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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나라나 국도(國都)나 각 고을에 있는 가장 큰 산을 진산(鎭山)이라 하여 그 곳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모시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서울의 진산(鎭山)은 크게는 북한산(北漢山: 삼각산)이고, 작게는 그 주산(主山)인 백악산(白嶽山) 곧 북악산(北嶽山)이다. 서울의 산에는 밖으로 크게 네 개의 산과 안으로 네 개의 산이 있다. 외사산(外四山)으로는 동서남북에 용마산(595.7m), 덕양산(124.8m ), 124.8m 관악산(124.8m ), 북한산(836.5m)이 있다.
내사산(內四山)으로는 낙산(洛山, 111m), 인왕산(仁王山,338m), 남산(木覓山,262m),북악산(白嶽山, 342m )이 있다.
금년에는 그 여덟 개의 서울 산의 산행기를 쓰기를 벼르다가 마침내 인왕산부터 이렇게 시작한다.
석가탄신일에 불자(佛子)인 아내에게 절과 산을 겸하기 위하여 우리는 3호선 독립문 역에서 내려 인왕산을 향하고 있다.
아까사아가 하얗게 지고 있고 넝쿨장미가 담에서 빨갛게 피어나는 초여름이었다.
인왕산은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 낙산(洛山)과 함께 우백호에 해당하는 화강암이 노출되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수석을 펼쳐놓은 듯한 암산이다. 산은 높지 않지만 북한산에서 뻗어 내린 용(龍)의 산세가 네 산 중에서도 가장 웅장하다.
인왕산(仁王山)이란 지명은 조선조 태조 때에는 서봉(西峰)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인왕사(仁王寺)라는 사찰이 있다하여 인왕산(仁王山)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는 말이 광해군일기에 전하여 온다.
경주 석굴암에 가면 그 입구에 눈을 부릅뜬 불교의 수호신이라는 한 쌍의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보게 된다.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용어로는 여래(如來)의 지덕(智德)이 견고하여 일체의 번뇌를 깨뜨릴 수 있다는 말이지만, 금강석(diamond)처럼 몹시 단단하여 어떠한 물건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금강이란 말이 인왕(仁王)인 것을 보면 인왕산이란 도성(都城)을 지켜 주는 수호 산이라는 유추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인왕산의 한자는 仁王山(인왕산)으로 써야지 仁旺山(인왕산)으로 써서는 안 된다.
조선조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이나, 강희언(姜希彦)의 산수화에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仁王山(인왕산)이라 쓰여 있는 것을 악랄한 일본인들이 일본(日本)의 日(일)이 조선 王(왕)을 누른다는 뜻으로 ‘王’(왕) 자를 ‘旺’왕) 자로 고쳤다는 말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당시 왜놈들은 우리 조선민족을 가축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길들이고자, 우리 국토를 영원한 일본 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야욕으로 우리나라 곳곳을 자기들 뜻대로 지명을 뜯어고쳤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왕산 일주문에는 아직도 '仁旺山仁王寺'라 쓰여 있는가.
한국에는 산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생긴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 때문에 사람들은 유난히 바위가 많은 인왕산 바위 곳곳에다가 치성을 드리고, 그 술과 안주가 되는 과일과 돼지 머리를 그대로 두고 간다 한다.
그래서 밤이 오면 이 일대의 노숙자가 모여 들고 그러면 이곳의 정자에서는 찬란한 밤의 향연이 벌어지게 된다고-.
신성한 절에 웬 무당의 요란한 굿 소리인가. 이상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이 국사당(國師堂)이었다. ‘國師’(국사)란 ‘왕의 스승’이란 말인데- 하면서 처음에는 의아하였지만 마당의 표지의 안내 설명을 보니 여기에는 불상은 없고 비단에 채색한 그림으로 모신 21점의 화상(畵像) 중에 이태조와 그의 스승격인 무학대사가 있었다니 머리를 끄덕이게 한다.
그 당시 漢陽(한강 漢, 북쪽 陽)에 도읍을 정하고 서울의 수호신사로서 남산 꼭대기에다가 목멱신사(木覓神祠)의 사당을 만들어 놓았더니 후대에 오면서 무속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1925년 일제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세우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를 이곳 인왕산 산록으로 옮겨 오자 남산이란 뜻의 '목멱(木覓)' 대신에 국사당(國師堂)이란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이곳 국사당은 오늘날 민속 신앙 보존과 연구에 메카의 역할을 하여 왔다.
마침 굿을 하고 있었는데 무당이 예비군복을 들고 치성 드리고 있는 모습은 군인 가서 죽은 자식의 천도(薦度)를 비는 모양이다. 무당의 얼굴이 깨끗한 것이 아마도 인간문화재인가 보다.
이 국사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여 준 것이 그 위에 있는 선바위다.
