양에서 잡아온 동태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고성의 명태는 진부령에서 황태로 거듭난다.
< 거진읍 전경 >
< 거진읍 시가지 >
< 거진항 건어물거리 >
< 진부령의 황태식당 >
< 진부령 황태덕장 >
그냥 말리는 북어와 달리 황태는 동해의 항구에서 속을 뺀 명태가 진부령을 넘어 인제와 경계지역의 하천변 마을에 도착하며 차가운 계곡물에 잠시 담갔다가 명태를 말리는 덕장에 간다.
기둥을 세우고 빨랫줄같이 선을 연결한 덕장에서 영하 10℃이하의 날씨에 얼어다가 삼한사온으로 잠시 포근해지면 녹았다가를 반복하면서 12월 중순에서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모진 시련을 겪게된다.
이렇게 해서 노란색이 감도는 황태가 완성된다. 지금은 전국어디에서나 황태를 주재료한 집들이 성업중이지만 실제로 황태의 본고장은 북한의 원산이며 1960년대에 들어와서야 진부령 일대에서 황태가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황태덕장이 주로 있는 곳은 인제의 용대리 계곡이지만 겨울철에는 진부령의 흘3리 덕장에서 볼 수 있으며, 지금은 대관령등 여러 곳에서 덕장이 운영되고 있다.
필자는 여행 중 먹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이 적지만 이 지역을 지날 때면 꼭 진부령 고개 위 부흥식당에서 황태와 관련된 음식을 먹는다. 맛도 맛이지만 의미가 있는 지역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축제
고성의 축제는 지역의 지리적인 특색을 반영하는 해맞이 축제와 명태축제, 역사를 확인하는 수성문화제가 대표적이다.
해맞이 축제는 해가 솟아오르는 것을 볼 수 있는 동해안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행하여지는 축제로, 고성에서는 통일전망대 일대에서 열리게 되어 최북단의 휴전선 접경지역에서 열린 다른 것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사실 매일 보는 해는 어떤 모습으로 떠오르냐는 것보다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떠오르냐가 더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명태축제는 남한에서 제1의 명태산지인 거진항 일대에서 2월중에 열리는데, 전국 명태어획량의 60%이상을 차지하는 고성의 가장 지역적 특색이 강한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주로 명태와 관련된 요리의 시식과 공연 등이 펼쳐지며 올해로 6회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밖에 고성의 전통적인 축제로 가장 큰 지역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1983년부터 시작되어 올해로 22회를 맞이하는 수성문화제를 들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전통지역축제처럼 고구려~조선초기까지 수성군으로 불렸다는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오는 축제로 가을에 열리며,
이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해나가면서 체험하는 지역 축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문예행사, 민속행사, 체육행사 등이 다채롭게 공설 운동장 일대에서 열리며,
축제는 수성신을 모시는 제례를 시작으로 전애행사, 문예행사, 식전행사, 민족행사, 체육행사가 2일에 걸쳐 진행된다.
고성의 축제는 다른 지역처럼 화려하거나 주목을 받는 행사는 아니지만 소박한 이 지역의 정서와 분단이라는 아픔을 간직한 이들 고성사람들의 순수함을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체험이다.
첫댓글 잘다녀와..노라누님..못가는이맘..슬퍼
노라누님,가기도 힘들거니와 읽기도 힘드네요.시간나는데로 차근히 읽어 보겠습니다.
설명 기막히게 해놓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