호랑이 굴이 있다는 곳에 있는 범바위는 등산객들이 거쳐 가는 커다란 바위로 정상을 향하 다 뒤돌아보면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영락없는 호랑이 모습이다.
인왕산 하면 지금도 떠오르는 것이 인왕산 호랑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태종 5년에는 경복궁 내전(內殿)에, 연산군 11년에는 종묘까지 침입하는 등 민가의 피해가 많았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무악재를 넘을 때, 호랑이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이 모여서야 함께 재를 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멘트 층계가 눈에 거슬리더니 인왕산 정상 가까이 바위를 깎아 만든 층계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이 층계를 만드느라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정상의 널찍한 공터 끝에 초소가 있고 그 한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으로 있다. 삿갓바위였다.
인왕산의 가장 큰 멋은 우리 서울을 내려다보는 조망에 있다. 다른 어떤 산보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서울. 돌산이라 나무 하나 가림 없이 천지가 사방으로 팔방으로 탁 트였다.
동쪽에 북악산이 보이고 그 넘어 북한산이 보이는데 의정부 쪽의 전두환 대머리 같다는 552m 사패산, 739.5m의 도봉산 능선, 삼각산, 국민대학 뒷산인 705m 보현봉까지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서울 시내의 마천루를 넘어서 아름다운 남산 뒤에 한강, 다시 넘어 관악산 등등.
우리 한강에 비하면 영국 런던의 템스 강이나 파리의 센강은 한강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아주 적은 강이다.
유럽 7개국을 흐른다는 다뉴브강이나 이집트의 나일강, 인도차이나 반도의 메콩강도 우리 한강에 비하여 크기에서도 그렇지만 아름다움에서도 견줄 바 못 된다.
이탈리아나 그리스도 그러했지만 서유럽 등에는 지평선뿐, 산이 있어도 그 산에는 나무가 없었다.
알프스의 나라를 빼고는 대부분의 유럽의 나라들은 평야뿐 산이 없다. 오죽해야 폴란드란 폴(평야) 란드(나라)란 이름이겠는가.
나는 세계를 돌아본 후에야 비로소 한국의 산하의 아름다움을 알고 내가 한국인이며 그 중에서 그 산을 사랑하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로구나 하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 한국의 산하도 세계의 아름다운 산하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왕산 정상 바로 밑이 치마바위가 있다.
하산 길에 이곳을 지키고 있는 수도사령부의 그 젊고 예쁜 위병들과 김밥과 커피를 함께 하였지만 다음에 갈 때는 담배나 몇 갑 가지고 가야겠다. 마음먹고 찍어온 디카 사진을 편집하다가 날려 보냈으니 다른 코스로 다시 또 가야겠다.
ilman의 국내외 여행 & 산행기
*서울의 몽마르트 낙산(駱山)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이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이
북현무(北玄武) 북악산(北岳山)과
남주작(南朱雀) 저 남산(南山)과.
서울의
내 사산(內四山)이 되어
우리 서울을 지킵니다.
-서울의 내 사산(內四山)
서울의 몽마르트라는 낙산(駱山) 가는 길은 지하철 4호선 혜화동역에 내린다.
파리에 있는 5개의 언덕 중 그 중 가장 높다는 것이 해발 130m로 몽마르트 언덕이다.
파리의 상징이자 낭만이 되는 시민을 넘어 세계인의 휴식처가 되는 곳으로, 우리의 125m 낙산과 비교하여 낙산을 한국의 몽마르트라 하였다면, 낙산 기슭의 옛날 서울대 부지였던 대학가는 서울의 하이데르베르크로 명명하고 싶다.
라인강의 지류인 네카 강변 따라 하이델비르크의 사각형으로 사암을 깎아 만든 길이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인하여 세계인들을 유혹하고 있는 대학가로서 자고로 독일 젊은이들의 거리라면, 우리의 마로니에 공원과 그 앞의 혜화동에서 종로5가로 해서 청계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강으로 흘러가던 그 복계천 길이어서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던 은행잎에다가 그 위에 펼쳐진 찬란한 조각들의 군상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언제 이렇게 수많은 조각들을 만들어 놓았는가. 산을 가겠다는 발길을 나도 모르게 흥분된 마음으로 종로5가까지 돌리게 하였다.
이곳은 젊음의 쉼터요, 만남의 광장이라서 실용적인 뜻에다가 미적 조각미를 감안한 것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긴 의자, 주사위 등. 의자 하나하나가 아무리 바삐 가는 길이라도 앉아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도록 각각의 조각마다 이야기가 예술과 얽힌 의자였다. 그 재료가 오석으로 나타나다가 나무를 만나면 꽃밭의 사각형 둘레석이 되는데 거기 앉는 이는 그대로 그 꽃밭의 일부가 되게도 한다.
마침 지나가던 초등학생 어린이가 있어 저건 뭐냐고 물었더니 아이스크림을 먹고 응아한 거시기라며 웃는다.
이 거리의 모습은 개선문에서 콩코르트 광장으로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샹 젤리 거리보다 더욱 다양하고 아름답다면 지나친 말일까? 마로니에 공원조각에는 지난날 그 자리에 있었던
나의 모교의 건물의 기념 모형비가 있어 가난했던 고학시절의 나의 옹색한 학창을 뒤돌아보게도 한다.
그 앞에 비가 있어 가보니 다가오는 것은 저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오
우가비(五友歌碑卑)다. 서울대학교 본부가 있었던 이 마로니에 공원이 바로 우리나라 근대 시조문학의 거성 윤선도의 선조 때(1587년)의 생가 터였던 곳이다. 고산 선생이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같은 말없는 사물에다가 뜻과 마음과 정을 주고 보길도의 풍경을 노래하며 살던 것처럼, 나는 꽃과 호수의 나라 일산에서 노후를 보내면서 국내외의 아름다움을 찾아 어디에 있는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시조 노래하며 수필로 해석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성터 따라 가보는 것이 낙산 산행의 진수(眞髓)려니 하면서 흥사단 건물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 쪽에서부터 산을 오르기로 했다.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오르는 길은 점점 가팔라지는데 양쪽으로 다세대 주택과 연립주택들이 즐비하다. 드디어 층계가 나타나고 초여름 녹음이 시작되더니 싱겁게도 제3전망광장에 금방 올랐다. 혜화문에서 이어져 온 성터가 동대문까지 시작되는 곳이었다.
성을 올라 바라보니 달동네 넘어가 삼선교요, 그 너머 아파트촌이 미아리 고개를 좌우로 가르고 있는데 그 뒤에 희미하게 수락산과 불암산이 보인다.
서울 성곽은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2년 후 전쟁과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서 20만명을 동원하여 세우고 세종 때 돌로 쌓았다. 당시 서울 인구가 6만5천명이던 시절이었다. 성은 높이가 12m, 폭이 4.3cm로 총 길이 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잇고 있다. 내가 가는 역사탐방로는 혜화문에서 동대문까지2.1km의 능선이다.
지금까지 내 기억으로는 낙산 정상까지 판자촌과 동숭동 시영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들어 서서 황폐한 곳으로 남아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정상 부근의 모든 판자촌과 아파트는 다 헐려 버렸고 성벽 따라 멋진 길이 정상이라는 놀이광장으로 열려 있다.
1966년부터 낙산 복원 사업이 시작되어 이젠 낙산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되돌려 진 것이다.
젊어서 이곳 가까운 집에서, 직장에서 20년 이상이나 근무를 한 내가 이렇게 캄캄하다니 다른 이는 말하여 무엇 하랴. 여기 오르기 전에 들렸던 혜화동에서 산다는 여직원도 마로니에 공원은 알아도 낙산공원을 모르고 있었다.
오르는 길은 길지가 않아서 힘들지가 않았고, 가끔 만나는 사람들도 가벼운 옷차림뿐 나처럼 등산 가방을 메고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img src="http://www.donginji.or.kr/Users/E/S/S/ESSAYLOVE/upload/DSCN0031놀이마당정상근.JPG">
제2전망광장, 제3전망광장에 이어 여기서는 가장 높다는 곳이 놀이광장이라는데 그 위의 더 높은 곳에 양옥집 하나가 깃대를 세우고 철조망을 보기 싫게 둘렸다. 군부대였다. 125m밖에 안되는 낙산이지만 그래도 이 산은 도성을 지키는 수호산이라 지금도 저렇게 수도 서울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의 젊은이 군인들이 초소로 서 있는 것이다.
산의 정상인 깃대봉 주변은 지금도 창신동 달동네였다. 옛날에는 요꼬라 하는 세타 등을 짜는 간이 수공업 공장이 많았다. 그 많은 직공들이 즐겨 먹으려 찾던 것이 냉면이어서 지금도 낙산명물로 남아있다. 이화여대 쪽의 충신동성터냉면집, 깃대봉에서 창신동으로 내려와 있는 깃대봉냉면집들의 역사가 20년을 훌쩍 뛰어넘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낙산 정상에서 마을버스(낙산-동대문) 회차 지점을 지나 조금 내려가 3거리에 있는 낙산공원의 대표라는 낙산냉면집을 찾았다.
12시가 훨씬 지났는데도 층계 밑으로 내려가 있는 좁은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집에서는 제일이라는 특냉면을 시켰더니,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식성인데도 입에 꽉 당겨오는 얼큰이냉면의 환상적인 맛이라니-.
언제 아내와 다시 한번 와야겠다. 친한 친구 불러 함께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이 낙산냉면집에서 아래로 쌍용아파트를 조금 지나면 비우당이란 초라한 집이 있다.
비우당이란 ‘비’가 오면 방 안에서도 ‘우’산을 바쳐 비를 피한 집 ‘堂’(당)이라 해서 비우당이라 했다는 조선 초의 청백리 정승인 유관 선생의 자택이었다. 날마다 부패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부러운 삶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마을순환버스 회차지점 부근 성터 바로 아래에 낙산의 유래가 표지로 서있다.
낙산(駱山)은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일명타락산) 또는 준말로 그냥 낙타 駱(낙) 駱山(낙산)이라 하였다. 당시의 풍수사상으로는 주산인 북악의 동쪽에 있으므로 우백호 인왕산에 대치되는 좌청룡에 해당되는데 경복궁 건축 방향을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와 사이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경복궁은 주변 형상으로 보아 암산(巖山)인 인왕을 주산으로 삼아 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북악산이 좌청룡(左靑龍), 남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되어 청룡 주작(朱雀)․ 백호(白虎)․ 현무(玄武)가 잘 어울리게 되고 북악과 일직선상에 놓은 관악산(冠岳山)이 불산[炎山]이라서 나라에 변고가 많다는 것이 무학대사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척불(斥佛) 숭유(崇儒)의 유학자이며 개국 일등 공신인 정도전은 의견이 달랐다.
“예로부터 임금은 남향[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자고로 동향하여 다스린 예는 없사오니 한갓 중의 주장은 불가하옵니다.”
신라 때 의상대사의 산수기(山水記)에는 그렇지 않을 경우를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으나 정씨 성 사람이 시비하면 5세도 지나지 않아 왕가의 재앙이 있으며 200년이 지나면 국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왕가의 재앙은 북악이 주산일 경우에는 동의 낙산이 좌청룡이 되고 동은 동궁처럼 세자에 해당하는데 낙산은 산세가 길게 뻗지 못한데다가 다른 산보다 허하므로 맏아들이 왕으로 등극한 경우는 이조 560년 동안 3, 4번뿐이어서 안으로는 왕위 계승으로 정권 다툼이 많았고 예언대로 개국 후 200년 뒤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4대문의 이름은 돈의문(서:敦義門), 숭례문(남, 崇禮門), 숙정문(북, 肅靖門) 석자뿐인데 동대문의 현판만은 興仁之門(흥인지문)으로 산맥 모양의 갈 ‘之’(지)를 더하여 부족한 낙산의 기를 보하게 하였다.
손우성 저 ‘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경복궁을 남향으로 하여 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어느 날 무학대사가 논가를 지나가고 있는데 논을 매던 한 노인이 이상한 소리로 소를 나무라고 있었다. ‘이랴, 이 무학보다 미련한 놈의 소!' 이상하게 생각한 무학의 물음에 노인의 답은 이러하였다. ‘한양 땅은 학(鶴) 모양의 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학(鶴)이 날개를 다칠 것이 뻔한 이치가 아닌가. 그러니까 아무리 공들여 쌓아도 궁궐이 무너지지. 그러니까 성부터 쌓아야 한단 말일세.’ 그래서 경복궁은 성이 먼저 축조된 다음에 궁궐이 지어지게 된 것이다.”
놀이 광장의 서울 전망은 일품이었다. 인왕산에서 보던 전망보다 우람한 인왕과 북악과 남산의 전경을 어우를 수 있는 곳이 여기 이외에 더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부터 나무 층계가 아래로 내려가고 있고 그 동쪽 편에 8각정이 있다. 낙산정(駱山亭)이었다. 그 옆에 밭이 있는데 저것이 흥덕이네 밭인가 보다.
홍덕이란 신하가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후의 효종)이 심양으로 볼모로 잡가 있을 때 채소를 가꾸어서 김치를 담가 아침저녁 지성으로 드렸는데 볼모에 풀려 귀국하여 왕이 된 효종은 그때 그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어 낙산 중턱에 채소밭을 흥덕이에게 주어 김치를 담가 바치게 하였다는 밭이다.
낙산 정에서 바라본 서울은 아름다웠다. 파란 녹림지역을 이룬 비원과 종묘와 창경원 너머 서울을 빙 둘러 싸고 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앞이 명륜동과 동숭동 일대이다.
바로 이 정자 아래가 낙산전시관이 있다. 조선시대부터 6․25로 무성한 판자촌 모습과 경제 개발인 한창일 때 동숭동 아마트 시대를 지나 정리괸 현재까지 낙산이 변천되어온 모습과 낙산에 얽힌 사진 자료를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北岳山[백악산] 산행 Photo 에세이/서울의 내사산(內四山)
가는 길// 말바위 쉼터(와룡공원): 지하철3호선 2번 출구- 마을버스종로2번-성균관대 후문에서 10분/지하철 4호선 혜화역 1번 출구- 종로 08번 -종점(명륜3가)서 10분
홍련사 쉼터: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출구- 초록버스 1111번, 2112번- 종점(명수학교)서 10분
창의문 쉼터: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초록버스 0212, 1020,7022번-자하문 고개서 2분
*. 북악산에 대한 그리움
광화문에서 북악산을 보면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처럼 북한산은 북악 뒤에 얼굴을 들고 있는 누이처럼 보인다.
대학 시절 혜화동에 살 때 성터 따라서 숙정문까지 갔다가 군인의 제재를 받고 더 이상 못 갔던 곳을 오늘 우리 동네 하(河)형과 함께 가고 있다.
내 일찌기 뜻한 바 있어 서울의 내사산(內四山)과 외사산(外四山)의 산행기를 정리하였다.
그 중 북악산만 빠져서 안타까와 하더니, 북악이 시민의 품에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북악산을 향한다.
-북악산은 경복궁의 주산을 넘어 서울의 주산으로 그 이름이 백악산(白岳山이다.백악이란 이름 외에도 면악(面岳), 공극산(控極山)이라고 하던 산이다.
특히 경복궁 쪽에서 보면 모양으로 보아 '죽순 '과 막 벌어지기 직전의 '모란꽃과 비유되기도 하던 산이다.
요번에 개방된 북악산의 출발지는 3곳이다. 와룡동 말바위쉼터코스, 홍련사쉼터코스, 창의문 쉼터 코스, 창의문[자하문] 코스지만 이 코스는 몹시 가파르고 힘든 코스여서 평소 등산을 잘 하지 않은 분이거나 노약자 또는 어린이는 말바위쉼터나 홍련사 쉼터 코스를 문화재청에서는 권하고 있다.
-인터넷신청: http://125.131.116.61/advance/course.asp
*. 창의문 이야기
내가 오르는 창의문(彰義門)은 서대문과 북대문[肅靖門]의 사이에 있는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義]을 드러나게[彰] 하자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창의문이나 북소문이란 이름보다는 자하문(紫霞門)으로 알려진 문이다.
이 근처의 계곡 이름이 자하계(紫霞溪)였기 때문이다. 이 문은 사소문(四小門) 중에 유일하게 옛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문으로도 유명하다.
창의문에서 자세히 보아야 할 곳은 두 군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무지개문의 상단에 그려 있는 봉황 한 쌍의 그림이다. 속설에 의하면 창의문 밖의 지형(地形)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 모양의 봉황을 그려 넣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문루 밖 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이다.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만든 것인데 연잎 모양의 조각 모습이 참 멋지다. 이렇게 빗물 하나에도 우리의 선인들은 실용적인 것에 멋을 더한 것이다.
*. 서울 성곽 관람
서울 성곽 관람은 층계를 오르내리는 것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그 층계가 작으만치 850에서 875개에 달하는 가파른 층계로 총 거리가 4.3km를 걸어야 한다.
그것을 2시간 정도에 마치는 일정이어서 충분히 쉴 시간은 거의 없다. 그래서 쉼터가 있는데 돌고래쉼터, 청운대심터, 백운쉼터, 말바위쉼터로 전망대를 겸한 곳이었다.
사진 촬영은 많은 제약이 있으리라 생각되었는데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군시설은 국민으로서 찍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몇을 제하고는 그 시설도 많지가 않았다.
북악산 관람은 창의문 우측으로 난 나무 계단을 오르면 거기 창의문쉼터가 있고 거기 있는 출입관리소에서 인터넷으로 접수한 사람 50명에다가 거기서 직접 접수하는 사람을 선착순으로 50명을 더해서 주민등록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주는 패찰을 목게 걸고 해설 안내원과 안전요원의 안내를 앞뒤로 받으며 산행를 하게 된다.
이 산행은 곳곳에 있는 쉼터별로 잠깐씩 쉬어가며 해설을 듣곤했다.
*.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
우리가 창의문 오르는 초입에 있는 안내판의 이름이 '북악산 서울성곽 관람안내'다.
북한산을 개방한 것이 아니라 북악산 등산로만을 개방한 것이어서 이 밖을 이탈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서울 성곽에 대한 이야기다. 다음은 관람 전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갈 이야기들이다.
서울의 사방에는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요새가 되는 내사산(內四山)이 있다.
북악산(北), 낙산(東), 남산(南), 인왕산(西)이 그것이다.
이 내사산(內四山)을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北), 용마산(東), 관악산(南), 덕양산(西, 행주산성)이 밖으로 또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한강은 동서(東西)로 흐르고, 청계천은 그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흘러서 서울은 원래부터 여름철 한강의 범람에서 안전할 수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창의문 앞에 이런 석비가 있다. '
-'청계천 발원지: 이 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양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르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로 정하였다.
이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길 무렵 한양의 인구는 약 1만 명이었다. 태조는 태조 4년에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짓고, 이듬해에 한양(漢陽) 방위를 위하여 석성과 토성의 성곽을 쌓고 그 드나드는 문으로 사대문(四大門)과 그 사이 사이에 사소문(四小門)을 지었다.
-사대문(四大門)
동: 흥인지문(興仁之門), 일명 동대문. 보물 1호
서: 돈의문(敦義門,일명 서대문) 지금의 신문로에 언덕에 있었으나 1915년 헐어 없어졌다.
남: 숭례문(崇禮門): 일명 남대문. 국보1호
북: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 북대문
-사소문(四小門)
동북: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의 본명
서남: 소의문(昭義門), 덕수궁 뒤 서소문의 본명
동남: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의 본명
서북: 혜화문(惠化門) , 동소문의 본명
*.'서울'의 어원에 관한 전설
조선 태조 당시에는 서울을 한양(漢陽)이라 불렀다.
-漢陽(햔양)의 '漢'은 '한강'이란 뜻이요,' 陽'은 '水之北曰陽'(물의 북쪽을 '陽이라 함')이라 하여 생긴 말이다.
'서울'이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민간어원설(民間語源說)'이 전하여 온다.
- 조선 초, 태조가 이 성을 쌓을 때. 성 둘레를 어떤 범위로 삼아 성을 쌓야 하나를 크게 고민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낮에 보니 안쪽만 녹아 울타리를 이루고 있었다-눈이 안에만 내렸다는 설도 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는 하늘이 정하여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눈의 경계 따라 성을 쌓도록 정인지에게 명하였다. 그래서 이 서울의 성곽을 ‘눈성’ 또는 ‘설성(雪城)’이라 하였다.
-서울을 '서울'이라고 하게 된 것은 위 이야기처럼 '雪'(설)로 '울'타리를 하여 주었다 하여 '설울'이라 하였는데, '불삽-부삽, 솔나무- 소나무, 불나비-부나비'처럼 우리말에서 두 낱말사이에 'ㄹ'이 탈락하는 음운탈락현상에 따라 '설울-서울'이 되었다는 것이다.
*. 북악산 쉼터 이야기
북악산 등반은 층계를 계속 오르내리는 것이어서 그러다 보니 자주 자주 쉬어야 했다. 그래서 도중 도중에 쾌적한 쉼터를 마련해 놓아 쉬면서 전망을 바라보게 하였다.
등반 중 제일 처음 만난 쉼터가 돌고래 쉼터였다.
이름을 돌고래 쉼터라고 하는 것은 그 쉼터를 자세히 보면 우측 소나무 밑에 돌고래를 닮은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백악산 산행에서는 정상을 처음 볼 수 있다는 설레임도 있지만 오르다 보게 되는 북한산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오르는 곳은 백악산의 뒤이어서 보현봉에서 시작되어 독바위에 이르는 서울을 빙둘러싸고 흐르고 있는 북한산 능선의 찬란한 파노라마가 전개되고 있었다.
삼각산이라고 하는 인수봉 백운대와 국망봉은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뿐만 아니라 인왕산이 북악산 성터와 함께 고즈넉한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 백악마루쉼터
백악마루에 오르니 이런 생각이 난다. '오래 살았더니 별꼴 다 보겠네'가 아니라 '오래 살았더니 백악산도 올라 보게 되었구나!'
전국의 산을 다니면서도 바라보기만 하고 살던 산에 올라 서울 장안을 굽어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이런 우리들의 마음을 고맙게도 읊어 준 시인이 있다. 황지우 시인었다.
뉴욕에도 도쿄에도 베이징에도 베를린,모스크바에도 없는 山
단 하루도 산을 못 보면 사는 것 같지가 않은
산이 목숨이요 산이 중요인 나라에
오늘
싱싱한 산 한 재가
방금 채색한 각황전(覺皇殿)처럼
사월 초순 첫 초록 재치고
솟아올랐네.
저 권부의 푸른 기와집 그늘에 가려
지난 반세가 마음의 위도에서 사라졌던 자리에서
오늘 이제는 육성으로 이름 불러도 될
그대 백악이여.
금지된 빗금을 넘어 그대가
사람 만나러 내려 올 때
솟아난 것은 한낱 돌덩어리가 아닌
우리네 마음의 넉넉한 포물선이었구나.
이렇게 풀어 버리니 별것도 아니었던 두려움이
홍련사에서 숙정문 지나
창의문에 이른 길 따라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아름다움이 되었으니
아무나 그 문들을 활짝 열어
그대 슬하에 감추인 칼바위며 촛대바위를
순우리말로 되찾아 오네.
-풍경 뻬레스트로이까 ‘북악산 개방에 부쳐’에서
백악마루는 시야를 막는 잡목 하나도 없이 사방이 시원하게 뚫린 약간은 넓직한 곳이었다. 서쪽 끝에 사람이 오르내릴 수 있는 바위가 있고 남산을 향한 곳에 백악산 342m라는 정상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 다음과 같은 비석이 서 있다.
-이 곳은 북한군의 공중 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 10.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이 곳 북악산을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삶터로 가꾸기 위해 옛모습으로 복원하다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길 기원하며 -2001년 새아침
*. 1. 21소나무
쉼터를 향하는 길에 사람들이 한 소나무 앞에 모여서 무언가를 보고 있다. 뭘까?
1.21소나무였다.
소나무에는 총알로 깊숙하게 패인 자국이 있고 그런 곳마다 주위에 흰 페인트로 둥글게 표시한 것이다.
-1968년 1월 17일 북괴군 124군 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이 그들 말대로 청와대를 까러 왔다가 아까 우리가 올라온 자하문에서 총격전을 벌이다가 이곳에 도망온 공비들과 교전을 벌여 사살한 곳으로 그때의 흔적이다.
그 잠입한 사건 때문에 지금까지 38년 동안 일반인 출입 금지지역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로 그 일부나마 국민에게 개방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노 대통령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처음 대통령이 되고서 제일 기분이 좋았던 것 중의 하나가 북악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혼자 누리는 게 은근히 기분도 좋고 특권을 누리는 것 같아 기분 좋았는데 나중 몇 번 더 와보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작년에는 '홍련사 입구- 숙정문-촛대 바위'까지만이더니 금년 4월에 전면 개방을 하여서 나는 벼르다가 이제야 찾는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약속대로 개방된 코스에서 하루를 보낼 수는 없지만 그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성을 끼고 오르내리다 성벽을 유심히 보면 성벽 돌 중에 한자로 쓴 바위에 글씨가 보인다. 처음 성을 쌓을 때 천자문의 천지현황(天地玄黃) 순으로 공사 구역 표시 등을 써놓은 글이다.
-정도전(鄭道傳)은 성저(城底)를 측정하여 이를 97구로 나누고, 각 구마다 천자문(千字文)의 글자로 번호를 붙였다.
북악산의 정상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일주하면서 천(天)·지(地)·현(玄)·황(黃)~의 차례로 글자를 붙여나가다 95번째 글자인 조(弔)자에 이르러 북악산에 도달하도록 하였다.
*. 성벽 이야기
서울의 성벽은 태조 때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수축하기 시작하여 세종과 숙종을 거치면서 완성한 것이다.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기리18.2km를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260년간 쌓아온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41만 9천 600여 명이 동원 된 대역사였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10.5km만 남게 된 것은 1899년부터 전차 개설로 동대문과 서대문 구역, 남대문, 혜화동 등 평지 성곽이 모두 철거 되었기 때문이다.
성곽 축조 방식을 보면 어느 때에 쌓은 것인가가 분명히 들어난다.
-큰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음어 쌓은 것이 태조 때 성벽이요, 장방형의 돌을 기본으로 하되 사이사이 잔돌을 섞어 쌓은 것은 세종 때 쌓은 성벽이다. 그보다 크게 정사각형으로 장정 4명이 들 수 있는 무게의 크기로 규격화하여 튼튼히 쌓은 것은 숙종 때 쌓은 성벽이다.(그림 참조)
성벽 위의 담장을 여장(女墻) 또는 성가퀴라 한다.
성(城)이란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에 대비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이다. 1개의 여장을 1타라 부르는데 1타에는 3개의 총쏘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을 쏘는 곳은 아래로 비스듬한 근총안(近銃眼) 하나가 있고, 그 양쪽에 먼 데를 겨냥하는 수평으로 된 원총안(遠銃眼)이 각각 1군데씩 있다.
*. 곡장(曲墻) 이야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성벽에 바싹 다가붙어 처들어 오는 적을 공격하는 시설에 성우와 곡성과 치성이 있다. 이 세 가지 성(城)은 모두 성벽보다 조금 바깥으로 내쌓은 것이다. 성의 네 모퉁이를 성우(城隅)라 하고, 돌출한 모양이 말굽 모양의 반원이면 곡성(曲城), 네모꼴이면 치성(雉城)이라 한다. 이 모두 성벽에 붙은 적을 사각(斜角)으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백악산의 곡장은 여장과 함께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 설명하고 있는데 그게 잘못된 것 같다. 곡성과 치성은 분명히 다른 모양인데 뭉뚱그려서 치(雉)로 설명하고 있다. 더 분명한 고증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하겠다.
한 마디만 더해야겠다. 정상석은 '백악산'이라고 되어 있는데 창의문의 입구를 위시해서 '북악산 오르는 길', '북악산성곽관람안내' 등으로 혼용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북악산은 북쪽에 있다하여 백악산을 북악으로 부르는 것이니 백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쪽이든 하나로, 아니면 ( )라도 해서 통일했으면 좋겠다.
*. 해태바위
정상에서 내려오다 보면 백악산 중간 쯤 백악산 중턱에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바위가 있다. 해태바위였다.
해태란 시비선악을 안다는 사상적인 동물이다.
경복궁의 광화문 문밖 양쪽에도 있고,경복궁 근정정 처마 마루에도 있는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생각하는 상상적인 동물이다.
서울의 외사산중에 남쪽에 관악산 정상에 올라가 보면 활활 타는 불꽃 모양의 바위가 많다.
그래서 관악산이 불산이라 하여 화재를 두려워 하던 사람이 그 불을 막기 위해서 해태를 조각하여 두었는데 그래서 저 해태바위도 궁중의 화재를 막아주는 해태바위라 하는 것이다.
이 해태는 머리 위에 뿔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싸울 때 의롭지 못한 이나 옳지않은 사람이 있으면 이 뿔로 받아 버리는 정의의 사도라 한다.
*.촛대바위
촛대바위 전망대로 오기 전에 멀리서 본 촛대바위는 10m 이상이나 우뚝 선 모습이더니 정작 촛대바위 전망대에 와서 보니 그 바위 뒤통수만 보인다.
작년 8월에 촛대바위까지만 북악산이 개방 되었을 때 나와 동갑이었던 친절한 안내원의 설명이 기억난다.
-지금 우리는 촛대 바위보다 높은 위치에서 촛대바위 뒤통수만을 보고 있어 평범한 바위 같지만 밑으로 내려가서 보면 13m나 되는 촛대 모양의 우람한 바위지요.
저기 보이는 삼각점 같은 것은 측량 표지가 아닙니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 강점기에 왜놈들이 조선의 민족정기 말살을 위해서 쇠말뚝을 박은 자리에서 그 쇠말뚝을 뽑고 저렇게 표시한 자리입니다.
이곳 북악산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김신조 등 124군 부대가 침투한 직후부터 일반인이 출입금지 지역이라서 이곳은 휴전과 같이 서울 한복판에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전 된 곳입니다. 지금은 1차 계발계획으로 단순하지만, 2차, 3차까지 진행되면 북악산 관람은 더욱 다양해 질 것이고, 그때에는 양적인 성장 발전만 거듭해온 우리나라가 청계천, 한강 등의 역사 유적과 함께 북악산도 선인들의 얼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대바위 바로 그 아래에 30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남산[木覓山]을 중심으로 한 서울 시내가 한 눈으로 들어오는 곳이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에 올라 서울을 조망하는 것처럼 감개가 무량하다. 옛날 이태조가 서울로 천도할 때는 인구 1만 명, 숙종 때에는 인구 10 만 명이었다는 한양이, 이제는 인구 1천만을 뛰어넘는 세계 10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된 서울을 나는 굽어보고 있다.
*. 북대문 숙정문(肅靖門)
서울 사람들은 남대문, 동대문이나 지금은 없어진 서대문까지는 알아도 북대문이 '숙정문(肅靖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숙정문(肅靖門)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의 숭례문(崇禮門). '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르린다'는 뜻으로 이름 붙였다.
태조5(1396)년 처음 서울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 석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어,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문을 나서면 북악산이 가로 막아 있고 성북동 골짜기로 오르내리는 문이라서, 북대문인 숙정문보다 동소문(현 惠化門)을 통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하였다.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학적으로 동령(東嶺)과 서령(西嶺)은 북악산의 양 팔에 해당하므로 동령에 해당하는 숙정문과 서령에 해당하는 창의문(지금의 자하문)에는 문을 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팔에다가 문을 어떻게 낼 수 있느냐 해서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두 문을 폐쇄하고 그 앞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던 문이다.
이 문이 열릴 때도 있었다. 가뭄이 심할 때나 홍수가 있을 때였다.
음양5행설에 의하면 남(南)은 양(陽)이요, 북(北)은 음(陰)이다. 맑은 날은 양(陽)이요, 비 오는 날은 음(陰)이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음기(陰氣)가 많은 숙정문을 열고, 양기(陽氣)가 많은 숭례문은 닫은 가운데 숭례문[남대문]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반면에 비가 많이 올 때에는 숭례문[남대문]은 열고 숙정문[북대문]을 닫고 숙정문에서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음기가 강한 곳이어서 이를 두고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하여 온다.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 두게 하였다.(이규경의 '五洲衍文長箋散稿')
이와 같이 숙정문은 항상 닫혀 있는 문이라서, 세상 사람들은 창의문(彰義門, 紫霞門)을 흔히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 숙정문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창의문에서 보던 빗물을 내려 가게 하던 한 쌍의 누혈(漏穴)을-.
*. 말바위전망대
말바위 전망대란 성균관대학 후문 뒤에 있는데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거기에 있는 바위의 모습이 위치에 따라 말 같이 보인다 해서 그것을 말바위전망대라고 하는 것이다.
거기서 직진하면 삼청공원이요, 로타리식으로 만든 멋진 나무 층계를 따라 돌아 내려가서 성터를 우측에 끼고 10분쯤 내려갔더니 성대 후문이 나온다. 거기서 마을버스 2번을 타면 안국역 쪽으로 빠지고, 좌측으로 가면 명륜동3가 혜화 전철역 쪽이 나온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안국동 가는 2번 마을 버스가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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